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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신 피난민을 배에 태워라 우린 중공군과 싸우며 육로로 철수하겠다”

‘흥남철수작전’의 숨은 영웅 김백일 장군

  • 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우리 대신 피난민을 배에 태워라 우린 중공군과 싸우며 육로로 철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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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계-안강전투 승리…낙동강전선 사수
  • ● 최초로 38선 넘어 북진…10월 1일 국군의 날 始原
  • ●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 수송 강력 요구
  • ● 흥남철수작전 최후까지 피난민 승선과 수송 지휘
  • ● 1951년 3월 비행기 사고로 殉國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 시 해병대박물관에 있는 장진호전투 기념비였다. 기념비에 헌화한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문 대통령은 기념비 방문에 앞서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손자, 포니 대령의 손자 등을 만난 자리에서도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젊은 부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새 삶을 찾고, 그 아이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돼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에 ‘흥남철수의 주역이신 현봉학 선생의 딸, 헬렌 현 여사와도 만났으며,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루니 제독은 서신을 주셨다’는 글을 올렸다.

문 대통령의 장진호전투 언급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미동맹의 미래에 우려의 시각을 갖고 있던 미국 조야에 신뢰감을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흥남철수작전의 진실

장진호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2만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격전을 벌인 6·25전쟁 3대 전투의 하나로 불린다. 미군은 비록 큰 전력 손실을 입은 채 후퇴했지만 2주간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킴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이뤄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흥남철수작전은 흥남항에 모여 있던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1군단, 북한 피난민 10만 명 등 총 20만 명을 해상을 통해 철수시킨,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 철수작전이었다. 국민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와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만 보면 흥남철수작전은 미군의 인도주의적 정신과 한 통역장교의 인간애가 만들어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그런가.

남정욱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당초 미군이 진행하려 했던 철수작전은 미군과 한국군 10만 명과 피난민 일부를 수송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피난민 10만 명을 포함해 20만 명으로 늘어난 것은 당시 육군 1군단장이던 김백일 장군의 노력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실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전쟁사’를 비롯해 군 원로들의 회고록,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보면 김백일 장군이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놓친 흥남철수작전의 진실과 김백일 장군이 6·25전쟁 중에 이룬 업적을 재조명했다.

김백일 장군은 1917년 북간도 연길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찬규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타계해, 할아버지 김영학 선생이 어린 김백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백하 김영학 선생은 구한말 선각자로, 당시 관북지방 제일의 교육기관으로 불리던 함일(咸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00년 함북 경성읍에 설립된 함일학교는 많은 항일투사와 인재를 배출했다. 1910년 한일병탄이 있은 후 백하 선생은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한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이던 선생은 1927년 일제에 체포됐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44년 별세했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간도특설부대와 동북항일연군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꿈꾸던 김백일에게 백하 선생은 독립운동의 필요성과 함께 일본이 패망한 후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다며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했다. 당시 장교가 되는 길은 세 가지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중국군관학교, 만주 봉천군관학교 입학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백하 선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중국군관학교에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만주 봉천군관학교는 관동군 주도하의 학교였지만 다국적 청년들이 모인 곳이라 경쟁하며 군사 지식을 배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38년 봉천군관학교 5기로 졸업한 김백일은 만주국이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만든 간도 특설부대 창설위원으로 임명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간도특설부대를 항일독립군을 토벌한 친일 부대로 규정한다. 이 때문에 김백일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작성한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명단에 포함됐다.

이에 대해 이준구 전 경기대 교수(국제관계학)는 “1930년대 초 이후 한인 무장독립단체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북간도엔 무장독립단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간도특설부대가 싸운 것은 조선독립군이 아니라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등 중국공산게릴라였다. 김일성 부대도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다”고 반박했다. 공산주의운동을 했던 동북항일연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간도특설부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광복 후 북간도에서 평양으로 온 김백일에게 북한 지역을 점령한 김일성이 은밀히 접근했다. 함께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자고 설득하던 김일성은 김백일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권총을 뽑아 위협하기도 했다. 이렇게 3일을 시달리던 김백일은 곧바로 평양을 빠져나와 서울로 왔다. 그날 우러러본 하늘이 너무 맑고 밝아서 ‘온 세상이 붉은색(공산주의)으로 물든다 해도 나만은 희게 버티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고쳤다.



