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온산부터 새만금까지… 최열의 환경운동 20년 회상기

  • 글: 최열

    입력2003-01-30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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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환경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 오는 2월말 자리에서 물러나 야전의 운동가로 돌아간다.
    • 환경운동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척박한 여건에서 20여 년간 한 우물을 파온 최총장이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한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한 환경운동가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편집자).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1997년 방한한 월드위치연구소 레스터브라운 소장(왼쪽)과 함께한 최열총장

    2003년, 쉰다섯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이 나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봐왔다. 군사독재, 개발독재, 그리고 다양한 시민사회의 성장까지 모두 함께. 그 덕에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지금 내 눈은 한국사회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흐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구 곳곳에서 ‘환경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자연과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낀다.

    물오른 버들개지처럼 유연하고 혈기왕성한 젊음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년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쉰다섯이면 조금 여유있게 살고 싶은 마음도 들 때다. 그러나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하루 1달러에 의지해 살아가고, 공해로 매년 300만명의 극빈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오염된 물로 300만명의 어린이가 설사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뻔히 바라보면서 한가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구의 환경문제는 어느새 내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섣부른 공치사가 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보다 더 묵묵히 일해온 운동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에 대한 생각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믿는 까닭에, 지난 20여 년 기억의 사진첩에서 한 장 한 장 옛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한다.

    돌아보면 위기는 언제나 좋은 기회였다.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한 해결책이 없었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술을 먹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면 방법이 생기고 도와주는 이들이 나서 위기가 기회로 변하는 것이다.

    1.08평 독방에서 환경운동 시작



    환경에 대한 나의 고민은 197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1971년 대학군사교육 강화 방침에 맞서 교련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강제징집되었던 나는, 이후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벌이다 1975년 6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45명의 ‘동지’들과 함께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갇힌 곳에서 여름을 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조국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을 품고 있던 우리는 밤마다 방을 바꾸어가며 시국 토론을 벌였다. 토론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출감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함께 복역중인 동료들은 한결같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공해가 모순된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공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와 빈민, 어린이들이다. 그렇다면 공해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또 다른 운동이 아닌가.

    이런 얘길 꺼내면 동료들은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무슨 환경이냐”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옆방에서 함께 복역하던 시인 김지하씨, 국회의원 이부영씨 등은 한결같이 나를 격려해주었다. 1976년 가을부터 환경 관련 서적들을 탐독해나간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 덕분이다.

    다음해 3월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나는 1.08평짜리 독방에서, 어렵게 반입해온 책을 하루 12시간 이상 읽었다. ‘공해’나 ‘환경파괴’의 현장에 직접 갈 수 없다는 게 무엇보다 갑갑했지만, 복역 기간 2년3개월 동안 독파한 250여 권의 책은 나를 누구와 토론을 벌여도 대적할 수 있는 환경전문가로 만들어주었다.

    첫 삽, 공해문제연구소

    유신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9년 5월 나는 4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꿈꾸어왔던 환경운동을 시작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많은 동료들이 “지금은 환경운동보다 민주화운동이 절실하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맡게 된 것이 민주청년협의회(민청) 부회장이었다.

    6개월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청조직 활성화 작업을 하다 보니 이내 다시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해 11월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보안사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조사를 마치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나는 이번에도 환경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어려운 수형 생활을 견뎌냈다.

    1981년 3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나는 역설적이게도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그리고 출감과 함께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때 상근자로 참여한 사람은 나와 정문화, 김태현씨 등 세 사람. 혈기왕성한 세 명의 젊은이는 이 땅에서 공해란 단어를 아주 없애버릴 듯 의기양양했지만 사무실을 냈다고 일이 잘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운영비가 문제였다. 사재라도 털어 활동비로 보태고 싶었지만 5년 반 동안의 감옥살이로 생활비조차 없을 때였다. 그때 권호경 목사, 함세웅 신부, 한승헌 변호사, 이돈명 변호사 등 여러 어른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특히 윤보선 전대통령은 두둑한 금일봉을 건네주시며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려움은 운영비 부족에서 그치지 않았다. 돈이야 빌리면 된다지만 외압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해문제연구소’는 5공화국 들어 설립된 최초의 재야단체였다. 당국은 공해문제연구소를 환경공해가 아닌 ‘정치공해’를 다루는 ‘불순단체’로 간주했고 각종 정보기관을 통해 해체를 종용하며 갖가지 협박을 해왔다.

