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낡은 정치’ 확대재생산한 ‘제왕적 권력’

  • 글: 박효종 parkp@snu.dc.kr

    입력2003-02-04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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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출범한 김대중 정권. 하지만 정치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임기말을 맞았다. 누구보다 현실 정치를 잘 알기 때문일까. ‘의사가 자기 병 못 고친다’는 속담처럼 김대중 정권 5년은 실천은 사라진 채 정치개혁 과제만 양산한 시기였다.
    ‘낡은 정치’ 확대재생산한 ‘제왕적 권력’

    1998년 8월, 취임 6개월을 맞은 김대중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정치개혁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추진해야 할 개혁 어젠더는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절박한 과제는 정치개혁이었다. 개혁의 시대정신에 부응해 ‘국민의 정부’도 정치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나기는커녕, 낡은 정치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은 각종 ‘권력형 게이트’를 양산하더니 마침내 권력누수현상으로 이어졌다.

    보스 중심의 정당정치도 계속 건재했다. 국회는 ‘식물국회’ ‘방탄국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2000년 4·11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하며 정치개혁에 지지와 성원을 보냈음에도 DJ정부는 ‘낡은 정치’의 청산을 외면하고 말았다.

    정치개혁은 IMF사태 이후 대량 실직과 퇴직을 강요한 사회·경제개혁과 관련, 정치권이 솔선수범해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도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의 성격을 갖는 필수적인 과제였다. 환자를 치유하려는 의사에게 “의사여, 너 자신의 병부터 고쳐라”는 주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김대중 정부에서 유의미한 정치개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개혁에 관한 논의는 기껏해야 정부부처와 국회의원 규모를 줄이는 ‘양적’ 범주에 접근했을 뿐이다. 행정부처가 줄어들었고 국회의석이 줄었다. 이것이 그나마 DJ가 벌인 정치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행정부와 국회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정치개혁의 우선 과제라고 할 수는 없다. 더욱 중차대한 개혁 어젠더는 정치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질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따른 실질적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30년간 지역적 소외의 상징이었던 호남의 정치지도자가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지역주의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또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지연된 ‘민주주의의 질(quality of democracy)’을 제고하고 민주화를 공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기대와 열망은 희망사항이었을 뿐, 충족되지 못했다. 지역감정은 김대중 정부에서 오히려 악화되었고, ‘권력의 인격화’와 ‘제왕적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권위주의 정치 또한 강화되었다.

    후진정치의 주범 ‘제왕적 대통령제’

    정치발전의 당위성을 감안할 때 정치개혁의 내용과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는 문제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의 안정적 발전과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민주선거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한, 삼권분립이나 지방분권은 불가능하다. 또 검찰 등 권부의 직무수행도 공평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쟁의 대상이 된다. 국무총리가 아닌 대통령 비서실장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주체가 되는 현실, 청와대비서실이 소내각으로 작동하는 현실은 모두 입법부와 사법부를 위축시키는 제왕적 권력에서 비롯된 후진정치의 현주소다.

    김대중 정부는 소수정부다. 자민련과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공조한 결과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원론적으로 내각제는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이 제도가 한국의 정치현실과 정치문화에 적합한가 하는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내각제 논의는 제도의 장점보다 제왕적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 공약은 실시 여부를 떠나 대통령의 권력집중을 완화하겠다는 묵시적 약속으로 보아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현실적으로 개헌에 필요한 정족수인 국회의석 3분의 2는커녕 과반수에도 미달하는 소수여당이라는 점을 빌미로 내각제 개헌 논의조차 시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왕적 권력을 축소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DJ정권의 국무총리는 ‘책임총리’는커녕, 예전처럼 ‘방탄총리’와 ‘의전총리’의 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비용과 투명하지 못한 정치자금의 운용도 큰 문제였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검은 돈과 관련될 소지가 많고, 무기명 기탁이 가능한 정액 영수증을 기부받을 수 있게 했다(제7조2항). 또 기부자명단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검은 돈이 유입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아 사실상 고비용의 정치구조를 부추기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는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이 1980년대 초기에 비해 100배 이상 인상되었다. 1981년 8억원이던 것이 2002년 1140억원으로 증가했다.

