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장애를 무기 삼지 말고 당당히 살아야죠”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07-29 17: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올해 46세의 박종태씨. 그 역시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엔 인공관절이 박혀 있고 공장의 프레스기에 손가락 3개를 크게 다친 2급 장애인이다.

    재산이라곤 경기도 안산시의 12평짜리 영구 임대 아파트와 110만원짜리 디지털 카메라, 낡은 알루미늄 가방뿐인 그는 장애인이 눈물을 흘리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장애인들 사이에서 그는 ‘해결사’ ‘장애인 권익 지킴이’라 불린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에서 추산한 우리나라 장애인 수는 약 500만명. 당당하게 사회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박씨는 전국을 순회한다.

    그가 미리 보내온 활동 내용 자료를 살펴보니 책 한 권은 될 정도로 방대하다. 장애인 시설에 대한 고발, 의견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산자부장관, 철도청장 등을 고발한 고발장도 포함돼 있다. 그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과 방송 스크랩도 50여 건이 훌쩍 넘는다.

    필자와 만난 날 박씨는 날씨가 무척 더운데도 검정색 셔츠에 긴소매의 검정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제 마음은 수도자나 다름없습니다. 광야의 신부 흉내를 내보는 겁니다”라며 조용히 웃었다. 수도자의 마음가짐을 가지려 검정 옷을 입는다는 것.

    -장애인 권익 운동을 시작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장애인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 장애인 권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애인 지킴이가 된 동기 대신 혼자 활동을 벌인 사례를 설명했다.

    “안산시가 1997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장애인 복지회관 건립이 시의회의 반대로 계속 표류하고 있었어요. 교통난이 심해진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속내는 ‘혐오시설’을 시내에 둘 수 없다는 거였죠. 지역 주민들도 건립을 찬성한 터에 시의회가 반대하니 야속하더군요. 건립이 지연되면서 갈등이 심화됐죠. 그래서 제가 1998년 5월 시의회 본회의장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방화혐의로 구속돼 3개월간 복역했죠. 그런데 막상 제 행동에 대해 장애인 단체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과격했지만 장애인을 위해 한 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석방 탄원서도 모두 지역주민들이 나서서 내준 겁니다.”

    -보통 자기가 사는 지역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꺼리는데, 다행스런 일이군요.

    “그렇지요. 안산시민들이 선진 시민의식을 가졌다고 봐야죠.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는데 시의회가 반대를 하니 ‘혐오시설은 오히려 시의회 본회의장이다’ 하고 불을 붙였던 거죠. 다행히 불길은 곧바로 잡혔고 이 사건 이후 언론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어요. 덕분에 1999년 4월 복지회관이 무사히 건립됐고 현재 잘 운영되고 있어요.”

    그는 “장애인일수록 시내에서 비장애인과 어울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흔히 장애인 시설을 산골짜기에 지으려 하죠. 그러면 서로간의 단절만 가져올 뿐입니다” 하고 주장했다. 지루한 싸움이었지만 결국 그는 승리를 거뒀다.

    박씨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생활고 탓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던 장애인 여학생과 평생을 집 안에서만 생활하던 중증 장애인 자매에게 학비와 병원치료비, 전동 휠체어 등을 선물했다. 비용은 100% 모금활동을 통해 마련했다. 그가 해온 장애인 권익운동에 대한 설명은 끝이 없었다.

    박종태씨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도 부모도 모르는 그는 장애인 못지않게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의 한 시립아동보호소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이름이 왜 박종태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아동보호소 시절은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악몽이었죠. 많은 아이들이 들락날락하고 안정감이 없는 곳, 가난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내팽개쳤다가 찾아가는 곳…. 열두 살까지 살았지만 좋은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배를 많이 곯아서 그런지 이렇게 키가 작고 몸도 허약해요(그의 키는 155cm 남짓하다). 배고픔을 참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왜 그렇게 아이들을 배고프게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보호소 시절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원아들을 보던 일입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이곳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1970년대 초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직업연수원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동보호소 내에 개설된 중학과정을 1년 정도 마쳤을 즈음이었다. “이것이 학력의 전부”라며 그는 쓸쓸히 웃었다.