    연구소를 출범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포함한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계훈제 선생과 박종태 전 의원의 회갑연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박종태 전 의원은 수감중에, 계훈제 선생은 수배중에 회갑을 맞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조촐하게 공동회갑연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관계기관은 당시 초청인 자격이었던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주요 참석자들을 가택연금시켰다. 나도 용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소동 끝에 결국 공동회갑연은 무산되었고 준비한 음식은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음식물 쓰레기 양산이었던 셈이다.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세요”

    우여곡절 끝에 1982년 안양천 오염실태 파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해현장 조사를 벌여나갔다. 이듬해에는 울산과 온산, 여천 등지의 공해현장을 답사하며 제법 체계를 갖춘 공해추방운동을 펼쳤다. 이 중 비철금속단지가 위치한 온산 지역의 공해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983년과 84년 두 해 동안 공해연구소 조사단은 온산 지역을 30여 차례 이상 방문하며 공해 실태를 조사했다. 비철금속단지로 유명한 온산에는 당시 13개의 외국 공해업체 공장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들 공장에서 내뿜는 각종 유해가스와 연기 때문에 도시는 언제나 희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조사를 끝낸 우리는 결과에 경악했다. 지역 주민 1만명 가운데 700여 명이 뼈마디가 쑤시고 눈병, 기침, 피부병 등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환경이 오염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이 아이들이다. 나는 이어 공장과 인접해 있는 모 초등학교 6학년 한 학급 학생 아동들을 대상으로 공해피해를 조사했다. 학교에 들어선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화초가 모두 말라죽은 교정. 고사한 플라타너스 아래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핵폭발로 폐허가 된 죽음의 도시 속 교정을 연상케 했다. 6학년 한 학급 학생 52명 중 절반인 26명이 뼈가 쑤시고 눈병이 나거나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잡은 물고기, 조개, 미역 등 해산물과 농작물에서는 구리, 아연, 카드뮴 등 중금속이 기준치의 10배에서 100배까지 검출됐다.

    상황은 심각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미약했다. 분노와 절망감에 싸여 착잡한 심정으로 바닷가를 거닐던 나는 우연히 한 해녀를 만났다.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던 그 분의 말 한마디가 자괴에 빠져 고민하던 나를 일으켜세우는 기폭제가 됐다.

    “선생님, 저는 살 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제발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세요.”

    이듬해인 1985년 그간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에도 공해병인 ‘온산병’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환경청과 관련 부서에서는 관변 학자들을 동원해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나는 공해추방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를 심문하던 한 수사관은 “환경청이 환경운동은 돕지 않고 오히려 검찰과 경찰에 허위사실을 전달해 당신을 구속시키려 한다”며 “당신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나를 당장 구속시켜라”고 했다. 그러면 이 문제가 널리 알려지고 세계의 환경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공해추방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2002년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하던 최열 총장이 회원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3일 만에 풀려났다. 내가 석방된 것은 정부가 ‘온산병’을 간접적이나마 시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후 나와 동료들은 ‘온산병’의 원인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국내의 생화학자, 의사들과 공동으로 조사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단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사를 의뢰한 학자와 의사들이 한결같이 참여 거부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으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공개적인 조사작업에 참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국내 인력으로는 조사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규명한 일본인 학자 하라다(原田) 박사를 초청해 조사를 의뢰했다.

    1985년과 86년, 온산 공해병 조사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하라다 박사는 첫마디로 “온산은 죽음의 땅”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공단이 들어선 지 7년 만에 발생한 온산병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발병한 미나마타병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 공해병”이라며 그 심각성에 우려를 표시했다. 공해문제연구소의 조사결과 발표는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됐고 사회문제로 비화됐다.

    정부는 부랴부랴 자체 조사단을 구성하고 온산지역 주민 1만여 명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등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공해를 추방하기 위한 대책이라기보다는 현상만 가리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주민들이 이주한 땅에는 다시 공장이 들어섰고 온산 하늘은 점점 더 희부옇게 변해갔다.