    결국 정경유착을 막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한다는 취지는 실종되고 정당 보스들만 힘 들이지 않고 돈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정당에 들어가는 국고보조금이 과연 투명하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실질적 조치조차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정당 보스가 나랏돈을 쌈짓돈처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김대중 정부는 정치자금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긴 했으나, 용두사미가 되었다. 개혁입법으로 추진된 돈세탁방지법을 보자. 2001년 6월 여야협상에서 정치자금은 이 법의 대상에서 제외키로 방향을 잡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3개월 뒤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는 정치자금을 다시 포함시켰다. 하지만 국내에서 거래되는 불법자금에 대한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계좌추적을 금지하고 선관위에 사전 통보토록 해 정치자금의 숨통을 터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2002년 2월엔 전경련이 “부당한 정치자금을 거부하겠다”고 공개선언, 주춤거리는 정치권을 다시 압박하고 나섰다. 별도로 진념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1%(연간 1700억원 규모)를 정치자금으로 쓰자”고 제안, 공론화에 나섰지만, 기업들의 반발과 실효성 논란으로 무위로 돌아간 상태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야심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하지만 선거 공약에 거품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권 후 재검토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1998년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선거 공약을 검토하여 IMF외환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야 할 과제 100개를 선정했다. 이를 토대로 ‘국민의 정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선거 당시 김대통령이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내세웠던 정치 관련 공약 가운데 앞서 언급한 내각제 실시와 정치자금법 개정 이외에도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정부조직과 기능을 근본적으로 개혁한다.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사청문회를 도입한다. ▲검찰·경찰 등 국가권력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한다. ▲지방자치제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지방재정제도를 전면 개선한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한다.

    주목할 점은 이들 공약 가운데 상당 부분이 100대 국정과제 선정 때 슬그머니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선거 당시의 공약이나 집권 이후의 100대 국정과제를 보면 행정부 중심의 정책적 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축소나 정치자금법 개정 등 정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주안점이 있는 정치 분야의 개혁 과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지만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정부조직을 축소했지만 각 부처의 반발로 정부 조직과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몇 개 부처를 개편하고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신설하는 등 ‘큰 정부’로 회귀하고 말았다.

    의지조차 없었던 검찰 개혁

    둘째, 중앙인사위원회를 신설했지만 관례가 된 연공서열 중심 인사풍토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또한 가신그룹의 인사관여도 여전했다. 개방형 임용제를 도입했지만 민간 전문가 충원에 실패했고, 공무원이 신분을 바꿔 개방형 자리까지 차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인사청문회를 도입해 국무총리와 헌법재판관, 대법관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한 것은 과거에 비해 획기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청문회 대상을 국회의 인준을 받거나 추천을 받도록 헌법에 규정된 대상자로 한정함으로써 유명무실한 인사검증제도가 되었다. 즉 국무위원과 장관급 공직자는 물론, 권력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등은 청문회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 결과 임기 내내 DJ는 편파인사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인사파동이 자주 일어났다.

    셋째, 검찰과 경찰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전 법조비리, 옷 로비 사건, 파업유도 사건 등 절박한 계기가 주어졌음에도 김대중 정부는 검찰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아니 추진할 의지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1998년 대통령 취임 직후 법무부의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DJ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강조했지만, 검찰은 여전히 대통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검찰’의 멍에를 벗지 못했다. 검찰총장의 임기제가 법제화됐지만,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검찰총장이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낡은 정치’ 확대재생산한 ‘제왕적 권력’

    정치권이 머뭇거리는 사이 시민단체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1999년 5월 ‘정치개혁을 위한 사회단체 연대회의’의 기자회견 장면

    넷째, 지방자치제도의 개선도 부진했다. 오히려 정부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각시켜 기초자치단체의 부단체장을 중앙정부가 임명하겠다는 중앙집권적 정책을 추진하다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포기하기도 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권한과 기능의 재분배를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기능이양위원회를 만들었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다.

    다섯째, 부패방지법이 제정됐지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발톱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 또 특별검사제는 김대통령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였으나, 도입할 경우 검찰의 위상을 실추시켜 권력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실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또 2000년 2월 국민여론에 밀려 국회 의석 26석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선거법·정당법·국회법·정치자금법이 일부 개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의미한 정치개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권력집중과 고비용 정치구조 등 해결해야 할 본질적인 정치개혁의 과제에는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쁜 통치의 예술’

    김대중 정부는 정치개혁을 소수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사고, 혹은 정략적 사고로 접근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의 실패다. 한국 상황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제도 자체로서 갖는 매력은 있지만, 민주당의 ‘동진 정책’이라고 할 영남권 진입의 정략적 목표를 이루겠다는 발상이 배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반발이 거셌고, 마침내 거부된 것이다.

