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수백 개의 문이 있는 도시’ 룩소르

영원불멸의 꿈이 아이러니로 남은 땅

  • 입력2003-02-03 15: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글·사진: 김선겸
    ‘수백 개의 문이 있는 도시’ 룩소르

    고대 이집트의 영광이 서려있는 카르나크 신전.지금은 폐허나 다름없지만 그 웅장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나일강 중류에 위치한 룩소르는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잘 보여주는 도시다. 지금은 작고 초라한 성읍에 불과하지만 고대에는 ‘테베’라 불리며 번영과 풍요를 누렸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시인 호메로스는 룩소르를 가리켜 ‘수백 개의 문이 있는 도시’라 하며 그 풍요로움을 노래했다.

    테베의 신에게 바친 거대한 송가(頌歌)

    필자가 룩소르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기로 한 곳은 카르나크 신전. 나일강 강변도로에 서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마부가 소매를 잡아끈다.

    흥정을 끝내고 마차로 10분 남짓 달려가니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양머리 모양의 스핑크스가 줄지어 있는 거리를 지나 탑문을 통과하니 정방형의 광장 한복판에 람세스 2세의 석상이 보였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배자로 손꼽히는 이 파라오는 수천년의 시간을 잊은 채 아직도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서 있다. 람세스 2세의 발등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네페르타리가 조각되어 있어 영원불멸의 사랑을 과시하고 있었다.

    람세스 2세의 석상 뒤편에는 카르나크 신전의 하이라이트인 대열주(大列柱) 홀이 펼쳐진다. 134개의 거대한 열주가 떠받치고 있는 이곳에선 건축과 신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열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람세스 3세, 핫쳅수트 여왕, 아메노피스 3세 등 많은 파라오들이 테베의 신 아문(Amun)에게 바친 거대한 송가(頌歌)다.



    카르나크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이 지루해질 즈음 파라오가 묻혀 있는 룩소르 서안(西岸)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을 건너기 위해 나가보니 호객꾼들이 다가와 펠루카(나일강을 유람하는 돛단배)를 타라며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세계 어느 곳이든 관광지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흡사하다. 짜증이 난다 해도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백 개의 문이 있는 도시’ 룩소르

    도심지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강을 건너 서안에 이르러 멤논의 거상, 람세스 3세 신전, 라메세움 등의 유적을 거쳐 핫쳅수트 신전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거대한 3층 테라스식 신전에는 여왕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 소말리아와의 교역장면 등을 담은 벽화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핫쳅수트 신전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파라오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이 나온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들 정도로 메마른 계곡과 황량한 바위산. 도굴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런 험지를 안식처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파라오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바람대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덤 속에 가득한 화려한 벽화는 절대권력의 힘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무덤의 주인은 그 자리에 없다. 그들은 이제 카이로의 박물관에서 몇 푼짜리 구경거리가 되어 가난한 후손들의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역사의 아이러니다.

    무덤에서는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파라오의 가난한 후손들은 몇 푼의 돈만 쥐어주면 그림설명까지 해주며 촬영을 묵인했다. 그들에게는 죽은 파라오의 무덤을 지키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가 훨씬 더 급한 문제일 것이다.

    빛 바랜 ‘문명의 발상지’

    시내로 돌아와 접한 거리에서는 현실의 이집트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고단한 삶의 무게였다. 룩소르 시내에 꽂혀 있는 ‘문명의 발상지’라는 푯말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현실 속의 룩소르였다. 도시에는 찬란한 과거의 영광과 현실의 고단함이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고 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