    “직업연수원에 가서야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따뜻한 한 끼 식사를 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몰라요. 따뜻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1년 정도 목공 교육을 받은 그는 솜씨 좋은 기능공이 될 수 있었다. 15세 때 가구목공소에 취직했지만 돈을 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맞는 일도 많았고 일이 힘들어 코피를 쏟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더 좋은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열여섯 되던 해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에 깁스를 한 채 1년여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특히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쳐 인공관절을 해박아야 했다. 하지만 보살펴주는 이가 없어 치료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오히려 병원의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교통사고 당한 후 결핵 걸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용변 처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죠. 결국 병실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어요.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저를 다른 병실로 보내라고 항의까지 했으니까요. 병실 쓰레기통에 대소변을 해결했으니 얼마나 냄새가 났겠어요. 유일한 해결책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었죠. 먹지 않으면 용변 횟수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2∼3일에 한 번 한밤중에 몰래 용변을 봤어요. 나중엔 그것도 들통이 났는데, 정말 죽고만 싶었지요. 이런 모든 일들이 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것으로 알았죠.”

    1년여의 힘든 시간이 지나 퇴원하긴 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그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결핵에 걸리고 만 것. 다행히도 직업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수녀들 덕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천주교 요양소에 갈 수 있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가 찾아가는 이는 성직자들이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영혼을 거두어준 하느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요양소에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20세 때 공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확 바꾸게 해준 사람을 만나게 됐다.

    “교도소 출소자를 상대로 자립운동을 펴는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까지 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만 했어요. 하지만 저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죠. 그래서 목사님과 함께 교도소 출소자를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 거죠. 5년간 활동했는데, 사실 쉽지 않았어요. 시행착오도 많았고 그때마다 적잖이 회의도 느꼈죠.”

    결국 출소자 돕기 활동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성격은 확 바뀌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그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된 것. 그후 그는 대한항공 계열사인 한국항공에서 화물운송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직업학교 시절 인연을 맺었던 수녀가 충주 성신 맹아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알게 됐다. 맹아학교에서 수녀의 일을 도우면서 그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보았다고 한다.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사회복지법인 평화재단의 임득선 이사장(맨 오른쪽)과 박씨는 서로 도우며 ‘장애인 권익 지킴이’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뇌성마비인 데다 눈까지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을 보고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 있나’ 싶었어요. 저는 너무도 가진 게 많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죠.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고 결핵 때문에 숨이 차지만, 이들에 비하면 제 몸은 너무도 행복한 육신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맹아학교는 충주에서 광명, 다시 안산으로 이주했다. 박씨는 수녀를 따라 거취를 옮겨가며 맹아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박씨는 가죽, 염색, 판지, 대형박스 제조 공장 등에 근무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1995년 공장의 압착기에 왼쪽손가락 세 개가 눌리는 사고를 당했다. 산재보상도 받지 못해 이곳저곳 손 치료를 위해 뛰어다녔다고.

    “서울 구로동에 손가락 산재협회가 있습니다. 작업 중 손가락이 잘린 직공들의 모임이죠. 저도 협회에 가입했고 성형외과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덕분에 손가락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해요. 그래서 산재 판정을 받기 위한 투쟁을 벌였어요. 사실 손가락 하나 잘리면 보상 수가가 턱없이 적죠. 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고요. 막상 제가 장애인이 되고 나니까 장애인 권익 보호에 더욱 앞장설 명분이 생겼습니다.”

    공장 압착기에 손가락 3개 눌려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안산시의회 본회의장 화재 사건으로 3개월 복역한 후 길거리의 장애인 시설 개선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안산 시청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장애인은 리프트를 이용하게 되어 있죠. 하지만 리프트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용하기가 매우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했어요. 하지만 ‘네가 뭔데 이런 걸 요구하냐’는 답이 오더군요. 신문에 ‘장애인 시설 엉망이다’는 제목으로 글을 냈죠. 다행히도 많은 기자분들이나 독자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더군요. 마침내 1999년 시청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됐죠.”

