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의 반론

  • 글: 조영철 국회사무처 예산분석관·경제학박사 yccho@assembly.go.kr

    입력2003-02-17 11:3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사람들은 과연 합리적일까. 금융세계화는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
    • 지난 2001년 노벨결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부총재와 2002년 수상자인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네만.
    •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날이 갈수록 위력을 더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노벨상 수상자의 공통점은 신자유주의의 기본전제를 부정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시장만능’을 비판하는 이들이 유럽에서 각광 받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월스트리트는 과연 세계 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 믿을 만한 시스템인가.

    현대경제학은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모두 인정한다. 시장도 불완전하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부의 경제 개입도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심각한 문제인지, 이를 해결하려면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를 최대한 활용하되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총론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평화는 거기까지다. 금융자유화, 주주가치경영,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제도, 민영화, 규제완화, 조세 정책 등 세부적인 사항에 들어가면 총론에 합의했던 경제학자들은 어느새 ‘시장 대 국가’라는 두 패거리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치한다. 이만큼 학문적 전선이 뚜렷한 학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를 시장근본주의라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실패의 원인을 무턱대고 정부의 오류에서 찾는 반면 시장의 실패는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경제규제를 풀고 자유화정책을 실시할 때 생기는 많은 부작용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호들갑 떨지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야”라는 태도로 일축해버리곤 한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대립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까. ‘완전경쟁시장’이란 현실경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 틀일 뿐인데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교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신자유주의는 틀렸다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 행태경제학 : 사람들은 생각보다 멍청하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 중 하나는 ‘효율적 자본시장이론’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학 교과서가 전제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완벽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거래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최적 상태가 자연스레 도출되는 시장’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자본시장이라는 얘기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품시장은 독과점이 생길 수 있지만 증권시장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으니 거의 완전경쟁적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최대한 자유화를 시켜주면 시장이 알아서 자금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자본시장에서 손을 떼라’는 말의 바탕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있다. 1970~80년대 신자유주의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멍청한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는 신자유주의의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까닭이다. 자유화에 대한 이런 믿음은 80년대 금융자유화를 신호탄으로 해 기업의 구조재편이나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신자유주의 물결의 확산을 불러온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부가 손만 떼면 이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과연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 주식을 사고 팔까. 이 물음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행태경제학’이다.

    행태경제학은 투자자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전제를 비판함으로써 자본시장 또한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행태경제학의 이런 생각은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나드 케인즈에서 비롯한 것이다. 케인즈는 인간이 합리적이지만은 않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에는 탐욕, 무지, 공포, 모방 등이 섞여 있으며 이런 본성이 시장의 불확실성과 결합하는 경우 시장은 심각한 교란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케인즈는 금융시장이 다른 시장보다 훨씬 취약해 사소한 징후에도 금융의 기초가 무너지고 다른 부문에까지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런 주장은 그럴 것이라는 직관적 판단이었을 뿐 실증적인 근거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행태경제학이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몬에 의해서였다. 사이몬은 “인간이 합리적 계산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다고 보는 것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올해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 중 한 사람인 대니얼 카네만이 바로 사이먼의 주장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사람들의 인식과 선택에 많은 편향과 오류, 비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 인물이다. 그의 실험연구를 살펴보자.

    당신에게는 2000만원이 있는데, 다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500만원을 현금으로 받거나 아니면 1000만원을 딸 확률이 50%인 복권을 받거나.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3000만원을 갖고 있다. 1000만원을 잃을 확률이 50%인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무조건 500만원을 뺏겨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대니얼 카네만

