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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우연한 기회에 獨 감리교병원과 2명으로 시작… 9년간 1300명 초청

나의 한국 간호요원 독일 개척기

  • 이종수|독일 본대 종신교수

1962년 우연한 기회에 獨 감리교병원과 2명으로 시작… 9년간 1300명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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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0년대 독일로 진출한 한국 간호여성들의 삶을 다룬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기획전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9월 3일까지 열린다. 간호요원들(간호사와 보조간호원)은 전후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로 가기도 했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 간호요원들이 독일에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이종수 본대 종신교수가 당시 일화를 담은 회고글을 보내왔다. 이 글의 초고는 지난해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포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국내 독자를 위해 수정 게재한다. <편집자>
1959년 4월 나는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뒤셀도르프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 생활이 어려워서 그랬는지 1년 뒤인 1960년 5월 나는 B형간염에 걸려 뒤셀도르프대학병원 제2내과에 입원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주는 식사가 너무 입에 맞지 않아 한 달 뒤 간 검사 수치가 비정상임에도 조기 퇴원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간 검사 수치가 예상 외로 나빠지자 나는 같은 병동에 다시 입원했다. 급기야 간 검사 수치를 보고 놀란 병원 측과 DAAD는 공부를 중단하고 집(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결정을 내렸다. 난데없는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이 시점의 건강 상태로는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정도가 못 돼 나는 우선 병 치료를 받기로 했다. 병명은 치명적 B형간염이고, 이 병의 사망률은 당시 80~90%였다. 그 후 나는 근 1년간 절망 속에서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1961년 3월 완치돼 퇴원했다.



‘간염 나으면 어려운 이 위해 살겠다’

고독과 눈물 속에서 보낸 1년간의 간수 없는 ‘감옥 생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 또한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병상에 누워 매일 밤 하나님께 기도했다. 병이 낫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신다면 한국의 고아와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1960년 7월 어느 날 저녁 입원 환자를 돌보고 있던 병동 수간호사 엘리사벨 여사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겪은 종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여러 이야기 도중 우연히 ‘독일의 간호사 교육은 학비가 전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때 한국의 전쟁고아들에게 독일에서 간호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병자를 위해 봉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내가 그런 일에 기여하는 대가로 하나님께서 내 병을 완치시켜주기를 나는 기대했다.

그해 8월 나는 입원 중이었지만 프랑크푸르트 감리교 선교회장을 방문했다. 그런 분이라면 나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지만, 중요한 일이라며 핑계를 대고 병실을 빠져나와 기차를 타고 그 분을 만나러 갔다. 선교회장은 자신의 집 앞 나무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간호사들)에게서 좋은 경험을 얻지 못했다”며 나를 문전박대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한국전쟁에서 고아가 된 2명만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서투른 독일어로 반복해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한 나는 낙담한 채 뒤셀도르프 병실로 돌아왔다. 다음 날 간 검사 수치는 더 악화됐다. 절망적인 나날이 계속됐다.

몇 주 후 프랑크푸르트 감리교 선교회장에게 나의 현재 상태, 한국에 있는 전쟁고아의 현황, 한국의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긴 사연과 전쟁고아 2명의 독일 간호사 교육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러 달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성탄절에 도착한 편지

나는 독일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을 병원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모두 고향에 가고 중환자 몇 사람만 병동에 남아 있어 너무나 적적했다. 그런데 나는 병실에서 몇 통의 성탄절 축하편지와 함께 어떤 분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이의 주소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감리교 부녀회장 루이세 숄츠 부인/ 파울리너가 30, 베를린(Pauliner 30, Berlin-Lichterfeld)’ 나는 이 편지를 병상에 누워 읽었다. 숄츠 부인은 ‘한국 광주에 있는 전쟁고아와 빈곤층 자녀를 위해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2명을 뽑아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도록 초대하겠으며 그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썼다. 감리교 선교회장 방문 4개월 뒤의 일이었다. 나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내게 건강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리라고 확신했다.

1961년 4월 의료보험공단 측에서 나에게 남부 독일 도나우 강가에 있는 니데랄타이(Niederaltei) 수도원에서 4주간 요양을 하도록 도와줬다. 그곳에서 요양한 덕분이었는지 나는 건강이 매우 좋아졌고, 그해 여름학기부터 공부를 계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DAAD로부터 받았다.

