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제국에 비끼는 노을 - 서울, 1979년 7월 첫 주말

  • 이문열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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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문사 소회의실이 마땅치 않아 바깥 다방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차 다시 문화부를 들렀더니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이 작가. 황 기자가 좀 보자는데. 곧 신문사로 돌아온다고. 저를 잠깐 만나주고 가달라나.”

    “황 기자요? 또 어느 분을 말하시는지.”

    갑작스러운 통보라 무슨 다른 인터뷰라도 남았는가 싶어 그가 그렇게 물었다.

    “어느 분은 무슨, 황정욱 기자 말이야. 우리 정치부 차장. 지난겨울 당선자 인터뷰 사진 찍으러 여기 왔을 때 만나서는 형님, 아우 하면서 서로 얼싸안을 듯 죽이 맞아 잘 돌아쳤잖아. 그런데 오늘은 영 안면몰수네. 요즘 그 친구 청와대 출입한다니 왜, 무슨 야코죽을 일이라도 있어?”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데 그 선배, 요즘 청와대 출입합니까?”

    “그래, 지난 5월부터야. 국회 출입하다 깜짝 발탁됐지. 아마 기자 출신으로 그 동네에 미리 자리 잡은 다른 선배 입김 덕분일 거야.”

    “그럼, 부장님 말마따나 그 동네 일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나야 모르지, 아침에 오늘 이 작가가 인터뷰 온다는 소리를 했더니 조금 전에 느닷없이 전화로 이 작가 좀 잡아달라네. 거기서 지금 곧 출발할 거니까 요 앞 기린호텔 커피숍에서 보자더군.”

    부장이 그래놓고 자기 일로 돌아가는 게 처음부터 대놓고 하는 반말투와 더불어 그를 자기 밑에 있는 기자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약간 어이없기는 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사람들은 그 출신 신문사 문화부가 친정이 되고, 그때의 담당 기자와는 문단 동기처럼 지내게 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밖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함께 들어온 정 기자를 그가 웃으며 돌아보자 정 기자도 찡긋 눈짓까지 하며 뜻 모를 웃음으로 받았다.

    겨우 별 다섯 개를 달기는 해도 지은 지 오래되어 평소에는 한산한 느낌을 주던 신문사 건너편 호텔 커피숍은 그날따라 은근히 흥청거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한군데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둘러보니 황 선배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문화부장이 언제 전화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퇴근 무렵이라 도심에서의 이동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짐작은 갔다.

    그가 갑자기 무슨 일일까.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 이 신문사 안에서 마주친 걸 빼면 황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로 10년 전 서울을 떠나던 그해 봄이었다. 삼선개헌 반대 때인가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하숙집에서 연행돼 간 뒤 일주일째 등교하지 않는 급우의 행방을 알아보러 황 선배를 찾아간 적이 있다. 애인도 아니고 결국은 친구로 남지도 못한 여자 동급생과 함께였는데, 찾아간 그들에게는 황 선배가 한국 제일의 신문사 사회부에서 잘나가는 엘리트 기자였지만, 나중에 그 자신이 기자가 되어 가늠해보니 그때 황 선배는 겨우 사쓰마와리(察回·경찰서 출입 견습)나 면한 사회부 기자 3년차였다.

    그날도 그의 요청에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는 듯 친구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수첩에 적고, 다시 그의 연락처 전화번호를 물은 뒤 나중에 알아봐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 끝내 황 선배로부터 무슨 소식을 들은 것 같지는 않다.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된 지 닷새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취조 과정에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바닷가로 시집간 누나 집에서 한 열흘 쉬다 왔다는 얘기를 나중에 그 급우로부터 직접 들은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러면 황 선배는 내게 누구인가. 지난겨울 오랜만에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왜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까지 화끈했을까. 지조불군(鷙鳥不群), 사나운 새는 무리 짓지 않는다,를 무슨 신념처럼 되뇌며 한 10년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고 스승도 없이 세상을 홀로 떠돌 때도 남에게는 한 번도 붙여본 적이 없는 형님이란 호칭을 그에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거기서 그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금세 떠오른 것은 그사이 희미해진 형의 모습이었다. 형은 열네 살 나이 중학교 2학년 여름에 환갑이 된 할머니와 서른세 살의 홀어머니와 세 살 터울로 줄줄이 난 어린 사남매를 돌봐야 하는 가장이 되어 그것도 남침과 북진, 진격과 후퇴를 주고받으며 가열해진 6·25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전쟁이 휴전으로 멈춰진 뒤에도 간단없이 죄어오는 연좌(連坐)의 올가미를 피해가며 홀아비 빠진 환과고독(鰥寡孤獨) 일곱 식구와 10년이나 도회를  떠돌았으며, 그때조차 그가 이끄는 삶은 한 번도 뒷골목의 고단함과 범법의 그늘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형은 또한 남쪽 세상이 작은 미소만 보내도 선한 의지와 망설임 없는 열정으로 그들이 가리키는 무지개를 좇았다. 모진 세상에 몰릴 때는 악덕 포주나 다름없는 도시 변두리 술집 마담의 기둥서방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한때는 혁명정부의 장려에 따라 선산 발치의 잔솔밭을 맨손으로 개간해 몇만 평 농지를 만들고 지방자치 단체로부터 상록수 상까지 받은 적이 있다. 선치포(善治圃·채소밭을 잘 가꿈. 흔히 농사를 잘 지음으로 전용되기도 함)를 선비의 한 미덕으로 쳐주기도 하는 영남남인의 맥을 이어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는 꿈을 꾸기도 했고, 그 꿈을 끝내 꽃피워보지 못한 그의 시로 수줍게 노래하기까지 했다.

    황 선배가 그의 삶에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 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렵게 길을 돌아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형이 가장 먼저 권한 일은 서울에 가거든 반드시 황 선배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황에게 품었던 외경심을 드러냈다.

    그눔의 미군부대가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지만, 그 친구와 나는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진흙더미 같은 차이였지. 특히 제대로 된 학교는 양정중학교 2학년 첫 학기 6월로 끝나고, 돈으로 산 엉터리 졸업장이나 위조된 전학증으로 야간 고등학교 1년 반, 야간대학 두 학기로 모든 교육과정이 끝나버린 내게 그는 쳐다보기조차 아득한 구름이었어.

    양키부대 장교숙사 보일러맨으로 일하면서 주야 어느 쪽이든 12시간 가까이 함께했지만,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내게는 그가 딴 세상 사람 같았어. 그저 일류 대학교 상급반이라든지, 많이 알고 좋은 책을 두루 읽었다는, 혹은 양놈들처럼 영어를 읽고 말할 수 있다는 그런 능력에 대한 감탄이 아니야. 영어 잘하고 책 많이 읽기로는 그때 배씨 성 쓰는 친구가 하나 더 있었지. 내가 보기에는 영어회화는 양키들보다 더 유창한 것 같았고, 들고 다니는 책도 얇건 두껍건 언제나 꼬부랑 글씨로 된 것이었지.

    그러나 한 묶음처럼 몰려다니며 근무하던 우리 셋이 어쩌다 한가해 입 섞어 잡담이라도 하게 되면, 대개는 둘의 말싸움으로 번지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그 둘이 또 구름과 진흙이었어. 대부분 배가가 양보하는 기색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제법 벼르고 덤벼들어봐도 그들의 논쟁에서 배가는 황형에게 도무지 제배(儕輩)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어. 적어도 내 눈에는.

