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남북 정상회담 성사시킨 권병현·최수진 베이징 비밀접촉 내막

  • 글: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3-02-04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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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중대사관에서 통일관으로 근무한 문대근씨가 권병현·최수진 연결시켜
    • 최수진, 남한의 지원으로 북한의 SOC 건설 방안 올려
    • 北 아태, “상부(김정일) 위임에 의한 것이니 통 크게 (정상회담을) 추진하라”
    • 김정일의 이례적인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 방문 내막
    • 국정원, 권병현·최수진 라인 주저앉히고 정상회담 안건 가져가
    • 정상회담 서훈 대상자에서 권병현·문대근 누락시킨 한국 정부의 졸렬함
    남북 정상회담 성사시킨 권병현·최수진 베이징 비밀접촉 내막

    권병현 전 주중대사(왼쪽),최수진 총사장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 사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감동적이었다. 이 만남의 연장선상에서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공사가 시작되었고, 북한 선수단이 부산아시안게임에 참여하는 등 남북한은 분단 이후 보기 드문 밀월기를 보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상회담은 한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심각히 다투는 남남(南南)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남북 갈등도 적지 않았다. 휴전선 바로 북쪽에 북한군 공병대가 건설한 금강산댐(북한에서는 임남언제)의 안전문제를 놓고 남북이 대립하였고, 서해에서는 남북 해군이 정면으로 충돌해 수십명이 사상하는 참사를 빚었다(6·29교전). 정상회담은 우리 민족에게 복(福)을 불러온 것일까, 아니면 화(禍)를 초래할 것인가?

    새로운 사실 확인

    남북 정상회담이 민족사에 어떤 획을 그었는지는 사가(史家)들이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사가들이 그 일을 하기에 앞서, ‘사실 추적’을 주업으로 하는 기자(記者)들이 해놓아야 할 부분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혀놓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그 역사적인 의미에 못지않게 성사 과정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으므로, 더욱 더 정교한 추적이 필요하다.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4월8일 박지원(朴智元·60)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宋浩景·62) 아태 부위원장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함으로써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과 송호경은 남북한의 ‘고위급 인사’인데, 과연 두 사람의 담판만으로 회담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박-송 담판 이전에 분명히 실무적인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기자는 ‘여백’으로 남아 있는 실무 접촉 부분을 찾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권병현(權丙鉉·64) 당시 주중대사(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사업가인 최수진(崔秀鎭·52)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이하 흑민경) 총사장 라인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에 ‘통일 소’를 보내며 금강산 관광사업을 따낸 현대그룹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상회담은 권병현-최수진 라인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다.

    박-송 라인 이전에 권-최 라인이 있었음을 알아낸 기자는, 곧 당사자를 상대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가을 기자는 권병현 전 대사를 만났으나, 그는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후로도 그는 “그 일에 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며 만남을 거부했다.

    권병현-최수진 라인을 연결시킨 실무자는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 ‘통일관’으로 나가 있던 문대근(文大瑾) 서기관이다(현 통일부 정책1담당관). 그러나 문서기관도 기자와의 접촉을 극력 사양했다.

    박지원-송호경 담판 이전의 밀사

    기자는 방향을 바꾸었다. 한국에서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북측 실무자로 활약한 최수진 총사장을 상대로 사실 확인을 해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최수진’은 북한문제를 다루는 기자 사이에서는 전설로 회자되는 이름이다. 많은 기자들이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극구 피해왔다.

    YS 시절인 1995년 남한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했을 때, 그는 북한측 밀사로 처음 남북문제에 개입했다. 그 직후 그는 ‘시사저널’과 한 차례 인터뷰했다. 이에 대해 최총사장은 “그 인터뷰는 나와 상의한 후 내보내기로 약속한 것이었는데, 시사저널이 그냥 보도해버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피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1996년, 네 차례 남북 당국간 비공개 회담을 성사시켰다. 남측 언론은 전혀 보도한 바 없는 비밀 회담이었다. 1997년에도 한 차례의 비공개 당국간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비밀회담에서 남북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회담이 열릴 때마다 그는 북한 대표단의 숙소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숙박비를 부담해가며 북한을 도왔다. 이에 대해 최총사장은 “우리 민족이 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10월 기자는 베이징(北京)에 있는 최총사장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따뜻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준 그는 “지금(내일) 조선을 방문해야 하니, 갔다온 후에 보자”고 말했다. 그가 북한 방문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날 다시 전화를 걸자, 그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단호히 인터뷰를 사양했다.

