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책이 시키는 대로 사는 어떤 인생

  • 글: 조유식 인터넷서점 알라딘 대표 sindbad@aladdin.co.kr

    입력2003-01-30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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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시키는 대로 사는 어떤 인생
    나는 사람의 말보다 책과 글에 더 혹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덕 본 것도 있고 손해 본 것도 있다. 책은 다분히 이상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다. 그래서 책이 하라는 대로 하다 보면 사람도 그런 방향으로 가서, 갈 데까지 가보는 것 같다.

    내가 처음 책과 접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다. 우리 집 근처 을지로 4가에 ‘장안서림’이라는 한 30평짜리 서점이 있었는데, 한두 달에 한번씩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3남매의 손을 잡고 이 서점에 들러 1인당 몇 권씩 책을 사주셨다. 요즘 성인용으로 정식 출간돼 인기를 끌고 있는 ‘괴도 뤼팽’ ‘셜록 홈스’ 그리고 ‘암굴왕’ ‘전쟁과 평화’ 등의 ‘동화판’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3학년 때 학교에서 ‘전국고전경시대회’라는 걸 했다. 책 읽고 독후감 쓰는 것인데, 학교에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가 표지에 나와 있는 녹색 책을 단체구입해 나눠줬다. 제목은 ‘신유복 전’. 신유복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고려 아니면 조선시대 이야기인데, 외적이 침입해서 나라가 어려울 때 그가 나서서 싸워 나라를 구하고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걸 읽고 내가 쓴 독후감의 결론은 ‘신유복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명예를 떨쳤지만 죽고 나니 무슨 소용인가. 인생은 허무하다’였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인생무상을 느꼈으니 스스로 대견하여 어머니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독후감을 다 읽으신 어머니는 “쪼끄만 게 벌써부터 인생무상?” 하시면서 칭찬 대신 야단을 심하게 치셨던 것 같다.

    말보다 책과 글에 혹하다

    ‘동화판’을 제외하고 어른들이 읽는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의 ‘테스’였다. 내게 사춘기는 이 책과 함께 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슬픈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한 채 산 송장으로 멍하니 지냈다.



    중3 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죄와 벌’ 등 묵직한 인간문제를 천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심오한 인간정신의 고투와 웅대한 지적 스케일에 매료됐다. 이 시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읽었는데, 주제와 형식의 색다름에 매혹돼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카뮈,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휴머니즘과 반항정신에 깊숙이 끌렸던 고교시절이 지나자 질풍노도의 1980년대 대학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중고교 시절의 독서로 다듬어진 순수이성의 숲에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그대로 한 점 불꽃이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을 기록해 등사본으로 몰래 돌려보던 이 책엔 수천명의 양민을 학살한 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써 있었다. 민중과 함께 그런 자들을 벌 주라는 실천이성의 명령에 쌍수를 들고 순종하며 보낸 것이 대학 1학년 때부터 훌쩍 십여 년. 그 사이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다 같은 책이었다.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 다음 책 한 권을 들었는데, ‘논어’였다. 내가 받아 안은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나를 다스려 남을 편안케 하라, 또는 남을 변하게 하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수년간은 ‘논어’와 관련된 책만 읽었다. ‘논어’와 논어 해설서를 비롯, 논어를 혁신 이데올로기로 삼아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우리나라와 중국의 제왕들, 정치가들의 저서와 그들에 관한 역사서, 현대사회에서 논어의 합리적 핵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한 책들….

    그러다 어느날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사업을 하면서도 책은 나와 불가분이었다. 사업 아이템 자체가 책을 파는 인터넷서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터넷 비즈니스 중에서도 인터넷서점을 택한 이유는 책이 좋아서였다. 잘 만든 인터넷서점은 훌륭한 문화 인프라로서 수많은 도서관보다도 더 큰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리라는 비전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런데 일단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오히려 책을 읽을 시간이 줄어들었다. 관심도 경영으로 집중됐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수년간은 오로지 경영에 도움되는 책들만 보고 있다. 피터 드러커의 ‘변화 리더의 조건’은 나에게 경영 바이블이다. 병원의 존재목적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함이듯, 기업의 존재목적은 이윤추구나 ‘철밥통’ 만들기가 아니라 사회에 꼭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단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업이나 장사를 하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기업이 되면 사회는 반드시 그 기업에 보답한다. 논어의 정신이나 피터 드러커의 명제는 사회를 선한 순환의 고리로 파악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나는 이런 정신이 좋다.