    온산뿐 아니라 울산이나 전남 여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울산의 경우 석유화학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유독 가스로 아이들의 목에서 피가 터져나오고 그 지역 삼산평야에는 벼가 여물지 않을 정도였다. 공해에 강하다는 배나무에도 탁구공만한 배만 열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공해 사례 발표장에서 울산 지역의 한 주민은 “서울은 공기가 오염돼 살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막상 올라와 보니 공기가 너무나 좋아 내 얼굴에 생기가 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여천에는 동양 최대의 비료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공장에서 내보낸 유독 물질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TV 안테나를 부러뜨릴 정도로 독했고 견디다 못한 지역 주민 1100여 명이 정든 땅을 떠나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나는 이삿짐을 싸는 주민들을 안타까운 심경으로 바라봤다. 그곳에서 칠십 평생을 살았다는 한 노인은 마루 아래 섬돌을 어루만지며 “공장이 들어서자 다들 잘살게 됐다며 좋아했는데, 공장 때문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을 떠나게 됐다”고 울먹였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대부분 큰 도시로 나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객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이들 대부분이 남편은 막노동, 아낙네는 행상을 전전하며 도시 빈민으로 변해갔다. 한번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너무도 깊은 그늘을 남겼다. 공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던,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보자던 몸부림은 결국 아무도 살수 없는 죽음의 땅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동지’가 된 담당 경찰관

    환경운동이 반정부 운동으로 인식되던 1980년대 초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강연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1983년 명동성당에서 대학생과 성직자 250여 명을 대상으로 가졌던 첫 공개강연회에서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이후로, 나의 환경강연은 늘 ‘관계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강연이 있는 날엔 무조건 연금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것은 1985년 봄 숙명여대에서의 강연. 약속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경찰 10여 명이 집을 지키는 바람에 4시가 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연을 포기했고 총학생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총학생회장은 “모든 학생들이 강연을 들을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와달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부리나케 청파동으로 달려가 강연을 마쳤다. 그날 이후 한두 시간이던 연금은 24시간으로 늘어났다. 온종일 20평 남짓한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어느 날 담당자인 김모 경사에게 “집에 틀어박혀 있느니 남한산성에 가서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환경 얘기는 그 술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환경은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의 것”이라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환경운동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 의견에 충분히 공감했던 것일까. 이후 김경사는 가택연금지시를 미리 알려주는 식으로 환경운동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지방강연에 동행해 출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전투경찰들을 뚫고 무사히 강연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현직 경찰관의 신분으로는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도움을 준 적지 않은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아이들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1984년과 1985년 온산·여천지역 공해조사에 참여한 청년들과 주부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환경단체가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와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였다. 이 두 조직은 1988년에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으로 통합돼 세력을 확장했다. 조직뿐 아니라 활동영역도 쓰레기 적게 버리기, 합성세제 안 쓰기 등 일상생활에까지 확대했다. 대통령직선제가 관철되는 등 민주화 바람이 불던 때여서 눈에 보이는 탄압은 사라진 후였다. 나와 공추련 회원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전국을 돌며 환경감시운동을 펼쳤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외국에 나갈 수 없던 내가 다른 나라의 환경단체 인사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1988년 9월 독일 녹색당 초청으로 첫 외국 나들이에 나섰을 때 만난 외국 환경운동가들은 특히 온산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자국 문제도 아닌 남의 나라 공해문제를 자세히 알고 걱정하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원자력발전소의 유해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된 것도 독일 여행에서였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후 2년6개월이 지났던 그 무렵, 독일 주부들은 슈퍼마켓에 갈 때도 방사능 탐지기를 갖고 갈 정도로 방사능 오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의 경험이 이후 러시아의 동해안 핵폐기물 투기 저지운동, 대만 핵폐기물 북한반입 반대, 플루토늄 일본반입 반대투쟁 등 핵폐기물 처리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공추련은 안면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백지화 운동, 낙동강 페놀 방출 관련 조사 및 대책활동 등을 벌였다. 특히 두산이 낙동강에 페놀을 무단 방류해 국민적인 충격을 안겼던 이른바 ‘페놀 사태’는 환경운동이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공추련은 한국 환경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대중주의’를 표방한 본격적인 환경운동단체였다. 공추련의 창립과 함께 전국 규모의 환경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공해추방’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공해추방에서 환경운동으로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는 세계환경운동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 운동의 화두가 ‘반공해’였다면, 이때를 기점으로 ‘환경운동’이라는 새로운 기치가 떠오른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환경운동 또한 이를 계기로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공추련은 1993년 4월, 전국의 주요 8개 환경단체와 통합하여 한국 최대의 환경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이하 환경연합)’으로 거듭났다. 이후 환경연합의 역사는 곧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였다. 시대마다 굵직한 환경문제를 이슈화하고 해결하기 위해 벌였던 그 모든 노력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다섯 평 남짓한 혜화동의 어둡고 좁은 사무실에서 공해추방과 함께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도움을 주고자 출발한 ‘시민법률상담소’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세훈 변호사와 옷로비 사건 특별검사로 활약한 최병모 변호사, 일조권 소송으로 유명한 김호철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 상담실이 이제는 ‘공익환경법률센터’로 정식 발족하여 북한산 공사금지청구소송, 새만금 헌법소원, 행정소송 등을 이끌어가는 전문 환경법률기관으로 성장했다.

