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노정권 연대’냐 중립이냐 시민단체의 ‘정치적’ 고민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3-02-04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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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단체의 ‘정치적 중립’ 원칙은 폐기될 수 있는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시민단체 구성원들이 고민에 휩싸여 있다.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약체 정권을 사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2000년 총선 이후 치렀던 ‘홍위병 논쟁’ 재발을 염려하는 ‘현실적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과연 시민단체는 노무현 당선자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인가.
    ‘노정권 연대’냐 중립이냐 시민단체의 ‘정치적’ 고민

    2000년 총선시민연대 운동(위에사진)을 통해 엄청난 성과와 함께 ‘홍위병 논쟁’이라는 강한 후폭풍을 맞았던 시민단체들은 지난해 대선 기간에는 공명선거감시사업(아래사진) 등 캠페인성 활동을 펴는데 주력했다.

    #1 지난해 초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는 ‘정책캠페인과 반부패입법운동, 유권자참여운동의 세 축을 기반으로 2002년 대선을 준비한다’는 대선사업 기획안을 마련했다. 이 기획안에 따라 전국 400여 시민단체로 구성된 ‘2002대선유권자연대’(이하 대선연대)가 출범해 캠페인을 전개한 것.

    그러나 “일상적인 캠페인 대신 2000총선시민연대(이하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처럼 직접적인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 시민단체 내·외부에서 쏟아져나오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후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공정선거감시운동 대신 차기 대통령 선택기준에 대해 시민운동의 입장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대세로 확산되지 않았고 대선연대는 선거자금 모니터 등 공명선거감시사업에 집중하며 대선기간을 보냈다.

    #2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많은 시민사회단체, 개혁적인 사회집단들에게 이번 12월19일 선거에서 개혁세력의 승리를 위한 연대를 정중히 제안 드립니다. … ‘저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자, 한마디로 도와주십시오, 연대를 합시다’라고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10월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당사에서 가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한 대목. 선거를 70여 일 앞두고 있던 이날은 민주당 내 일부 의원들이 후보단일화협의회를 결성한 다음날이었다. 노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바닥을 치던 무렵에 나온 이 ‘공식 연대제의’는 시민사회단체 구성원들 사이에 회자되며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단체에서는 “지지율이 계속 저조하면 선거운동기간 전에 노무현 후보 지지를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부토의를 벌였다.

    #3 지난 12월23일 열린 참여연대 전체간사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전체간사회의란 주요 현안에 대한 참여연대의 입장을 결정하기 위해 실무 간사진이 모두 참여해 토론을 벌이는 자리.



    이날의 주제는 선거 이후 간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노무현 시대 참여연대의 운동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전체간사회의의 대체적인 기조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정권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약체 개혁 정권인 노무현 정부를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12월28일에는 주요 시민단체의 정책담당자들이 대선결과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비공식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성공회대 NGO학과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새 정부의 개혁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장시간의 격론을 거치고도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한 토론회였다.

    #4 “지난 수십년간 벌여온 시민운동의 축적이 없었다면 이번 당선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개혁과 국민통합을 이뤄낼 것이니 시민운동이 동참해주십시오… 김대중 정부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인색하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한 게 많은데, 나중에 고칠 수 있는 작은 문제점들만 가지고 너무 비판한 것 아닌가, 때로는 장독을 깨나 접시를 깨나 똑같이 꿀밤 한 대씩 때리는 방식의 ‘형식적 균형주의’가 억울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잘못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100점짜리는 못 되어도 60~70점 정도는 하겠습니다.”

    지난 1월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신년하례회에 대통령당선자로는 사상 처음으로 참석한 노무현 당선자의 인사말이다. 발언이 끝나자 신년하례회의 진행을 맡았던 박원순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 마이크를 받았다.

    “시민단체는 기본적으로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에 엄격한 잣대를 갖게 마련입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엄중한 책임은 집권여당에 있으니까요.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협력과 칭찬을 아끼지 않겠지만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 또한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정중한 요청’과 ‘정중한 거절’이 오고 간 이날 자리에 참석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반응은 다소 엇갈렸다. 노당선자의 참석을 적극적으로 환영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시민운동가들이 새해 덕담을 나누는 자리가 노당선자 위주로 흐른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활동가도 있었던 것. 한편 이날 노당선자의 이례적인 참석과 적극적인 ‘구애성 발언’을 두고 몇몇 신문에는 ‘시민단체의 권력화를 경계한다’는 내용의 논설이 실렸다.