감리교 부녀회의 초청을 받은 간호사 지망생이 독일로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과 독일에서 여권을 수속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다. 1962년 늦여름 한국 간호학교학생 2명이 독일에 도착해 프랑크푸르트 감리교병원(Diakonischen Krankenhaus Bethanien)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 간호요원이 독일에 정착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라 하겠다.

간호요원 교육이 시작된 지 6개월 후에 프랑크푸르트 지역에서 이 두 간호학생에 대한 호평이 들렸다. 한국 여성은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환자에 대해 천사와 같이 친절하다는 거였다. 뉘른베르크와 함부르크에 있는 감리교병원에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들이 더 오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독일 감리교 부녀회는 그 두 병원을 위해서도 간호학교 학생 초청 비용이나 여권 수속을 열심히 도왔다.



‘제가 너무 고단해요 하나님!’

1962년 나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정보다 1년 늦게 독일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63년 1월 외과의사로서 뒤스부르크에 있는 베데스다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50병상의 외과에 과장 1명, 상의(Oberarzt) 2명, 의사 4명이 근무했다. 의사가 말할 수 없이 부족해 나는 내 몸을 보살필 여유도 없이 무척 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그 후 한국 간호학교 학생 교육은 감리교 산하 병원 3곳에서 이뤄졌다. △프랑크푸르트 감리교병원: 1962년 2명, 1964년 11명, 1967년 6명 △뉘른베르크 감리교병원: 1963년 10명, 1964년 9명 △함부르크 감리교병원: 1964년 9명, 1965년 6명 등이다.

이렇게 독일 감리교병원에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 53명이 교육을 받게 됐다. 오로지 독일 감리교 부녀회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 에센에 있는 루터교병원인 휘센스 스티프퉁(Huyssens-Stiftung)에서 1964년 초 연락을 해왔다. 감리교병원으로부터 ‘한국 간호학생 교육이 만족스러웠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이 병원의 간호학교 교장 좀머(Sommer) 여사가 자기 병원 간호학교에서 한국인 간호학생 교육을 실시하고 싶은데 이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일연방경제협력부(당시 후진국원조부)에 신청하겠다고 나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1964년 가을에 한국 간호학교 학생 14명이 독일정부의 후원으로 독일에 왔다. 독일연방정부 초청이라 사증 수속이 아주 빨리 진행됐다.

1963년 나는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겐 아주 고단한 한 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술해야 했다. 더욱이 부상 환자의 외래진료, 45개 병상을 돌봐야 하는 병동 일, 밤 당직 그리고 주말 당직을 하면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병원 일만 해도 너무 고단해 한국인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내가 간염으로 오랜 기간 병 치료를 받으며 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내 건강은 더욱 악화돼 간경화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이 악화될 경우 의사라는 내 직업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1963년과 1964년 당시 독일 병원에 의사가 대단히 부족해 나는 쉬는 일요일만 한국 간호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나 함부르크 병원의 간호학생들을 보살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졸거나, 길가에 차를 멈추고 자는 경우가 잦았다. 1964년 12월 초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나는 함부르크 감리교병원 간호원장의 요청으로 함부르크로 차를 몰았다. 새로 한국에서 함부르크에 도착한 간호학교 학생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며 내가 와주기를 바란 거였다.


간호요원 문제 해결하러 눈길 운전

이날따라 눈이 많이 내렸다. 함부르크병원에서 학생들과 점심을 같이했는데, 다시 하노버 쪽에서 연락이 왔다. 오후 6시쯤 하노버에서 독일 루터교회 그리고 루터교병원협회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회의를 하자는 얘기를 들었다. 회의 안건에 대해서는 통지를 못 받았다. 나는 여기서도 한국 간호학교 학생에 대해 토론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부르크에서 하노버로 가는 고속도로는 눈 때문에 매우 미끄럽고 여기저기서 교통사고가 나 자동차는 거북이 걸음이었다. 과로로 몸이 몹시 피곤했다.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께 한국 간호학교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끝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후 3시쯤 함부르크에서 출발해 오후 8시쯤 하노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오후 6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론 안건은 ‘루터교병원들이 한국의 간호학교 졸업생 200명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1964년 여름 에센 루터교병원에 도착한 한국 간호학생들이 보여준 병실 일 처리 능력이라면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별도 교육 없이도 바로 병원에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루터교병원협회 대표자들과 고용계약조건을 협상하고, 이에 대해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는 일을 나보고 하라고 했다.
나는 당시 한국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해 그날은 아무런 의견을 내지 못했다. 눈 속에서 차를 몰아 월요일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하나님에게 말을 걸었다. ‘저에게 건강을 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제가 하노버 루터교에서 부탁한 일을 꼭 해야만 할까요, 너무 피곤하네요.’



