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서청원 대표와 하순봉 최고위원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이후보는 자택에서 비서실 부실장인 오세훈(吳世勳) 의원에게 “이제 뭘 하지”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단상(斷想)을 떠올렸다.
“소설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속화(俗化)했지. 그러면서도 목표와 이상이 있었어. 나도 그랬지. 그러나 나는 속화만 해버렸어….”
이후보의 웅얼거림 속엔 정치권 입문 후 6년여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났다. 30여 년 법관생활과 공직생활에서 쌓은 ‘대쪽과 원칙’의 이미지, 그리고 정치권 입문 후 겪은 ‘굴절의 시기’는 집권 후 새 정치의 포부를 펼쳐 보이기 위한 밑거름이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의 표시였다.
이후보는 선거 다음날인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정치이력상 ‘초고속 압축성장’의 길을 걸어온 그의 마지막 얼굴엔 ‘눈물’이 흘렀다.
한나라당은 이제 두 차례나 대선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러나 그 충격은 1997년 대선에 비해 훨씬 커 보인다. 홍준표(洪準杓) 의원은 “대선 후 가끔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려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번만은 정권 탈환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데 따른 허탈감이 컸던 탓이다.
실제 2002년 초반까지 ‘이회창 대세론’은 거칠 게 없는 듯했다. 지난해 초 노풍(盧風;노무현 돌풍)이 불면서 아들의 병역비리 수사까지 겹쳐 지지도 추락의 위기에 빠지긴 했지만 대선 직전까지 이후보의 지지도는 부동의 1위였다. 그 어느 때보다 당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원내 의석은 물론 지방정부까지 완전 장악해 대선을 치를 조건은 완벽해 보였다. 대선이 끝나 해를 넘긴 지금까지 당 안팎에서 대선 패배의 후유증이 무겁게 깔려 있는 것도 이같은 아쉬움과 무관치 않다.
당 주변에서 선거 전략의 총체적 실패라는 총론적 진단부터 ‘후보 본인의 문제점이 컸다’ ‘네거티브 공세로 일관해 2030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뒤늦게 불어닥친 반미 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등등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보 아들 선거광고 개입시비
이런 가운데 여러 당직자들이 곱씹는 대표적인 패인은 일차적으로 홍보 전략의 부재로 모아진다.
노무현 후보 선거캠프는 TV 광고에서 철저히 감성적 접근 전략을 구사했다. ‘노무현의 눈물’이 대표적 사례다. 반면 이후보 선거 캠프는 ‘이성적 접근’ 전략을 구사해 참패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당내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실무자들은 다수의 시청자들이 보는 TV매체의 성격상 감성적 컨셉트를 잡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으나 되돌아온 것은 “광고 결정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지도부의 질책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 실무진들이 거액을 들여 미리 만들어놓은 TV 광고물은 완전히 용도 폐기됐다. 실제 선대위 모 간부는 광고 전략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자 이후보에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는 꾸중을 두 차례나 들었다는 후문이다.
이후보 직계 가족의 광고 개입 시비도 불거졌다. 이후보의 아들과 가까운 미국 유수의 광고 전문가 출신 그룹들이 모 후보특보와 보좌역을 통해 TV광고 전략 수립과 집행에 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당내에선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대선 초반 홍보전에서 밀리자 이후보는 뒤늦게 윤여준(尹汝雋) 의원을 긴급 투입, 홍보전략의 재조정 작업에 나섰으나 대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의 한 관계자는 “홍보대응전략이 오락가락하면서 의사결정권자가 선거기간 동안 5번이나 바뀌었다”며 “애초부터 체계적인 홍보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 아니냐”고 회고했다. 선거 후 논공행상을 의식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시어머니’만 많았을 뿐, 선거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