    간단한 기대값 공식을 떠올려 계산해보면 위의 두 경우의 모든 선택은 똑같이 2500만원이라는 기대소득을 갖는다. 다시 말해 무엇을 선택하든 경제적 합리성 기준에서 보면 똑 같은 게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전자와 후자의 게임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카네만의 실험에 따르면 전자처럼 기대소득이 증가하는 ‘상향 게임’에서는 확실한 현금 500만원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반면 후자의 ‘하향 게임’에서는 돈을 잃을 확률이 50%의 게임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생각해보자. 동전던지기에서 앞-앞-앞-앞-앞-뒤가 나올 가능성과 앞-뒤-앞-뒤-뒤-앞이 나올 가능성 중 어느 것이 클 것 같은가. 역시 실험에 따르면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양자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재미있는 것은 앞면이 계속 나왔을 때 이제 뒷면이 나올 차례라고 믿는 이런 식의 오류는 일반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험이 많은 심리학자들의 통계직관력을 검토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흔히 나타났다. 이런 연구들은 상황이 어떻게 짜여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지와 반응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은 합리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감성과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카네만의 연구를 통해 행태경제학은 투자자가 합리적이라는 효율적 자본시장의 기본 전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됐다. 카네만이 인지심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은 행태경제학에 끼친 이런 기여 때문이다. 행태경제학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 인물로는 언젠가는 노벨상을 수상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버드대학의 안드레이 쉴레이퍼 교수가 있다.

    MBA도 별 수 없다

    증권시장에서 기업의 미래 수익성을 결정하는 기초조건을 따져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정서에 많이 의존하는 투자자를 ‘잡음 거래자(noise traders)’라고 한다. 효율적 자본시장론도 이런 비합리적인 잡음 거래자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비합리적 투자자의 오류나 실수를 이용하여 차익을 내려고 하는 합리적 투자자가 있기 때문에 잡음거래자의 행동은 상쇄된다는 것이 효율적 자본시장론자들의 반론이다. 개인투자자가 실수나 오류를 범해도 합리적 기관투자가가 이를 교정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카네만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인이든 전문가든 인지 오류와 판단 편향의 문제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경제학박사나 MBA출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기관투자가가 합리적일 거라고 기대하지만, 펀드매니저들은 개인투자자들보다 정보우위에 있을 뿐 3개월, 6개월마다 투자수익률을 평가받고 경쟁상대자와 비교 당하는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히려 인지 오류와 판단 편향을 나타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카네만은 말한다.

    케인즈가 말했듯이 주식시장의 게임은 ‘어느 기업이 가장 좋은 지를 고르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기업을 알아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투자자의 행동을 뒤쫓는 ‘대세 따르기 투자’가 선호된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이 비슷한 유형의 인지 오류와 판단 편향을 보인다면 잡음 거래자들의 행동은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증폭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투자자들은 다수 여론에 편승할 때 안심하기 때문에 군집현상이 쉽게 나타난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기초조건을 분석해 투자하는 것보다 다른 투자자의 행동을 주시하는 것이 비용측면에 있어서도 훨씬 싸고 편하다. 결국 아무리 합리적인 투자자라도 독자적인 분석을 통해 투자를 결정하기 보다 오히려 추세를 따라 잡음 거래자들의 대세 따르기를 부추기는 것이 더 유리한 경우가 생긴다. 합리적 투자자가 악화(惡貨)를 구축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투자자들은 과거 자료보다 최근 자료를 더 중시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최근의 경제 현상이 장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최근 현상을 근거로 미래의 장기 추세를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90년대 미국의 호황을 가리켜 ‘정보기술산업의 투자 붐과 증시 거품을 갖고 경기변동은 사라졌으며 이전 역사와는 달리 장기호황이 지속될 것’이라 했던 허황된 전망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

    기존의 자기 생각과 배치되는 증거와 일치하는 증거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증거를 훨씬 중시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뉴스가 나와도 견해 수정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견해와 반대되는 뉴스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면 어느 순간 투자자들은 기존의 자기 견해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고 투자 방향도 급속히 변한다. 증시가 늘상 변덕스럽게 요동치고 수많은 거품과 폭락을 만들어 내는 것은 행태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많은 논리적 약점을 갖고 있는 ‘신경제론’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 조절학파 : ‘신경제(New Economy)’는 전혀 새롭지 않다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미셸 아글리에타