기계-안강전투

김백일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보병학교 창설, 육군 작전참모부장 등을 역임하며 건군 초기 우리 군의 기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3차례에 걸쳐 전투사령관을 맡으며 다양한 전투 경험을 쌓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북부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여순사건을 평정했다. 1949년 5월 21일 북한군이 옹진반도 지역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옹진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7월 1일 옹진지역을 탈환했다. 같은 해 9월엔 지리산 전투사령관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경험은 6·25전쟁에서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우리 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개전 두 달도 채 안 돼 대구 코앞까지 밀렸다. 당시 낙동강 동부전선인 경주 기계-안강지역을 방어하는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 3사단) 부군단장이던 김백일 장군은 9월 1일 병세에 있던 김홍일 군단장이 물러나면서 군단장에 올랐다.

9월 2일 북한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보름 넘게 이어진 북한군의 파상적인 공세를 1군단은 진지를 빼앗기면 다시 빼앗기를 반복하며 끝내 막아냈다. 다부동 전투와 함께 북한군의 공격이 가장 거셌던 기계-안강 전투에서 김백일 장군이 이끄는 1군단이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우리 군과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기계-안강전투에서 패배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열을 재정비한 우리 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김백일 장군이 이끄는 1군단은 거침없이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 3사단은 동해안 가도를 따라, 수도사단은 동해안의 내륙을 따라 북진했다. 9월 30일, 가장 먼저 38선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유엔사령부나 미8군사령부는 38선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미 대통령의 특별한 지시가 없이는 38선을 넘어 작전할 수 없다는 지침까지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총사령관을 불러 북진을 명령했지만 작전권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워커 8군사령관을 납득시킬 명분이 없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이때 김백일 장군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3사단 제23연대가 주둔한 곳 정면에 있는 북한군 요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이 피해를 보게 된다. 북한군 요지는 38선에서 800여m 떨어진 북쪽”이라고. 정 총사령관은 이를 근거로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우리 국군부대에 위협을 주고 있는 양양 북쪽의 북한군 고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38선을 잠깐 넘겠다’고 설득했다. 워커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에 띌정도로 큰 병력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승락했다.

그렇게 해서 3사단 23연대 3대대에 38선 돌파 명령이 떨어졌다. 1950년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 김백일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처음으로 38선을 넘었다.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제정한 것은 바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연곡해수욕장 부근에 가면 우리 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는 다리가 있는데 바로 백일교다. 김백일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956년에 목재 교량으로 건설했다 1972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했다.

양양을 점령한 3사단은 10월 11일 원산까지 탈환했다. 그 공로로 김백일 장군은 장군 진급 3개월 만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당시 정일권 육해공군총사령관도 소장 계급이었다. 총사령관과 같은 계급이 된 것이다. 미군도 원산에 입성한 김백일 장군에게 미국 대통령 훈장 ‘레존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를 수여했다.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1군단은 함경북도 북청, 신흥, 청진을 지나 두만강이 눈에 보이는 혜산진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전세가 급변했다. 중공군 압박에 서부전선이 붕괴됐고, 동부전선 역시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반격에 고립됐다. 11월 30일,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전 병력의 철수를 명령했다. 1군단의 퇴로인 원산은 이미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미 해병 1사단과 1군단 등은 흥남에서 해상을 통해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초 미 제10군단이 철수시켜야 할 물동량은 병력 10만5000명, 차량 1만8000여 대, 각종 전투물자 약 35만t 등이었다. 여기에 군경 가족과 일부 피난민을 후송할 계획이었는데 대규모 피난민 대열이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흥남철수작전에 북한 피난민이 포함된 과정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통역장교이던 현봉학이 포니 대령에게 미 제10군단장인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 북한 피난민들을 포기하지 말고 흥남에서 구출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알몬드 장군이 이를 허락했다는 주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장진호전투 기념비 헌화를 전후해 언급한 내용은 이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최종 명령권자이던 알몬드 장군 본인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비행기로 흥남항 상공을 선회하던 알몬드 장군은 지상의 수많은 피난민을 보고 보좌관 헤이그에게 “이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순 없네. 반드시 모두 구출해야 한다”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헤이그는 알몬드 장군의 지시를 포니 대령에게 전달했고, 포니 대령은 명령에 따라 피난민 10만 명을 수송할 배를 확보했다는 이야기다. 헤이그의 주장에 따르면 알몬드 장군은 피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극동군사령부에 동의를 구했고, 극동군사령부는 워싱턴에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국군의 사명

