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가 의도적인 유전자 합성의 결과라면 후자는 화학물질 불법 배출의 의도치 않은 결과다. 또 ‘설국열차’에서 미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곤충 양갱’을 등장시켰다면 ‘옥자’에선 인간친화적 슈퍼돼지를 등장시켰다. 전자가 시각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후자는 정서적 거부감을 유발한다. ‘옥자’는 이를 토대로 오늘날 공장식 축산농장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미란다는 미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그 일환으로 태어난 새끼 슈퍼돼지를 세계 곳곳에서 전통 사육법으로 키우게 한다. 그렇게 강원도 산골소녀 미자(안서현)와 자매처럼 함께 자란 옥자는 뉴욕에서 미란다가 개최하는 품종 대결에 억지로 끌려가 ‘강제 짝짓기’와 시식용 신체 추출에 이어 도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런 옥자를 구하기 위해 다국적 동물보호단체 ALF와 손잡고 미국으로 건너간 미자의 ‘옥자 구하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일반 돼지보다 대여섯 배 커 보이는 옥자가 햇살 부서지는 강원도 산골에서 미자와 뛰노는 장면이 실사를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틸다 스윈튼과 제이크 질레할, 폴 다노 같은 해외 유명 배우들이 한국 감독을 위해 기꺼이 망가지며 블랙코미디를 펼치는 점도 유쾌하다. 하지만 본질은 생명과 감정을 지닌 가축을 언제까지 인간을 위한 육류 공장의 생산 재료로만 취급할 것인지, 또 그것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 질문이다. 아쉬운 점은 이런 질문을 실제 돼지가 아니라 가상의 거대 생명체를 통해 제기함으로써 현재진행형 질문이 아니라 언젠가 미래에 답해야 할 질문으로 우회한 점이다.
‘옥자’가 묻고 ‘호모 데우스’가 답하다
이런 통찰은 인간을 위한 희생이 당연시되던 가축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꾸게 만든다. “인공지능이 스스로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을 착취하고 심지어 죽여도 괜찮을까? 아무리 뛰어난 지능과 성능을 지닌 컴퓨터라 해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면, 인간이 돼지를 착취하고 죽이는 것은 윤리적인가? 인간은 더 높은 지능과 더 강한 능력에 더하여 돼지, 닭, 침팬지, 컴퓨터 프로그램과 구별되게 해주는 마법의 광휘라도 갖고 있는가? 갖고 있다면 그 광휘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인공지능이 그런 광휘를 획득하지 못한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20세기 과학자들은 그 광휘를 찾기 위해 온갖 연구와 실험을 펼쳤다. 이에 대한 결론은 “사피엔스가 돼지와 달리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이다. 과학의 나침반은 오히려 인간과 돼지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가리키고 있다. 신경과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이 2012년 공동으로 발표한 ‘케임브리지 선언’은 “인간만이 의식을 생성하는 신경기질을 지닌 유일한 생물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 모든 포유류와 조류, 문어를 포함한 그 밖에 많은 생물을 포함하는 동물들 역시 그러한 신경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AI 시대가 몰고 올 윤리혁명
사실 인간중심주의는 3차례에 걸친 인지혁명으로 타격을 받았다. 첫째가 인류가 발 디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둘째는 인류가 시간의 원점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우연한 산물이라는 다윈 혁명이다. 셋째는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는 심지어 인간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이라는 프로이트 혁명이다.‘호모 데우스’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신 그 마지막 인지혁명이라고 불릴 사건이 AI에 의해 촉발되고 있음을 설파한다. 인간에 필적할 AI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중심주의라는 나르시시즘의 처절한 붕괴를 목도하게 될 것이란 설명이다.
거기엔 자가당착도 발견된다.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신의 경지까지 넘보게 된 것이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구축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와 상상을 통해 국가, 돈, 법인, 종교, 이념처럼 실재하지 않는 허구를 인간들 사이에선 실재하는 것처럼 믿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영화 ‘옥자’에서 CG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만 봐도 여지없이 입증된다. 하지만 첨단과학을 통해 이런 상호주관적 의미망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인류가 기댈 언덕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관적 의미망이란 곧 많은 사람이 함께 꾸는 꿈이다. AI가 보기엔 ‘데이터상의 노이즈’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꿈이 없었다면 인류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꿈이 되려면 반드시 그걸 희구하는 열정과 많은 사람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윤리적 정당성이 그 안에 함께 녹아 있어야 한다. 열정과 윤리는 현재의 AI기술이 구현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를 그저 노이즈로 취급하는 한 AI는 결코 인간에 범접할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이 감정과 윤리를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윤리혁명은 지금부터라도 시작될 수 있다. AI시대가 가져올 혁명은 인간뿐 아니라 공장식 축산농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돼지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라투르 사상으로 읽는 ‘옥자’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는 신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과학, 정치학까지 다방면에 걸친 ‘하이브리드의 사상가’로서 라투르를 심층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라투르의 관점에서 보면 봉준호의 괴물과 옥자는 근대적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하이브리드로서 공통점을 지닌다. 주한 미군기지의 실험실에서 잉태돼 한강변에 출몰하는 괴물은 정치(한미동맹)와 과학의 야합이자 과학이 초래한 사회적 재앙이다. 유전자조작으로 태어난 옥자는 ‘인공적 식용제품’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생명체’다. 무엇보다 자연과 과학에 속한 옥자와 사회와 문화에 속한 미자가 같은 자(子)자 돌림의 자매처럼 결합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미란다의 쌍둥이 CEO 낸시와 루시 미란도와 대조를 이룬다. 언니 낸시가 성과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라면 루시는 기업의 이미지를 중시하는 낭만주의자다. 하지만 이들 자매는 미자-옥자 자매와 달리 탐욕의 화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하이브리드를 대하는 봉준호 감독의 시선 변화다. ‘괴물’에서는 경악과 공포였던 것이 ‘옥자’에선 공감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자연과 문화를 오염시키고 교란시키는 하이브리드를 정화와 단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시선이 이를 연속성과 풍성함으로 긍정하는 비근대적 시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옥자’는 배급과 상영,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대한 구별을 신성시하는 근대적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하이브리드이기도 하다.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제작, 배급, 상영을 도맡아서다. 이 때문에 칸영화제 공식초청작임에도 프랑스에선 상영거부운동의 대상이 됐다. 과연 라투르가 이에 대해 뭐라 언급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