    나중에도 미군부대 그만두고 셋이 몇 달 방을 함께 쓰고 자취하며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배가는 유학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토론이 붙으면 판판이 황형에게 두 손 들고 끝나던 게 기억나. 마지막으로 황형을 본 게 이 나라 제일가는 신문사에 들어간 직후인데 그게 서너 해 안쪽 일이니까 아직 거기 다니고 있을 거야. 꼭 한번 찾아가봐. 만약 그 신문사가 우수한 신입 기자에게 장학금을 주는 곳이라면 그 친구 틀림없이 장학금 받고 들어갔을 테니까. 그것도 어디 좋은 자리에. 여러 해 전, 6·3사태 때 후배들 데모에 연관돼 주모자로 수배된 적은 있지만, 그것도 그 신문사가 야당 성향이 강한 데라 그 친구에게 큰 흠이 되지는 않았을 걸. 만나 봐. 왠지 네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꼭 어설픈 친구의 동생으로서뿐만 아니라, 고학으로 어렵게 같은 대학교를 마쳐야 할 제 후배로도.

    그런데 그때 그는 갑자기 형이 말하는 게 누구인지를 그로부터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 나도 알만하다. 우리가 선산(先山) 발치의 그 개간지를 떠나기 전이니 1964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형을 찾아왔다고 하면서도 외출한 형이 돌아오기를 집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개간지 산등성이 높은 쪽에서 아래쪽을 살피며 망을 보듯 기다리던 사람. 오래잖아 돌아온 형을 만나고서야 오두막 건넌방으로 들어 형과 무언가를 두런거리고, 어머니는 왠지 불안한 눈길로 방안의 대화를 엿듣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형이 손님을 접대할 장을 봐온다는 핑계로 다시 면소재지로 올라가자, 갑자기 분주해진 어머니. 무언가를 찾아내 황황히 집을 나서고, 한참 뒤에 형보다 먼저 돌아온 어머니가 그 손님이 있는 건넌방으로 가 낮게 흐느끼듯 사정하듯 하던 말….

    학생, 이제사 졸업했겠지마는 학생 때 알던 얼굴이이(이니) 그양 학생이라 부를란다. 아까 우리 아(아이)하고 주고받는 소리 가마이(가만히) 들어보이 학생이 뭘 몰라도 너무 모린다. 여기가 어딘지 아나? 바로 불구딩이(불구덩이)따. 깊은 산골짝이라 외져 숨기 좋아 비(보이)지만, 실은 여다로 뛰들면 뭐든지 함께 타죽는 불구딩이라. 그러이 고마 가라. 이 길로 멀리 가뿌래이. 그래야 학생도 살고 우리도 성하게 한 고비를 넘긴다. 자, 이거 천원이따. 동네서 급전으로 취했다(빌렸다). 차비에 보태 얼릉 여기서 천장만장 달라 빼라.서울서 웬 햅사한(해사한) 하이칼래(칼라) 하나가 여다 어디 숨어 지낸다는 소문이 나, 이 집 살피는 시퍼런 눈길 몰래(몰려)들기 전에, 아이, 당장 우리 아 돌아오기 전에. 학생이 뭔 죄를 짓고 이리 쫓기 댕기는지 모리겠다마는 여기 있다가 그 사람들 들이닥치면 우리한테는 마른 날에 날벼락이고, 학생은 죄를 두 배 세 배 늘이는 꼴이 난다. 알았제? 응, 알았제?

    하지만 그는 입학 이듬해에야 황 선배를 만나고 형은 다시 그 이태 뒤에 죽었다. 그동안 형을 추적해왔던, 좀 감상적으로 보이던 담당 수사관의 표현대로라면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래가 되어, 혹은 자신도 무엇인지 모르는 노래를 막 배워 소리 높이 부르려다가.

    그러고 보면, 그가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황 선배에게 그토록 격한 감회를 보이게 된 것은, 일찍 죽은 형을 향한 애도와 함께 그런 형이 일생의 자랑처럼 여기며 소중히 품고 우러러온 외우(畏友)에 대한 경의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네 살의 호기심과 선망에 찬 눈에 비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상과 야심에 휘몰려 세상에 거역하다가 수배자, 도망자, 잠행객(潛行客) 신세가 된 젊은 지식인의 기억 또한 틀림없이 그의 의식 속에서 한몫을 했다. 어떤 비장하면서도 애절한 잔영(殘影)으로.





    2.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나? 저쪽에서부터 눈짓, 손짓까지 해도 통 못 알아보고.”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치는 바람에 놀라 쳐다보니 황 선배였다.

    “아, 예. 옛날 생각요. 돌아가신 형님 생각도.”

    그는 얼결에 사실대로 말하고 이어서 되물었다.

    “그런데 오늘 그 동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저는 금방 오실 줄 알았는데.”

    “나오다가 급한 외신이 하나 들어왔다는 소리에 확인 좀 하고 오느라 늦었다.”

    “형님한테 급한 외신이라면 어떤 게 되지요?”

    “너 무슨 지방 신문사 있다고 하지 않았어? 요즘 급한 외신이라면 그 난데없는 땅콩농장 주인하고 주한미군 철수 얘기 빼고 뭐 있겠어? 아무리 재선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카터는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은 맞고, 그래서 군통수권자로서 기어이 저희 군대 빼겠다고 벅벅 우기고 나서면 뜨물에 애 생기는 수도 있으니까.”

    말을 주고 받다보니 지난번 만났을 때같이 과장된 감정은 잦아지고 10년 전과 같은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카터는 벌써 지난 주말에 저희 집으로 돌아갔잖습니까? 긴급조치(위반) 몇 명만 풀어주어 꼴 난 체면만 세워주면 주한미군은 안 빼기로 하고. 박통하고도 뭐, 화기애애하게 작별했다던데.”

    “야, 너희 신문사는 외신부도 없냐? 외신도 그때그때 안 챙겨봐?”

    “지방 신문사라 외신부를 따로 두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건물에 통신사가 있어 중요한 기사 낙종하게 만들지는 않을걸요.”

    “그럼, 그런 게 화기애애냐? 떠나는 날 공항 나가는 길에 카터가 박통 보고 침례교회 목사 하나 보낼 테니 그 말 듣고 예수 좀 믿으라고 하고 간 게. 그건 예순이 넘은 박통 엿 먹이려는 소리거나 악담 아니면 빈정거림이야. 그 전날 둘이 만났을 때는 또 어쨌는지 알아? 박통이 좀 장황하게 자신의 입장을 문장으로 꾸며 와 읽어나간다고, 함께 있던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메모까지 전달시켰다더군. ‘박정희가 이렇게 몇 분만 더 떠든다면 주한미군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빼버리겠다’고 쓰여 있었다던가. 이거 뭐, 두 번만 화기애애했다가는 제국 황제와 분봉왕(分封王)이 멱살 잡고 코피 나게 치고받겠네.”

    “그런 것도 외신에 나옵니까?”