    “말릴 순 없지만 안 가는 것이…”

    한해 사업을 준비하고 운동방향을 고민하는 1월, 시민단체들은 어느 때 보다 깊은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핵심은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볼 것이며,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12월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위원 명단이 엄청난 관심 속에 발표되면서 토론은 더욱 활발해졌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해온 전문가 및 교수들이 인수위에 일부 참여하는 것으로 확인되자 “시민단체의 국정참여가 NGO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비판사설과 칼럼이 일간지에 실렸다.

    시민운동진영이 새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 우선 시민단체 관련인사가 정부기관으로 이동하는 ‘인적 공유’와,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개혁과제를 시민단체가 제안하는 ‘어젠더 설정’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당선자 측 입장은 ‘다 받아주겠다’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당선자 측의 이러한 적극적인 제스처에 대해 시민단체의 공식적인 입장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 우선 인수위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에 대한 ‘과잉해석’부터 경계하는 분위기다.

    인수위 각 분과 간사와 위원들 중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인물은 일곱 명. 김병준 정무분과 간사(국민대 교수·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인하대 교수·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이은영 정무분과 위원(한국외대 교수·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 본부장), 정태인 경제1분과 위원(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정책전문가연대회의), 허성관 경제1분과 위원(동아대 교수·부산경실련 납세자운동본부장), 서동만 통일외교안보분과 위원(상지대 교수·전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장), 김영대 사회문화여성분과위원(개혁정당 사무총장·민주노총 부위원장) 등이다.

    이들의 인수위 참여에 대한 비판에 대해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인수위 각 분과 간사와 위원 중 시민운동가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김영대 위원 한 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상근 운동가가 아닌 ‘전문가 자문역’을 맡았던 사람들이라는 것.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조직을 대표할 만한 주요 임원이 아닌 사람, 특히 오래 전에 시민운동진영을 떠난 분들을 ‘시민단체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마디로 잘못된 우려라는 반박이다.

    그런가 하면 2월중에 구성될 새 정부에도 이들 전문가 그룹의 참여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간사들 사이에서 “모 인사도 물망에 올랐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지 않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의 공식입장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말릴 수는 없지만 맡고 있는 직책은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시민단체는 정관에 현직 임원의 정부산하 위원회 참여를 금지하고 있다. 참여연대의 경우는 지난 2001년 공동대표였던 김창국 국가인권위원장의 인선 당시에도 반대입장을 공식 표명한 바 있으며, 인수위가 “시민단체 인사들도 참여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는 ‘검찰인사위원회’에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박원순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무 상근자나 상징성이 있는 분들은 ‘새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 같은 분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라고 말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교수는 1월4일 인수위 관계자들이 자신을 방문한 것을 두고 설왕설래가 계속되자 “새 정부에서 공직을 맡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전언이다.

    ‘노정권 연대’냐 중립이냐 시민단체의 ‘정치적’ 고민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1월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신년하례회에 참석, 시민단체 원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방식이나 태도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시민단체들이 상근자 중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가 그룹을 ‘우리 사람이 아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오히려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고쳐 물어야 했다는 것.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이견으로 참여연대를 떠나기는 했지만 2년 이상 정책위원장을 맡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는가. 그동안 시민단체에서 이들 전문가 그룹의 역할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시민단체 전문가 그룹이 정부기관에 참여하는 것이 낯선 풍경은 아니다. 1994년에는 박세일 당시 경실련 정책위원장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임명된 바 있고,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에도 김태동 청와대경제수석,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등 이른바 ‘경실련 참여파’가 대거 기용됐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에 설립된 부패방지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에는 위원장은 물론 직원들도 적지않은 수가 시민단체 참여인사와 활동가로 충원됐다.

    이런 전례를 생각해볼 때 인수위 멤버에 시민단체 출신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도리어 “가능하다면 많이 갈수록 좋은 것 아니냐”는 것.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의 말을 들어보자.

    “외국의 경우에는 시민단체와 정부를 오가며 활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시민운동의 비판적 시선을 경험한 사람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장실무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봐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시민단체가 제시하는 어젠더를 개혁과제로 검토하는 부분에서도 인수위는 적극적이다. 인수위는 1월13일 경실련, 참여연대,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관련 시민단체를 초청해 ‘부정부패 근절과 재정개혁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이튿날에는 연대회의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어 1월15일에는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들이 인수위 환경분야 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인수위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배려’다.

