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이래서 興했다! 오리온, 아모레퍼시픽, 만도, 만카페, 웨스트엘리베이터 / 이렇게 亡했다! STX조선해양, 이마트, 쓰리세븐, 카페베네

대박 난 기업, 쪽박 찬 기업

  • 모종혁|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jhmo71@yahoo.com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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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말 중국 상무부는 1~11월 중국에 투자한 국가나 지역의 직접투자액 통계를 공개했다. 여기서 홍콩, 마카오 등 중화권과 싱가포르를 제외한 국가 중 1위는 43억7000만 달러를 투자한 한국이었다. 한국은 2012년 30억7000만 달러, 2013년 30억6000만 달러, 2014년 39억7000만 달러, 2015년 40억4000만 달러 등 지난 5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견지했다. 그 사이 대만(2012년 61억8000만 달러 → 2016년 31억5000만 달러)과 일본(2012년 73억8000만 달러 → 2016년 28억5000만 달러)의 중국 투자는 반토막이 났고, 미국도 30억 달러대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투자 대비 성적표는 어떨까? 중국 해관총서가 올해 1월 발표한 수입시장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589억 달러(10%)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일본(9.2%), 3위는 대만(8.8%), 4위(8.5%)는 미국이었다. 한국은 지난 10년간 9%를 유지하다가 2015년 10.4%를 차지해 최고 성적을 거뒀다. 통계로만 본다면, 현재 한국이 중국 시장에서 거두는 실적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실상은 조금 다르다. 필자는 1996년 2월 말 중국으로 건너가 2000년부터 대륙 각지를 취재했다. 평소 생활에서 혹은 취재 현장에서 한국 기업의 명멸을 지켜봤다.

    20년 전만 해도 중국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한국 기업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10년 전에는 그 수가 갑절로 늘어났지만, 현재는 다시 20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세계 정상급의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조차 중국 시장에서는 반도체와 LED를 제외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품목이 없다. 롯데, 신세계, CJ, GS 등 유통업체는 모두 중국에서 쓴맛을 보았다. 그에 반해 몇몇 기업은 중국을 제2의 내수 시장으로 삼아 비상한다. 중국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 다섯과 실패한 기업 넷을 추렸다.



    Up 1 오리온(好麗友)

    ‘좋고 아름다운 친구~ 하오리유 파이(好麗友派)!’



    그동안 필자는 중국 내 30개 성·시·자치구 500여 곳의 도시를 방문했다. 동쪽 끝 지린(吉林)성 투먼(圖門)에서 서쪽 끝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카슈가르(喀什)까지 다니면서 본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한국 식품은 단연 오리온 초코파이다. 필자가 준비해간 초코파이는 신장 북부 알타이산맥에서 유목하는 카자흐족 아이부터 구이저우(貴州)성 동남부의 깊은 산속에 사는 둥(侗)족 노인까지 모두 좋아했다. 이렇듯 오리온 초코파이는 ‘好麗友’라는 중문 브랜드 이름처럼 중국인에게 정겨운 친구가 된 지 오래다.

    이는 객관적인 수치로도 드러난다. 지난해 오리온이 국내에서 거둔 매출은 6794억 원으로 전년보다 약간 감소했다. 이는 아동 인구가 감소하면서 전체적으로 제과 소비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중국법인 매출은 1조3460억 원으로 한국보다 2배나 많았다. 영업이익도 중국이 1960억 원으로 790억 원인 국내보다 훨씬 높았다. 오리온처럼 연 매출 2조 원이 넘는 대기업 가운데 해외법인의 매출과 이익이 본사를 앞지르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오리온은 중국 파이 시장에서 수년째 1위를 지키고 있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명성은 중국 할인매장이나 슈퍼마켓에 들어가자마자 실감할 수 있다. 파이류 중 가장 좋은 위치에는 어김없이 초코파이가 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초코파이를 가장 좋은 어린이 간식으로 선호한다. 이처럼 초코파이가 중국인 생활의 일부분이 된 데는 오리온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뒷받침됐다. 오리온은 1995년 중국법인을 설립한 이래 1997년 베이징(北京)의 랑팡(廊坊)을 시작으로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선양(瀋陽) 등지에 6개 공장을 건립했다. 지역별로 화북, 화중, 화남, 동북 등 골고루 분포돼 있다.