    무작정 베이징으로 날아갈 수도 없어 속을 끓이던 기자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11월 중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에도 “베이징으로 오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1월30일 기자는 베이징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2월1일 흑민경 사무실에서 최총사장을 만났다. 마침 일요일이라 찾아오는 사람도, 걸려오는 전화도 없어 대화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최총사장은 5척 단구(短軀)지만, 부리부리한 퉁방울눈과 붉은 얼굴을 가진 게 특징이다.

    가자와 수인사를 나눈 직후 그는 “내가 왜 당신을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한국 기자는 만나지 않는 게 옳은데…”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까지도 기자는 그를 만나자고 한 목적을 밝히지 않았다.

    기자는 조심스럽게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지기까지의 남북 접촉사를 알고 싶다”고 운을 떼었다. 그가 뜨악한 눈빛으로 바라보기에 DJ정부 출범 이후의 남북 접촉사를 간략히 정리해주었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동결되었다. 때문에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98년 남측이 비료 10만t을 지원하는 대신 북측은 이산가족 만남에 응한다는 안건을 논의하기 위해 양측이 베이징에서 차관급 회담을 가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듬해인 1999년 6월 중순에도 차관급 회담을 가졌으나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해 6월15일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남북 해군이 맞붙어 북측에서는 30여 명 이상이 사상하고, 남측에서도 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완전 단절됐다. 그런데, 연평해전 1년 후 남북은 정상회담을 갖고 5개항의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기자는 “가장 극렬한 대립인 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정확히 1년 후 남북 정상회담으로 반전(反轉)이 이뤄졌다. 이 반전이 이루어진 1년 사이에 최총사장의 움직임이 있었다. 최총사장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다”며 답변을 유도했다.

    이에 대해 최총사장은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이냐. 당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겠다”고 역제의했다. 그로 인해 기자는 그때까지 취재해온 권병현-최수진 라인의 움직임에 대해 장시간 브리핑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브리핑이 ‘이 기자와 대화를 해야 하나’하고 망설이는 최총사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최총사장은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기자의 취재 내용이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면, 이야기를 자르고 들어와 정정(訂正)해 주었다.

    덕분에 기자는 박지원-송호경 담판이 있기 전의 남북 정상회담 비화를 거의 완벽히 재구성해낼 수 있었다. 다음은 최총사장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자가 복원해낸 남북 정상회담 성사 과정이다.

    문대근씨가 돌파구 마련

    1999년 6월의 연평해전 후 남북관계는 완전 냉각기로 들어갔다. 뜻하지 않은 충돌로 대화선을 놓친 김대중 정부는 대북문제를 다루는 부처에 남북관계를 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접촉선을 뚫지 못했다.

    이러한 때인 1999년 10월말 통일부의 문대근씨가 북한문제를 다루는 ‘통일관’으로 임명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부임했다. 전임자로부터 업무 인수를 받는 과정에서 문씨는 과거 최수진씨가 남북 협력에 깊이 관여해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문씨는 최수진씨를 만나면 꽉 막힌 남북 대화를 틀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최총사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최총사장을 만난 문씨는 남북 대화를 복원할 방안을 놓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최총사장은 “남조선의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서 북조선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전력(電力) 문제를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끊어진 북남 대화를 잇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씨가 “책임 있는 남한 사람으로 주중 한국대사를 내세우면 되겠느냐”고 묻자, 최총사장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후 문씨는 한번 더 최총사장을 만나 의견을 교환한 후, 권병현 중국주재 한국대사에게 최총사장과 나눈 이야기를 보고했다. 권대사는 문씨의 보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2000년 1월6일(이때부터는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됐으므로 날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문씨는 최총사장을 찾아가 권대사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최총사장을 찾아갔는데, 이때 최총사장은 ‘북과 남은 농업과 철도·경공업·수산·상품전시장 사업 등 다섯 가지 경제 분야의 협력에 주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북남관계 개선을 위한 북남 경제협력 건의서’를 문씨에게 주었다.

    문씨로부터 이 건의서를 건네받은 권대사는 주의 깊게 읽어본 후 문씨에게 최총사장과 만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1월9일 권대사는 문씨의 주선으로 베이징 시내 최고급 호텔인 켐핀스키 호텔에서 최총사장을 만나, 그가 제시한 남북경협 방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다.

