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新東亞-미래硏 연중기획 中·国·通

북한, 대만 따돌린 25년 전 ‘동해 사업’ “이제는 부상한 中이 韓에 힘 투사하려 해”

한중수교 주역 신정승 전 주중대사

  • 이문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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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이 큰 나라 되리라 누구도 예상 못해
    • 北이 말 안 듣는다는 中 주장에도 일리 있어
    • 美中 전략적 갈등 심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
    • 남중국해가 韓에 ‘제2의 사드’ 될 수 있어
    신정승(65) 전 주중대사는 대(對)중국 외교의 산증인이다. 외무부(현 외교부) 동북아2과장으로 일할 때(1990~1993) 한중수교 교섭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2008~2009년 주중대사를 지냈다. 국립외교원 중국연구센터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난 후 현재 동서대 석좌교수(중국연구센터 소장)로 있다. 



    암호명 ‘동해 사업’

    한중수교는 1992년 8월 24일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실용주의 철학이 맞아떨어졌다. 한국은 우방(友邦)이던 대만과 단교했으며 중국은 혈맹이던 북한에 실망감을 안겼다. 한중은 비밀 교섭창구를 통해 수교 협상을 진행했다. 수교 협상 암호명은 ‘동해 사업’이다.

    7월 7일 서울 광화문 미래전략연구원에서 신 전 대사를 만나 한중 관계의 과거·현재·미래를 물었다.

    중국과 수교한 지 25년이 됐습니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한중수교 교섭은 북한과 대만을 따돌려야 했기에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외무부에서도 몇 사람만 알았죠.”



    한중수교 협상 예비교섭 수석대표이던 권병현 전 주중대사는 부친이 병환이 났다고 둘러대고 외무부 청사에 나오지 않았으며 신 전 대사도 병원에 입원했다고 소문을 낸 후 수교 작업을 진행했다.

    “1991년 4월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北京)을 찾은 이상옥 외무부 장관에게 수교 교섭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첸치천이 회고록에 한국이 수교를 제안해 응했다고 썼는데, 수교 교섭을 정식으로 먼저 제안한 쪽은 중국입니다.”
    첸치천 전 외교부장은 ‘10가지 외교의 기록(外交十記)’이란 제목의 회고록에서 한중수교 과정을 소개하면서 1992년 8월 이전 한중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다. 중국인 중에 그곳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다.”

    한중 관계는 수교 후 25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두 나라는 현재 서로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규정한다.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지난해 7월 한국이 주한미군에 사드를 배치할 부지를 공여하기로 결정하면서 한중 관계는 얼어붙어 있다.

     “한중수교 교섭은 보안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가족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언론에 노출돼 외부에 알려지면 북한이나 대만이 어떻게든 방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동빙고동 안가에서 권병현 수석대표, 안기부 직원 1명과 수교 교섭 준비를 시작했죠.” 



    “한국, 북한 동등하게 대하라”

    중국인에게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중국도 똑같았고요.  
    “한국 정부는 1980년대부터 중국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983년 강원도 춘천에 중국 민항기가 불시착했을 때 베이징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건을 해결해줬죠. 그 후 인민해방군 해군 잠수정이 영해에 들어온 사건도 있었습니다. 함상 반란이 일어났는데 주동자들은 망명을 원했습니다. 예전엔 비슷한 일이 생기면 대만으로 넘겨주곤 했는데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잠수정 사건은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민항기는 눈에 보이니 외부에 공개할 수밖에 없지만 잠수정은 달랐습니다. 비밀리에 처리했죠. 선상 반란이 일어난 경우에는 국제법상으로도 선박이나 잠수함을 해당 국가에 되돌려주는 게 원칙입니다.”

    민항기, 잠수정 사건이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됐겠군요.
    “그렇죠. 중국과 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이 일부 이뤄질 때예요. 한국과 중국에서 개최되는 스포츠 행사에 양국 선수단이 참가했고요.”

    수교 교섭 때 중국이 까다롭게 나오진 않았습니까.
    “베이징이 특별히 요구한 것은 대만 문제 빼놓곤 없었어요. 대만과의 단교가 핵심이었죠. 중국과 수교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대만과 국교를 끊었기에 단교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일찍부터 했습니다. 대만을 포기하면서 우리가 뭘 얻을지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죠. 한중수교 이전까지 중국의 대(對)한반도 외교는 북한 일변도였습니다. 한국과 북한을 동등하게 대하라는 등의 요구를 했습니다.”