독일과 한국 간 지루한 협상

1965년 봄 나는 일방으로는 독일루터교병원협회 대표자들과 노동계약(노동시간, 언어교육, 필요에 따라 한국에 돌려보낼 일, 3년의 계약기간 보장, 독일연방고용인 봉급규정에 의한 봉급지급 등)에 관해 협상했다. 루터교병원협회 산하에는 신교 수녀님들이 경영하는 병원이 많아 협상이 아주 까다로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한국의 보건사회부에 이곳에서 협상한 노동계약을 제시하며 200명의 간호학교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여름 보건사회부는 한국에도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의 요구를 거절했다.

내가 당시 부퍼탈 바르멘(Wupper-tal-Barmen) 시립병원 외과에 근무 중이라 주어진 많은 병원 일을 하면서 해야 했기에 이 협상은 아주 서서히 진행됐다. 나는 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조언으로 청와대(박정희 대통령)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200명의 졸업간호사 독일 취업 허가를 부탁했다. 그 후 얼마 안 돼 한국 보사부에서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에 대한 노동계약을 보사부 한상태 국장과 협상하라는 편지를 내게 보냈다. 당시에는 한국과 전화통화가 불가능해 모든 연락을 우편으로 했다. 또한 나는 한국에 나갈 항공요금도 없었다. 한국 보사부 및 독일 루터교 병원협회가 몇 달간 편지를 주고받은 결과 합의한 세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교 사회사업본부와 루터교 병원협회는 나에게 개인 자격으로 이 사업 전체를 처리하지 말라고 했다. 루터교 병원협회는 공동으로 사단법인체를 설립해서 그 회원으로 한국에서 온 간호요원도 포함해 모든 일을 자신들과 공동으로 처리 또는 해결하자고 했다.

둘째, 한국에서는 오로지 한국 보사부가 한국해외개발공사와 공동으로 간호요원의 모집, 여권 수속, 출국수속 등을 담당하고 한국해외개발공사는 선발된 간호요원의 명단을 병원협회에 보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비는 공사가 부담키로 했다.

셋째, 독일에서는 독일 루터교 병원협회의 대표자로 당시 라인 지방 루터교 병원협회장 에세르(Esser) 씨가 선발돼 독일에 오게 될 간호요원의 노동 허가, 거주 허가 및 기타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한국 간호사가 근무할 해당 병원과 독일 루터교 사회사업본부와 협력해 해결키로 했다. 그리고 에세르 회장은 간호요원의 항공편 예약과 항공요금 지불 등을 해당 병원과 상의해 책임을 지고, 에세르 회장은 루터교 병원협회가 필요로 하는 간호요원의 수를 조사해 이종수 박사에게 알려주면 이 박사는 이를 한국 보사부와 해외개발공사에 통보한다는 내용이었다.


1966년 4월 서울에서 계약 체결

독일 루터교 병원협회 대표 에세르 회장과 나는 한국 보사부와 합의 사항에 관해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서울에 와서 보사부장관의 입회하에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통지해왔다. 당시 항공요금이 비싸서 루터교 병원협회가 부담하는 문제와 내가 부퍼탈(Wuppertal) 시립병원에서 휴가를 받는 문제로 한국에 가는 시기가 지연됐다.

드디어 1966년 4월 말 서울에서 정의섭 보사부장관, 한상태 의정국장 그리고 한국개발공사 사장과 위의 합의사항 이행에 관해 계약이 체결됐다. 동시에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200명의 여권 수속, 독일 병원 배치 그리고 사증 신청 등등이 이뤄졌다. 1966년 6월 제1차 간호학교 졸업 간호사가 쾰른/본 공항에 도착했다.