    밤새워 보고서 작성

    이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권대사는 1월11일 아침 대사 관저로 최총사장을 초청해 조찬을 하며, “대한민국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책임지고 이야기하겠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께서 의지를 갖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니 그 뜻을 북한에 전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권대사는 “김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로 허위를 모르고 살아온 분이다”라고 강조하며, 다시금 김대통령의 뜻을 북한에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1월11일은 화요일인데,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은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떠나는 항공편이 있는 날이다. 이미 평양 방문 일정이 잡혀 있던 최총사장은 권대사의 관저를 나와 바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 체류 기간에 최총사장은 북한의 대남 담당부서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 측 인사를 만나 권대사의 뜻을 전했다. 아태 인사들은 김대통령이 직접 ‘북남경협’을 언급했다는 데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북한을 떠나기 전 최총사장은 ‘남조선이 북조선의 SOC(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형태로 북남경협을 해보자’는 방안을 적은 글을 아태 김용순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1월22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최총사장은 권대사를 만나 아태 측에서도 경협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권대사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정말이냐. 경협 부분에 대해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느냐”며 반가워했다.

    최총사장은 남측에서 말하는 ‘퍼주기식 대북 지원’이란 말을 아주 싫어한다. 그는 북과 남이 함께 이익을 보는 경협을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이때도 최총사장은 “북남 교류는 북측이 일방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 북과 남이 같이 사업함으로써 함께 이익을 얻는 경제협력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지론을 덧붙였다고 한다. 권대사는 이러한 상황을 전부 서울로 보고하였다.

    1월26일 김대중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며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을 언급하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통령이 이러한 언급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권대사의 보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언론은 권대사의 부탁을 받은 최수진 총사장이 북한과 깊숙이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김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필요성’ 주장을 연례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비중 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태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아태 관계자를 남측과 접촉하는 실무자로 정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로 인해 권병현·문대근(남측)-최수진·아태 실무자(북측) 대화라인이 형성되었다. 양측은 이 라인이 가동하는 것을 한국 국정원에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남북 정상회담 성사시킨 권병현·최수진 베이징 비밀접촉 내막

    2002년 4월8일 베이징의 차이나월드 호텔에서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 서명한 박지원(오른쪽)-송호경 특사. 두 사람의 담판은 권병현-최수진 접촉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1월29일 최총사장은 사업차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때 만난 아태 관계자 중에는 북남경협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장시간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 토론이 최총사장을 분발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북한에 머물던 2월11일 밤 최총사장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북남 철도를 연결하고 그 철도를 통해 물류를 흘리는 북남경협을 해보자. 이산가족도 만나게 하면서 통 크게 북남 교류를 해보자’는 요지의 편지를 작성했다.

    내심 최고 영도자(김정일 위원장)에게도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성한 편지였다. 2월12일 그는 이 편지를 아태 관계자에게 건네주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다음날(2월13일) 그는 베이징에 나와 있는 아태의 고위 인사로부터 “당신의 뜻을 상부에 전달했다. 최선생이 수년간 호소해온 남측과의 북남 철도연결, 이산가족 만남, 북남 당국간 대화, 나아가서는 그보다 더 큰 것도 가능하다고 남측에 전달하기 바란다. 새로운 한 해에 대담하게 사업을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놀라운 소식이라 최총사장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자 아태 관계자는 오히려 “위임에 의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통 크게 추진하라”고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북측 사람이 말하는 상부는 김정일 위원장을 뜻하므로 최총사장은 크게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2월14일 오전 그는 문대근씨를 흑민경 사무실로 불러 아태 고위인사가 말한 내용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문씨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최총사장은 권대사와 점심을 함께하며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권대사 역시 놀란 표정으로 “좀더 분명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이니 아태 실무자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권대사의 요구는 일리가 있었지만, 북측으로서는 남측의 태도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므로 직접 만나게 해줄 수 없었다. 최총사장은 전화를 통해 권대사와 아태 실무자가 진의를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전화 통화에서 아태 실무자는 “최선생이 우리를 대표할 수 있으니 최선생의 말을 믿어도 된다”고 확인해주었다. 이 통화 후 최총사장은 약 2시간 동안 권대사와 전력(電力)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SOC를 남북이 협력해서 건설하는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최총사장은 2월18일까지 북한의 SOC 협력에 대해 남측이 대답해줄 것을 요구했다. 2월15일 권대사는 문대근씨를 서울에 보내 청와대 측에 다음의 내용을 전달케 했다.

    ‘남북경협은 북한이 가장 아쉬워하는 전력과 철도·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해주는 데 주력하는 경협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국간 대화, 이산가족 만남, 철길 연결 등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풀릴 것으로 보인다.’