    필자는 2006년 9월 상하이에서 화중판매법인을 취재했다. 현지 법인장은 대만 유학 경험이 있는 조선족 동포였다. 당시만 해도 주요 시장 책임자를 현지인으로 고용한 한국 대기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족 법인장은 한국인 직원들과는 유머러스한 한국어로 대화했고, 중국인 직원들에게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런 오리온의 현지화 전략과 능력 제일의 용인술은 담철곤 회장의 이력에서 비롯됐다. 담 회장은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서울외국인학교와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했다. 태생적으로 중국을 잘 알고 글로벌 시각을 갖춘 개인사는 기업 경영에 그대로 투영됐다.


    Up 2 아모레퍼시픽(愛茉莉太平洋)

    올해 4월 미국 뷰티·패션 전문매체 위민즈웨어데일리(WWD)는 ‘세계 100대 뷰티 기업’을 발표했다. 놀랍게도 한 한국 기업이 역사상 최초로 10위권 안에 입성했다. 2015년 12위에서 다섯 계단을 껑충 뛰어 7위에 오른 아모레퍼시픽그룹이었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6조6976억 원의 매출을 거두어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샤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을 눌렀다. 특히 판매 증가율은 18.2%에 달해서 향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코티(26.2%)에 이어 2번째로 높았다.

    아모레퍼시픽이 이렇듯 놀라운 성적을 거둔 데는 중국법인의 역할이 컸다. 아모레코스메틱상하이, 아모레R&I상하이, 아모레퍼시픽트레이딩 등 3개 법인이 중국 시장에서 거둔 매출은 1조2606억 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무려 39.3%나 증가한 수치다. 당기순이익은 548억 원으로 전년 대비 3.3%가 감소했는데, 공격적으로 매장을 확충하면서 투자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실제 아모레퍼시픽은 1993년 선양에 법인을 설립했고, 2002년 상하이에 공장을 가동했으며, 중국 각지에 4000개가 넘는 매장을 개설했다.

    이 같은 투자는 백화점, 전문점, 온라인 등 넓고 다양한 판매 채널을 확보해야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는 중국 화장품 시장의 특성을 간파한 결과다. 이 덕분에 아모레퍼시픽은 마몽드, 라네즈, 설화수, 이니스프리 등 4개 브랜드로 중국 여성 사이에서 확고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실제 필자의 중국인 친구, 동창, 지인 등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아모레퍼시픽 제품을 사용한다. 모두 바링허우(80後·1980년대 출생자)와 주링허우(90後·1990년대 출생자)로, 아모레퍼시픽에 대해 한결같이 “중국인의 피부에 맞으면서 가격은 프랑스와 일본 제품보다 싸다”고 칭찬한다.

    물론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진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2007년까지 15년 동안 적자를 내면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한류가 대륙에 휘몰아치면서 한국 화장품이 중국 여성의 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아모레퍼시픽도 그 기회를 포착해 드라마의 PPL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중국 대도시뿐만 아니라 중소도시까지 매장을 늘려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었다. 이러한 노력은 2010년대에 들어서 만개했다. 특히 2013년부터는 연평균 30% 이상의 고성장을 구현해 외국계 화장품 기업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다.



    Up 3 만도(萬都)

    5월 들어 거의 모든 증권사가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에 대한 투자 의견을 ‘매수’로 전환하거나 ‘매수 유지’를 제시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으로 인해 현대차그룹의 중국 내 판매량이 급감했다는 언론 보도와 배치되는 소식이다. 실제 현대차그룹과의 거래나 중국 시장의 비중이 높은 코오롱글로텍과 성우하이텍의 실적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코오롱글로텍의 경우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8%가 감소한 1587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11억4100만 원의 손실을 기록해 적자로 전환했다.