    북한 핵 문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 핵 문제는 그때도 존재했어요. 1989년 미국 관리가 첩보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갖고 소련과 중국을 방문해 북한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구축한다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중국과 수교 교섭을 하면서도 베이징에 북한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대만과의 단교 과정이 매끄럽지는 못했다면서요. 한중수교 3일 전인 1992년 8월 21일 주한 대만대사관에 단교 문서를 전달하면서 3일 내로 나가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만의 일방적 견해일 뿐입니다. 중국과 대만 모두 프레임을 만든 후 자신들의 주장을 집요하게 해 사실로 믿게 하는 일에 능숙해요. 이상옥 장관이 한중수교 교섭 과정에서 대학 강연 등을 포함해 수차례 한중관계 정상화가 머지않은 시기에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공식 통보 수일 전에 예고하기도 했고요. 대만대사관이 한중수교가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주관적 바람(Wishful Thinking)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국, 대만의 ‘아Q정전’ 

    일본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에 특사를 보내 설명했으나 한국은 처지가 달랐어요. 대만이 북한에 알려 방해할 수 있었기에 특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8월 21일 대만에 한중수교 사실을 통보하면서 보안 사항이니 8월 24일까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이튿날 언론에 공개한 것을 보면 특사를 보내지 말자는 판단이 옳았습니다.” 

    대만 사회 기저에 흐르는 반한 감정의 뿌리가 3일 내로 나가라는 통보에서 비롯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한국과 대만이 서로 착각한 측면이 있어요. 대만은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正統)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을 도왔다고 여깁니다. 자기네가 형이고 한국이 동생이라는 시각을 가졌더랬죠. 반대로 한국은 중국 대륙이 큰 시장인 데다 국제 무대에서 대만보다 중요하다고 봤고요.”

    덩샤오핑은 한중수교 10개월 전인 1991년 10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한중수교 계획을 시사했다. 첸치천 외교부장이 1992년 7월 15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한중수교 시기가 성숙했다. 북한의 이해와 지지를 구한다”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메시지를 전했다.

    서울은 보안을 유지했는데 베이징은 북한에 알렸습니다.
    “베이징이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북한에 통보하겠다는 얘기를 한국에 한 후 평양에 알려야죠. 저한테는 중국에 대한 첫 경험 비슷한 일입니다. 이후에도 중국 관계 일을 하면서 ‘아, 중국과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2년은 탈냉전 시대의 초입으로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북한도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적응해야 할 중대 기로였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통해 중국, 소련과 수교했는데 북한은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실패했습니다. 1991년 한국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을 1단계 교차 승인으로 본다면 한국은 2단계 교차 승인에도 성공했는데 북한은 실패한 격입니다. 북한이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실패한 게 북핵 문제의 역사적 근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한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북한을 끌어안아 2단계 교차 승인을 도왔으면 어땠을까요.
    “교차 승인의 실패가 북핵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북핵 문제로 인해 교차 승인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사실에 가깝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7선언에서 한국의 우방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서도 된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정책을 추진하고자 7·7선언이 나온 측면도 있으나 북한과 미국, 일본의 관계가 개선돼도 좋다고 본 것은 한국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핵 문제의 기원 

    1989년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부시 행정부의 방침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관계 개선을 검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국제정세가 완화한 1991년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한 전술핵을 철수합니다. 1991년엔 남북이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가 결정되고요.

    이렇듯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일련의 조치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1992년 7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결과와 북한의 신고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특별사찰 문제가 대두합니다. 북한이 1993년 3월 국면을 전환하고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강수를 두면서 미국,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어려워진 것이죠.”

    베이징은 교차 승인에 어떤 태도였습니까.
    “중국이 미국에 한중수교, 북·미수교 동시 추진을 제기했으나 워싱턴은 북한이 먼저 핵 개발을 포기하고 IAEA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일본도 북·일수교 교섭 3차 본회담에서 미국 요청에 따라 북핵 문제를 의제로 제기합니다. 이렇듯 핵 개발을 포기하는 게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이었죠. 또한 한중수교, 한소수교는 동서 냉전체제 붕괴 이후 중국과 소련의 실용주의적 고려에서 비롯한 것으로 교차 승인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에 관심을 표했으나 그것이 한중수교의 전제는 아니라고 언급했고요.

    한중수교 전후는 냉전 체제가 와해하면서 세계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 때입니다. 거의 모든 나라가 경제 우선의 실용주의로 나아갔습니다. 베이징은 그 같은 흐름에 올라타 오늘날의 중국을 건설했고요. 요컨대 교차 승인 불발이 북핵 문제를 야기한 게 아니라 북한이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고 핵 개발로 나아간 것이 지금 겪는 문제의 기원이라고 봐야 합니다.”



