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 권력자 한명회와 압구정 > 권세는 탐욕에 무너진다.
서울의 한강 북쪽에서 동호대교를 건너면 강남 부촌으로 알려진 압구정동(狎鷗亭洞)에 들어선다. 이 동네 이름은 과거에 그 근처 한강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압구정은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으로, 중국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가 재상이었던 한기(韓琦)의 서재에 붙여준 이름이다. 여기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동안 애쓰셨으니 이제는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롭게 지내십시오” 하는 위로의 뜻이 담겨 있다.
예종과 성종 두 왕의 장인으로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이런 사연이 담긴 정자 이름과 그 기문(記文)을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에게서 직접 받아왔다. 그런 뒤에 한강가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세워, 압구정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이곳은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들르는 명소가 됐다. 성종 12년(1481), 명나라에서 사신 정동이 왔다.
그는 조선 출신의 악명 높은 1환관이었는데, 한명회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정동은 압구정에 가겠다고 했고, 성종은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만류했다. 그러나 정동이 굳이 가겠다고 하니 할 수 없이 허락했는데, 가기 전날 정동이 몸이 아파 약속을 취소하려 했다. 한명회는 아픈 정동을 설득해 압구정에 가도록 하고는 임금에게 “정자가 좁으니 대궐에서 쓰는 큰 차일을 가져다 치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성종은 한명회의 요청을 거부하며 뜻밖의 말을 던졌다.
한명회의 도전 vs 성종의 응전
그대가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더 신경 쓸 것이 뭐가 있겠소. 좁다고 생각한다면 제천정(濟川亭)에서 연회를 열도록 하시오.
제천정은 왕실 소유의 풍광 좋은 정자다. 애초에 정동이 압구정에 가겠다고 한 것도 내심 불편했는데, 몸이 아파 못 가겠다는 정동을 굳이 압구정까지 끌고 가려는 한명회가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더구나 정자가 좁다면서 대궐 차일까지 가져다 치겠다고 했으니, 이는 한명회의 과도한 욕심으로 자칫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명회는 성종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큰 차일이 안 된다면 처마에 잇대는 장막이라도 가져다 치게 해달라고 다시 청했다. 그러자 성종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미 압구정에서 연회를 열지 않기로 하였는데, 또 무엇 때문에 처마에 잇대는 장막을 친단 말이오. 지금은 큰 가뭄이 닥쳐 맘껏 유람이나 할 상황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이 정자를 헐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중국 사신이 돌아가서 이 정자의 풍광이 중국 것보다 아름답다고 하면, 훗날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자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놀 것이 분명하니, 이는 뒷날의 폐단을 만드는 것이오. 또 강가에 정자를 지어놓고 놀러 다니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것을 좋게 보지 않소. 내일 연회는 제천정에서 열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마시오.
성종이 굳이 압구정으로 가겠다는 정동과 한명회의 행동을 노골적으로 막자, 노련한 정치가 한명회도 마음이 상했는지 임금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신이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아내가 원래 앓던 고질병이 이번에 또 재발하였습니다. 병세가 심해지면 제천정이라 해도 신은 가지 못할 듯합니다.
부메랑으로 날아든 ‘압구정 정치’
한명회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불경한 말을 하며 신하로서의 예의를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명을 내리면 신하는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야 하는데, 어찌 자기가 부탁해놓고 명을 내리자 도리어 사양한단 말입니까. 담당 관사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소서.
이후 승지와 대간들이 계속 탄핵하자, 성종은 결국 장인인 한명회에 대한 국문 요청을 허락했다. 그런데 과연 정자와 차일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실록에 기록된 사관의 평가를 보면 더 근원적인 데 갈등의 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에 한명회가 연경에 갈 때에 주상이 당부하기를, ‘혹시라도 정동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고 활과 화살도 바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통주(通州)에 도착하자 통역관을 시켜 정동에게 먼저 연락했고, 부사 이승소가 말렸지만 듣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활과 화살도 바쳤다. 그가 개인적으로 풍성한 선물을 바쳐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정동의 욕심을 채워준 덕에 많은 상을 받아 와서는 이를 늘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동을 압구정에 데리고 가서 성대한 잔치를 벌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핵을 당해 처벌받게 되었다.
성종과 한명회가 압구정을 놓고 대립하게 된 이면에는 그동안 한명회가 왕명을 무시하고 환관 정동에게 빌붙어 권력을 농단한 데 대한 성종의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니, 사관의 눈이 참으로 예리하다. 한명회는 ‘벼슬과 권력을 떠나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뜻을 담은 압구정을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결국은 이로 인해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제 정자의 모습은 겸재 정선이 그린 한 장의 그림 속에만 남아 있고, 압구정이 있던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해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이름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곳이 됐다.
< 성종과 이심원의 ‘축수재’ 논쟁 > 오래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다.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누군가 자신의 장수를 축원해주겠다고 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 병 없이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겠지만 사는 게 만만치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오래 살까 걱정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옛날에 사찰에서 신하들이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이를 축수재(祝壽齋)라고 했다.