    이에 반해 만도는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0.1%가 늘어난 1조3700억 원을 달성했다. 영업이익은 5%가 증가한 588억 원이다. 만도에 현대차그룹은 최대 고객사(43%)다. 현대차그룹의 부진한 성적은 만도에도 큰 타격이다. 그러나 만도는 다른 부품업체들과 달리 거래처가 훨씬 다변화돼 있다. 실제 만도 중국법인의 2대 고객사는 중국 로컬자동차업체인 지리(吉利·20%)다. 만도는 1분기에만 지리에 대한 매출을 전년 동기 대비 무려 94%나 늘렸다. 지리가 여러 종의 신차를 내놓으면서 1~2월 판매 대수가 전년 동기 대비 107%나 폭증했기 때문이다.

    만도는 그 밖에도 창청(長城·8%), 창안(長安·5%) 등 중국 로컬 자동차의 매출 비중이 37%를 차지한다. 지난해 중국 내 자동차 판매량은 2802만 대를 기록해 전년 대비 13.7%가 증가했다. 중국 로컬 자동차는 전년 대비 20.5%나 늘어난 1052만 대를 판매해 사상 최초로 1000만 대를 돌파했다. 또한 시장점유율도 43.2%에 달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에는 로컬 자동차의 점유율이 절반에 달할할 전망이다. 이렇듯 중국법인의 활약에 힘입어 만도는 지난해 매출이 5조8664억 원, 영업이익은 3051억 원을 거뒀다. 만도의 전체 매출액 중 중국법인의 비중은 26.5%에 달한다.

    필자는 2008년 12월 만도의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공장을 취재했다. 당시 만난 심상덕 쑤저우법인장은 “10년 내 중국 시장에서 벤츠, 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과 중국 로컬 자동차에 대한 납품 비중을 50% 이상으로 늘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를 위해 만도는 2002년 쑤저우에 진출한 이래 베이징, 톈진(天津), 하얼빈(哈爾濱)에 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베이징에는 연구개발(R&D) 부서와 주행시험장을, 헤이룽장(黑龍江)성 헤이허(黑河)에는 동계 주행장을 건설했다. 하얼빈 공장과 헤이허 주행장은 극한의 추운 환경을 이겨낼 부품을 생산하기 위한 전초기지다.



    Up 4 만카페(漫咖啡)

    중국 대도시를 다니다 보면 한적한 곳에 개성 있는 인테리어와 넓은 공간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그동안 베이징, 광저우, 충칭(重慶) 등지에서 이 커피전문점을 이용해봤다. 놀랍게도 테이블, 소파, 의자 등 가구의 모양과 규격이 가게마다 달랐다. 또한 커피 전문점이라기보다 카페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주방은 훤히 트였고 맛있는 커피와 와플을 먹을 수 있다. 중국 10대 커피 전문점으로 성장한 만카페(漫咖啡·Maan Coffee)가 그 주인공이다.

    만카페의 역사는 짧다. 2011년 1월 베이징에서 1호점이 문을 열었다. 그 뒤 대도시를 중심으로 매장을 열어 올 초까지 40여 개 도시에 160여 점을 오픈했다. 이 만카페의 창업자는 신자상(65) 회장이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샤브샤브 전문점인 ‘정성본’을 성공시키는 등 요식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러다 한 지인의 권유로 2005년 중국으로 건너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듬해 신 회장은 한식 레스토랑인 ‘애강산(愛江山)’을 개업했다. 시행착오 끝에 애강산을 정상궤도에 올리자, 커피 전문점으로 눈을 돌렸다.

    신 회장은 커피를 좋아해 평소 스타벅스를 자주 찾았다. 한데 매장이 너무 협소해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주변을 보니 적지 않은 중국인이 같은 불만을 품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에 스타벅스와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커피 전문점을 열기로 결심했다. 먼저 입지는 오피스 밀집지역이 아닌 한적한 장소로 선정했다. 대신 공간을 크게 잡아 테이블마다 간격을 넓혔다. 인테리어는 편안한 느낌을 주는 목재로 앤티크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다. 이는 과거 중국인들이 차관에서 오랜 시간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대화를 즐기던 문화를 서구의 커피 전문점에 접목한 것이다.

