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병현 전 주중대사(왼쪽),최수진 총사장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상회담은 한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심각히 다투는 남남(南南)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남북 갈등도 적지 않았다. 휴전선 바로 북쪽에 북한군 공병대가 건설한 금강산댐(북한에서는 임남언제)의 안전문제를 놓고 남북이 대립하였고, 서해에서는 남북 해군이 정면으로 충돌해 수십명이 사상하는 참사를 빚었다(6·29교전). 정상회담은 우리 민족에게 복(福)을 불러온 것일까, 아니면 화(禍)를 초래할 것인가?
새로운 사실 확인
남북 정상회담이 민족사에 어떤 획을 그었는지는 사가(史家)들이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사가들이 그 일을 하기에 앞서, ‘사실 추적’을 주업으로 하는 기자(記者)들이 해놓아야 할 부분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혀놓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그 역사적인 의미에 못지않게 성사 과정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으므로, 더욱 더 정교한 추적이 필요하다.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4월8일 박지원(朴智元·60)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宋浩景·62) 아태 부위원장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함으로써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과 송호경은 남북한의 ‘고위급 인사’인데, 과연 두 사람의 담판만으로 회담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박-송 담판 이전에 분명히 실무적인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기자는 ‘여백’으로 남아 있는 실무 접촉 부분을 찾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권병현(權丙鉉·64) 당시 주중대사(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사업가인 최수진(崔秀鎭·52)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이하 흑민경) 총사장 라인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에 ‘통일 소’를 보내며 금강산 관광사업을 따낸 현대그룹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상회담은 권병현-최수진 라인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다.
박-송 라인 이전에 권-최 라인이 있었음을 알아낸 기자는, 곧 당사자를 상대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가을 기자는 권병현 전 대사를 만났으나, 그는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후로도 그는 “그 일에 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며 만남을 거부했다.
권병현-최수진 라인을 연결시킨 실무자는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 ‘통일관’으로 나가 있던 문대근(文大瑾) 서기관이다(현 통일부 정책1담당관). 그러나 문서기관도 기자와의 접촉을 극력 사양했다.
박지원-송호경 담판 이전의 밀사
기자는 방향을 바꾸었다. 한국에서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북측 실무자로 활약한 최수진 총사장을 상대로 사실 확인을 해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최수진’은 북한문제를 다루는 기자 사이에서는 전설로 회자되는 이름이다. 많은 기자들이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극구 피해왔다.
YS 시절인 1995년 남한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했을 때, 그는 북한측 밀사로 처음 남북문제에 개입했다. 그 직후 그는 ‘시사저널’과 한 차례 인터뷰했다. 이에 대해 최총사장은 “그 인터뷰는 나와 상의한 후 내보내기로 약속한 것이었는데, 시사저널이 그냥 보도해버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피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1996년, 네 차례 남북 당국간 비공개 회담을 성사시켰다. 남측 언론은 전혀 보도한 바 없는 비밀 회담이었다. 1997년에도 한 차례의 비공개 당국간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비밀회담에서 남북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회담이 열릴 때마다 그는 북한 대표단의 숙소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숙박비를 부담해가며 북한을 도왔다. 이에 대해 최총사장은 “우리 민족이 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