    그는 관공서는 물론 장애인에게도 불만이 많은 듯했다. 심지어 그는 장애인 단체와 충돌한 일도 많았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장애인들은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무기 삼아 사회에 들이밀어요. 사실 선진 복지국가로 나아간다는 징표인지,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이것을 몇몇 장애인들이 악용하고 있어요. 비장애인처럼 불편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요구한단 말이죠.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니까 불쌍해서 봐주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안이한 시각이 오히려 장애인들을 망쳤다고 봐요. 장애인이 특별히 대접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동정을 받을 일은 더더욱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몇몇 장애인 단체들과 일부 장애인들은 일을 처리할 때 장애인임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고, 거기에 제가 제동을 걸다 보니 갈등이 참 많았죠.”

    -비장애인들보다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비장애인들이 배려를 해주니 한술 더 뜨는 거죠.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남의 도움을 받으려 하고, 안 해주면 신체 장애를 들이미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제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당당하되 장애를 무기 삼지 말자는 거죠.”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상당수 장애인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해요. 받는 데만 익숙하고 베푸는 데는 인색하죠. 자기가 고통을 겪으면 남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안 그래요. 물론 장애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이 있는 장애인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도 장애인 지킴이 운동을 하면서 늘 조심해요. 남을 제대로 배려하고 있는지, 혹 제 실수로 장애인 전체가 욕을 먹지는 않을지… 항상 되새겨요. 조용한 데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죠.”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박씨의 노력 끝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중인 안산시 구반월 수암육교

    -사제나 다름없군요.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까.

    “1981년 ‘사랑의 선교 수사회’에 입회했습니다. 세례명은 빈첸시오 아바오로입니다.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호하고 대변해주었던 프랑스의 성인 신부인 빈첸시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세례명이죠. 제 기구한 운명과 제 의지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많은 고아들이 믿고 의지할 곳이 없어 나쁜 길로 빠지곤 하죠. 하지만 저는 종교가 있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이 안 좋아 포기했어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정된 일을 하는 신부보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지금 상태가 더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부모와 같은 마음속 안식처인 가톨릭을 ‘배신’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봄 명동 가톨릭회관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설치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인 것. 한 달간 1인 시위를 벌였지만 관철되지 않았고 오히려 말썽 일으킨다고 구박만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정진석 대주교를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했다.

    “장애인 선교 단체가 둘이나 입주한 가톨릭회관의 화장실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좁은 데다 지하에 위치해 아예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당 곳곳에 계단이 있어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기 힘들어요. 노약자들도 출입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물론 불교 조계사 법당이나 포교원도 장애인들이 다닐 수가 없어요. 이웃 사랑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종교단체에서 장애인 노약자 시설을 외면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죠. 그래서 대주교님을 고발한 겁니다. 그러자 인권위원회에서도 난처해했어요. 그러던 중 명동성당에서 장애인 시설을 갖춰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교님께 죄송하지만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정당한 일이면 안 될 것이 없다”

    박씨는 “이 일을 치른 후 정당한 일이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최근 관심을 갖는 운동은 제대로 된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자는 것이다.

    “지하철마다 장애인 휠체어용 리프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시늉만 하고 예산만 버린 것 아닐까요.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려면 지하철역 기계실이 작동되어야 하고 역무원이 달려와야 합니다. 30분 이상 시간이 걸려요. 역무원 입장에서는 소모적이고 귀찮은 일로 생각할 수 있죠. 또 휠체어 리프트에 설치한 추락방지용 안전벨트와 고리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이렇게 쓸모도 없고 위험한 리프트보다는 예산이 좀 들더라도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세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 역사마다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나 임산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 그는 교차로 음성신호기 문제도 지적했다. 교차로 음성신호기는 건널목에서 시각장애인이 소지한 리모컨을 작동하면 신호등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현재의 신호 상태 정보가 음성으로 나오는 장치. 하지만 스위치를 누를 때 현재의 위치 신호등뿐 아니라 다른 곳에 세워진 신호등의 음성신호가 동시에 울려 혼란만 부르고, 오히려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일부 시각장애인 단체와 업체들이 결탁해 신호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구청에서 여러 신호기 제품의 성능을 일일이 시험해본 후 문제가 없는 신호기로 다시 설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한 신호기 업체의 사주를 받아 기존 제품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웃어버리고 말죠. 제 양심에 따라 활동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는 자신이 장애인 권익 활동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선배가 한 사람 있다고 말했다. 사회복지법인 평화재단의 이사장 임득선씨다. 필자와 박씨가 함께 평화재단을 방문했을 때 임씨는 휠체어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임씨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다.