    “그건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라 주로 배석한 비서실이나 측근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흘러나온 거지만, 외신을 통해 흘러나온 것도 많지. 특히 카터 방한 전의 몇 군데 특종은 외신에서 흘러나온 것들로 엮은 거야. 카터가 박정희 체면 세워주기 싫어서 워싱턴으로 초청하는 대신 굳이 자신이 멀리 일본을 돌아 한국에 온 것이나, 도착 시간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박통이 밤 9시까지 한 시간이나 더 기다리게 한 것, 전용기 에어포스 원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환영 나온 박통과는 덜렁 악수 한 번만 나눈 뒤 바로 미군 사단 사령부가 있는 캠프 케이시로 이동해 짐을 푼 것이며, 그리고 우리 정부가 마련한 어떤 환대나 편의도 받아들이지 않고 캠프 케이시에서 저희 장병들과 하룻밤을 잔 뒤 조깅에 연설까지 한바탕 늘어놓고서야 마지못한 듯 청와대로 옮겨간 것 따위, 모두가 사이사이 외신이 흘려준 토픽이나 가십들이 아니었으면 한 끈에 꿰어진 박정희 엿 먹이기로 정리되기 어렵지.

    ‘독재자와의 왈츠’는 그만 추겠다는 정도의 세련된 아메리카 제국판 왕화(王化) 정책은커녕 적이 뿌려주는 전술적 평화의 단맛에 취해 말끝마다 인권을 앞세우고 두 제국의 데탕트만 강조하는 날라리 도덕주의. 국내 뉴스보다 외신이 먼저 보도한 국제사면위원회와 한국기독교협의회가 함께 작성했다는 석방 요구 정치범 명단이며, 거기 대응하는 박통의 미군 철수 동결 및 한국군 군비증강 요구의 세목(細目) 같은 것들도 말이야.”

    황 선배는 이상할 정도의 열성과 집중으로 말을 길게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런 황 선배의 신중함과 진지함이 조금씩 부담되기 시작했다. 길게 쳐서 15년으로 잡고 되돌아봐도 두 사람이 거의 동배처럼 허심하게 속을 털어놓고 얘기한 기억은 별로 없고, 대학 진학 뒤에 몇 번 진지하게 찾아간 적 있다 쳐도, 오래 못 본 사이에 옛 기억은 희미해지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거기다가 그때까지 자신들이 큰 소리로 주고받은 얘기가 만나자마자 사람들 많은 곳에서 그렇게 함부로 떠들어대도 되는 것들인지도 문득 걱정이 되었다. 바깥은 유신 8년차의 우중충한 저물녘이었고, 호텔 커피숍 안은 인근 오피스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저는 지방 신문사에 근무하고, 또 지금은 내부 서열이 낮은 스포츠판(版) 편집을 맡고 있는데, 톱기사 선정과 제호 크기는 대강 데스크 분위기에 따르는 편입니다. 그것도 톱기사는 대개 데스크가 내려주는 대로 받아 와서, 정치판처럼 중앙의 권력 핵심 측근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며, 외신 토픽이나 가십을 모아 어떻게 크고 그럴듯하게 엮어볼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도 저는 형님께 청와대를 출입하니까 들을 수 있는 특종을 귀동냥하고 있다는 느낌에 그저 과분하고 황송할 지경입니다.”

    그는 과장한다는 기분 없이 그렇게 말해 까마득한 후배, 그리고 듣는 사람이란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킨 뒤 황 선배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거기 퇴근해 나오시다 말고 기다려서 주운 외신 이삭은 어떤 겁니까?”

    “이번에 카터가 내놓은 석방 요구 정치범 명단과 박통이 어제 카터에 보냈다는 메시지가 절충되는 과정이었지. 그걸 위해 한미 관계자 간 협의회 구성이 논의됐다고 하는데, 거기 관련해 늦게 들어온 외신이 몇 개 있다기에 그거 알아보고 관계 비서진 반응 한번 찔러볼까 해서…. 200명 넘는 카터의 석방 요구자 명단에서 향후 여섯 달 동안 무려 180명이나 석방하겠다는 박통의 결단도 그렇지만, 석방자 선별을 위한 한미 실무진 협의 문제도 관심 많은 부분이고. 특히 한국 쪽 대표가 누군지는 아주 중요하지.”

    “원칙이 그렇게 타협을 보았다면 그런 실무적인 이행 과정은 부수적인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한국 측이야 대표가 누가 되든….”

    “아니지, 한국 측 대표 곧 협상책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석방 대상이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 심하게는 인원수도 더 늘거나 터무니없이 줄어들 수도 있지. 석방 범위를 좁히고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국내법 적용을 주장하면 180명 아니라 80명도 내보내기 어렵고, 그 반대로 가면 국제사면위원회와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작성한 명단에 오른 모든 정치범에다 덤까지 보태 석방할 수도 있지.”

    “하긴 그러네요. 그래 누구랍디까? 누가 한국 쪽 협상 대표래요?”

    “아직 예측인데, 그 인선이 이미 이루어졌단 말을 듣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청와대 정무 쪽에서 가능성 높게 보는 것은 중정(中情)인 것 같아. 바로 중정부장을 실무회담 대표로 찍는 친구들도 있는가 보더라고.”

    “그렇게 되면 그 석방자 명단 그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왜, 많이 달라질 것 같아?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데?”

    황 선배가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뭔가 기대하는 눈치로 물었다.

    “중정부장 김재규, 혹시 네가 뭐 좀 별나게 아는 거라도 있어? 그쪽 동네 사람이라던데.”

    “이웃의 이웃 동네쯤은 됩니다만 그런 건 없고…. 그저 좀 별난 그 사람 이력 하나를 근래 들은 게 있어서.”

    “좀 별난 이력? 그가 선산 출신으로 박통과는 동향이며, 나이는 아홉 살 어리지만 육사 2기 동기라는 거 따위는 말고. 또 난데없이 사육신에 김문기(金文起)를 넣어 사칠신(死七臣)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김문기와 같은 김녕(金寧) 김씨인 그의 입김 때문이란 소문 따위도 빼고.”

    “그가 일본 해군 항공대에 들어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나갈 뻔했다는 얘기 들은 적은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일본군 어딘가에 지원 입대한 적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게 가미카제 도코다이였다니? 그리고 어쩌다 그런 곳에 지원하게 된 거래? 또 무슨 친일파 얘기야?”

    “그와 안동 농림(農林)학교 동창이었다는 우리 공무국 사람에게서 들은 건데요. 겉으로 알려지기에는 일본해군 항공대 조종사 요원으로 지원해 비행 훈련을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그때는 태평양전쟁 말기라 바로 그 훈련 과정이 가미카제 양성 코스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온 덕분에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는 신세는 겨우 면했지만요.”

    “그런데 그토록 위험한 훈련을 그 양반이 어째서 지원했다는 거야?”

    “그때 안동농림학교는 5년 과정의 구제(舊制) 중학교로 지역에서는 대구사범과 맞먹는다고 우길 만큼 명문이었답니다. 학생들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 섞여 있을 정도였다더군요. 그해 모내기철이 되어 안동의 어떤 부농(富農) 집에 5학년 전원이 모내기 노력봉사를 갔는데, 모내기가 끝날 무렵 논주인 집에서 새참이 나왔답니다. 마침 일본인 학생들은 할당된 모내기를 끝냈고, 조선인 학생들은 조금 남아 있어 조선인 학생장인 김재규는 일본인 학생장에게 새참으로 삶아온 감자를 그들부터 먼저 먹게 했는데, 거기서 말썽이 생겼습니다.

