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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생각해요, 이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세상 끝에 선 희귀·난치병 환자들

  • 글: 정호재 demian@donga.com

“매일 생각해요, 이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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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난치병이긴 마찬가지지만, 환자수가 워낙 많다보니 암 치료를 위한 의료체계는 제대로 갖춰져 있다. 암 환자에게는 최상의 의료 서비스가 제공될 뿐 아니라 거듭된 연구의 결과 치료제도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으므로 암은 이제 불치병이 아니다. 그러나 환자가 적어 이른바 ‘시장성’이 낮은 희귀병은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환자가 적다보니 희귀병은 전공 의사도 없거니와 치료제도 제대로 개발된 경우가 드물다. 유전성 질환이 많아 게놈프로젝트가 웬만큼 진전된 최근에야 조금씩 성과가 나오고 있다. 병명은 달라도 증상은 비슷한 경우가 많아 환자들은 확진을 받기까지 갖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지난해 7월, 희귀병 환자 가족의 아픔을 세상에 널리 알린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에 사는 윌슨병 환자 김모(59)씨가 자신과 같은 병을 앓는 것으로 추정되던 아들을 살해했다. 반신불구에 눈까지 멀어가던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 겪은 고통을 아들이 대물림한 것으로 알고 신세를 한탄해오다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윌슨병은 유전되지 않는 병으로 밝혀졌다. 윌슨병은 상염색체 열성 유전병으로 형제간에는 나타날 수 있으나,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대물림되지는 않는 병이라는 것. 전문가들은 김씨 아들의 병이 상염색체 우성 유전병으로, 시각장애가 있는 것으로 봐서 망막색소증을 겸한 소뇌(小腦) 위축성 실조증(윌슨병과 증상이 유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병도 모른 채 아들을 죽인 것이다.

이 사건은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의료사각지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난치성 희귀병 환자가 충분한 치료는커녕 자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진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정부 차원의 희귀병 관리·지원대책은 아직 초보 수준이다.



혈우병은 가장 널리 알려진 난치성 희귀질환이다. 모계에 의해 남자에게만 전해지는 혈우병은 혈액 속의 여러 혈액응고인자 가운데 제8 인자(혈우병A)나 제9 인자(혈우병B)가 부족해 작은 출혈에도 피가 멎지 않는 병이다. 때문에 평생 혈액응고인자제제를 투여받아야 하는 만성 유전질환이다.

서울 서초동 서울교대 앞에 자리한 혈우병 환자 모임 ‘코헴회’에서 만난 김승근씨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 첫눈에 환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희귀병 치료제가 다 그렇듯 혈우병 치료제도 값이 만만치 않다. 한 달 약값이 1000여 만원에 이른다. 2001년 이전에는 혈우재단이 치료비 일부를 부담했고, 이후에는 정부의 희귀·난치성 질병 의료비 지원사업에 포함되어 환자들이 약값 걱정을 덜게 됐다. 약값의 80%는 건강보험에서 지원되고, 나머지 20%는 국고에서 지원된다. 혈우병은 국가적 지원체계를 갖춘 몇 안되는 희귀질환 중 하나다.

하지만 환자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김승근씨의 말.

“정부가 지난해부터는 환자 모두에게 약값을 지원하지 않고, 수입과 재산상태 등을 조사해서 선별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환자 집안의 금융자산까지 찾아내서 선별한다는 거죠. 가뜩이나 혈우병 환자라고 하면 취업하거나 결혼하는 데 지장을 줘 가족끼리도 쉬쉬하는 형편인데, 이렇게 하면 누가 환자라는 게 다 드러날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약값 때문에 온 집안이 망할 지경에 이른 환자만 지원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이 사람은 혈우병 환자’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격이에요.”

약값에 치이는 환자들

보건사회연구원은 2000년 건강보험 청구 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국내 난치성 희귀병 환자가 111종 108만6800여 명이라고 추산했다. 그러자 숫자가 너무 부풀려졌다는 반박이 잇달았다. 숫자의 정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희귀병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규정이나 합의도 없거니와 정부 차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조차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희귀병을 관리하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과는 난치성 질환 11가지에 대한 지원정책 이외는 이렇다할 방안을 갖고 있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정청 산하 희귀의약품센터도 예산과 홍보 부족으로 50여 가지 질병을 앓는 1000여 명 정도의 환자만 이용하는 실정이다.

정부는 2001년 초부터 몇몇 희귀질환에 대해 의료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지만, 액수가 미미할 뿐 아니라 배분 방식의 실효성도 떨어져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크게 덜어주지 못하고 있다. 홍보가 제대로 안돼 지원금을 찾아가지 않은 수혜대상 환자도 많다.

보건복지부는 2001년 1월부터 만성 신부전증, 근육병, 혈우병, 고셔병, 베체트병, 크론병 등 6개 희귀성 질환에 대해 총 440억원(지방비 220억원 포함)의 의료비를 지원했다. 지난해 3월부터는 5개 질환을 추가했지만, 환자의 재산상태에 따라 선별 지원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기 때문에 예산은 더 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99만원)의 3배를 넘지 않는 월평균 297만원 미만 소득자에게만 해당된다(고셔병, 혈우병 환자는 제외). 이 때문에 지난해에 의료비 지원을 받은 희귀병 환자는 7500여 명에 불과했다.

“난치성 희귀병은 근육병처럼 환자가 무기력해 전적으로 주위에서 돌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거나 혈우병처럼 평생 약을 끼고 살아야 하는 병입니다. 어느 편이나 그대로 방치하면 당장 생명을 위협받기 때문에 도움과 비용이 요구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비싼 약값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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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호재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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