    행태경제학이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시장만능론을 비판해왔다면 이제 소개할 사람들은 시장만능론이 힘을 얻게 된 배경을 분석해 뿌리를 캐고 있는 이들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신자유주의가 오늘날처럼 세계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 것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기간 중 추진한 시장중심의 개혁이 성과를 낸 덕분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으로 불린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론과 맞서는 중심축은 당연히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영미식 자본주의가 90년대 호황을 누리고 신경제론이 판을 치고 있을 때 묵묵히 영미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논파한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미국 산업경쟁력의 한계를 비판하는 제도주의 경제학자(시장도 하나의 제도이며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장과 연계되어 있는 다른 사회제도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파)로 하버드대학의 윌리엄 라조닉 교수와 프랑스의 인시드(INSEAD) 경영대학원 교수인 매리 오설리번이 그 대표적 학자다.

    또 다른 부류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금융주도체제라는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조절이론(국민경제 내부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완화하고 노사관계, 금융, 기업지배구조 등 각 경제제도들이 잘 연계되도록 조절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경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발전할 수 있다는 이론)학파인데, 파리 10대학 교수이면서 프랑스 총리 직속의 경제분석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미셸 아글리에타가 그 중심 인물이다.

    이들 두 부류의 학자들은 학문적 배경이 전혀 다르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신자유주의 물결의 배후에는 세계 금융중심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City of London)의 이해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결국 뉴딜 개혁으로 해체된 금융주도의 시대를 다시 열려하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이 말의 뜻을 살피기 위해 잠시 20세기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20세기 미국 자본주의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기점을 통해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기점은 대공황 및 뉴딜개혁. 이를 기점으로 뉴딜 전과 뉴딜 후로 구분한다. 또 하나의 기점은 1970~80년대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시장자유화다. 뉴딜 후 반세기 가까이 유지되던 세계경제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렇게 나뉜 세 시기를 편의상 뉴딜 전, 뉴딜 후, 신자유주의 시대로 부르기로 하자.

    뉴딜 이전의 시대는 한마디로 말해 모건은행(J. P. Morgan & Co.)으로 대표되는 금융자본이 경제를 사적으로 지배하던 시기였다. 19세기말에는 철도산업에서 투자 붐이 발생해 엄청난 과잉중복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당시 발행된 회사채와 주식의 대부분은 철도회사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잉중복투자로 위기에 처한 철도회사들은 카르텔을 통해 가격경쟁을 피하려고 했지만 1890년 셔먼법 제정으로 카르텔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탈출구는 합병밖에 없었다. 더욱이 1893년 불황이 닥치자 파산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속출했고 합병 물결은 더욱 강화되었다. 수평적 합병이 이뤄지자 기존 소유자의 지분율은 떨어진 대신 회사의 경영은 합병을 주도한 투자은행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금융이 지배하던 시대

    1887∼1904년간 1차 합병물결 속에서 합병과 파산관리를 주도하면서 기업들을 구조재편했던 이들은 기업의 소유주가 아니라 금융회사들이었다. 모건은 채권자들을 설득해 회사채를 우선주로 전환시켜 이자비용을 삭감하고 의결권신탁(모건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집단들의 주식보유를 합쳐서 의결권을 장악하는 방식), 피라미드소유, 임원파견과 같은 금융트러스트(money trust)를 활용해 기업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철도노선 통합 등 구조재편을 주도했다. 미국 철강시장의 50%를 차지한 US철강도 모건이 주도한 합병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1900년 미국 40대기업 중 경영자가 소유하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기업 비중은 23.8%에 불과한 반면 오히려 금융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기업의 비중은 이를 능가하는 31.3%에 달했다.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뉴딜 이전 금융자본 트러스트의 권력은 정부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상황을 풍자한 신문 만평.