    정말 모르고 그랬는지 알면서 조선인 학생들을 얕보아 그랬는지 일본인 학생들이 새참으로 내온 감자를 자기들끼리 모두 먹어버린 탓이었습니다. 한참 뒤에 모내기를 끝낸 조선인 학생들이 그걸 알고 화를 내며 항의했는데, 그때는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모두 배고플 때라 시비가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조선인 학생장인 김재규는 당연히 그 앞장을 서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일본인 학생장과 담판으로 해결 짓게 됐는데, 거기서 그의 결기와 강단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의 흐름에 취해 자신이 들은 바를 극적으로 엮어가던 그는 문득 그런 자신이 한가로운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약간 객쩍어졌다. 30여 년 전 식민지 시절의 한 지방 도시 구제 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죽은 형의 친구요 대학교 대선배이며 신문기자 중에서도 삼엄한 청와대 출입인 대기자를 10년 만에 정색을 하고 만난 자리에서 장황하게도 늘어놓고 있구나….

    그래서 유도부(柔道部) 주장이기도 한 그 일본인 학생장을 완력으로 당해내지 못한 김재규가 낫으로 등을 찍어 중상을 입히고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 일과, 그를 걱정한 안동 지방 유지들이 모두 김재규를 구명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일, 그리고 경찰서장을 만나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절충으로 가미카제 특공대 지원이나 다름없는 해군 항공대 조종사 훈련소로 가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해가 바로 해방되던 해라 조종 훈련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단기 교육 뒤 소위로 임관돼 억지 가미카제로 죽는 걸 면하고 귀국했으며, 해방 정국에서 소학교 교사로 다시 시작했지만, 국군 창설과 더불어 육사 2기로 군문에 들어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생이 되면서 서슬 푸른 중정부장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 따위를 되도록 간결하게 끝맺었다.

    “형님께서 물으시니 얼결에 들은 대로 전하기는 했습니다만, 촌사람들끼리 주고받는 풍문 이리저리 엮어놓은 걸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이런 얘기나  듣자고 일부러 절 붙잡아두게 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요?”

    황 선배가 무엇 때문인지 잠깐 대꾸 없이 딴생각에 잠긴 걸 보고 그가 더욱 움츠러들어 그렇게 물었다. 황 선배가 그제야 무언가 자신만의 생각에서 퍼뜩 깨어나며 멋쩍게 웃었다.

    “얼마 전 누가 흉보듯 김 부장이 사무라이 소설을 좋아하고 저들의 무사도를 숭상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어서 잠깐 딴생각을 했어. 결기와 강단이란 말도 단기(短氣)란 일본말을 떠올리게 하고. 하면 한다는, 또는 해야 하면 반드시 한다는 그 단기….”

    황 선배가 변명하듯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정색을 했다.

    “이렇게 따로 널 보자고 한 건 네가 별나게 죽은 내 친구 아무개 동생이나 잘난 우리 대학 후배 따위가 아니라 한 작가 아니, 광의의 동업자인 문필업에서의 관심 때문이야. 네가 듣기에 난데없는 소리가 아니려면 이거….”

    황 선배가 그러면서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눈에 익은 표지의 책 한권을 꺼냈다. 중편 두 편을 묶은 그의 첫 소설집이었다. 원고지로 합쳐 850매 남짓인 중편 두 편에다 심사평 두 편과 거창한 해설 한 편을 보태 겨우 본문 인쇄 300페이지를 넘겼는데, 책은 판형과 지질로 솜씨를 부려 제법 두툼하고 무게 있게 보였다.

    “격조 높은 사유와 문장은 고전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아울러 진지함이 그리 흔치 않은 문학적 품성임을 상기시켰다.”

    황 선배는 짙은 갈색 띠지 뒷면에 흰색 고딕체로 추천사를 대신해 실은 심사 후기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은 뒤, 일부러 지은 것 같지만은 않은 감탄사와 함께 한마디 보탰다.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서평을 읽어왔지만 이토록 엄청난 찬사는 읽지 못했다. 신예 작가의 첫 책에 나는 이 소설을 네가 썼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서평 때문에 샀는데, 어제 퇴근길에 사자마자 읽기 시작해 자정을 넘겨가며 다 읽었다. 그리고 아침 출근길에 문화부장에게 어쭙잖은 감동이나 전하려고 갔는데, 거기서 네가 온단 소리를 듣고 문득 만나보고 싶어졌다.”

    “지각한 신인을 동정한 평단의 후의거나 베스트셀러의 환상에 다급해진 출판사의 우회적인 판촉 지원을 너무 후하게 값 쳐주신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검증받지도 않은 신출내기 작가의 책에 아직도 주저 없이 한밤을 내줄 수 있는 형님의 관심과 열정에 저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가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 없이 황 선배의 과분한 찬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렇게 더듬거렸다. 황 선배가 왼손까지 저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란 옛말도 있잖나? 정말로 네 글에는 소설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쓰는 말 위의 어떤 삼엄한 말, 예컨대 번득이는 영감이나 서슬 푸른 기상이 서린 어떤 외침 같은 게. 그리고 이제 세상이 그런 네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왜 아직 대구에 그러고 있냐? 내 알기로 너는 서울서 났고, 국민(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세 번이나, 졸업은 못해도 몇 해씩 서울에서 수학했던 걸로 알고 있다. 네 형은 자신이 고향 경상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걸 제갈량의 육출기산(六出祁山·중원으로 침공하기 위해 여섯 번 기산으로 진출함)에 견주어 ‘오출(五出)서울’로 부르고는 했지. 너도 ‘사출(四出)서울’은 되고 기산에 이르기도 전에 상당한 전과를 올린 셈인데, 앞으로도 그대로 너희 파촉(巴蜀) 땅에 주저앉아 있을 거냐? 네 형 말마따나 아직도 북으로 삼령(三嶺·여기서는 추풍령, 조령, 죽령)을 넘을 생각이 없는 거냐?”

    “실은 이번 서울로 오는 길 내내 ‘돌아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원장단처(故園腸斷處), 내 마음은 이미 고향이나 다름없는 서울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끊이는, 생각하면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땅으로서의 고향 말입니다.”

    “들으니 한시(漢詩) 구절 속의 고향 같은데, 나는 그런 관념적이고 감상적인 고향을 물은 게 아니다. 현실적으로 네 삶이 뿌리박은 땅, 네 가족이 살고 네 삶의 중요한 거래처가 모여 있으며, 행정적으로는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곳 말이다. 네 식으로 말하자면, 톨게이트를 지나거나 터미널에 내릴 때 자신도 모르게 아,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드는 그런 곳 말이다.”