    경영서적에 대한 천착

    병목이론을 소개한 ‘The Goal’도 유익했다. 열 명이 등산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열 명의 평균속도가 아니라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와 일치한다는 예화를 통해, 업무처리에서도 병목을 찾아 그 해결에 집중해야만 결과가 개선됨을 잘 설득하는 책이다. 병목 해결의 방법론은 ‘6시그마 기업혁명’에서 해답을 찾았다. 병목을 해결하되 인해전술이나 돈을 쏟아붓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원을 절약하며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이상주의’라 역시 마음에 들었다.

    게임이론을 소개한 ‘전략적 사고’도 흥미로운 책이었다. 게임이론에 의하면 인류역사는 곧 게임의 역사요, 인간은 게임하는 존재다. 게임은 항상 독립자존하는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상대의 의중을 읽고 상대의 수를 예상하여 수를 써야만 게임에 이길 수 있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게임이론의 사례 하나를 마케팅에 직접 활용해보기도 했다.

    내가 활용한 대목은 ‘합법적으로 카르텔 만드는 법’이다. 예들 들면 어느 공급자가 ‘최저가격보상제’를 내걸었다고 하자. 나보다 더 싸게 파는 자가 나오면 그 차액만큼, 혹은 그 두 배를 보상해주겠다는 정책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가격경쟁전략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100만원으로 형성된 PC시장에서 A라는 공급자가 어느날 90만원으로 공급가를 낮췄다. B는 이에 대응하려 최저가격 2배 보상제를 내걸었다. 고객 입장에서는 B에게 가서 PC를 사고 200% 보상상품권을 받는 편이 훨씬 이익이므로, 가격을 내린 A가 아니라 오히려 B에게로 간다. 이러면 가격인하로 시장점유율 확대를 노린 A의 시도는 실패하고 고객은 B에게로 몰린다. 그러나 B도 앉아서 PC 한 대당 20만원씩 더 손해보므로 결국 자기도 가격을 90만원으로 낮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A·B 공히 수익성만 악화될 뿐이다. 때문에 B가 최저가격 2배 보상을 내걸고 있으면 A는 가격인하를 시도하지 못한다. 따라서 최저가격 2배 보상제는 소비자에게 싸다는 인식을 주고 카르텔 금지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가격카르텔을 형성하는 방법이 된다. 출혈적 가격경쟁에 대한 이상적인 해법으로 보인다.

    목적의식보다 樂을 위한 책읽기를

    나는 이 이론이 정말 현실에서 구현될지 궁금해서 얼마동안 최저가격 2배 보상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결과는?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사업을 하면서 정신없을 때 ‘나는 달린다’를 읽었다. 현직 독일 외무부장관이 엄격한 자기성찰 끝에 자기개조를 위해 달리기에 나서고, 1년 만에 몸무게 37kg을 빼면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7년간 하루 30분씩 달렸다. 30분씩 달린 이유는 30분만 달려도 숨이 차고 땀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업 시작 후 3년간은 하루도 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다음날부터 하루 한 시간씩 뛰기 시작해 열달 만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저자가 몸으로 보여주기를, 100kg이 넘는 거구도 마음만 다잡으면 하루 한 시간씩 뛸 수 있고, 1년이면 마라톤도 뛸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십이 돼서도 나는 여전히 책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는 셈이다.

    돌이켜 보건대, 20대 이후 나의 책읽기는 철저히 실용적 목적에 집중됐다. 언젠가 지도교수님은 이런 나에게 ‘재미로 책을 읽어보라’고 충고해주신 적이 있다. 책읽기를 ‘낙(樂)’으로 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나는 괜시리 마음이 바빠서 한가한 책읽기를 즐기지 못했다. 심지어 20대 이후론 소설책 하나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마음의 병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최근 ‘궁궐의 우리 나무’란 책을 읽었다. 길을 갈 때는 항상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야 하지만 길가의 나무와 꽃들에도 눈길을 주면서 이름도 불러주고 아는 척해주면 걸음도 가벼워질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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