    개방된 부엌에서는 커피뿐만 아니라 와플, 샌드위치, 스파게티 등 다양한 요리를 신선한 재료로 만들었다. 필자도 커피를 마시고 와플을 먹기 위해 만카페를 애용한다. 이 때문에 만카페의 매출에서 커피 비중은 30%에 불과하고 요리가 70%를 차지한다. 이렇듯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 역발상으로 만카페는 성공했다. 매장이 늘어났지만 신 회장은 합작 형태의 직영점만 운영한다. 또한 상권 활성화를 앞세워 건물주를 설득해 매장을 5년에서 20년까지 장기 임차한다. 이런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만카페는 딜로이트컨설팅으로부터 12억 위안(2040억 원)의 기업 가치를 평가받았다.



    Up 5 웨스트엘리베이터(威斯特電梯)

    내륙직할시 충칭은 최근 수년간 중국 내 31개 성·시·자치구 중 경제성장률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와 함께 중국 4대 경제권 중 하나인 청위(成渝)경제권을 형성한다. 청위경제권은 면적 20.6㎢에 인구는 1억 명에 가깝다. 빠른 경제성장을 구가하며 아파트, 오피스, 쇼핑몰 등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같은 토대 에서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무빙워커 등을 앞세워 고성장을 구가하는 한중 합작 기업이 웨스트엘리베이터다.

    웨스트엘리베이터는 현대엘리베이터 주재원 출신인 권오철(60) 사장이 2006년에 설립했다. 한데 권 사장이 낙점한 공장 부지는 연해지방이 아닌 충칭 도심에서 60㎞ 떨어진 둥량(銅梁)현이었다. 서부대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건설 붐이 일고 있는 데다, 신생 기업으로서 연해지방보다 경쟁이 덜하기 때문이다. 또한 둥량현 최초의 외자 기업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런 권 사장의 선택과 결단은 적중했다. 지난해 웨스트엘리베이터는 충칭시 정부가 지정한 명품 브랜드로 뽑혔다. 또한 중국 10대 에스컬레이터로도 선정됐다.

    현재 직원 수는 500여 명에 달하고 엔지니어만 80명이 넘는다. 2013년 말 제2공장을 구이저우성 구이양(貴陽)에 설립하면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연 생산능력을 7000대로 끌어올렸다. 이렇듯 웨스트엘리베이터가 승승장구하는 데는 지역보호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의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以農村包圍城市) 전략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자기 지역 내 기업이나 상인과 거래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또한 연해 대도시 부동산 기업은 글로벌 엘리베이터가 아닌 중소기업을 상대조차 하질 않는다. 이에 반해 웨스트엘리베이터는 충칭에서는 업계의 선발주자 격이었다.

    권 사장은 둥량현 정부를 설득해 현 내에서 발주되는 빌딩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독점했다. 고용과 세금을 창출해 지역경제에 공헌하는 토착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방정부와의 관시(關係)를 타고 주변 현까지 장악한 뒤 청위경제권 내 도시 전체로 진출했다. 물론 인정(人情)에만 기댄 건 아니었다. 공정 표준화로 제품 단가를 낮췄고, 철저한 품질관리와 AS로 고객의 신뢰를 얻었다. 청위경제권과 구이저우의 고객 입장에서는 물류비용까지 싸니, 웨스트엘리베이터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Down 1 STX조선해양

    2008년 수주잔량 기준 720만7000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세계 4위, 연간 수주 실적 259만1000CGT로 세계 3위, 명실상부한 조선 ‘빅4’…. 2016년 5월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지난 7월 법정관리에서 탈출한 STX조선해양 이야기다. 한때 STX조선은 수주 실적에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에 이어 세계 3위를지 차지했다. 사세가 급팽창하면서 10대 재벌의 지위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룹이 붕괴됐고 임직원 절반 이상인 2300여 명을 감원하고 나서야 겨우 사지에서 나올 수 있었다.