    그 말에 퍼뜩 깨어나듯 그도 현실적이 되어 받았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라면 아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변두리 고시학원을 전천후(全天候) 강사로서 2년 떠돌아 겨우 두 칸 전세방에 남은 가족 다섯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구에서는 그래도 반듯하게 행세한다는 지방 신문사 기자로 전셋집에 살며 여섯 가족의 호구를 간신히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으로 받은 상금과 인세를 합쳐 그럭저럭 제 기자 봉급 3년치는 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제 가족의 장구한 삶에 아무런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거라면 여기 와서도 좀 더 나은 새 일자리를 찾으면 되지. 요즘 언론사 크게 많은 봉급은 아니라도, 몇 식구 호구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너 정도의 문필 이력이 덧붙는다면 지방 신문사보다야 여기서 견디기가 훨씬 낫지. 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는 게 기껏 그런 이유라면 지금부터라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마침 요즘 세상이 물밑으로 묘하게 요동치면서 특히 변화에 민감한 언론계에는 은밀하지만 새로운 변화와 그 방향성에 맞춘 이합집산의 움직임이 있어. 너도 움직여볼 생각이 있다면 네가 옮긴 걸 후회하지 않을 만한 곳으로 내 한번 알아보지. 실은 편집국장한테도 네 얘기를 한번 해보려고 했다. 속된 말로 물고기도 큰물에 놀아야 대물로 자라게 되는 거야.”

    황 선배가 그렇게 말을 맺어놓고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너 결혼하고 애 둘이란 건 신문에서 봤다만 다섯 식구 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누구야? 어머니 네가 모시고 있어? 누나와 여동생도 있지 않았나?”

    “누님과 여동생은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고, 어머님만 제대 이후로는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아, 어머님, 그분 참 대단하신 분이지.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난다. 64년도 너희 그 황무하던 개간지. 그때 어머님이 주신 그 1000원, 정말 요긴하게 썼다. 너희 호밀 볏짚 이엉 이은 오두막 살림 몹시 어려워 보였고, 어머님은 어디서 그 돈을 취해 오셨다고 했는데, 그게 빌려왔다는 뜻인 줄은 나도 금방 알았어. 그런데 그런 산골에서 그때로는 적잖은 돈을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빌리신 거래?”

    “제가 아는 바로는 형님이 상록수 상 부상(副賞)으로 받은 시계를 마을에서 돈놀이하는 아주머니한데 맡기고 빌리신 거랍니다.”

    그러자 황 선배의 얼굴에는 무언가 아련하고 애틋한 상념에 빠진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손목시계를 힐긋 보더니 탁자 위에 놓아둔 종이봉투를 챙겨 들며 말했다.

    “실은 오늘 저녁 너하고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틀렸다. 7시에 외신기자 클럽에서 무슨 모임이 있다고 하는데 카터가 또 무슨 되잖은 소리 한 게 있는지 귀동냥이라도 해봐야겠다. 그리고 너 서울 올라오는 거 다시 한 번 숙고해봐라. 진지하고 성실하게보다는 야심 차고 공격적이게. 가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듯한 네 삶을 바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어머님께는 안부 전해다오. 네가 서울로 옮겨 살게 되면 어머님을 한번 찾아가 뵈올 수도 있겠지. 이번은 언제 대구로 내려갈지 모르지만, 조심해 가거라. 다음에 서울 올 때는 꼭 내게 먼저 연락하고.”




    3.
    황 선배와 헤어진 뒤 뉘엿한 햇살에 벌겋게 물드는 빌딩 창문들을 바라보며 거리에 홀로 남게 되자 그는 잠시 낭패한 기분이었다. 그에게는 서울의 도심 가운데서도 가장 도심으로 여겨지는 세종로 사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갑자기 길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자, 이제 어디로 간다…. 거리가 가깝기로는 종각 쪽에 있는 출판사지만, 시간이 이미 6시를 넘기고 있어 가더라도 내일 일정을 절약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은행이 문 닫은 뒤라 이런저런 회계 정산도 틀렸고, 첫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이자 등단 넉 달 만에 첫 문학상을 안겨주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재확인해준 셈이 된 잡지사 발행인도 그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도 거기서 만나게 될 새로운 인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로 향하려는 그의 발길을 힘 빠지게 했다. 그때는 아직 문을 연 지 네댓 해밖에 되지 않는 출판사였고 발간하던 계간지도 당시 셋뿐이던 계간지 가운데 하나라 ‘삼대 계간지’에 끼게 된 것이지만, 원래 좁은 출판사 사옥인 데다 사장실이 따로 없는 네 평 남짓한 소회의실 겸 응접실은 언제나 이런저런 사람들로 붐볐다. 선배 작가들, 시인들, 그리고 주로 대학교수직을 겸하고 있는 평론가들에 문화부 기자며 그 밖의 여러 문화관계인이 드나들었는데, 그에게는 문단 선배와 평론가 선생들을 만나는 것이 특히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도 그가 도착할 6시 반 무렵이면 이미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적었고, 남아 있다 해도 그들을 찾아보려면 근처 술집을 뒤지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약속을 만들기도 마땅찮은 시간이었다. 대구 집을 나설 때, 마음속으로는 그날 저녁시간이 비면 이번에는 누님 집을 한번 찾아가 하룻밤 묵고 아침이라도 한 끼 같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각에 한군데도 편한 구석이 없는 누님네 시댁 아파트를 찾기는 정말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때 그야말로 불현듯 지난번 서울에 왔을 때 만난 대학 동기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달포나 지났나. 그날은 별나게 텔레비전 인터뷰가 있어 정동 쪽에 있는 방송국으로 갔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거기서 녹화를 마치고 나오다가 무슨 프린트물(物) 책자를 한아름 안고 지나가는 낯익은 얼굴을 하나 만났다. 저편도 그를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보며 알은체를 했지만, 이름을 얼른 떠올리지 못해선지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 입속으로 웅얼거리기만 했다. 결국 입을 먼저 뗀 것은 그쪽이었다.

    “야, 한촌(寒村),”

    그가 그렇게 상대를 부르자 그쪽에서도 바로 대꾸가 나왔다.

    “어이. 소, 소용자(所用者)”

    그러면서 흰 이를 드러내고 소 같은 웃음을 웃으며 다가왔다. 한촌은 ‘한심하고 촌스럽다’의 약자로, 남쪽 바닷가에서 서울로 올라온 상대의 투박하고 소탈한 모습을 놀려 그때의 급우들이 지은 별명이고, 소용자는 그 시절의 턱없는 오기와 허세를 빈정거려 급우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급우들이 그의 잦은 폭음이나 위태로운 돌출 행동을 나무라면 그는 대뜸 ‘천불양무소용자(天不養無所用者·하늘은 쓸모없는 자를 기르지 않는다)’를 무슨 영험한 주문처럼 외쳐댔고, 그러면 급우들은 금방 크게 깨달은 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빈정거렸다. 아, 참, 너는 쓸모 있는 놈(所用者)이었지, 하늘이 기르는….

    “야, 너 여기서 뭐하냐?”

    그가 거의 10년 만에 만나는 데도 어제그제 헤어진 것처럼 별 변화 없는 그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풀려 그렇게 소리쳤고 그쪽에서도 동시에 물어왔다.

    “신문 잡지에 발표된 이력이 묘하게 아리까리해 한번 알아본다고 하면서 미뤄왔는데, 정말로 불휴(弗休)가 휴(休)였구나. 그 이름에, 퍼질러 쉰다거나 끝장이라는 따위 말고 무슨 대단한 딴 뜻이 있다며 뻐기더니, 이제 그만 소설로 그 대단한 뜻을 대신하기로 했냐? 아니, 도당위원장께서 하사하신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변조해도 되는 거냐?”