우리 군과 6·25 참전 인사들의 회고록 등은 내용이 또 다르다.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 수송을 강력하게 요청한 것은 김백일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김백일 장군은 알몬드 장군과 만나기 전인 12월 9일 제3사단장 최석 준장,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 군단민사처장 유원식 중령 등을 소집해 피난민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이 때 그들이 나눈 대화에 대해 국방TV 김선덕 PD가 쓴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백일] “우리 1군단이 피난민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조국애와 인류 문명에 반하는 행위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데려가겠다. 그것이 국군의 사명이다.”

[유원식] “처음에는 함경북도 지사와 시인 모윤숙의 숙부, 그리고 저명한 목사까지 단 3명만 데려가겠다고 하다가, 우리 민사처의 끈질긴 교섭 끝에 3000명까지는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김백일]
“끝까지 교섭을 벌이시오. 정 못하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보이시오. 귀관들은 부대로 돌아가는 즉시 해안의 모든 배를 징발하시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배를 징발하여 피난민을 태우시오.”

[송요찬] “우리 대신에 피난민을 태워 보내고 국군은 걸어서 원산을 돌파합시다. 수도사단이 앞장서겠소.”

[김백일] “좋은 각오다. 나 자신도 그럴 각오로 있다. 묻겠는데 애들(장병들)의 생각은 어떤가?”

김백일 장군의 요청에 예상대로 미군 측에서는 군함에 민간인을 태울 수 없다는 미 해군 규정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이에 김백일 장군은 “함선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저 불쌍한 우리 북한 동포들을 태울 수 없다면 우리 제1군단이 타게 될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워주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 1군단은 바다로 철수하지 않고 중공군을 무찌르면서 육지로 철수해나갈 것이니 조금도 근심하지 마라”고 선언했다. 이에 미군 측에서 “한국군이 그렇게까지 결심하고 있는 줄을 몰랐다. 최대한으로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바꿔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피난민들을 태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참모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백일 장군은 북한 피난민 수송을 군 작전보다 중요시했다. 송요찬 당시 수도사단장에 따르면 3사단의 경우 청진에서 성진까지 철수하는 동안에도 대소 선박을 긁어모아 1만여 명의 피난민을 부산으로 태워 보냈다고 한다. 당시 제1군단 군수참모이던 김용기 대령은 김백일 장군이 참모장인 김종갑 준장과 운송책임관인 군수참모와 함께 최후까지 남아 피난민의 승선과 수송을 지휘했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해서 12월 24일까지 약 10만 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이 부산과 거제도로 피난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자칫 6·25전쟁 최대의 비극으로 끝날 수 있었던 흥남철수가 ‘크리스마스 최대의 선물’로 변한 것이다.



“군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흥남철수작전 후 삼척에 상륙해 38선을 방어하던 김백일 장군은 1951년 3월 28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한 여주 미 제8군 전방지휘소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 후 귀대하려고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강풍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다른 지휘관들은 기상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김백일 장군은 “군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부대(강릉에 위치)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서둘러 출발했다.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령 위를 비행하던 경비행기는 시야가 흐려진 데다가 엔진 고장까지 겹쳐 강원도 진부리 발왕산 화란봉, 지금의 용평스키장 눈 덮인 계곡에 추락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의 유해는 5월 9일 나물 캐는 처녀들에 의해 파괴된 기체와 함께 발견됐다. 장군의 가죽점퍼 속주머니에서 하이네의 포켓판 시집이 발견되었는데, 장군이 읽다가 접어둔 페이지에는 봄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가 적혀 있었다.