    이러한 정책제안에 대해 나쁘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 시민운동진영 구성원들의 중론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개혁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검토해 온 것이 시민단체다 보니 ‘개혁정권’을 기치로 내건 노무현 정부 입장에서 머리를 빌릴 수 있는 곳은 시민단체 뿐이라는 분석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교과서적으로 따지면 정책과제를 설정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정당의 몫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이를 거의 도외시한 채 정략에 몰두했다. 그동안 이 기능을 대신 수행했던 것이 시민단체였다. 말하자면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했던 셈이다. 이는 개혁적국민정당이 대선연대가 제시했던 ‘100대 개혁과제’를 정책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안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대형 단체들은 ‘외국에는 없는 백화점식 운동을 한다’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사안별 판단” VS “개혁정권 사수”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주요 시민단체의 공식입장은 이러한 정책 과제들과 맞물려 있다.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중립’과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원칙을 유지하면서 사안별로 판단하겠다는 것. 자신들이 제시한 정책을 비롯해 지지할 만한 개혁과제에 대해서는 협력과 공조를 아끼지 않겠지만,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때는 과감히 비판하겠다는 입장이다.

    서형원 환경연합 정책기획실장은 “김대중 정부도 출범 초기에는 시민단체의 개혁과제에 대해 적극적이었고, 실제로 많은 부분을 반영했지만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시민단체가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제2의 건국’ 운동처럼 정부 주도로 시민단체를 동원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면 절대로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 단체들 간의 절대적인 공감대다.

    반면 노무현 정부에 대해 ‘중립’ 및 ‘사안별 대응’이라는 기본자세로 임하겠다는 원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의 비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민운동진영이 상황을 너무 순진하게 보고있다’는 것. 지금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던 1998년과는 많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한 참여연대 팀장급 실무 간사의 말이다.

    “노무현 정부가 사상 최약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공학’에 의해 탄생하지 않았다는 장점은 우군이 없다는 단점이기도 하다. 현재 상황대로라면 ‘가장 개혁적’이라는 정권의 성격은 강한 반발에 부딪히면 순식간에 무너져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

    시민단체의 목적이 무엇인가? 개혁 아닌가. 현 시점에서 개혁을 이끌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극적으로 노무현 정부를 ‘지켜내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의 JP처럼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보적인 시민단체 입장에선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 정부를 지지할 수 있다. 개혁이 정부의 의지부족이 아니라 반개혁세력의 저지로 좌절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정부에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는 원칙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지금 시민단체의 비판타깃은 정부가 아니라 반개혁 세력이어야 한다고 본다.”

    한편 녹색연합의 한 활동가는 사안별로 접근한다는 입장 자체가 시민단체의 활동폭을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으로 5년간은 편가르기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싸움이 격해지면 시민단체가 ‘정치적 중립’을 충분히 고려해 제시한 정책과제도 정부가 채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대세력의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시민단체가 이 반발에 대응하면 반대세력은 ‘시민단체는 홍위병’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다. 쉽게 말해 어젠더 설정 자체가 편싸움의 도구가 되는 상황이다. 사안별 접근이라는 원칙이 무의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정치가 발전되고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면서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약체 정권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노무현 정부만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 이를 마치 특별한 비상상황인 것처럼 판단하고 ‘약체정권 방어’를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이실장의 반박이다.

    그렇다면 ‘개혁정권 방어’와 ‘정치 참여’를 말하는 시민단체 구성원들은 어떤 실행방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개념과 수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거칠게 정리하자면, 정부의 개혁에 대한 지지표명, 이른바 ‘반개혁세력’과 싸우기 위한 운동과제 설정, 정부관련 위원회 및 내각에 대한 적극적 참여, 선거에서의 개혁후보지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성’은 폐기돼야 하는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고민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기간 내내 시민운동진영을 뜨겁게 달궈왔던 이슈 또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원칙은 시효가 다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었다. 대선연대의 캠페인성 활동방식을 두고 여러 단체들이 이견을 표출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지 ‘참여사회’ 1월호는 이와 관련해 ‘정치적 중립, 시민운동의 보신주의인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선협)와 경실련 공동대표를 지낸 손봉호 서울대 교수는 “시민단체의 특정후보 지지는 시민들의 반응을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며 ‘엄정 중립’을 강조한 반면,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교수들의 모임인 개혁과통합의정치를위한교수모임 상임공동대표를 맡은 바 있는 이종오 계명대 교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도 시민단체가 정치적 지향을 분명하게 밝히고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적극 참여’를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의 한 실무간사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허구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한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이든 자신의 목적과 입장이 있는 한 완벽한 객관이나 중립을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운동을 이끌어온 분들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1996년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 등 시민운동진영 주요 인사들의 총선출마나 2000년 총선연대를 둘러싼 ‘홍위병 논쟁’을 통해 시민운동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는지 지켜본 이들은 아무래도 선뜻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총선연대 활동의 합법성을 둘러싸고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분들끼리 공석에서 논쟁을 벌여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더욱이 대선은 정치세력간의 전면전이 아닌가.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맹렬한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중책을 맡은 이들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미 ‘선거자금 투명화’나 ‘공정선거 감시’ 같은 이슈들은 노사모의 등장과 국민경선 등 정치영역에서의 빠른 변화에 의해 낡은 것이 돼버렸다. 대선연대가 총선연대와 달리 뚜렷한 성과 없이 마무리된 것은 시민운동진영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에 발이 묶여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까닭이다. 시민단체가 갖고있는 개혁에 대한 비전에 보다 가까운 후보를 선택하고 지지하는 식의 적극적인 운동이 필요했다.”