    1912년 5대은행(J. P. Morgan & Co., First National Bank, National City Bank, Guaranty Trust Co., Bankers Trust)이 지배하는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의 자산규모가 미국 GNP의 56%에 달하자 “금융자본이 지나치게 많은 경제력을 갖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금융회사들이 금융트러스트를 통해 담합함으로써 법을 뛰어넘는 독점적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중소기업인, 중소상인, 농민과 진보주의자들 등이 모여 ‘반독점’의 정치적 연대를 결성해 미국정부가 독점을 규제하고 경쟁정책을 강화하도록 압박했다.

    1913년 미국이 연방준비시스템을 만들기 전에는 J. P. 모건이 중앙은행의 최후 대부자 역할을 수행해 금융위기를 수습할 정도였으니 모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금융자본의 권력이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미국 의회가 1914년 클레이튼법을 제정해 경쟁기업의 인수, 경쟁기업들간의 임원겸임을 금지하자 금융자본의 금융트러스트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정부는 금융안정성 확립을 위해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하여 투자은행업무와 상업은행업무를 분리함으로써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1938년 제정된 챈들러법은 투자은행이 공개기업의 구조재편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투자은행이 기업통제권을 획득하는 주요 통로를 아예 막아버렸다.

    클레이튼법과 일련의 뉴딜 법으로 금융자본이 사적으로 산업전체를 지배하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공적인 규제가 이뤄지는 관리금융체제가 확립되었다. 뉴딜 이후 경제가 회복되면서, 미국산업은 경쟁적 구조로 재편되어갔고 대기업 경영자들은 금융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완벽한 재량권을 확보하게 됐다. 흔히들 뉴딜정책은 노사관계나 복지제도를 진보적으로 바꾼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는 한 측면에 불과하다. 뉴딜은 모건으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의 경제권력을 종식시키는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조절학파 경제학자들은 금융지배가 종식된 뉴딜 이후를 ‘포드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뉴딜 개혁으로 금융자본이 대기업을 소유·지배하는 수직적 관계는 사라지고 대신 거리두기 관계로 변했다. 소유분산과 소유·경영의 분리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제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은 기업 지배자가 아니라 포트폴리오 투자자로 격하되었고 분산된 주주는 기업경영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뉴딜 이후 노동운동은 확산됐고 전문경영자의 재량권도 강화됐다. 한마디로 요약해 금융자본의 영향력은 약화된 반면 경영자와 노조의 힘은 강해졌기 때문에 경제의 중심 축은 자연히 노사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경쟁기업들보다 잘 나가는 한 노동자는 생산성을 높인 만큼 임금이 올랐고 주가상승을 통해 주주의 이익도 보장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미국이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경쟁우위를 상실한 60년대 후반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이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결국 미국의 대립적 노사관계가 노동자의 숙련과 참여를 중시하는 독일·일본의 협력적 노사관계 보다 경쟁력에서 열등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월스트리트의 ‘권좌 복귀’

    미국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자 달러가 미국 국내보다 나라 밖 금융시장에 쌓이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유러달러시장이다. 60년대부터 미국 다국적기업과 금융기관들이 관리금융체제의 금융규제와 조세를 피해 자본을 런던이나 도꾜, 프랑크푸르트 등 역외로 유출하면서 형성된 이 시장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심화되면서 급팽창했다.