정부는 김백일 장군을 중장으로 일계급 추서하고, 대한민국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장군의 유해는 나중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육군본부에서는 1955년 장군의 공적이 담긴 전공비(戰功碑)를 부산에 세웠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업적을 잊어버렸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북한 피난민 10만 명을 탈출시킨 공적을 기리기는커녕 친일파라는 논리로 그의 동상과 전공비를 철거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진정한 애국과 매국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김백일 장군 유족 김동명 한국문화안보연구원장 |"아버지에 대한 친일파 굴레 꼭 벗기고 싶다”


김백일 장군의 2남1녀 중 막내인 김동명(67) 한국문화안보연구원장은 육군사관학교 28기로 입학해 2004년 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아버지 뒤를 이어 군과 국가를 위해 일했다. 전역 후에는 함경북도도민회에서 일하다 이북5도위원회 함경북도지사,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지난 6월 21일 전쟁기념관에서 ‘김백일 장군의 건군(建軍) 및 6·25전쟁 주요 활동’을 주제로 추모학술회의를 여는 등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아무 기억이 없다. 전쟁 중이라 아버지와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게 아쉬울 때가 있다. 어른들로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처럼 군과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좌우명이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쉬지 않는다,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뜻인데 그게 아버지의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 생활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아버지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지휘관이 많았다. 내가 일을 못하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게 되니까 항상 조심하며 군 생활을 했다.”

추모행사는.
“원래는 국가에서 해줘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올해가 아버지 순국 66주기, 탄생 100주년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기억하는 후배들이 뜻을 모아 추모학술회의를 하려고 보훈처에 예산을 신청했는데, 심사에서 탈락했다.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지난 6월 조촐하게 추모학술회의를 열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6·25전쟁 자체가 잊히는 느낌이다. 당시 호국영령이 없었다면 오늘 대한민국도 없다는 것을 국민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며 흥남철수작전을 언급했다.
“흥남철수작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줘 고마운 마음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 부모님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남철수작전을 미군만의 공으로 돌리는 것 같아 아쉬웠다.”

아버지 업적이 가려진 느낌이란 뜻인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을 떠난 마지막 배이고, 1만4000여 명의 피난민이 타긴 했지만,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남한에 온 북한 피난민은 10만 명이 넘는다. 나머지 피난민은 헤엄쳐 왔겠나. 당시 아버지가 지휘한 국군 1군단이 상선을 포함해 조각배까지 모든 배를 모아 피난민을 실어 날랐다. 당시 1군단이 얼마나 고생하며 피난민들을 후송했는지 증언이 넘쳐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외면받는 느낌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아버지뿐 아니라 건군 주역들에 대한 ‘친일파’ 오해를 꼭 풀려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간도특설부대가 한인 무장독립단체를 공격했다고 주장하는데, 1938년 이후 만주 지역엔 한인 무장독립단체 자체가 없었다. 간도특설부대가 싸운 건 마적단으로 불리던 항일연군, 즉 중국공산당들이었다. 북한 김일성부대도 항일연군 소속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당시 계급이 중위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기 위해 친일파 기준을 중위까지 끌어내린 것인데, 억지 논리다.”



장진호전투 기념비 뒷이야기 | 민주당이 예산 삭감 주장했던 기념비에 문재인 대통령 헌화


문재인 대통령이 찾은 장진호전투 기념비는 버지니아 주 콴티코 해병대 박물관에 위치하고 있다. 올해 완공, 공개된 기념비는 8각 모양으로 각 면에는 고토리, 하가우리 등 지역별로 이어진 장진호전투의 면면이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기념비는 2013년부터 현지 미 해병대 참전용사들이 모금을 시작해 국가보훈처와 민주평통, 애국단체총연합회 등 한국 국민의 정성을 모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립비용(60만 달러, 한화 약 6억8000만 원) 중 3억 원을 한국 정부가 지원했다.

그런데 현재 여당인 민주당은 당초 이 기념비 건립을 위한 예산 편성에 반대했다. 2014년 국가보훈처는 예산안에 기념비 건립 예산 3억 원을 편성해 국회에 넘겼다. 그러나 국회 심의 과정에서 민주당은 “미국에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이미 3개나 있다”며 예산 편성을 반대했고, 정무위에서 전액 삭감했다.

이에 당시 박승춘 보훈처장은 “어떻게 이런 예산을 깎느냐”며 서류를 던지고 항의하기도 했다. 보훈처 측은 “3개 기념비는 미국인들이 모금해 세운 것으로 우리 정부가 세우려는 기념비 예산 삭감의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논란 끝에 여야는 3억 원을 2년에 걸쳐 나눠서 정부 예산에 반영하기로 합의해 기념비 건립이 이뤄질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사회에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데 기여한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이른바 ‘적폐 인사’로 지목돼 문재인 정부 들어 1호로 경질된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민주당 반대 속에 추진한 사업이란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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