    반면 박원순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의 견해는 다르다. 무엇보다 국민 정서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기대하는 역할은 제3자적 감시자, 객관적 비판자다. 만약 시민단체가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정부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그 시민단체를 불신하거나 백안시할 것이다. 그럼 그들에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을 뿐더러 시민운동의 사회적 공신력도 크게 떨어진다. 이러한 현실은 누구보다 현장 활동가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만약 노무현 정부의 개혁정책이 실패하거나 김대중 정부처럼 부패로 얼룩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권은 유한하지만 시민운동은 영원하다. 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적 중립성을 둘러싼 내부논란의 수위는 단체별로 조금씩 편차를 보인다. 김영삼 정부시절 개혁신당 창당 및 연대 등으로 정치참여를 추진하다 좌절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경실련은 이 문제에서 비교적 확고한 입장이다. 어떠한 경우든 이 원칙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으리라는 것. 경실련은 상근 간사들까지 정당 가입을 금지한다고 정관에 명시하고 있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엄정한 정치적 중립은 경실련 초기부터 명확히 견지해온 입장이다. 다른 단체들이 1980년대 재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했다면 경실련은 ‘전문가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참여연대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공식적인 입장은 경실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내부에서 ‘적극 개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비교적 세를 얻고 있는 것. 이태호 정책실장은 기자에게 “‘적극 참여’를 주장하는 간사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단언했지만 또 다른 실무간사는 “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3분의 1은 될 것”이라고 추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단체에 가입할 정도의 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적 입장도 분명하다. 경실련 회원 중에는 한나라당 지지자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참여연대 회원들은 상당수가 노사모 혹은 민노당 지지자와 겹친다. 참여연대가 노무현 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해도 반발할 회원은 10%가 안 될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별로 잃을 것이 없는 것이다.”

    경실련과 달리 참여연대는 운영위원과 집행위원, 사무처장 등 ‘지도급 인사’의 정당 가입만 금지되어 있다. 실제로 실무 간사들 중 일부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있는 상태. 극소수지만 대선기간 노사모에 후원금을 낸 이들도 있다는 전언이다. 단지 참여연대 내부에서 이를 공개하거나 간사직함을 걸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제한하고 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방문한 회원이나 다른 구성원에게 특정정당 지지발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정치적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적극 개입’을 주장하는 논리의 또 다른 근거는 ‘머뭇거릴 경우 개혁의 헤게모니를 놓칠 수 있다’는 상황판단이다. 앞에서 말한 참여연대의 팀장급 실무간사의 말이다.

    “정부가 참여연대보다 더 진보적이면 어떻게 되나. 지금처럼 ‘중립’에 발이 묶여 있으면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지금까지 시민단체는 ‘원래 되어야 하는데 안 되는 것, 보편 타당한 문제’를 주로 제기해왔다. 부패방지, 검찰개혁, 상속세 완전포괄주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과제들은 이제 정부가 추진한다. 이미 시민운동을 지지하던 국민들의 상당수가 시민단체에 보내주었던 성원을 노무현 정부에게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더 진보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참여연대가 서 있는 이념적 바탕과 괴리가 있다. 게다가 그 지점에는 이미 민주노동당이 있지 않은가. 민노당도 이번 대선을 통해 ‘제도권 정당’으로 발돋움했다고 봐야 한다. 이제는 ‘중립’에 연연할 경우 오히려 국민의 지지가 떠날 수도 있는 시기다.

    참여연대가 회원들의 가장 큰 비판을 받았을 때는 ‘홍위병 논쟁’이 불거졌던 총선연대 활동 때가 아니다. 그때는 회원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오히려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싸고 참여연대가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을 때 비판이 폭주했다. 왜 DJ정부의 언론개혁에 동참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시민단체가 회원들의 뜻으로 움직인다는 것만 분명히 하면 참여연대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답은 분명해진다.”

