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임명주 역,
이루, 2013
책 읽는 뇌
매리언 울프, 이희수 역,
살림, 2009
지난 석 달간 이 연재를 통해 독서의 기본인 책 고르는 법과 읽는 법에 대해 생각해봤다. 때로는 사냥감 고르듯 치열하게 책을 고를 것을, 때로는 책을 샅샅이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돼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는 것을, 때로는 책이 내는 지엽말단의 소음에도 귀 기울일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이야기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책과 독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 책, 완전체인 어떤 것
우선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시작해보자.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는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독서의 유용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오해와 편견과 불순한 의도에 의해 책을 읽는 다양한 경우를 제시하며 그것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독서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책을 읽는다고 비열하고 교양 없는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으며, 반대로 선한 사람이 나쁜 책을 읽는다고 해서 악인이 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독서는 그리 유용하지도 못하다. 독서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많으며 명예나 돈을 얻으려면 독서에 시간을 쓰는 것은 그리 추천할 일이 못된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독서를 많이 한다거나 나이가 든다고 해서 독서의 기술이 나아진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재차 확인시킨다.
또한 우리는 때로 위안이나 힐링을 위해 책을 읽지만 독서는 인간을 전혀 위로하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사라질 고통 따위는 애초에 그리 심각한 고통이 아니다. 절망에서 구원하기보다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 그나마 책이 줄 수 있는 유용함이라고 전한다. 단치에 따르면 독서는 오히려 매우 이기적인 행위다. 독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은 왜 존재하는가. 단치는 책을 일종의 완전체로 파악한다. 그 가치나 영향력이 어떻든 책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고자 만들어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저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책이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면 의도를 품게 되고, 도구로 전락해 질이 낮아진다. 이런 경우 독자는 모욕감을 느끼고 책은 저자가 의도한 주제와도 멀어진다. 재능 없는 작가가 자기만족을 위해 쓴 실패한 책들은 때로 독자 차원에서 고쳐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철저히 무용의 존재론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것이 사유의 최전방에 선 완전체로서의 책이다.
# 독서, 뇌 진화의 증거
그렇다면 독자는 완전체로서의 책을 어떻게 온전히 독서할 수 있는가. 여기에 제시되는 방법 역시 상당히 고전적이다. 좋은 독자는 읽으면서 쓰는 이다. 출판 편집자와 인쇄업자가 책에 남긴 여백과 틈새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으며 자신만의 주석을 단다. 이러한 독자 고유의 암호와 부호와 문신이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소유하게 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독자의 이기심 또한 충족된다. 이기심이 충족된 이후에야 책이 가질 수 있는 여타의 이타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이렇게 육체의 수고와 책의 물질성에 의존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을 고수하는 독자에게 최근의 데이터화 된 책과 각종 전자 기기 속의 책은 암담한 미래일 것이다. 그래서 ‘왜 책을 읽는가’의 결론에는 “결국 모든 것은 소멸하리라!”는 묵시론적 자조가 드러난다.
어쩌면 독서 행위 시 나타나는 뇌의 화학작용을 관찰하는 과학적 접근법이 책의 멸종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새로운 알고리즘이 될지도 모르겠다.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는 사실 난독증에 관한 책이다. 문화와 인종을 막론하고 종종 나타나는 난독증이 창의성의 방증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난독증의 원인은, 대부분의 사람이 독서에 사용하는 뇌의 영역을 소수의 사람은 사용하지 않는 데에서 나타난다. 소수의 특별한 난독증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일반적인 독서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수가 공유하는 독서 경험이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지적 진화(intellectual evolution)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울프는 독서를 ‘독서 프로세스’라고 하며, 이것이 인류 각각의 머릿속에서 일어나지만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문화적 발명’이자 ‘독서 혁명’이라고 말한다.
독서란 한 개인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정신의 진화인 동시에 다수가 공유하는 사회문화적 발명이자 혁명이라는 것. 왜 그런가. 이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지시와 상징이던 문자가 체계를 잡아가는 것이면서, 그 문자 체계가 공통의 상상력과 추상성을 발휘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passing over) 과정에 모두가 합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추상적 문자가 만들어놓은 법칙을 활용해 자의식을 버리고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와 다른 사람으로 구성된 책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것도 인류의 다수가 문자 패턴을 동일한 시각 표상으로 읽어내고, 동일한 뉴런 연결 과정을 통해 동일한 뇌의 부분을 사용해, 같은 사고의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책의 문자를 독해하는 독서 과정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이 개개인의 과정인 동시에 다수의 공통된 사항이 되기까지는 수천 년 동안 혁명에 가까운 진화와 발명 과정을 거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 과정에서 난독증을 겪는 돌연변이들은 때로 독서를 비약적으로 진보시킨다. 그들 소수자의 독서는 다수가 사용하지 않는 뇌를 사용해 이루어진다. 본인들만이 사용하는 뉴런의 연결 과정과 뇌의 회로들이 진부해진 문자와 표상의 세계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 독서의 정신 구조에 혁명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앨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등은 모두 심각한 난독증을 겪었으나 그들만의 독서법으로 기존의 정신 구조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나는 왜 일반적인 독서 프로세스를 진보로 이끄는 난독증을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일까. 지금 여기 우리의 책과 독서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바뀌든 독서는 계속될 것이며 발전과 진화를 거듭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기 위해서다. 객관적으로 확보된 그간의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서 말이다.
최근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에게 독서란 주로 모니터 읽기와 스마트폰 보기다. 그러면서 그들이 때로 아날로그적 독서에 난독증 증세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서의 뇌가 겪어온 오랜 진보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지금의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어쩌면 창의적 난독 과정을 통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구성하는 와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또 다른 독서 혁명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