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공동체를 지키는 영웅으로 카우보이와 보안관을 등장시킨 서부극이 이를 대신해왔지만 이미 오래 전에 인기를 잃었다. 그렇지만 현대 도시에서 계속 범죄가 일어나기에 그런 범죄에 맞서 싸우는 일반인 영웅을 상상하는 것이 현대 대중에게 더 공감을 얻게 되었다. 즉, 슈퍼히어로물은 미국의 짧은 역사라는 결핍과 도시의 범죄에 대한 상상이 결합돼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 블록버스터 미국영화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각색한 슈퍼히어로물이다.
DC 코믹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히어로는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이다. 이에 비해 마블 코믹스는 개별적인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과 함께 이들을 팀으로 엮은 작품인 ‘어벤저스’ 시리즈와 ‘엑스맨’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였다. 마블 코믹스 작품 중에서도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물이 ‘스파이더맨’ 시리즈다.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다른 슈퍼히어로물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기에 각기 다른 연출자에 의해 각자 다른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스파이더맨 3부작’은 먼저 샘 레이미 연출, 토비 맥과이어 주연으로 2002년, 2004년, 2007년에 만들어졌다. 원래 샘 레이미는 5편까지 만들려 했으나 투자사와의 견해차로 인해 3부작에 그쳤고 2012년과 2014년에 마크 웹 연출, 앤드루 가필드 주연으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만들어진다. 이 두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달리 최근에 개봉된 ‘스파이더맨: 홈커밍’(이하 홈커밍)은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의 팀에 합류하는 스파이더맨을 그린다.
스파이더맨은 왜 퀸스에 살까
스파이더맨은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차별화된 특징을 지녔다. 주인공 피터 파커는 원작 만화는 물론 영화에서 뉴욕 퀸스의 포리스트힐 지역에서 이모와 함께 사는 고등학생으로 등장한다. 보통 미국 영화에선 뉴욕의 다섯 개 보로(borough) 중 경제와 문화의 중심인 맨해튼을 가장 많이 보여준다. 맨해튼 이외의 지역인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스파이더맨 이야기는 드물게도 퀸스를 배경으로 한다. 퀸스는 뉴욕에서도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여주는 서민 거주지역이다. 피터 파커가 퀸스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의 서민적 성격을 암시한다.부모를 일찍 여의었거나 친부모가 없는 것은 슈퍼맨과 배트맨도 마찬가지다. 이때 슈퍼맨은 갓난아기일 때 크립튼 행성이 파괴되어 아버지 조엘이 캡슐에 담아서 지구로 탈출시키고 미국 중서부 지역에 살던 켄트 부부가 그를 발견하고 키운 것으로 나온다. 파괴된 고도문명 크립튼과 조엘은 20세기 초에 쇠퇴하는 유럽 문명을 상징하고, 클라크 켄트(슈퍼맨)가 미국 중서부지역에서 성장했다는 설정은 곧 신생 미국의 건강한 에너지를 상징한다. 배트맨의 경우, 고담시티의 대부호 브루스 웨인이 어린 시절 부모를 강도에게 잃은 후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범죄에 맞서 싸우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슈퍼맨과 달리 고독과 어둠에 친숙하다.
하지만 클라크 켄트와 브루스 웨인은 모두 성인 남성이다. 반면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는 과학에 관심이 많은 가난한 고등학생이다. 그가 좋아하는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제대로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서툴고 수줍은 10대다. 그의 이러한 위축된 모습은 청소년이라는 연령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가 지닌 사회적 약자로서의 사회적 특성을 암시한다.
이렇게 미숙한 소년의 특성을 반영해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그의 연애담과 성장담이란 두 바퀴의 서사로 굴러간다. 사춘기 소년이 공동체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의무감과 책임감, 그리고 연인을 보호하는 기사도를 터득해 진짜 남자가 돼가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여기에 그가 10대 소년이라는 점에서 미국식 하이틴 영화의 관습을 덧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멘토가 필요한 가난한 서민 영웅
‘홈커밍’은 이런 관습에 투철하다. 그래서 133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을 지닌 영화가 됐다. 3부작의 메리 제인과 어메이징의 그웬 스테이시처럼 홈커밍에는 리즈 툼스라는 짝사랑의 대상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차별점이라면 그의 고등학교 생활과 그의 친구이자 사이드 킥(조수)인 네드와 우정을 쌓아가는 내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가난한 10대의 처지를 반영한 내용도 여전하다. 광속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슈퍼맨이나 신형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배트맨에 비해 스파이더맨은 활동 반경이 작다. 거미줄을 쏘아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돌아다닌다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욕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자동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10대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면 이렇게 고층건물 사이로 거미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이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마치 도시 변두리의 청소년이 시내에 처음 왔을 때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홈커밍’의 스파이더맨은 악당의 음모를 막기 위해 워싱턴DC에 가야 하는데 다른 슈퍼히어로들이라면 날아가거나 비행기로 이동할 텐데 자가용이 없는 그는 전국경시대회에 나가는 학교 대표로 스쿨버스를 타고 가게 된다.
힘없던 이가 힘을 가졌을 때 느낄 만한 희열감과 무절제함이랄까. 스파이더맨은 그래서 흥분하거나 까불대는 모습으로 등장하기 일쑤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힘을 과시하기보다는 책임 있고 절제하며 분별의식을 일깨워주는 어른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정신적인 아버지 역할이다. 스파이더맨 3부작 1편에서 피터의 삼촌 벤 파커가 그런 역할을 했다면 ‘홈커밍’에서는 토니 스타크(아이언맨)가 그 역할을 맡는다.
반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무책임하게 쓰는 어른이 악당으로 등장한다. 3부작에서는 자신이 개발한 무기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그린 고블린과 닥터 옥토퍼스, ‘홈커밍’에서는 토니 스타크와 전쟁을 치른 외계종족이 남기고 간 물질을 수집해 무기로 파는 벌처가 그런 인물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아무리 다양한 악당과 맞서 싸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저소득층 지역에 사는 소년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책임감을 지닌 선량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성장담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