    6·13 지방선거의 교훈

    가장 적극적인 형태로 정치 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지역시민단체들. 단순한 감시활동을 벗어나 시민단체의 어젠더를 관철할 수 있는 인물이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견해다. 지난해에는 6·13 지방선거를 위해 아예 ‘시민단체 정당’을 창당하자는 논의가 폭 넓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진보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것이 ‘목적달성’을 위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환경운동연합 등 몇몇 단체들은 ‘자치위원회’를 조직해 지방선거에 후보를 내 원내진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 지역 환경연합 관계자의 말이다.

    “환경연합의 ‘후보전략’에 대해 이른바 시민운동의 ‘어른들’은 걱정이 대단했다. 이석연 전 경실련 사무총장은 ‘순수성의 훼손’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비판했지만, 환경연합이 이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물론 지방정치와 중앙정치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치에 뛰어들면 시민단체는 망한다’ ‘정치는 멀리할수록 좋은 불결한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노무현 정부를 맞이하면서 시민단체도 중요한 국면을 맞고 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는 지난 대선을 거치며 이루어진 한국 정치 상황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는 설명이다. 정당구조가 개혁되고 노사모 같은 자발적 정치단체가 힘을 얻는 상황에서 시민운동진영 또한 폭넓은 변화를 요구받게 되리라는 것이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분석이다.

    “지금까지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하며 성장해온 시민단체들은 앞으로 정치개혁을 통해 정당이 제대로 정책기능을 수행하게 되면 운동방식을 변경할 수 밖에 없다. 이념정당인 민노당의 출현도 위협적일 뿐더러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의 개혁도 결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시민단체에 참여하던 전문가 그룹이 미국이나 유럽처럼 정당의 정책연구기관으로 흡수된다. 인적인 인프라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시민단체들이 누려왔던 영향력은 급속히 퇴조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강력한 정부가 사라지는 흐름도 시민단체의 위상을 위협한다. 지금까지 강한 시민단체가 필요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정부권력이 지나치게 강해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기능이 조정자 역할로 축소되면 시민운동의 위치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민단체는 앞으로 환골탈태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 중심의 정책설정 대신 미국의 NGO들처럼 활동가 중심의 ‘감시’로 방향을 잡는다거나, 완전히 지역에 밀착하는 풀뿌리 조직을 추구하거나, 혹은 자신의 구체적인 영역을 특화하는 단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그 방향으로 가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장윤선 ‘참여사회’ 편집장은 ‘중립’과 ‘개입’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시민운동진영이 처한 이 위기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향후 시민운동진영의 방향은 물론 존폐까지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 이 논란이 과연 어떤 결론을 낼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다소 엇갈린다. 박원순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시민단체들이 모두 똑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다양한 목적과 활동방식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있는 것이지, 이들이 한꺼번에 결정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요즘에는 다른 단체에 연대사업을 제안해도 꼼꼼히 살펴보고 참여여부를 결정한다. 옛날처럼 몰려다니는 식의 운동이 아니다.

    참여연대나 경실련 같은 규모 있는 단체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시민사회가 단체들의 ‘중립성 폐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단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각자의 자유다.”

    개혁 반발 여부가 결정 가른다

    반면 ‘적극 개입파’에 가까운 견해를 갖고 있는 참여연대의 한 간사는 노무현 당선자와 인수위를 둘러싼 상황 변화에 따라 생각보다 빠른 시일 안에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다며 3월 열리는 참여연대의 9차 정기총회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원래 1~2월은 한해 사업을 계획하고 집중할 사안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점이다. 이번에는 이 기간이 노무현 정부의 출범준비시기와 겹쳤다. 시민단체들은 정부와의 관계설정에 대해 내부논의를 하면서, 인수위 활동과 그에 대한 재벌·관료사회·보수언론 등의 반응을 한두 달 더 지켜볼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앞으로 5년이 어떻게 전개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흐름은 일단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라는 분위기다. 내부의 이견도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잠복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개혁이 곳곳에서 좌초하는 분위기라면 현실적인 한계를 각오하고서라도 ‘분명한 동참’ 입장을 드러내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는 올 한해 사업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주요 이슈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개혁정권 사수’를 염두에 둔 활동, 예를 들면 ‘언론개혁운동’처럼 ‘선명한’ 사업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도 있다. 참여연대는 정기총회에서 사업계획을 확정한다. 참여연대가 ‘개입적 성격’이 강한 사업을 채택하면 시민운동진영 전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이것이 3월15일 열리는 참여연대의 총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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