    STX조선이 몰락한 데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해운과 조선의 업황이 급속히 악화돼 유동성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2005년에 사들인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조선소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은 것이 패착이었다. STX조선은 여의도 면적 1.7배에 달하는 총 550만㎡ 부지 위에 28억 달러를 투자해 해외 최대의 조선왕국을 건설했다. 이는 진해, 부산부터 프랑스, 핀란드까지 STX조선이 전 세계 21곳에 갖고 있는 조선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승승장구하는 STX조선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다롄조선소의 위상은 엄청났다. 작업장에는 한국인 직원 800여 명을 포함해 2만8000여 명이 일했다. 인수 전 범용선박을 생산하던 작은 조선소를 초대형 광탄석운반선, 부유식 원유저장설비 등 특수선과 드릴십, 해양플랜트까지 생산하는 전천후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조선소를 관리하는 14층의 오피스 빌딩이 새로 지어졌고,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아 도심에서 조선소까지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다. 국내에서 ‘샐러리맨 신화’를 창조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이 중국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롄에 대한 무리한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물론 유럽 8개국에서 인수합병(M&A)으로 사들인 조선소도 문제였지만, 다롄조선소의 규모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결국 은행 채권단이 4조5000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STX그룹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사실 중국 투자는 강 전 회장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모든 임원이 반대했지만, 강 전 회장은 국내의 협소한 작업장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중국행을 밀어붙였다. 최고경영자(CEO) 한 명의 잘못된 투자 결정이 그룹 전체의 존망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걸 STX조선이 여실히 보여줬다.



    Down 2 이마트

    5월 31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이마트가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언론에 공표했다. 현재 이마트는 중국에서 점포 6개를 운영 중이다. 이 점포들이 순차적으로 임차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중국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마트는 1997년 대형마트로는 처음으로 상하이에 첫 매장을 개점하며 중국에 진출했다. 초창기 이마트는 내실 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상하이, 톈진 등 직할시에만 점포를 열었다. 그러다가 2006년 정용진 당시 부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중국 진출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정 부회장은 2008년 상하이에서 열린 11호점 개점식 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국내 점포를 늘리느라 중국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해 외국계 유통회사들이 이미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면서 “2014년까지 중국에 100개의 점포를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뒤 2010년까지 점포 수를 27개로 늘렸지만, 손실은 2010년 735억 원, 2011년 1114억 원 등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정 부회장의 말처럼 뛰어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매장만 늘린 결과였다. 결국 이마트는 2011년 점포 11개를 한꺼번에 매각했다.

    필자는 2011년 6월 상하이의 한 매장과 농산물 물류센터를 취재했다. 당시 이마트 점포의 점장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는데도 중국 소비자의 급변하는 구매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싶었다.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 이후 식당의 음식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면서, 외식을 주로 하던 가정조차 집에서 직접 요리해 먹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형마트 업계에서는 다양하고 신선하면서도 저렴한 식재료를 확보하는 전쟁이 일어났다. 또한 소비자가 매장에서 구매하기 편리하게 배치하는 전략이 중요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간 이마트 점포는 식재료 코너가 경쟁 업체보다 작았고 상품은 신선하질 않았다. 밤에 취재한 농산물 물류센터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규모가 작긴 했지만 식재료와 과일의 보관과 관리가 너무 허술했다. 결국 이마트 중국법인은 그 뒤로도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2014년 440억 원, 2015년 351억 원, 지난해 216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구조조정을 통해 점포를 10개 이내로 줄였어도 적자는 계속됐다. 의욕만 앞세운 확장 전략과 점장을 중국인으로 채우면 된다는 안이한 판단이 낳은 참사였다.



    Down 3 쓰리세븐(777)

    1996년 3월 필자가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베이징에서 처음 사귄 중국인 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한국 제품이 최고”라면서 이것을 꺼내들었다. 이듬해 10월 주룽지(朱鎔基) 당시 부총리가 경공업 대표단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만 상인이 선물한 제품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국 상품은 이렇게 품질이 뛰어난데 왜 국산은 품질이 안 좋습니까? 우리도 노력해 이렇듯 훌륭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냅시다.”