    환경에 대한 자료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시민과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좁은 공간에 ‘시민환경정보센터’도 만들었다. 시민들은 그곳에서 자료도 찾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환경기사를 스크랩하는 등 시민들의 자원봉사활동은 운동의 힘이 되었다. 지금은 환경관련 포털 전문사이트인 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와 인터넷 자료실을 운영하고, 시민단체의 웹호스팅 등을 돕고 있다.

    환경운동은 전문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연합에서 함께 일하는 환경운동가들은 국내의 유수 대학을 나와 석사과정을 거치거나 유학을 다녀오는 등 전문역량을 축적해 가는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에 환경운동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연구와 지식을 제공하는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정부와 기업에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시민환경연구소’. 이시재, 장재연, 윤제용 교수 등의 활약과 지원으로 연구역량이 향상되었다. 이런 전문성으로 환경운동은 한 차원 상승해 매향리 주민 피해 입증과 평택 소각장 주민 다이옥신 피해사례 규명 등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반 환경운동가에서부터 학자적 환경운동가(scholar activist),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은 학자 등 다양한 전문인력이 상승효과를 이뤄내는 전문기관으로 성장한 것이다.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1999년 3월 동강댐 백지화를 위한 33일 농성중 심혜진(왼쪽 끝), 정지영(왼쪽 두번째), 안성기(왼쪽 네번째), 등 영화인과 함께

    1998년 강원도 영월의 순박한 주민들이 환경연합에 도움을 청해왔다. “아름다운 우리 동네에 대형 댐이 건설될 예정이라는데 우리 고장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환경연합 내부에서도 대형 댐과 가두리 양식장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수몰민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당장 짐을 꾸려 동강으로 내려갔다. “환경연합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단연 첫손에 꼽히는 동강댐 백지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한국적인 비경을 볼 수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어라연의 강줄기는 햇빛에 빛나고 있었고, 반짝거리는 물과 고기들, 바위와 나무들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중국의 계림이, 미국의 그랜드캐년이 이와 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때 생각했다. “이것을 잃는다면, 이것을 물에 잠기게 한다면 환경운동을 했노라고 후손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노력이 들더라도 동강을 지키자.”

    서울로 올라와 정부의 계획을 확인하고, 대형 댐과 동강 주변의 지형 및 지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관계 전문가들을 모으고,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모색했다. 동굴전문가 석동일씨, 지질전문가, 수량·수질 전문가, 그리고 언론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까지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탰다. 그러던 중 KBS 다큐멘터리 ‘동강’이 방영되면서 전국에서 “우리도 동강을 지키고 싶다”는 문의와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나 그런 국민적인 열망과는 상관없이 정부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우리는 각계인사 33명과 함께 33일간 환경연합 마당에서 농성을 했다. 애국지사 33분이 나라를 지켜낸 생각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밤을 새워 철야농성을 하고, 단식도 하고, 기자회견도 했다. 농성이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국민들의 발길이 밀려들었다. 환경운동가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준 중국집 주인, 만두가게 주인, 밤 12시에 안산에서 차를 타고 온 부부와 아이, 아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싶다며 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온 선생님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전국의 온정들이 모아졌다.

    국민적인 힘을 느낀 우리는 한강 뗏목 시위도 기획했다. 강원도 정선에서 아라리를 부르며 뗏군을 하시던 여든 줄의 노인 세 분이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를 마다 않고 뗏목을 직접 만들어주셨다. 다급해진 정부는 일주일을 넘게 준비한 시위를 막으려 했다. 경찰들에 둘러싸여 시위가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김정길 행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집회를 허용해줄 것을 부탁했다.

    겨우 집회를 할 수 있게 되자 노인들과 환경운동가들이 함께 배를 한강에 띄웠다. 순풍에 돛을 단 듯 뗏목은 ‘동강댐 반대’라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붙인 채 한강을 미끄러져 갔다. 그때 다리 위를 지나던 버스의 시민들이 창 밖을 내다보며 격려의 손짓과 박수를 보내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정부는 2000년 6월5일 환경의 날을 맞아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했다. 실로 국민이 이룬 쾌거였다. 그날 밤 우리는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 그리고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그렇게 동강은 국민의 강이 되었다.