    도당 위원장은 남로당(南勞黨) 무슨 도당(道黨)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6·25전쟁 때 행불(行不)이 된 아버지를 가진 그 친구가 어쩌다 ‘애비는 남로당이었다’는 과우(科友)를 알게 되면 그들의 아버지에게 어김없이 붙여주는 남로당 당직이었다. 도당위원장이 하사했다고 하는 말은 그 이름을 남로당인 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뜻이 된다. 그가 기억하기로 그때 서른 명 과우 가운데 ‘애비는 남로당이었다’는 친구는 대강 대여섯 되었는데, 그 친구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거기다가 그와는 한 해 남짓 문학 서클을 함께했고, 동인지에 나란히 글까지 실은 적도 있다,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한촌거사(居士)와 방송국 딴따라 일이다. 그런데 한촌거사가 왜 여기서 어정거리냐? 그리고 한아름 안고 있는 건 뭐야?”

    “아, 이거? 채택되기를 기다리며 피디(PD)실을 돌아다니는 대본들이다. 나도 어정거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피디를 지원해 입사 3년차를 넘겼으니 이제 입뽕은 해야지.”

    “그럼 우리 한촌거사가 바로 그 드라마 피디님이 되는 거야? 그런데 어정거리며 돌아다닌 건 뭐고 입뽕은 또 뭐야?”

    “이제 나도 우리가 10년 만에 처음 만난다는 게 실감 나는구나. 학교 떠난 그 이듬해 가을인가, 네가 어느 절에 있다가 장날에 읍내 나와 쓴다며 달랑 장난 같은 엽서 한 장 보낸 걸 끝으로는 연락조차 없더니…. Nigimi-ssibio란 영문 추신 달린 엽서.”

    그 친구가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소리 없는 웃음을 웃고는 느긋한 소리로 덧붙였다.

    “이러다가 내 팔 다 빠지고, 이 동네서도 또 한촌 소리 듣겠다. 3층에 커피도 파는 휴게실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기다려, 이거 내 자리에 갖다놓고 곧 따라 내려갈게.”

    그도 다음 일정까지 여유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 친구와 그대로 헤어지기는 싫었다. 3층 휴게실로 가자마자 전화를 걸어 다음 일정을 30분쯤 늦추었다. 몇 분 안 돼 뒤따라 내려온 그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던 얘기를 이어가듯 말했다.

    “어정거렸다는 건 교직 의무 연한을 다 채우고 왔다는 뜻이야. 너, 우리가 대학 때 받은 등록금 감면 그거 공짜 아니다. 반드시 중등교원으로 2년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부 장학금이었다고. 우리 도당위원장 겨우 세 돌 지난 나와 스물두 살 어머니 버려두고 내빼 야산에서 죽었는지 북쪽으로 달아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병력자원으로서의 나는 부양가족이 있는 독자(獨子) 아니냐? 덕분에 군대 면제받아 72년에 대학 졸업하고 바로 고향 내려가 중학교 접장질을 시작했지. 섬마을 선생님으로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살다 보니 금세 3년이 훌쩍 지나가데. 그사이 교직이수 의무기간도 끝나고. 그런데 어느 날 신문 구직란을 보니 벌써 내 나이가 구직(求職) 시험 데드라인에 걸려 있더라고. 왜 그때는 만 스물여덟이 취직 시험 상한이었잖아? 갑자기 뭔가 후끈 달아오르는 게 있어 방송국 시험을 쳤지.”

    “그런데 왜 하필 방송국이고 드라마 피디야? 한촌거사, 그때 네가 우리 동인지에 소설 실은 것 나도 기억하는데, 너희 도당위원장한테 버림받은 얘기 같은 거.”

    “그랬지. 그랬는데 말이야.”

    그 친구가 그렇게 기세 좋게 받다가 갑자기 무얼 생각했는지 간결하고 실무적인 어조가 되어 물었다.

    “우리 ‘소용자(所用者)’ 선생, 아직 지방에서 서울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은데,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나? 특히 봉급쟁이들 일과 이후가…. ”

    그때는 그도 조금 전에 전화로 얻어둔 30분 말미를 떠올리고, 길어질 것 같은 그 친구와의 대화에 은근히 다급해져 가고 있을 때였다. 마침 잘 물어주었다는 듯 아직 남은 그날 일정을 밝혔다.

    “실은 한 시간 뒤쯤  대학로 부근에서 문예지 대담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게 끝나면 이번에는 밤차로 대구 바로 내려가야 해. 지난달에 또 금, 토 이틀 묶어 우리 신문사에 농땡이 쳤거든.”

    “실은 나도 다음 프로 제대로 나가려면 30분 안으로 뭐 하나 똑바로 알아보고 시놉시스 새로 짜내라는 소리를 듣고 나왔어. 내일 나갈 시사만평 지금대로 그냥 두면 샤우도(샤프트) 나갈 구성이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주둥이 석 자에 꼬리가 닷 발이라 안 되겠다. 우리 오늘은 이만하고 따로 날 한번 잡자. 너 다음에 언제 올라 오냐? 그때는 이 한촌거사도 아예 네 일정에 끼워주라. 나도 연락만 주면 대가리가 터져도 어떻게 시간을 내볼게. 그래서 한잔 꺾으며 옛일, 요즘일 얘기나 질펀하게 나눠보자.”

    그는 그때 덥석 물듯 그 제의를 수락했지만 이번에도 그 친구와의 추억담 후일담을 위한 여유를 일정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조금 전 갑자기 일정이 뒤틀려, 경우에 따라서는 온밤을 빼낼 수도 있게 되자, 먼저 그 친구부터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이미 오후 6시 반을 넘긴 시간을 걱정하며 방송국으로 전화를 넣었으나 다행히도 한촌거사가 받았다. 하지만 급작스레 꾸민 일정이라 페널티가 있었다.

    “광화문 부근이라고? 그렇다면 일단 우리 뭉치자. 한데 네가 이리로 와라. 다음 프로 펑크 안 내려면 오늘 야근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조금 쥐어짜면 두어 시간은 너와 저녁 겸 술 한잔 꺾을 수 있다. 아무리 천하의 이불휴라도 미리 연락하지 않은 죄가 있으니 그만 벌점은 감수해라. 미루면 또 언제가 될지 몰라. 나도 무리해 짜낸 시간이다. 너를 보낸 뒤에는 또 방송국에서 날밤 새울 각오를 하고.”


    4.
    그 친구가 전화에서 일러준 약속 장소는 그 방송국에서 예전에 러시아 정교 성당이 있었다는 정동 쪽으로 내려오는 골목 어귀에 있는 일식집이었다. 어렵게 잡은 택시로 방송국 앞에 내린 그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돌이켜보니 어떤 구체적인 기억도, 그 기억이 가능한 사건이나 인연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친구는 벌써 와 있었다. 넓지 않은 실내 한구석의 네 사람이 쓸 탁자 하나를 차지해 이것저것 정갈한 쓰키다시 한 상에 회 한 접시를 받아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퇴근 무렵이라 택시 잡기 어려울 것 같고, 택시를 잡아봤자 걷기보다 많이 빠를 것 같지도 않아 먼저 한잔했지. 너도 다짜고짜로 한잔해라. 저녁은 이따 보아 스시나 몇 점 하거나 메밀소바로 때우기로 하고.”

    그 친구가 빈 잔에 맥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좋지, 술상이 우리가 함께 받아본 상 가운데서는 가장 고급스러운 상이라 좀 서먹하기는 하다만.”

