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인내의 전략

  • 글: 강인애 경희대 대학원 교수·교육공학(iakang@khu.ac.kr)

    입력2003-07-30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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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내의 전략
    영문과를 나온 사람들이 제일 고역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그럼, 영어는 잘하시겠네요?”라는 기대 섞인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육을 전공했다고 다들 자기애들에 대한 진지한 교육상담을 하려고 할 때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 분야도 이제는 교육심리, 교육행정, 성인교육, 교육평가, 교육과정, 그리고 내가 하는 교육공학 등 여러 분야로 나뉘어 있다. 특히 내 분야에서 하는 일은 학교나 기업에서 적용할 수 있는 교육이나 훈련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교육과 같은 컴퓨터 활용 교육을 하는 것이므로, 애들의 학교생활이나 교우관계, 진로 등의 문제에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전공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전공자들에 비해서는 교육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론을 많이 접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누가 물어온다면 나는 ‘인내’라고 대답하고 싶다.

    내가 전공한 교육이론은 ‘학습자 중심’ 혹은 ‘학습자 주도’를 강조하는 ‘구성주의’다. 이는 일방적인 지식 전달과 흡수를 강조하는 기존의 교사 중심적 수업환경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수업의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나는 과연 이 이론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지금까지 그 이론에 입각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하지만 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X세대를 지나 N세대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기성세대와는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요즘의 대학생들도 학교라는 특수환경에 이르면 어느새 ‘지식 흡입 스펀지’처럼 철저히 사회화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이들에게 색다른 수업경험을 주기 위해 나는 우선 좌석 배치부터 달리한다. 모든 의자를 소그룹 별로 동그랗게 배열하도록 하는 것이다. 맨 앞에 우뚝 서 있는 교수용 탁자는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올려놓는 용도로 쓸 뿐 내 자리는 언제나 소그룹으로 모여 있는 학생들 옆에 남아도는 의자들 중 하나다.

    내 임무는 본 수업에 앞서 토론할 주제나 질문거리를 제시하고, 다음에는 그 문제나 질문에 관해 학생들이 준비해온 것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그에 따른 그룹별 해결안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각 그룹을 돌아다니면서 토론 모습을 관찰도 하고, 간혹 ‘또 다른 학생’의 위치에서 토론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미 1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해왔건만 이런 수업의 첫 시간이면 언제나 학생들보다 더 긴장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라도 되는 듯 비장함까지 갖추고 수업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학생들에게 내 수업방식을 설명하자마자 마구 쏟아지는 그들의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시선과 싸워야 한다. 첫 1∼2주의 수업에서는 이런 방식이 너무 어렵다느니 막막하다느니 따위의 한숨 섞인 반응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2주쯤 지나면 학생들의 절반은 포기와 체념의 상태로, 절반은 새로운 수업방식의 긍정적인 면을 스스로 발견하면서 수업 분위기는 역전된다. 바로 이때 나는 ‘인내’의 전략이 결국 성공했음을 느끼곤 한다. 토론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학생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막막함에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의 눈빛과 마주칠 때는 이리저리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옆자리에 앉는다.

    그럴 때면 십중팔구 학생들은 여태껏 열을 내며 토론하다가도 갑자기 멈추고선 “제발 더 이상 우리를 ‘고문’하지 말고 ‘정답’ 좀 알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 이럴 경우 ‘그까짓 것’ 하면서 ‘정답’을 떡하니 알려줘서 “역시 교수는 달라”라는 감탄을 자아내고 싶은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난 다시금 ‘인내’라는 주문을 맘속으로 외운다. 그리곤 가능한 한 그들 스스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도록(대개의 경우 그렇게 된다) 안내해주는 도우미 노릇을 하고 일어선다.

    이러한 ‘인내’의 결과는 한 학기가 끝난 뒤에 변해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전반부의 고통과 어려움을 훨씬 능가하는 보람으로 다가온다. 학생들은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난 그냥 그들에게 토론할 거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발표 내용에 대해 약간 덧붙이거나 정리해줄 뿐 수업의 주인공은 엄연히 그들이 되고 그들의 생각과 목소리와 경험으로 수업내용이 채워진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번 수업을 통해 뭔가를 배웠다기보다는 내 스스로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을 맛본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은 그들의 열띤 토론으로 꽤나 소란스럽다. 간혹 옆방 교수님이 내 방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들여다보기도 한다. 학생들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주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생각을 내게,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 있게 전달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게는 3년 터울의 아이 둘이 있다. 큰애는 둘째가 생기기 전 3년간만 독점적 사랑과 관심을 누렸을 뿐 그 이후는 많은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거나 공유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을 힘들어하더니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큰애는 처음 1∼2년만 엄마의 도움을 받았을 뿐 그 이후의 학교생활은 ‘홀로서기’의 반복훈련이었다. 그러나 둘째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전공하고 가르치는 이론이 ‘스스로 학습하기’임에도 자식에게는 그런 인내심을 발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결국 둘째아이의 숙제는 대부분 엄마의 숙제가 되고, 첫째아이의 숙제는 일하는 엄마의 한계 탓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숙제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큰애는 어떤 숙제가 주어져도 스스로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길 뿐더러 대견하게도 대부분을 거뜬하게 해낸다. 반면에 둘째는 자기 숙제로 끙끙대는 엄마 옆에서 아주 부분적인 조수 노릇을 하는 것으로 자기 몫을 다했다고 느끼곤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다행스럽게도 애들이 올해 아빠와만 함께 지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남편은 “숙제는 애들 스스로 해야지 누가 도와주면 안 돼”라고 주장하면서 나름대로의 교육철학을 피력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귀찮음에서 비롯되는 방관을 위장하기 위한 전략임을 나는 빤히 알고 있다. 이런 ‘소신’ 있는 아빠와의 생활에서 첫째아이는 별 탈 없이 잘 적응해갔지만, 엄마의 ‘조급한 도움’에 익숙해 있던 둘째아이는 으레 아빠에게서도 비슷한 것을 기대했다가 낭패를 보고는 했다.

    그 다음부터는 둘째 녀석도 숙제가 주어지면 아예 자기 혼자 하겠다고 공언하고는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고 한다. 게다가 혼자 끙끙거리며 한 숙제가 선생님으로부터 칭찬까지 듣는다니 내심 걱정하며 안달하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역시 ‘인내’가 가장 효과적인 학습전략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많은 교육이론이 강조하듯이 이런 ‘인내’는 아이들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짓장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 비록 얕은 경험이고 서툰 지식이지만 스스로 그것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결국에는 성숙함에 다가서리라는 믿음, 이것이 우리 부모들에게 필요하다. 아이들 옆에서 방향지기, 즉 문자 그대로 ‘도우미’ 노릇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너무나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우리 부모들이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입시 중심의 교육환경이다.



    올바른 교육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낙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남들 따라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내가 제안하는 ‘인내’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호사스런 이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나의 크고 작은 경험들을 돌이켜볼 때 분명 ‘인내’의 전략은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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