    이렇게 되자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도 흔들리게 되었다. 달러의 신인도가 추락하면서 달러와 각국통화의 환율을 일정하게 묶어두었던 고정환율제 또한 흔들렸고, 이에 근거했던 브레튼우즈 체제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실질금리는 거의 영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고 불확실성이 급격히 확대되어, 투자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뉴딜 이후 정부의 금융규제에 순응해왔던 월스트리트는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제 금융자본은 “정부는 시장에서 손을 떼라”고 외치며 통화주의정책과 금리상승, 금융자유화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유러달러시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시장이 급속히 확대된다는 것은 금융세계화가 강화되면서 미국 정부의 통화신용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대규모 유동자본은 국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움직이며 세계 각국에서 금융자본과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경제환경을 조성해나갔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 또한 기존의 정책을 바꾸며 규제를 완화할 수 밖에 없었다. 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가 고달러·고금리를 통해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통화주의 긴축정책을 채택하게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것은 뉴딜 이후 월스트리트의 규제자였던 미국 정부가 월스트리트의 지원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금융자본의 투기활동이 가장 자유롭게 보장되는 나라가 되었다. 급팽창한 유동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국가간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뉴딜 이전 시대와 같이 금융이 주도하는 시대가 재현된 것이다. 이름은 신자유주의지만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국가 간의 경계가 무너져 유동적 금융자본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조절학파는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이란 미국경제가 추락하면서 발언권이 강화된 월스트리트 주도로 뉴딜 이전의 금융 시대가 재현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하는 특권을 보유한 미국이 국제금융중심지 월스트리트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미국 이익을 최대화하는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의도는 또 하나의 국제금융중심지 시티를 보유한 영국의 이해와도 맞아 떨어졌다. 과거에는 GM의 이익이 미국의 이익이었다면, 이제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이 곧 미국의 이익인 시대가 된 것이다.

    거품은 돈으로 만들어진다

    미국이 90년대 누린 장기호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분석이 존재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많은 신경제론자들은 미국이 90년대 장기 호황을 누린 이유를 ‘정보기술산업의 생산성 향상’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셸 아글리에타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90년대 미국의 장기호황 또한 단순히 금융주도체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지를 잠시 따라가보자.

    레이건 행정부가 고달러·고금리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외국에 나가있던 막대한 해외자본이 미국으로 유입되어 증시에 투자되었다. 이에 따라 80년대 이후 미국의 가계와 뮤추얼펀드,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급증했고 주식시장의 수요는 엄청난 규모로 증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거래와 가격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정작 주식공급물량 자체는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가상승으로 인해 유상증자와 기업공개가 많아졌지만 미국 기업들의 주식발행을 통한 순자금조달(net source of finance)은 마이너스였다. 다시 말해 미국 주식시장 전체로 볼 때 기업공개나 유상증자에 의한 자금조달보다 자사주와 타사주 매입 등을 통해 기업잉여가 밖으로 유출된 규모가 더 컸다. 비금융기업이 매입한 주식이 발행된 주식보다 더 많았던 셈이다. 따라서 기업잉여의 상당부분이 실물부분에 투자되지 않고 M&A와 자사주 주가관리를 위해 기존 금융자산에 투자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주식공급물량이 별로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량은 그리 증가하지 않는데 돈은 계속 모여들고 다시 투자되니 주가가 계속 상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90년대 미국의 금융주도체제는 돈 놓고 돈 먹기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안정적으로 유효수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포드주의 체제처럼 생산성 향상→근로소득 증대→유효수요 창출이라는 긍정적인 축적기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분배율이 급속히 악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소비가 늘어난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식 값이 올랐기 때문에, 혹은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지극히 불안정한 주식시장 전망에 근거해 아직 주머니에 들어오지도 않은 돈을 미리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이 주가가 오를 것이라 믿고 많은 돈을 쓰자 사상 최고치의 경상수지 적자가 고달러·고주가에 의한 자본수지 흑자로 상쇄되는 현상이 계속됐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경제 호황은 거품붕괴에 따른 긴축의 악순환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불안정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적대적 M&A, 차입매수 등 8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재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경제학자로 마이클 젠센이 있다. 젠센은 금융을 규제한 뉴딜법이 대공황이란 혼란시기에 나온 포퓰리즘 정책로 역사적 오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 금융자유화가 뉴딜의 포퓰리즘 오류를 시정하는 역사적 진보라고 주장했다. 물론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뉴딜이 역사적 오류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뉴딜이 금융지배 시대를 종식시켰다면 80년대 이후의 금융자유화가 뉴딜이 종식시킨 금융주도의 시대를 다시 여는 것이란 판단은 정확한 것이다.