    “도시락을 안주로 카바이트 막걸리 나눠 마시던 시절로부터 벌써 10년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너나 나나 그동안 먼 길 고단하게 걸어왔으니, 이만 술상 받은 거 가지고 너무 청승 떨지 마라.”

    그런데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이 문득 지난번 만났을 때 2년 동안 중등교원으로 근무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을 어정거린다는 말로 표현했던 걸 기억나게 했다.

    “그러면 어정거린다는 말이 먼 길 고단하게 걸어왔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되냐? 그때 교직 이수하는 것 말고 무슨 길을 그리 고단하게 걸었는데? 또 지난번에 왜 소설 쓰기는 그만두고 방송국으로 가게 됐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너는 대답 않고 다시 만날 다짐만 했지. 그래, 네 소설은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그때 말한 방송국 피디의 입뽕은 또 뭐고?”

    “실은 중학교 접장질한 그 3년, 생판 어정거리기만 한 건 아니고 뿔 빠지게 소설도 써봤지. 어쩌면 오지게 멀고 고단한 길을 압축해 걸은 3년이라고 봐도 돼. 그런데 여기저기 투고해봐도 뭐, 도통 안 되더군. 당선은커녕 후보작으로 한번 거론도 못 돼봤어. 그러다가 그 봄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 없는 가작을 낸 게 격려가 돼 방송국 피디를 지원하게 됐지. 입뽕은 입본(立本)의 일본식 발음일 거야. 어쩌면 입본조차 일본말일지도 모르고. 영화판에서는 감독으로 첫 영화를 찍는 걸 말하는 데, 우리도 그 말을 써. 드라마 쪽 피디로 첫 작품을 찍는 건데, 이판에서는 나는 늦은 편이야. 조연출로 소품(小品)들고 왔다갔다 하다 보니 그새 또 3년이 지나간 거지.”

    대학 다닐 때는 낯도 좀 가리고 말수도 많지 않던 친구였으나, 몇 년 방송국에서 부대껴 그런지 아니면 여러 해 만에 만난 어설픈 옛 동인(同人)이 반가워서인지 한촌은 한참이나 더 너스레에 가까운 후일담을 이어갔다. 그사이 제법 많은 술잔이 오고가 그도 조금씩 취해가는 듯했다. 하지만 무언가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취기를 단속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훌훌히 떠나더니, 작별조차 없이 사라지더니 그 시퍼런 사법시험은 어쩌고 이렇게 다시 작가 이불휴로 돌아왔나? 그때 그 시험 합격하면 국가를 상대로 평생 소송이나 하면서 살겠다고 하지 않았어? 도당위원장 때문에 판검사 임용 거부하면, 변호사 자격 얻는 그 즉시로.”

    “사정변경의 원칙이라는 것도 있잖나? 그게 내 뜻같이 되지 않더군. 얘기하자면 길어. 학교를 떠나고 한 10년 이리저리 몰리다가 하나 남은 화살을 사소한 분개에 떼밀리듯 쐈는데 실은 그게 운 좋게 과녁을 맞힌 기분이야.”

    “그 등단 소감 한번 묘하네. 매스컴으로 흘러나온 것은 그렇지 않던데. 자못 비장하고 결기 서린 걸로 기억되는데.”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다 조금씩 상기되기도 하고 때로는 목소리까지 그럴듯하게 떨리는 법이야.”

    “새 책 나오고, 대단한 기세로 나간다는 소문이던데. 그래, 이제는 무명(無名)처럼 가난하고도 작별한 거야?”

    아마도 신춘문예 등단 소감이 들어 있는 구절을 걸고 드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는 그걸 그 친구가 그만큼 주의 깊게 그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별로 껴듣지 않았다.

    “아직은 몇 푼 안 되는 상금이 인세보다 더 많아. 6인 가족의 중요한 생계는 여전히 지방 신문사 기자 월급에 기대고 있고.”

    “하기는 이제 겨우 등단 일곱 달째지. 이거 내 선망이 지나쳤나.”

    그 친구가 그래놓고 제법 자기 분석적이 되어 말을 이었다.

    “아마도 남아 있던 아이들 사이의 추측이나 우려가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뒤에 돌아온 네게 보이는 별난 관심일 수도 있을 거다. 돌아보면 우리가 모두 학교를 떠날 때까지, 먼저 떠난 너를 무던히도 걱정하고, 더러는 부러워하기도 했지. 그 뒤 근래까지 너를 아는 동문들끼리 주고받은 풍문과 추정들도 요란했고.”

    “어떤 거였어? 뭐라고들 하디?”

    “누구는 네가 랭보처럼 외항선을 타고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고, 누구는 일본으로 밀항해 거기서 너희 도당위원장을 만나고 그를 따라 공화국으로 넘어갔다고도 했어. 어떤 엉뚱한 친구가 소문 듣기로는 마호메트처럼 돈 많은 과부 만나 의붓자식 친자식 합쳐 다섯이나 거느리고 성주처럼 산다던가.”

    “그래도 내가 그눔의 시험 일찍 때려치운 건 모두가 감 잡았던 모양이네. 망해도 아주 망한 건 아니란 것까지는.”

    “끝까지 간 것도 있었어. 네가 이래저래 안 되자 법원서기 시험을 쳐 지방 도시에 처박혔다던가, 사법서사로 쪼그라들어서도 여전히 고시에 열중하고 있다던가…. 누구는 몇 번 시험에 떨어지자 홧김에 월남전에 지원해 종전 직전에 전사했다고도 하고.”

    한촌이 거기까지 말해놓고 비로소 실무적인 방송인으로 돌아가 말을 맺었다.

    “네 후일담 얘기 끝나면 우리 ‘창작시대’ 동인 얘기부터 시작해 68학번 동기 서른 명 현황 파악까지 다 하려들겠지. 하지만 오늘은 미안하다. 미리 말했듯, 아무리 10년 만에 만난 ‘쓸모 있는 놈’이라도 나는 그런 시시콜콜한 옛날 얘기로 여기서 너와 밤새워 퍼마실 형편이 못된다. 이 몸에게는 하루빨리 한촌거사 면하고 입뽕 선생 되는 일이 급하다. 10시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궁금한 것부터 순서대로 조리 있게 물어 시간을 절약해라.”

    그도 한촌거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들은 말이 있어 어느 정도의 질의 항목과 순위를 정해놓고 있었다. 먼저 떠오르는 대로 그 친구에게서 듣고 싶던 것을 물었다.

    “73년 초쯤 하가와 69학번 정석이 어떻게 묻고 물어 내 신혼집을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들으니 창작시대 동인들이 주축이 되어 김형 유작집(遺作集)을 내준다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됐냐? 시비(詩碑)도 어디 세운다고 하던데.”

    “작품집은 이듬해 내가 주동이 돼 만들었다. 그러나 김형이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가 아니고 제작비 모금도 잘 안 돼 정격의 소설 작품집은 못됐다. 시비는 다시 그 한 해 뒤 후배 동인들이 김형의 ‘꽃’ 연작 5를 기왓장만 한 쑥돌에 새겨 교정 어디에 묻으려 했는데 학교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시비는 ‘꽃이여/ 내가 죽어 홀로 걷는 저승길/ 스무사흘 달무리처럼이나 곱게 피어라…’ 그 구절이겠지. 합평회에서 김형이 처음 그 시를 발표할 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어. 사위스러운 느낌이 드는 게 시참(詩讖) 같기도 하고, 심하게는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 났으니 묻는 거지만, 우리 학번 졸업은 몇 명이나 했나? 내가 떠날 때도 벌써 네댓 명 안 보였는데.”

