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눈 덮인 귀틀집 사이로 밤새 까마귀 울고

오대산 방아다리 약수에서 부연동 오지마을까지

  • 글: 황일도 기자 사진: 김용해 기자

    입력2003-02-03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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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산은 겨울이 제격이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뚫고 만나는 알싸한 약수에서부터, 교교한 달빛을 받아 빛나는 산사(山寺)의 처마 끝이나 허름한 귀틀집 뜨끈한 아랫목에서 만나는 찐 감자에 이르기까지….오대산을 제대로 보려면 역시 눈 덮인 진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눈 덮인 귀틀집 사이로 밤새 까마귀 울고

    켜켜이 쌓인 오대산의 눈 내린 능선. 부연동 마을로 들어가는 전후치 고개 중턱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출발할 때는 잔뜩 찌푸렸던 날씨가 강원도에 들어서자 활짝 갰다. 시원하게 뻗은 영동고속도로의 소실점에서부터 늠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산을 바라보니 매연에 찌들었던 정신이 버쩍 든다.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다섯 봉우리가 연꽃처럼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으니 그 이름 또한 오대산(五臺山)이다.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오대산을 찾는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은 진부IC. 다른 한편으론 속사IC를 통해 31번 국도를 따라 1.5km 달리다 8번 국도로 들어가면 산속 깊은 모퉁이에서 ‘오대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신약수와 방아다리 약수를 만날 수 있다. 철분과 탄산이 많아 녹맛이 나면서도 톡 쏘는 것이 이들 약수의 특징. 방아다리 약수로 들어가는 빼곡한 전나무 숲길 산책도 놓칠 수 없는 보너스다.

    아침 일찍 나선 길이니 벌써 배가 고파온다. 8번 국도를 타고 진부면을 향해 내려오는 길에서 만나는 강원도 음식의 대표주자는 역시 산채정식. 봄에 캐 정성껏 갈무리해둔 나물들이 한겨울에도 금방 캐낸 듯 푸릇해 제아무리 고기를 즐기는 사람도 장조림에는 거의 손이 가지 않는다. 1년이 다 되도록 신선한 나물 맛의 비결은 ‘식당의 명운이 걸린 비밀’이란다. “솜씨가 좋은 이는 식당마다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하다”며 주방 아주머니가 웃어보인다.

    오대산을 관통하는 6번 국도를 달리다 446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향하는 곳은 월정사, 상원사,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겨울 산사(山寺). 앞산 건넛산이 죄다 오대산이니 상원사가 위치해 있는 곳은 연꽃의 한가운데. 길은 멀리 명개리 계곡까지 닿는다지만, 눈이 왔다 하면 한 발씩 쌓이는 산길이 상원사까지만 이어져도 감지덕지다.





    “그래서 나 어릴 적 큰스님 말씀이 ‘오대산은 곰하고 중하고만 사는 데지 사람 살 곳은 못 된다’는 거였지요.”

    먼 길 온 객에게 국화잎 띄운 녹차를 권하던 월정사 주지스님이 주섬주섬 옛 이야기를 꺼낸다. 폭설에 갇힌 절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쌀 실은 소발구(수레형 썰매)를 끌다 밤을 새운 일이며, 월정사 참나무 숲을 베러 온 도벌꾼들과 주먹질해가며 싸운 일까지. 굽이굽이 이야기 듣다 보니 어느새 짧은 해는 뉘엿 서산을 넘었다.

    월정사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고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나섰다. 눈 덮인 계곡을 따라 올라갔던 446번 지방도를 그대로 내려와 다시 6번 국도에 접어들면 행선지는 진고개. 평창군과 강릉시의 경계인 정상에 오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오르는 길은 멋진 풍경에 놀란 감탄사로 이어지지만, 소금강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리 휘고 저리 뻗은 가파른 비탈길에 겁먹은 감탄사가 이어진다.

    오대산이 감춰놓은 또 하나의 보물이라는 송천계곡과 약수는 지난해 여름 수해에 상해 복구되지 않은 채였다. 아쉬운 마음에 폭폭 아궁이 연기를 뿜고 있는 식당집에 찾아드니 주 메뉴는 토종닭이란다. 옳거니, 뒷산 비탈을 아장거리던 바로 그 녀석인 모양이다.

    장작불 땐 아랫목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다 보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닭 한 마리와 포실포실한 찐 감자가 상위에 오른다. “한 술만 떠보라”고 내준 닭죽은 또 그것대로 입에 착착 붙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원래는 약수로 닭을 쪄 벌건 색깔과 독특한 맛이 일품인데 약수터가 흙에 덮여 샘물을 쓰니 제 맛이 안난다”는 주인 아저씨의 아쉬운 자랑이 뒤를 잇는다.



    오대산 계곡의 하이라이트라는 소금강 입구에 다다르자 늘어선 가게들이 흐린 겨울 해를 받아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든다. 산행 온 사람들이 제각기 커피 한 잔씩 타 가지고 둘러앉은 가겟집 테이블의 화두는 새로 뽑은 대통령 이야기. 추위를 추스르고 오르기 시작한 소금강 계곡에는 무릉계, 십자소, 대왕암의 기암괴석이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름 수해는 길을 구룡폭포에서 끊어놓았다.

    미처 성이 차지 않은 마음을 달래려 찾은 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소금강의 옆줄기 용수골. 소금강 입구에서 6번 국도를 타고 1km 남짓 달려 삼산파출소 직전에서 우회전해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아는 사람만 아는’ 경치가 숨어 있다. 허위허위 깊은 골짜기에 내려섰다. 눈 녹은 물이 콸콸 흘러 바위를 때리고 반쯤 녹은 얼음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햇살에 빛나는 모양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니 “비경은 비경”이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여행의 마지막 발길은 강원도에서도 가장 깊은 오지라는 부연동 마을로 향한다. 소금강에서 차를 되돌려 6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나오면 오른편으로 깜박하면 놓치기 십상인 415번 지방도가 있다. 날이 저물면 갈 수 없다는 전후치 고개를 30분 가까이 곡예하듯 타넘어야 나오는 곳이 바로 부연동이다. 깎아지른 듯한 산들이 빙 둘러싼 분지에 폭 파묻힌 스무 가구 남짓의 마을을 보니 ‘6·25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지냈다’는 옛 이야기가 그럴듯하다.

    마을 끝 산모퉁이에 남아 있는 귀틀집을 찾아나선 길에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창호지를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이 더없이 아늑하다. 집 뒤 나무들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가 울어제끼고, 사람 소리에 놀란 고라니는 카메라를 들기도 전에 후드득 달아나버린다. 몇 해 전까지 서울에 나가 살다 돌아왔다는 민박집 젊은 주인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산골에 묻혀 사는 맛’을 이야기하는 동안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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