    더 큰 당근, 더 큰 채찍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은 1992년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미 군사연습의 축소 등을 검토하면서 핵 동결을 출입구로 삼아 핵 폐기 및 평화협정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인데요. 
    “그때와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북한 핵, 미사일 능력이 1992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발전했습니다. 1992년에는 핵, 미사일 능력이 초보 수준이어서 포기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달라요. 북한이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평화 구상을 실현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제재와 대화를 병행해 당근보다 더 큰 당근, 채찍보다 더 큰 채찍으로 북한을 다루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접근 방식은 전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찔끔찔끔 줘봐야 고마워하지도 않아요. 확실하게 줄 건 주되 진짜 아프게 제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6월 30일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서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사안을 포함한 문제에 대한 남북 간 대화를 재개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열망을 지지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이를 두고 북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이 운전석에 앉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한국이 운전석에 앉았다는 얘기가 언론에 나오는데 실제로 그런지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 맡기겠다는 것인지, 말치장(rhetoric)일 뿐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북핵 문제가 북한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 대북 정책이던 ‘전략적 인내’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더욱 강력한 제재를 시사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미국이 한걸음 물러서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지켜볼까요.

    설령 미국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한국의 제안에 호응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북한은 핵, 평화협정 등은 미국과 협상할 문제라는 일관된 견해를 오랫동안 견지해왔습니다. 북한이 지금껏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인 적이 없어요. 안타깝게도 그간 한반도 문제에서 북한이 운전석에 앉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북한이 가진 전략적 가치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강경책만 썼다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바오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평양에 다녀왔는데 남북 정상회담에 북측이 관심이 있다’고 언급하자 이 대통령이 ‘우리는 언제든 만날 용의가 있다. 딱 한 가지, 핵 문제에 관한 진전된 약속만 있으면 다른 것은 국민을 설득해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에 나설 의지가 있었으나 북한이 응하지 않아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평양은 서울이 좋은 아이디어를 제기해도 자신들이 나아가려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의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합의를 이뤄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며 자신감을 보이던 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다녀온 후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국이 어느 정도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베이징은 워싱턴이 바라는 최고 수준의 제재에 나서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제재와 대화 두 방향 모두에서 중국에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중국이 가진 의지가 제한적인데도 국제사회가 지나치게 기대한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북한이 말을 안 듣는다는 중국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고요.

    북한 대외무역의 85%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으나 베이징이 평양을 본격적으로 압박할 의지와 역량을 가졌는지 의문입니다. 중국에 북한이 가진 전략적 가치는 중요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제재를 가해 북한의 붕괴를 초래하면 전략적 가치를 잃는 겁니다.
    베이징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를 철저히 준수한다고 밝히지만 제재 결의안 작성 과정에서 중국의 소극적 태도로 결의안에 강력한 제재가 포함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국제사회 일각에서 중국에서 북한으로 가는 송유관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데 베이징은 그렇게 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6자회담을 재개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대화 테이블로 북한을 끌어오지도 못했고요.

    중국이 북한을 움직이는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려 변명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 시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때 일입니다. 리자오싱이 각국 외교장관에게 북한 외상을 불러올 테니 별도로 세션을 하나 만들자고 하더군요. 시간을 비워놓고 기다리는데 결국 북한 외상을 데려오지도 못했습니다.”



    남중국해와 ‘항행의 자유’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하던 때 미국의 대(對)중국 정책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발표됐습니다. 단둥은행 제재와 대만으로의 무기 판매 승인이 그것입니다. 4월 6, 7일 미중 정상회담 이후 조성된 미중 간 허니문이 끝난 것으로 봐야 할까요. 
    “큰 흐름에서 미중 관계를 보면 중국의 부상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대응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전략적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4월의 트럼프-시진핑 회담은 상견례 성격이었죠. 두 정상은 큰 틀의 협력을 확대하되 이견은 상호존중을 기초로 관리해나가자고 합의했으나 전략적 불신이 감소된 것은 아닙니다. 북한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면서 중국과의 협조가 강조되긴 했으나 대북 제재와 관련한 베이징의 태도에 워싱턴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등장 후 보류해온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작전을 재개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미중 관계를 허니문이라고 칭하긴 어려울 거예요.”