    새만금은 그냥 갯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갯벌을 가지고 있는 축복받은 나라다. 갯벌이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도 몇 안 될 뿐 아니라, 서해안처럼 광활한 갯벌을 가진 나라는 전세계에 대한민국 한 곳뿐이다. 독일도 히틀러 정권까지는 갯벌의 중요성을 모른 채 매립하고 간척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갯벌의 정화능력과 생태적 다양성, 경제적 가치,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 등을 알게된 이후 북해 연안의 갯벌을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개발의 망령을 못 떨쳐내고 있다. 간척이 한반도 지도를 바꿀 수 있는 국가 역점사업이라고 믿었던 박정희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자원인 갯벌은 메워지고 파괴되고 소멸해 가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새만금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다. 이미 갯벌의 가치가 국제적으로 입증됐고, 쌀 과잉이 심각한 상태여서 농지를 위한 간척사업이 불필요해진 지금, 논을 메워 아파트를 짓고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왜 반복하고 있을까.

    환경연합 회원 2000여 명은 전국회원대회를 개최하여 새만금 방조제에서 갯벌을 살리자고 외쳤다. 지구의 벗 세계의장 리카르도 나바로와 보브 브라운 상원의원, 레스터 브라운 월드워치연구소장 등 무수한 외국의 환경전문가도 새만금을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각 분야의 전문가와 민관공동조사단이 사업을 중지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쇠 귀에 경 읽기다.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안해 본 것 없이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정부는 귀를 닫아버렸다.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 나 세 사람이 새만금을 지키기 위한 단식농성을 하던 때의 일이다. 국무조정실장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만나자고 하길래 약속 날짜를 잡았다. 혹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 기대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자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우리가 단식농성중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제안했고, 농성중이니 먹지 않겠다는 우리들 앞에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님이 합석한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계속 “새만금 갯벌이 메워져도 아무 지장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차라리 만나지 않으니만 못했다. 단식중이라는 상대방의 사정은 물론 종교적 신념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나라와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점 후회 없는 총선연대 운동

    새만금은 단순히 갯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식과 비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2002년 11월 스페인에서 개최된 ‘습지보전을 위한 국제협약(람사협약)’ 8차 당사국총회에서, 전세계 참가자들은 새만금 갯벌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에 놀라고 정부의 무모한 계획에 혀를 내두르며 새만금 갯벌을 지킬 것을 공식 성명으로 채택했다. 시베리아부터 호주까지 날아가는 겨울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새만금 갯벌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은 시대의 사명이다. 새만금은 우리 것이 아니라 전세계와 후손들의 것이다. 한번 들어섰으니까 벼랑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다. 잘못된 결정임을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정부와 정치인들은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연말이 되면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동년배를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산화한 전태일 열사,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자결한 김상진 열사 등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이 원했던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에서 활동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 ‘총선시민연대’ 활동, 즉 낙선운동이었다.

    2000년 초, 감옥이라도 가겠다는 의지로 박원순 변호사, 지하은희 여성연합 대표 등과 나는 낙선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국민들은 IMF로 힘든 시기에 일부 정치인들이 호화 골프 여행길에 고급 양주를 사오는 것을 보면서 새 천년 국회의원 선거는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레스센터 20층 대회의장에서 수백 명의 보도진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는 방대한 자료조사와 검토를 거쳐 작성한 공천 반대 인사명단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계 인사들과 전국을 돌며 낙선운동을 벌였다.

    그때는 국민적인 지지도 대단했다. 청주에서는 한 시민이 “선생님을 찍고 싶습니다. 기호가 몇 번이신가요?” 하고 물은 적도 있었다. 명동성당 앞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사우나를 갔더니 돈을 안 받는 것은 물론 박수를 치며 따뜻한 차까지 주었다. 돌이켜보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달렸지만, 국민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적을 만들면 안 되지만, 나는 그 운동을 하면서 참 많은 이들과 본의 아니게 원수가 되었다. 당시 낙선 대상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한국사회의 정치발전을 위해 뛰어넘어야 할 과제였다는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2003년은 환경연합에도 큰 변화의 시기가 될 것이다. 1993년 환경연합이 생긴 이래 8개 지역에만 있던 지역조직은 어느새 52개로 확대되었고, 회원도 8만7000여 명에 이르는 아시아 최대의 환경단체로 발전했다. 이제는 후배 활동가에게 사무총장을 맡길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비약적인 성장 덕분이다.

    25년을 쉼 없이 달려온 지금 돌이켜보면, 환경을 위해 남편과 아빠를 양보한 아내와 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나의 생각과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기에 이해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아껴주고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도 환경운동으로 보답하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환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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