축수재는 불교 행사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행했는데, 조선 태종 11년(1411)에 와서 매년 행하던 축수재를 혁파했다. 태종은 “오래 살고 일찍 죽고는 운명에 달려 있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축수재를 혁파하는 까닭을 밝혔다. 이후 세종도 축수재를 시행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조 1년(1455) 삼각산 승가사(僧伽寺) 등 여러 절에서 탄신 축수재를 베풀었다. 그러다 축수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이 일어난 것은 성종 때다.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종친인 효령대군의 증손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이었다.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평소 ‘학문은 경술(經術)을 깊이 연구하고, 마음은 바른 이치를 간직했으니, 나는 성현(聖賢)의 문도(門徒)다’라고 자부하던 인물이었다.
성종 8년(1477) 9월 9일, 이심원은 임금과 함께한 자리에서 축수재에 대해 논한다.
이심원: ‘경국대전’에서 예제(禮制)에 어긋나는 제사인 음사(淫祀)를 금지하였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 보니 습속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을 수리하라 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해도 궐 밖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다 알겠습니까.
성종: 경의 말이 분명 옳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선대왕 때에 시작한 것이다.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입니다”
이심원: 축수재는 주상을 위하여 거행하는 것이라서 신하들이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구하지 말라’ 하였고, ‘제사 지내야 할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시행한다면 근본이 튼튼해지고 나라가 편안해져 건강과 장수를 누릴 것이니, 어찌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큰 덕을 지니면 반드시 걸맞은 지위를 얻고 반드시 장수를 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상이 좌우를 돌아보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윤자운: 장수를 빌며 기도하는 것은 주상을 위하는 일이니,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 해도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심원: 윤자운의 말은 틀렸습니다. 장수를 기원할 때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 겉으로는 따르는 척해도 마음속으로는 잘못이라 여긴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선대왕 때부터 해온 일이라도 도리에 어긋난다면 바로 고쳐야 하니 어찌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혁파하십시오.
성종: 내가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성종은 이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해 11월 26일 이심원은 다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사람의 화와 복은 모두 스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지도 않고 귀신에게 아첨하고 기도해서 복을 얻은 자는 없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정도만을 지키고도 화를 당한 자 또한 없습니다. 하물며 임금의 탄생은 실로 천명을 받은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주인으로서 욕망을 절제하고 언행을 바르게 하며 덕을 닦아 정사를 행하고 억조창생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수고롭게 기도하지 않아도 재해가 사라지고 장수와 복이 올 것입니다…(중략)…하늘에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원망하고 신이 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천금을 허비하여 나쁜 귀신에게 제사한다 하더라도 결국 화를 재촉할 뿐이니, 끝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중략)…만약 부처의 힘을 빌려 성상의 수명을 하루 한 시각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신하의 마음으로는 자기 몸을 백번 바친다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금에 한 번도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 어찌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이심원은 어진 정치로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면 절로 장수하게 될 것이니 축수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이 상소를 읽고 이심원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다른 신하들의 생각을 물었다. 그때 승지들이 이심원의 말에는 그른 점이 전혀 없다며 두둔했다. 한참 있다가 성종은 이심원을 불러놓고 표범 가죽 한 벌을 하사하며 전교했다.
축수재는 선왕께서 지내시던 것이기 때문에 감히 혁파할 수 없다. 세조는 선왕이 아니신가. 그대는 세종을 본받길 바라는가. 그대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앞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은 아뢰지 말라.
그러나 이심원은 12월 2일 다시 차자를 올렸다. 세조가 예종에게 세상의 변천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한다면서 부왕의 행적이라며 바꾸기를 꺼린다면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격’이 된다고 일러준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세조를 본받으려거든 ‘도(道)를 좇으라’고 일러준 세조의 뜻을 따르라고 설득했다. 경전의 글을 인용하고 세조의 말까지 끌어와 성종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니, 성종도 더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격”
올바른 도리를 힘껏 진술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나를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내가 비록 무지몽매하지만 그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경의 의견에 따라 즉시 축수재를 혁파하겠다.
마침내 이심원은 성종으로부터 축수재를 혁파하겠다는 답을 받아냈다. 축수재를 혁파하라고 끈질기게 주장한 이심원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심원은 독서를 좋아하고 옛 성현의 도를 흠모하여, 유자(儒者)를 만나면 반드시 성리(性理)의 연원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단의 책을 찢어서 버리며, 고상한 뜻을 품고 직언을 하니, 사람들이 간혹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심원이 축수재 혁파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혈기가 왕성한 나이인 24세 때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철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 거침없는 성격으로 인해 남의 눈 밖에 나기도 했지만 결국은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축수재 혁파는 왕실에 여전히 남아 있던 각종 불교 행사를 혁파하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올바른 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릇된 길의 근원을 끊어야 한다는 이심원의 줄기찬 주장은 관습적으로 행해온 왕실의 행사까지 혁파할 만큼 집요하고 강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