    개혁정권을 표방한 김대중 정부가 정치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소수정권이라는 점이 주된 원인이다. 소수정권이다 보니 기득권 세력에 포위돼 의도된 개혁을 제대로 시행해나갈 수 없었다. 또 하나 자민련과의 공조로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념적 지향이 다른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해 집권한, 권력기반이 취약한 소수파 정부로서 보수 기득권 세력과의 전면 대결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정치개혁 실패가 ‘포위된 개혁’에 있는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DJ의 정치 비전이 문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는 정치를 ‘가능한 것의 예술(art of the possible)’로 접근했을 뿐, ‘좋은 통치의 예술(art of good governance)’로 접근하지 않았다. ‘수의 논리’에 집착해 야당의원 빼내기를 했고, 또 교섭단체 구성에 의석수가 모자라는 자민련을 도와주기 위하여 ‘의원 꿔주기’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했다. 특히 ‘의원 꿔주기’는 1950년대의 ‘사사오입’개헌만큼이나 후진적인, ‘가능성의 예술’로서의 정치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통치술이다. DJ가 추구했던 ‘가능성의 예술’로서의 정치는 유감스럽게도 ‘좋은 통치의 예술’이 아니라 ‘나쁜 통치의 예술’의 전형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국민의 정부는 개혁을 내세운 정부임에도, 소수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반(反)개혁적인 행동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의석수를 늘리는 전통적인 방식에 매달렸던 것이다. 김대통령은 거대 야당의 반대로 곳곳에서 개혁이 저항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수의 논리’에 집착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의원 대부분이 개혁적이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야당의 태도를 비타협적으로 만들어 여야대결은 더욱 격화되었고, 각 분야의 개혁입법은 변칙적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개혁은 의석수를 떠나 개혁주체의 확고한 의지와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청사진이 중요하다는 점을 DJ는 깨닫지 못했다. 개혁의 의도가 좋아도 방법이 좋지 못하면 그 개혁은 왜곡되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기주의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셋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해야할 김대통령 자신의 정치행태가 문제의 일부라는 점에 있었다. ‘국민의 정부’임을 내세웠으면서도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는 구두선에 불과했다. ‘국민의 뜻’은 오로지 대통령의 편의적인 주관적 판단의 형태로만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분야는 잘 돌아가고 그렇지 않은 분야는 주춤하는 ‘인치’의 양상이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든 것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돼 대통령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경제사회분야의 개혁은 물론, 정치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의지가 결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대통령의 결단과 지시로 개혁작업이 시작되고 중단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가리켜 언론에서는 “선생님처럼 모든 것을 가르치려 한다”고 꼬집었다. ‘철인(哲人)왕’을 자부한 DJ의 인치는 아테네의 솔론이 개혁법을 제정하고 자신이 개혁법을 시행하는 역할을 사양하고 아테네를 떠난 것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넷째, 정치개혁의 실종과 실패는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독선적 태도에서 기인했다. 김대중 정부와 여당은 개혁과정에서 제기된 선의의 ‘비판’과 악의적 ‘비난’을 구분하지 않고 ‘쓴 소리’는 모두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낙인찍었다. 누구도 개혁을 독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개혁과정에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이를 숨기기보다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바람직한 개혁 방향에 대한 공감대 형성에 주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선적 사고에 젖어 ‘개혁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거대 야당이 권력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개혁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야당이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에 가까울 정도로 개혁정치의 걸림돌 역할을 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유의미한 정치개혁을 이루지 못한 정부·여당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김대중 정부의 민주개혁에 대한 철학과 청사진의 부재, 그리고 정치적 의지의 결여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개혁의 과정에서 국민은 많은 준칙에 익숙해졌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거나 “교육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등등. 같은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대통령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준칙을 음미할 상황이 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어떻게 하면 대선 때 얻은 득표력 이상으로 권력을 극대화할까 하는 소수정권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정치영역에 관한 한, DJ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의 순간(Machiavellian moment)’을 포착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심했을 뿐, 상대적으로 그 권력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일부 실행된 정치개혁도 김대통령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실패’로 끓어오른 여론 달래기용으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가듯 실시된 것들이다. 옷 로비 의혹사건이나 검찰의 파업유도 의혹사건 다음에 특별검사제가 실시된 것이 단적인 예다. 또한 권력 ‘게이트’가 발생하고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될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검찰의 중립화 의지가 타나났다. 대통령 임기 내내 김대통령은 여당의 총재직을 유지한 채 대행체제로 당을 운영하고 있다가 임기 종반부 잇단 선거패배 이후에야 당 총재직을 내놓고 탈당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정치적 패자의 이미지가 강했을 뿐, 개혁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5년이라는 한정된 기간에 모든 걸 다 이룰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임기 5년 동안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결의를 다질 수도 있을 것이다. DJ는 경제사회 분야에서는 왕성한 개혁을 시도했고,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다. 경제사회 분야의 개혁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는 개혁의 방향과 방법론이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밀어붙이기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5년 동안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하지만 정치 분야의 개혁은 다르다. 대통령 1인 권력의 제한과 투명한 정치라는 목표와 방향에 관한 한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따라서 요구되는 것은 정치개혁을 실천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였다. 그러나 DJ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정치적 제스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개혁 어젠더에 얽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 그 자체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권력에 대한 몰입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처럼 김대통령을 위축시켰고 가정을 풍비박산냈으며 여당을 인기 없는 당으로 만들었다. 김대통령도 전임 김영삼 대통령처럼 아들 문제 때문에 국민 앞에 몇 번씩 사과해야 했으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후보 시절 민주당이라는 간판을 쓰지 못하고 ‘국민후보’라고 호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김대통령의 실패가 노무현 당선자에게 반면교사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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