    베이징의 소시민부터 훗날 총리가 되는 주룽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 제품은 바로 ‘777(쓰리세븐)’ 손톱깎이였다. 한데 쓰리세븐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상품이었다. 해마다 8000만 개에서 1억 개를 생산해 90% 이상을 수출했다. 지구촌 인구의 40% 이상이 쓰리세븐 제품으로 손톱과 발톱을 깎았다. 또한 손톱깎이는 일반인의 선입견과 달리 30여 가지 공정을 거쳐야 완성될 만큼 정밀한 제품이다. 그 때문인지 금세기 초까지 쓰리세븐 손톱깎이 선물세트는 중국인이 명품 브랜드와 똑같이 대접하는 한국산 일상용품이었다.

    쓰리세븐이 중국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자, 수많은 불법 복제품이 쏟아졌다. 그로 인해 쓰리세븐의 성장세가 둔화됐다. 진품과 복제품을 구분하도록 금속 표면에 특수 처리를 해야 했다. 2001년 최고의 영업이익을 낸 뒤 판매는 조금씩 줄어들었는데, 2005년 창업자인 김형규 회장이 쓰리세븐을 몰락시키는 오판을 내렸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바이오 회사인 크레아젠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인수금액이 생각보다 늘어나자, 2006년부터 1년여 동안 쓰리세븐 주식 240만여 주(370억 원)를 크레아젠과 가족, 임직원에게 증여했다.

    2008년 1월 김 전 회장이 작고하면서 법률에 따라 150억 원의 상속세를 내야 했다. 유가족은 할 수 없이 회사 지분을 JW중외홀딩스에 넘겼고, 2009년 경영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회사 상황은 계속 악화됐고 결국 쓰리세븐과 크레아젠 모두 JW중외홀딩스에 내주고 말았다. 경영진이 수시로 바뀌면서 쓰리세븐의 시장점유율은 떨어졌다. 지금은 중국시장에서 4~5위를 오르내린다. 후발주자이던 르메이(日美), 보유(博友), 링리(今利) 등이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을 앞세워 쓰리세븐을 추월했기 때문이다.



    Down 4 카페베네

    2008년 1월 1호점을 개업해 2010년 300호점을 돌파하고 2012년 800호점을 개점한 커피 전문점. 2012년 매출액 2207억 원, 영업이익 66억 원을 달성한 한국 커피 전문점의 선두주자. 2013년 1000호점을 돌파하고 미국과 중국에 진출한 신데렐라.
    이 모두가 카페베네가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지난해 카페베네는 전년 대비 32%가 줄어든 817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영업손실은 전년보다 18% 늘어난 134억 원이었다. 이처럼 카페베네가 급속히 몰락한 데는 과도한 매장 확장과 무리한 해외 투자가 결정적이었다.

    미국법인은 지난해 132억 원의 손실을 냈고, 중국 사업은 100억 원 이상의 손실을 본 채 완전히 철수했다. 2012년 4월 카페베네는 국내 사업이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 것을 예견하고, 중치투자그룹(中企投資集團)과 지분 50대 50의 합작법인을 설립해 중국에 진출했다. 출발은 산뜻했다. 진출 3년 만에 대도시 곳곳에 600여 개의 매장을 열었다. 한동안은 가맹비, 인테리어비 등으로 한 달에 9000만 위안(153억 원)을 벌어들였다.

    한국에서처럼 카페베네 특유의 공격적인 확장 경영이 중국에서도 성공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카페베네는 한국처럼 중국 내 매장 95% 이상을 가맹점으로 운영했는데, 2015년 초부터 커피 원두와 식재료를 각 매장에 제대로 공급하질 못했다. 인테리어업체에는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가맹비만 받고 매장 개설을 지원하지 않아 가맹주들이 소송에 들어갔다. 심지어 중국법인 임직원에게 지불할 임금까지 체불했다. 이 모든 문제는 한국 본사와 중치 간 경영 분쟁이 발생하면서 비롯됐다. 결국 한국 본사는 엄청난 손실만 입은 채 중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현재 중국에는 여전히 수백 개의 카페베네 매장이 영업 중이지만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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