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삼재 의원,강재섭 의원, 김덕룡 의원, 최병렬 의원, 이부영 의원, 서청원 의원, 박근혜 의원(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라당은 1997년 대선에서도 좌절의 쓴맛을 봤다. 그러나 지금은 5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1997년에는 재기의 희망이 있었다. 이회창씨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떠난 데다 대타마저 불투명해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 기약없이 떠다니다간 좌초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여의도 중앙당사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post) 이회창’ 시대를 노리던 인물들에겐 지금이 분명 기회다. ‘대망(大望)’을 품은 주자(走者)들은 이미 발 빠르게 도전채비를 갖추고 있다.
생존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
한나라당 구성원들의 마음은 무척 초조하다. 구심점 부재에 따른 내부 이탈을 막으면서 2004년 봄 총선에서의 재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회창 전 총재를 대신할 새 인물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새로운 얼굴을 내세워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민주당과 맞서지 못하면 차기 대선은커녕 내년 총선에서 공멸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한다.
이런 절박함에도 한나라당은 ‘이회창 퇴장’의 후유증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혁파 중진인 이부영(李富榮) 의원은 “이회창씨가 차지했던 영역이 너무 컸다”며 “공백을 메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 전 총재가 원망스럽다”며 지금의 혼란상에 대해 ‘이회창 책임론’을 제기하는 당직자들도 많다. 지난 5년 동안 이 전 총재가 당권과 대권을 한손에 틀어쥔 ‘제왕적 총재’로 군림하면서 ‘넘버2’ 만들기를 외면해온 것이 오늘의 혼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의 핵심참모로 일했던 한 전국구 의원은 “재작년 말부터 2인자를 길러야 한다는 건의를 수차례 올렸다”며 “그때마다 듣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말했다. 당내에선 그간 ‘넘버2’ 반열에 오르려 했던 최병렬(崔秉烈) 박근혜(朴槿惠) 강재섭(姜在涉) 의원 등이 이 전 총재의 견제로 잇따라 주저앉았다는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지난해 당권·대권 분리와 집단지도체제 도입을 앞두고 넘버2 육성방안이 검토됐으나 끝내 채택되지 않았는데 그 부작용이 오늘날의 인물난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당권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뚜렷한 강자가 없는 까닭에 한나라당은 춘추전국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현 지도부가 사퇴를 결정해 차기 전당대회가 눈앞에 닥쳤지만, 뚜렷한 선두주자는 보이지 않는다. 서청원(徐淸源) 대표와 김진재(金鎭載) 박희태(朴熺太) 이상득(李相得) 하순봉(河舜鳳) 강창희(姜昌熙) 의원 등 현 지도부에 참여했던 최고위원단은 차기 전대 지도부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선 직후부터 터져나온 책임론 공방은 당권경쟁의 신호탄이었다.
지난 12월23일 강재섭 의원은 최고위원회의 공개석상에서 먼저 최고위원직을 던지며 선수(先手)를 쳤다. 그의 최고위원직 사퇴는 당내 소장파의 사퇴 공세를 피하고 ‘프리(free)하게’ 당권 재도전을 준비하려는 이중포석이었다. 강창희 의원도 뒤를 따랐다.
강재섭 의원의 사퇴 선언 계획을 전날 안 서대표는 이날 최고위원단의 행동통일을 주문하며 제동을 걸었으나 실패했다. 사퇴 선언 후 비공개 회의에선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최고위원인 김정숙(金貞淑) 의원은 “혼자만 살겠다고 인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며 강재섭 의원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김의원은 강재섭 의원을 두둔하는 강창희 의원에게도 “당신은 대전시지부장이나 사퇴하라”고 공박했다. 목소리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의원과 강창희 의원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대판 싸웠다는 후문이다.
서청원의 반격 카드
허를 찔린 서대표와 최고위원단도 반격카드를 내놓았다. 차기 전당대회 최고위원 불출마 선언이 바로 그것. 박희태 의원은 강의원 등에 대해 “난파선에서 자기들만 먼저 살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가면서 우리들을 난파선에서 살려고 버둥거리는 쥐새끼로 만들어버렸다”고 격분하며 불출마 선언을 주도했다. 박의원은 먼저 김진재 의원과 상의, 불출마 의견을 모았고 하순봉 의원은 나중에 동조했다. 이상득 의원은 서대표 의견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대표는 자신만 사퇴하고 남은 최고위원단에게 당무를 맡기는 방안을 내놓았다. 반면 최고위원들은 “대표직 사퇴는 당헌상 불가능한 일인데, 초법적으로 강행하는 나쁜 법통을 선례로 남길 수 없다”며 반대했다.
서로의 견해차는 12월26일 천안연수원에서 열린 의원·위원장 연찬회로 이어졌다. 그러다 이날 오후 분임토의시간, 서대표와 최고위원들은 감정이 격해지면서 전원 즉각 사퇴와 불출마 선언이라는 강수(强手)를 던졌다. 강재섭 의원의 당권 재도전을 저지하려는 ‘물귀신’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아무튼 내놓고 당권도전을 선언한 주자는 없지만 당권경쟁을 향한 중진들의 물밑 싸움은 천안연수원 논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게 한나라당 주변의 대체적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