    ◇ 폴 크루그만 : 투자자가 중요해지자 소득분배가 악화됐다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폴 크루그만

    60년대 후반 미국 산업이 경쟁력을 잃게 되자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주주와 금융자본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포드주의의 중심 축인 노사관계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적대적 M&A가 확산되면서 경영자들은 주주자본주의 원리에 신속하게 적응했고 주가극대화, 자본수익성 극대화를 경영의 최고 목표로 설정하는 변신을 했다. 즉 단기 주가극대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기업의 경영자들은 적대적 M&A로 경영권을 박탈당했고, 스톡옵션제도 도입으로 경영자의 보수가 주가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경영자들은 오로지 ‘짧은 시간 안에 주가를 높이 끌어올려 스톡옵션으로 큰 몫을 챙기는 것’을 기업경영의 목표로 삼았다.

    기업 인수자들은 기업을 매수해 구조재편을 한 다음 주가가 오르면 팔아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기업 인수자들은 R&D투자, 노사관계 안정과 노동자 숙련향상 같은 장기적인 경쟁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감량경영을 추진하고, R&D투자 같은 무형자산투자나 임금을 삭감하거나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해 빠른 시간 안에 기업수익을 높일 수 있는 단기 전략을 중시했다. 기업 인수자는 포드주의 시대에 확보한 노동자 권리를 빼앗는 구조조정을 실시함으로써 자본이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전략을 추구했다.

    1990년대 초 적대적 M&A를 어렵게 하는 주법(州法) 개정이 많이 이루어졌고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전략이 개발·확산되면서 적대적 M&A의 물결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경영진은 과거처럼 생산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산업전문가들이 아니라 월스트리트와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MBA출신 금융·재무 전문가들로 채워졌다. 스톡옵션제도의 일반화로 경영자는 주주와 다름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주주의 이익을 위해 회사를 경영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재편은 일정정도 노동권을 소홀히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강력했던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이 때문이다. 1970년 100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노동자의 39배를 벌었는데 1999년에는 1000배를 벌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 국부의 대부분을 극소수의 갑부들이 좌지우지하던 뉴딜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인 폴 크루그만은 뉴딜정책, 특히 2차대전 이후 상위계층의 소득비중이 급락하면서 미국이 중산층 사회가 되었으며 1970년대까지는 소득격차가 계속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소득격차는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했다. 크루그만은 그 이유를 기업 문화의 변화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노사관계를 중시했던 경영자자본주의가 투자자와 금융이 주도하는 투자자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로 변하면서 소득분배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기업의 이해관계자란 노동자, 경영자, 그리고 채권자나 주주 같은 투자자들이다. 금융자본은 바로 투자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포드주의 시대에는 노동자가 기업을 구성하는 핵심 관계자였지만 안티 뉴딜의 금융주도시대에는 노동자가 배제되며 사회는 크루그만이 말하는 뉴딜 이전의 ‘위대한 겟츠비’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 셈이다.

    시장의 실패 인정해야 경제가 산다

    윌리엄 라조닉

    신자유주의 진영의 경제학자들은 보통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비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자본주의란 게 어차피 인센티브 효과에 의존하는 건데 평등만 강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경제의 효율이란 게 이들의 답변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시장 중심의 영미식 자본주의는 효율적인가? 제도주의 학파의 라조닉과 오설리반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들은 90년대 미국 호황의 많은 부분이 금융거품에 기인한 것일 뿐 아니라 실물경제의 생산성 향상도 신경제론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작다고 보았다.