    최총사장은 18일까지 서울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있으면, 2월19일(토) 평양을 방문하기로 아태 측과 약속해놓고 있었다. 최총사장은 문대근씨가 남측의 답변을 갖고 오기를 기다렸으나, 18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문씨는 전화로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 기다려달라”고 통보해왔다. 훗날 최총사장은 국정원이 제동을 걸어 남측의 대답이 늦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의미심장한 박재규 장관의 연설

    그러나 남측은 나름대로 ‘미소’를 날리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대근씨가 서울에 오기 전인 2월9일 김대통령은 일본 도쿄방송(TBS-TV)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식견 있고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로 평가해 주목을 끌었다. 2월28일 발매된 독일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는 김위원장을 실용주의자로 평가했다.

    2월19일 박재규(朴在圭·58) 통일부 장관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8주년 기념 모임에서 이러한 요지의 연설을 했다.

    “북측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는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에 호응해야 한다. 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을 견지하면서 교류협력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 남북 경제공동체의 튼튼한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남북간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 당국간 대화가 필수적이므로, 남북은 거창하고 원대한 주장이나 구호보다는 작으나마 실제로 실천해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월24일 박장관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2월19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부 업무 계획을 보고하며 정상회담 성사에 대비한 만반의 회담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보고를 올렸다”고 밝혔다.

    이 시기 청와대는 통일부 등 관계기관을 불러 ‘북한이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고,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을 개선해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남북경협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움직임을 보도하였다.

    이런 가운데 평양에 있는 외신들이 아주 이례적인 사건기사 하나를 타전했다. 3월5일 저녁 7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간단한 전화통보를 한 후 수행원을 이끌고 평양의 중국대사관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자국에 주재하는 대사관을 찾아간 것은 여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북한식 표현으로는 ‘사변적(事變的)인 사건’에 해당한다.

    김위원장의 방문 목적은 이임을 앞둔 완융샹(萬永祥) 주북한 중국대사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김위원장은 밤 11시까지 장장 4시간이나 머물며 대화하는 ‘이례’를 보여주었다.

    외신은 이날 김위원장이 완대사에게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조중(朝中) 정상회담을 갖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김위원장이 이처럼 중국 방문을 부탁한 것은 권-최 라인을 통해 남한의 협력으로 북한의 SOC를 건설한다는 안이 오고갔기 때문이다.

    김위원장이 중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튼 후인 1983년이다. 김위원장이 17년 만에 중국 방문을 결정한 것은 그의 중국대사관 방문 이상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도 한국 언론은 김위원장의 중국대사관 방문 의도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5월29일 김정일 위원장은 2박3일 일정으로 중국을 비공개·비공식적으로 방문했다.

    남측은 정보기관을 통해 김위원장의 방중 정보를 포착했는데, 중국 정부는 김위원장이 북한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인 6월1일 양원창(楊文昌)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권대사에게 김위원장의 중국방문 사실을 공식 통보해주었다.

    이때는 이미 박지원-송호경 담판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한 것이 알려진 다음이라, 남측 언론은 ‘김위원장의 방중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답사인 것 같다’고 정확히 해석했다.

    南, 베를린선언으로 화답

    한편 남측도 김위원장의 중국대사관 방문에 버금가는 쇼킹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3월2일 김대중 대통령은 투자유치 등의 목적을 갖고 유럽 4개국 순방에 나섰는데, 이때 그의 가방 안에 북한을 겨냥한 비장의 프로젝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3월9일 독일에 머물고 있던 김대통령은 베를린자유대학을 방문해 이 카드를 꺼내들었다.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대학 연설에서 북한을 위한 ‘베를린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연설의 주 내용은 ‘지금까지의 남북경협은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민간기업 차원에서만 진행됐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 선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TV 방송4사로 하여금 김대통령의 연설을 국내에 생중계하도록 조치하였다. 최총사장의 지론인 ‘남측이 북측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돕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베를린선언은, 정상회담이라는 빅 이벤트를 통해 남북을 다시 만나게 한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이때부터 남측 언론은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는 ‘남측이 김대통령의 베를린선언 발표 수시간 전쯤, 적십자 연락관 접촉을 통해 조선로동당 김용순 비서 앞으로 김대통령이 발표할 베를린선언 내용을 전달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통령의 대북 연설문 내용을 사전에 북측에 전달한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무게가 실렸다.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도 북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단언을 내놓았다.