    워싱턴이 중국의 대북제재가 불신의 임계점을 넘었다고 판단하면 세컨더리 보이콧(제재 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 기업·개인을 제재하는 것)을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도 북한과 미국 중 선택해야 합니다.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트럼프의 트위터를 보면 중국에 짜증 내는 듯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단둥은행 제재, 대만으로의 무기 판매 등에서 미뤄보듯 미중 관계가 험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아시아의 국제 문제로 남중국해, 대만을 포함한 동중국해, 북한을 둘러싼 이슈가 있습니다. 그중 남중국해가 핵심입니다. 대만에 무기를 파는 것과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것 등은 중국을 건드리고자 이전에도 툭툭 던진 카드고요.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의 의견이 그나마 접근할 부분이 있는 곳이에요. 동중국해 또한 상대적으로 조용하고요. 반면 남중국해는 두 나라의 의견이 완전히 갈리는 곳입니다. 미중이 남중국해에서 부딪쳐 한국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면 남중국해 문제가 제2의 사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6개항의 공동성명 중 다음 두 대목이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양 정상은 역내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미·일 3국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 양 정상은 3국 안보 및 방위협력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억지력과 방위력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양 정상은 기존의 양자 및 3자 메커니즘을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협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이하 생략)’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규범에 기초한 질서를 지지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공조해나갈 것을 확인했다.’


    한·미·일 안보협력과 중국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핵 문제 등과 관련해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몇 문장에 걸쳐 있습니다. 중국이 싫어하는 게 한·미·일 안보협력입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규범에 기초한 질서’는 남중국해라고 쓰진 않았으나 항행의 자유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성명에 굳이 이 같은 문구를 넣은 것은 남중국해에서 갈등이 빚어질 때 한국이 미국을 지지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남중국해는 우리에게도 무척 중요해요. 에너지(원유) 수입과 무역이 그쪽을 통해 이뤄집니다. 국력과 해군력이 남중국해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남의 나라 얘기하듯 하지만 실은 한반도 문제와도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중요한 지역입니다. 원론적으로는 우리도 항행의 자유를 주장해야 하고요.”

    미국이 한걸음 더 나아가 남중국해에서 군사 작전을 할 때 한국이 도와야 한다고 요청하거나 군사 작전 직접 참여 등을 요구하면 한중 관계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 인공 섬에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본격적인 갈등이 일어나기 전에 북핵 문제를 완화하거나 해결해내는 게 최선이겠군요.
    “그렇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려 있다면서 굉장히 불만스러워합니다. 미국이 말하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가 원래는 남중국해가 중심이던 것인데 현재는 북한의 연이은 도발 탓에 한반도에 집중하는 상황입니다.”



    한중 관계 ‘힘의 비대칭’

    문재인 정부 출범을 계기로 한중 간 사드 갈등 출구전략 모색이 활발합니다. 원만한 해결이 가능할까요.
    “출구전략이라는 말은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는 뉘앙스를 줍니다. 따라서 사드 해법이라고 칭하는 게 옳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드 문제는 미중 간 전략적 갈등이 심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북핵 문제뿐 아니라 한중 간 국력 차이 확대라는 동북아 정세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는 터라 다루기가 매우 어렵고 복잡합니다. 시간을 갖고 매우 신중하게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압력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거나 양국 관계의 나쁜 선례가 돼서는 안 됩니다. 한미동맹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되고요. 북핵 문제에서의 실질적 변화가 없는 한 사드 배치 철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전제하에 한중 양국의 체면을 살릴 방안을 마련해야죠.”

    사드 갈등 탓에 한중수교 25년 역사에서 한중 관계가 가장 냉각돼 있습니다.
    “최근 25년간 일어난 변화 중 누구도 예측 못한 게 있습니다.”

    ….
    “중국이 지금처럼 큰 나라로 부상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 동북아2과장을 맡고 나서 도쿄를 방문해 일본 외무성 중국과장과 회의하면서 중국에 대한 견해를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 외무성 중국과장이 ‘중국이라는 나라는 참 크고 복잡해 중국을 이해한다는 건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중국이 그렇듯 큰 데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 앞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리라고 내다보더군요. 아마도 그것이 당시 국제적으로 공유되는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는 달랐죠. 중국이 엄청나게 발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전략적 갈등을 빚습니다. 중국이 큰 나라가 된 게 사드 갈등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 중 하나예요. 한중 관계에서 비대칭이 일어나면서 중국이 한국에 힘을 투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사드 배치 문제를 미국과 중국만이 결정하게끔 나둬서도 안 됩니다. 사드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이 빠지면 앞으로 한반도 문제도 자기들끼리 논의하려고 할 것입니다.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사드 해법으로 한국의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 불편입과 사드 레이더의 작동 범위 등과 관련해 한·미·중 3자간 합의 및 발표를 추진하는 게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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