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8일 각계 인사 1013명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한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1000인 선언’의 주요 골자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 정치권뿐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반면 시민사회의 현실정치 참여의지를 매우 강하게 표출했다.
특히 여야를 떠나 현 정치권 전부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새로운 정치주체로 나서겠다는 대목은 자연스레 ‘신당’에 대한 의지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정치는 정당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내부의 시각 차이는 이처럼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선언문의 방향성과 내용에서부터 시작됐다. 박원순(朴元淳)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은 선언문 작성에 직접 참여했던 시민사회의 대표적인 인사다. 박이사장은 8월말 일부 언론에 선언문 내용의 일부가 알려져 ‘신당’ 창당 논란이 일자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선언문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일종의 경고문일 뿐이다. 시민단체들이 직접 창당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내년 총선에서 새로운 정치세력 결정의 촉매제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랬던 박이사장이 정작 선언 당일 선언자 명단에서 빠지자, 대부분의 언론과 시민사회 관계자들은 선언문 내용을 둘러싼 내부 논란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1000인 선언’은 정치세력화 선언
실제로 박이사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불참배경을 묻는 질문에 “그(선언문) 내용에 정치세력화 부분이 있었다. 난 우리 자신이 정당을 만들거나 제도권 정당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한 적이 없다”고 말해 선언문 내용과 직접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박이사장은 이어 “물론 서명하신 분들이 다 정치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도권 정치 하겠다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나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면서 “앞으로도 참여할 의사는 없고, 우리 시민사회가 좀더 확대되고 제대로 정착되는 것이 정치개혁의 간접적인 토양을 만들어가는 것인 만큼 그 일에 좀더 몰두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참여연대 소속 관계자들이 이번 선언에 전원 참여하지 않은 것도 이처럼 박이사장과 뜻을 같이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와 관련,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이 밖에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 그리고 특별히 입장을 밝힐 것도 없다”면서 “다만 뜻 있는 분들이 모였으니 잘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간단히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박이사장이 시민사회의 정치참여를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도덕적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정치인들보다는 훨씬 현명하고 깨끗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민운동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분들이 한꺼번에 다 옮기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이사장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시민운동의 순수성 훼손 우려에 대해서도 “국내 시민운동도 매우 다양해졌고, 그 수도 많아졌다. 일부의 흐름을 전체화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정치에 직접 뛰어든다고 하더라도 시민사회 운동을 위한 수단일 뿐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사들 사이에서도 선언문 내용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신당 등에 대해 입장과 시각이 크게 엇갈려 앞으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이들은 또 시민사회의 정치적 중립성과 순수성에 대해서도 분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였다.
손혁재(孫赫載) 성공회대 교수는 “신당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치주체의 출현을 촉구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선을 분명히 했다. 이어진 손교수의 설명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정치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정치개혁 입법 청원도 해봤고, 올해 초 시민단체 대표들이 국회의원, 원외정당(민주노동당), 학계 전문가들까지 참여한 범국민추진협의회를 만들어 의원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도 아직까지 실무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더 이상 정치권에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새로운 정치주체 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