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가운데 ‘유토피아 블루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스위스의 10대 소년이 공부에 지쳐 유토피아를 노래하는 밴드를 만들려다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이야기다. 상영이 끝난 뒤 감독은 영화가 실화를 근거로 한 것이며, 실제 주인공 소년은 자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를 자살로 끝맺지 않았다. 소년의 노래처럼 그래도 아직 유토피아는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거꾸로 매달려 본 세상
그런 아이들이 문제아일까? 그렇다면 나도 문제아였다. 나도 10대에 정신병원에 끌려간 적이 있다. 30여 년 전, 빈부갈등을 욕하는 글을 썼다고 해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그때 잘못되었다면 나는 정신병자로 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땐 나 같은 학생은 예외에 속했다. 지금은 공부나 왕따 등으로 인해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정말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강요당해 죽어가고 있다. 죽지 못해 어른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리라.
몇 달 전 아나키즘학회에서 권력도, 자본도, 종교도 없는 세상을 노래한 존 레논의 ‘이매진’이라는 노래를 소개했더니 한 기자가 “그런 내용인 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어디 그 노래만 그런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이었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도 사실은 유토피아를 노래한 것이다. 어디 노래만 그런가. 산더미 같은 시와 소설, 책들이 있지 않은가. 유토피아가 죽었다고? 천만에! 살기 힘든 세상에, 더욱 더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 어떻게 유토피아를 향한 외침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영화 ‘유토피아 블루스’는 주인공이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해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거꾸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인공은 현실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까지 거꾸로 매달린다. 영화관을 나와 다시 역동적인 인파에 파묻히자 그 인파 모두 어쩌면 나처럼 좋은 영화에 굶주린 불쌍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의 며칠이 나나 그들에겐 어렵게 찾은 유토피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토피아가 정말 있다면 누구나 찾고 싶으리라. 그러나 중국의 유토피아로 불린 선경(仙境) ‘무릉도원’은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일찍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었으나, 그저 희귀식물이 많은 큰 숲일 뿐이어선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부근의 장가계는 이름난 관광지로 알려져 있으나, 무릉도원은 그렇지도 않다. 사실 도연명(陶淵明)이 노래한 무릉도원도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점 외에는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지금 그곳은 아무런 특징 없는 중국의 시골마을일 뿐이다. 그래서 관광지가 되지 못한 것일 게다. 물론 관광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국가 유토피아’의 낡은 세계
도연명이 노래한 무릉도원이 유토피아일 수 있음은, 뒤에 왕안석(王安石)이 노래했듯 지배자의 권력이 미치지 않고 계급 없는 자급자족의 시골로 평화롭고 세금이 없었던 때문이다. 이는 중국 민중의 최대 문제가 세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도연명이 산 4세기 전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없는 곳이 아닌가.
물론 도연명의 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기보다 마음속에 있는 유심(遊心) 또는 아예 무심(無心)을 찬양한 것일 터이므로 세금 없는 유토피아 운운하는 것은 유심 또는 무심의 시인들에게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무릉도원은 차라리 놀이토피아 또는 놀이공원일 것이다. 영화 ‘넘버 쓰리’의 조연 ‘랭보’처럼. 지금 그런 류의 ‘토피아’들은 너무나 많다. 머니토피아, 쇼핑토피아, 섹스토피아, 출세토피아, 권력토피아, 폭력토피아 등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