1966년 간호사 200명을 시작으로 1967년 간호사 200명과 간호보조사 600명, 1968년 간호보조사 200명, 1967~1968년 간호학교 학생 50명 및 기타 인원(독일감리교병원으로 온 53명 등)이 독일에 도착했다. 우리는 1960년부터 1968년까지 총 1300명의 간호요원을 독일에 초청해 독일 루터교 사회사업본부 및 독일 루터교 병원협회와 공동으로 보살폈다. 그것은 1968년에 도착한 간호요원의 3년 계약이 완료되는 1971년까지 이어졌다.

독일에 간호보조사(현 간호조무사)를 데려온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당시에는 한국에 보사부가 인정한 간호보조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의원에서 일하는 보조간호원은 간호에 관해 전혀 교육을 받지 않고 대부분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개업 의원에서 배우고 일하면서 개업의를 돕고 있었다.

1966년 4월 에세르 회장과 내가 한국 보사부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나는 눈이 불편해 진료차 안과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개업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보조간호원이 “집안이 어려워 적은 봉급이나마 부모에게 보내고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도 독일에 가서 일할 수 있을까요”라며 간절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감동한 나는 독일에 돌아와 독일 루터교 사회사업본부 총재와 이 보조간호원들을 돕기 위해 상의했다. 한국 보사부는 갑자기 의료법을 개정할 수 없으니 도와주고 싶으나 보조간호사 자격증을 발행할 수 없다고 연락해왔다.



나는 의사다

나는 루터교 사회사업본부 및 독일정부와 협상해 한국의 의원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으로 한국해외개발공사에서 내과, 외과, 간호학과를 각각 1개월씩 3개월 교육받은 사람을 독일에서 간호보조사로 인정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초청한 간호보조사는 800명에 달한다.

나는 루터교 병원협회와 절충해 이와 같이 독일에 온 한국 간호보조사가 봉급을 받고 근무하면서 간호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어 독일간호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 간호요원을 독일로 초청한 일은 나의 치명적 간염을 치료하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전공 분야이자 직업인 의사로서도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66년 나는 부퍼탈-바르멘 시립병원 외과에 근무하다가 1967년부터 본(Bonn)대학병원으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30병상을 맡았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병동 일 외에 종일토록 수술을 하고 밤 당직을 서거나, 당직이 없는 밤에는 의과대 학생들과 같이 의학 연구차 동물실험을 했다. 또 세계 의학계에서 활약해보려고 학술논문 2편을 독일 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이 해 말엔 본 대학병원에 신설된 집중치료병동의 병동장직을 맡았다.

1967년 800명의 한국 간호요원이(전년까지 합하면 1100명) 독일에 도착했다. 이들이 독일 전국에 분산됐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발생했다. 지옥처럼 힘들고, 잠이 그리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새로 주신 건강 덕에 불철주야로 일할 수 있었다.
1968년 한국 간호요원 200명이 독일에 추가로 도착해 1300명을 보살펴야만 했다. 이 와중에 본대학병원은 나를 몇 개월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미국 덴버에 있는 콜로라도대학병원 스타즐 교수 아래에서, 그리고 LA의 캘리포니아대학병원 테라사키 교수 밑에서 장기이식에 관한 연구를 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해방

미국에서 독일로 돌아오자마자 본대학병원 외과의 간이식 팀장직을 맡았다. 1969년 6월에 유럽대륙 최초의 간이식 수술 기회를 얻고 같은 해 본대학 의학부에 교수자격 인증 하비리타치온(Habilitation) 논문을 제출해 1970년 통과됐다. 1971년에는 남부 독일 울룸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받았다. 그러나 나는 본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외국에서 온 의사인 내게 이와 같은 기회가 주어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며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감사드리며 살고 있다.

1966~67년 독일 경제가 악화되자 1968년 독일연방노동청은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을 억제했다. 이로 인해 한국 간호요원의 독일 취업은 일시적으로 1969년부터 허가되지 않았다. 1971년부터는 한국 정부가 직접 이 사업을 진행했다. 나는 훗날 1969년 독일연방노동청의 외국인 취업 중지 조치는 1960년 병실에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과제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것이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나의 유럽 대륙 첫 간이식 수술도 1969년에 이뤄졌다. 만학도인 나에게 대학병원에서 환자 치료, 연구와 교육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와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나와의 인연으로 독일에 오신 한국간호요원 여러분이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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