    금융의 본질적 기능은 어느 기업이 투자할 만한 좋은 기업인지를 선별하고 투자한 기업이 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선별·감시란 결국 기업의 미래 수익성을 예측하는 것인데, 여기엔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 투자자와 기업이 갖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서로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투자자는 기업의 핵심역량에 관한 정보가 있어야 수익성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데, 이런 고급정보는 경쟁기업에 넘어가는 경우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투자자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기업의 핵심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신뢰할 수 있는 몇몇 투자자들만이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둘째, 투자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기 대신 기업을 감시해주기를 바란다. 한 투자자가 많은 감시비용을 들여서 경영오류를 찾아내 기업효율이 개선되었다고 하자. 이 때 그 사람은 감시비용을 모두 부담하지만 기업 효율 개선으로 발생한 이익은 모든 투자자들이 나누어 갖는다. 이처럼 감시투자는 일종의 공공재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다른 사람의 감시에 무임승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는 감시와 그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장기적 관점에서 상당한 비중의 투자를 하고 기업 감시비용을 적극적으로 부담하는 투자자를 적극적 투자자라고 한다. 적극적 투자자는 기업과의 이해관계가 깊기 때문에 기업도 이들에겐 기업의 핵심적 비밀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적극적 투자자가 있어야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가능해지고 금융의 감시·선별도 제대로 될 수 있다.

    그러나 거리두기 관계에 있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투자가들은 적극적 투자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공재 성격의 감시투자 비용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든다. 20세기 초 모건은 유동성을 희생하면서 기업지배를 위해 상당한 지분을 장기 보유하는 적극적 투자자였다. 하지만 지금 금융자본은 기본적으로 유동성을 선호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감시비용을 부담하려 하기보다는 불길한 징조가 보이면 신속히 떠나기 위해 기업과 적당히 거리를 둔다.

    미국처럼 자본시장중심의 경제에서는 증권 애널리스트들의 감시 기능도 중요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기업이 공개한 정보에 기초해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또 애널리스트는 증권회사에 소속된 몸이기 때문에 주식거래가 활성화되고 인수한 증권이 잘 팔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정적인 평가로 거래가 급감하면 증권회사도 손해가 아닌가. 따라서 애널리스트들의 감시 기능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결국 미국식 금융시스템에서는 회사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생각하는 전략이 발붙이기 힘들다. 그러한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발생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윤을 증가시킨다는 정보를 경영자가 분산된 외부주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주식값은 기업의 단기실적에 따라 요동을 치고, 경영자는 장기적 투자수익을 극대화하기보다는 단기수익 극대화에 치중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화사와 경영자는 ‘어떤 돈을 어디에 써야 장기적으로 회사에 가장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헤맬 수 밖에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안티뉴딜의 금융주도체제를 만들어냈다. 이제 기업의 목표는 주가 극대화이고, 경제의 중심은 주식시장이다. 증시가 침체하면 투자도 위축되고 소비도 위축되고 경제 전체가 침체한다. 증시가 뜨지 않고는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주식시장이란 곳은 알고 보면 투기판이나 다름없는 동네다. 자본시장 중심의 경제는 극단적으로 불확실성이 높은 경제이기 때문에 경제 주체들의 단기주의와 투기성, 유동성 선호도 극단화 되었다. 원래 자본시장은 자금조달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주주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모든 경제가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축은 매우 까탈스럽고 변덕스럽다.

    다시 케인즈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시장에 맡겨둘수록 경제는 잘 돌아간다”고 믿는 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확산될수록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학문적 체계는 더욱 정교해지고 각국, 특히 유럽의 지식사회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단지 미국이 주도하는 신체제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아니면 도대체 어디까지 자본시장과 주주자본주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지금처럼 이들에게 경제의 큰 틀을 맡겨두어도 좋은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때문일까.

    “소유가 분산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단계에 이르면, 경영자들은 주주의 이윤극대화보다는 기업 자체의 전반적인 안정성과 명성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게 된다. 물론 주주는 관습적으로 정해지는 적절한 수준의 배당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이것이 충족되는 한 경영자들은 공공 및 고객으로부터의 비판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일찍이 케인즈가 남긴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초반의 세계경제는 이러한 케인즈의 이상과는 너무 멀어졌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