    “박종태씨는 장애인 일이라면 목숨 바쳐 일하고 있어요. 다소 급진적이어서 장애인 단체와도 관계가 매끄럽지는 않죠. 저도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이니 무조건 주라’는 식의 사고는 전혀 장애인 복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박씨와 저는 시각이 비슷해요. 그래서 서로 도우며 장애인 권익 지킴이 운동을 함께하고 있어요.” 임씨의 이야기다.

    취재진은 박씨의 노력 끝에 육교 옆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있는 안산시 구반월 수암육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육교로는 장애인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시범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 엘리베이터가 완공되면 주변의 명물로 등장할 것이라고 그는 자랑했다.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오전 6시에 일어납니다. 제 아파트에는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기도실로 쓰고 있어요. 이 방에서 한 시간 가량 묵상을 하고 오전 7시30분쯤 밖으로 나갑니다. 밖에서 하는 일은 무척 다양해요. 장애인 권익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오후 7∼8시쯤 집으로 돌아옵니다.”

    -인생관을 말씀해주시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도 행복해하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성한 얼굴인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번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죠. 누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간다고 보십니까. 제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저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제 인생관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제 한 달 수입은 55만원이에요. 장애인 2급 지원금 35만원과 천주교에서 지원하는 20만원이 전부죠. 아파트 관리비와 임대료가 10만원, 휴대전화 요금이 12만원 정도 들어요. 가장 큰 지출항목이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니까 교통비와 여관비도 만만찮지만 특별히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어릴 적부터 궁핍한 생활을 했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살다 보니 부의 중요성을 잘 모르게 된 것 같어요.”

    -좋은 직장, 안정된 생활, 행복한 결혼 등을 꿈꾸지는 않았나요?

    “물론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한국항공에 다닐 때 한 여성을 좋아했어요. 그분도 제게 무척 잘해주셨고요. 하지만 관계를 진전시킬 수 없더군요. 자격지심 때문이랄까, 솔직하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없었어요. 부모도 저를 버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를 받아줄까 싶었고요. 그냥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삽니다”

    그가 결혼을 포기한 것도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가정도 지킬 줄 모르며 장애인 권익을 지킨다며 돌아다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 그는 이젠 자신의 사사로운 행복은 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버리자 더 큰 행복이 보였다고 한다. 3년 전에는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한 환자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나눔으로 얻는 행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체득했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문제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간다

    -앞으로의 계획은?

    “할 일이 너무나 많죠. 초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문제 있는 곳에 저는 반드시 출동하니까요. 허허. 오늘도 지난 5월14일 부천 성내 전철역 철로에 떨어져 숨진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그분은 월남전에 파병돼 고엽제에 시달리다가 끝내 시각장애까지 일으킨 분이었어요.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그분의 옷소매를 잡아주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국민의 발’인 지하철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없애자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최근 창간한 주간 ‘서울장애인신문(www.ablenews.co.kr)’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좀더 조직적으로 장애인 권익 향상 운동을 할 생각입니다.”



    박종태씨의 큼직한 알루미늄 가방 앞면과 뒷면에는 ‘장애인 권익운동과 편의시설 실태조사 및 불편사항 신고 상담실. 011-472-6310. 장애인권익지킴이’라고 쓰여 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의 가방이 바로 ‘이동사무실’인 셈. 무거운 짐으로 보이는 그의 ‘이동사무실’이 바로 인류의 참된 가치를 선물하는 값진 보석이 아닐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