    “졸업식장에서는 열일곱. 나중에 복학, 복교, 복적 해서 졸업한 아이들이 대여섯 더 있다 소리 들었고.”

    “강의실 흑판에다 크늘프로 낙서하던 친구는? ‘그때 크늘프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애절한 구절 끝에 적힌 날짜가 하필 만우절이라서 몹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독일어로 낙서하고 친절하게 번역까지 달기도 했지. 아인잠카이트 이스트 마이네 하이마트(고독은 나의 고향이다). 쇤 이스트 유겐트(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다가 고트 이스트 토트(신은 죽었다)! 누군지 짐작은 가도  말을 붙여보지 못해 그랬는지, 그 친구 이름이 기억 안 나네.”

    “아, 그 친구. 그때 우리 동기 여학생 가운데 하나를 짝사랑했는데, 그 아가씨가 재학 중에 결혼해 학교를 떠나는 바람에 정신병원으로 갔지. 둘 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 졸업했다는데, 이름은 말하기 뭣하네. 아이들에게 제법 충격을 준 사건이었는데.”

    “하가 하고 정석이 그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겼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둘 다 휴학과 복학을 되풀이해서 몇 해 늦게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좋은 데 배정받았지. 그런데 그 뒤를 또 몰라. 하가는 강북 명문에 떨어졌는데, 학원가 출강에 맛을 들여 몇 해 재미를 보다가 자신이 학원을 차렸다는 소문을 끝으로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반면에 정석이는 우리 동기도 아닌데, 그 유명한 결혼으로 하가보다는 자세하게 근황을 알지. 강남의 새로운 명문 고등학교로 간 그는 무슨 연수인지 교육인지로 한국에 온 일본 여자와 사귀다가 결혼해 쌍칠(77)년도 여름 일본으로 갔어. 사다코(貞子)라던가. 그리고 거기서 다시 공부를 더해 지바 대학인가 어디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게 내가 들은 마지막 소식이야.”

    “이튿날 되게 무서리가 내린 아침/ R씨는 목관에 실리어 지구를 탈출하였다…. 어느 찌는 듯한 여름 아침/ 우리 정석은 사다코에게 얹혀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그런데 언젠가 도화지에 물감으로 인공기(人共旗) 그려 벽에 걸고, ‘김일성 만서이’ 하다가 도루묵 엮이듯 떼로 잡혀간 영문과 열사(烈士)들은 어떻게 됐지? 그 사건, 절에서 날짜 지난 신문으로 읽어서.”

    “이제는 다른 과 아이들 안부까지 묻는 걸 보니 어지간한 모양이구나. 네가 말한 그 일은 내가 눈여겨보지 않아 어떻게 마무리졌는지 모르지만, 그 떨거지 중에서 운동권이라고 부를 만한 최초의 노동운동가가 나온 것만은 들어 안다. 그런데 너….”

    “뭔데?”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그 친구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그가 먼저 물었다.

    “끝내 세실리아는 묻지 않는구나. 그쪽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야? 아니면 아직 남은 상처가 있어 그게 건드리는 게 겁나는 거야?”

    “글쎄.”

    그는 진심으로 자신도 애매한 기분이 되어 그렇게 대꾸하고 공들여 그 뒤를 이었다.

    “둘 다 아니지만 까닭을 말하려니 영 어렵구나. 실은 전혀 물어볼 생각을 안 했어. 아주 잘 마무리된 일의 추억 같은 것이었거든”
    “잘 마무리되었다고? 너 떠날 무렵 걔를 보는 표정 꽤나 복잡해 보였는데. 나중에 걔한테 보낸 네 엽서도 그랬고.”

    그사이에도 찔끔찔끔 나누어 마신 술로 제법 불그레해진 그 친구가 다시 살피는 눈길이 되어 그를 보며 그렇게 반문했다.

    “엽서?”

    “필기 대신 어디서 인쇄된 걸 오려 붙여 만든 엽서였는데, 걔는 장난으로 받아들여 내게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그렇지가 않았어. 그래, 몇 구절 기억난다. 사람의 아들이여, 이제는 머물 곳도 떠날 곳도 없더라. 그래도 날은 다 되었고, 너는 떠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뭐 그런 잠언시 같은 거였는데.”

    “그거 아마 신문의 ‘일요시단’ 같은 난에 실린 어떤 신예 시인의 시였을 거야. 그런데 그게 그렇게 구절까지 기억할 만큼 심각한 미련 같은 걸로 읽혔어?”

    그때 계산대 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김 피디님 전화예요. 방송국인가 봐요.”

    그러자 얼른 벽시계를 살핀 그 친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젠 들어오라는 재촉 같아. 그만 일어서지. 다음에 한 번 더 날 잡자. 그때는 옛날 친구들도 몇 모으고. 그래도 우리 앞뒤 세 학번으로 보면 등단한 친구도 서넛 있어. 천하의 이불휴만큼 뜨르르하지는 못하지만.”

    시계를 보니 그 친구가 진작부터 말한 10시라 그도 군소리 없이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식당 앞 어두운 골목에서 방송국 쪽으로 올라가는 그 친구를 보내고  정동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취하도록 마시지 못한 술과 다 풀지 못한 회포가 은근한 아쉬움이 되었다. 그래서 적당한 술집이 나타나면 혼자서라도 들어가 몇 잔 더 마시려고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저만치에 문득 솟은 듯 낯선 양식의 건축물이 눈길을 끌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드러나는 스카이라인으로는 띄엄띄엄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붉은 벽돌로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군(群)이었다. 정동(니콜라스)성당이던가, 성공회성당? 그는 술기운에 얼얼한 머리로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어느 쪽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군데 성당 양식도 교회당 양식도 아닌 건물을 구별하게 되면서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성당 부설이에요. 대학생 기숙사. 여학생만 써요. 저녁 10시 귀가예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반짝 불이 켜지듯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사람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되도록 캠퍼스에서 멀리 떠나 같이 있기를 좋아하던 시절의 세실리아였다. 시민회관에서 9시 반에 끝나는 공연을 보고 함께 그 기숙사로 돌아갔는데, 종종걸음을 쳐서인지, 시계를 잘못 보았는지, 15분이나 남기고 기숙사 출입문이 보이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럼 저기서 10분만 더, 하고 부근 다방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 때문에 기숙사 귀가시간을 어기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둘 모두 무슨 일에 혼이 빠졌던 것인지, 하던 얘기를 멈추고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는 기숙사 문 닫는 시간에서 20분이나 지난 뒤였다.

    “길 건너 담 모퉁이에서 내가 들어가는 거 지켜봐주다가 떠나세요. 어쩌면 저 문, 두드려도 안 열릴 수 있어요.”

    그녀는 기숙사 철문 쪽으로 종종걸음 치며 그렇게 당부했다. 어두운 담 모퉁이에서 그때 그는 차라리 그 철문이 열리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던지. 조금이라도 함께 더 있기를 바라는 단순한 희망 하나로. 저물기 전 그곳을 지날 때 느꼈던 기시감(旣視感)은 결코 엉뚱한 게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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