    3월10일 건설교통부는 남북경협의 한 방안으로 거론된 금강산선을 잇기 위한 예산 100억원을 다음해 예산에 반영해달라고 기획예산처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3월17일에는 박재규 통일장관, 이정빈(李廷彬) 외교장관,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방법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로써 한국의 건설업체에서는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특수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현재 남북은 DMZ 부근에서 동해선을 잇고 있는데, 동해선 연결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최총사장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동해선을 이어 중국의 동북(東北) 3성과 북한에 묻혀있는 철광석과 석탄 등 광물자원을 포항제철로 보내고, 부산항에 내려진 컨테이너를 동해선을 통해 북한과 중국·러시아로 보내자는 물류 방안을 주장해왔다(최총사장은 경의선보다는 동해선이 물류 면에서는 훨씬 부가가치가 크다고 주장해왔다).

    최총사장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북측의 아태와 남측의 권대사에게 전달했고, 남북한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베를린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베를린선언에 대해 북측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때문에 남측 언론은 베를린선언을 필두로 한 남측의 노력을 일방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권-최 라인은 정상회담 이후의 이벤트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남북 경제공동체는 민족주의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두 사람은 민족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 뤼순(旅順)에 있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유해를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 안장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희망의 날개를 펼칠 때 임동원씨가 이끄는 국가정보원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권대사에게 더 이상 남북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언질을 주고, 문대근씨에게도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이어 국정원은 최수진씨를 배제시킨 채 바로 김용순이 이끄는 아태와 접촉했다.

    권병현-최수진 라인이 국정원-아태 라인으로 변경된 과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 라인이 등장하면서 남북 대화의 주제도 권-최가 움직일 때와 달라졌다고 한다. 국정원과 아태로 라인이 교체된 직후 등장한 것이 남북 특사 접촉이다.

    특사 접촉은 3월13일 북측이 먼저 (비공개로) 제의함으로써 검토되었다. 특사 접촉은 양측 최고 지도자의 신임장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각자가 들고 간 신임장을 상대에게 제출해 신임을 확인한 후, 대화에 들어간다.

    김대통령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북측에서는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을 특사로 비공개 임명했다. 박장관은 국내 언론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3월17일 상하이(上海)로 날아가 19일까지 송호경과 회담을 갖고 돌아왔다.

    3월22일 두 사람은 베이징에서 다시 2차 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에서는 정상회담과 관련한 핵심 사항들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송호경은 김정일 위원장이 아니라 김영남(金永南·7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정상회담에 나올 것 같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 바람에 박장관은 합의가 끝난 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북한이 김영남 위원장을 내세우겠다고 고집하면 정상회담은 물 건너가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4월4일 베를린을 방문한 북한의 백남순(白南淳·73) 외상이 김대통령의 베를린선언 취지를 환영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불식되었다. 이 발언은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에 나오겠다’는 화답(和答)으로 해석돼, 4월8일 박지원 장관은 베이징의 차이나 월드 호텔에서 송호경 부위원장과 3차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에 응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날 오후 7시25분 두 특사는 남북정상회담을 연다는 합의문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측은 4월10일 이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박지원-송호경 담판이 있은 후 1934년생으로 동갑인 임동원 국정원장과 김용순 아태위원장이 정상회담의 전 과정을 통제했다. 6월13~15일 사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임동원-김용순 두 사람은 지근거리에서 두 정상을 보필했다.

    그러나 가장 엄혹했던 시기에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권병현-최수진씨는 TV를 통해 이를 지켜보아야 했다.

    2002년 6월 한국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수훈자 리스트에 실질적으로 정상회담을 엮어낸 권병현·문대근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장시간에 걸쳐 기자의 브리핑을 들으며 잘못된 내용을 수정해주던 최총사장도 이 부분에서는 크게 호응했다.

    그는 “정상회담은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이기 때문에 남측의 국정원이 권대사와 문대근씨를 주저앉히고 정상회담 논의를 가져간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성과를 논의할 때는 두 사람의 업적을 인정해줘야 옳은 것 아닌가. 남측의 시야가 너무 좁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질타했다.

    “베를린선언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야”

    기자가 최총사장을 만나고 온 후 한반도에서는 큰 사건이 많았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북핵 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기자는 최총사장과 여러 번 전화통화를 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지금 남측 사람들은 북측의 전기사정이 얼마나 엄혹한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북측이 저렇게 하는 것인데, 남측과 미국은 핵문제만 거론하며 북측을 몰아세우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민족공조에 동참할 수 있는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북과 남은 북측의 SOC를 재건하는 문제에 협력해야 작금의 사태를 풀 수 있습니다.

    남측은 베를린선언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베를린선언대로 SOC 건설을 했으면 지금의 위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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