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3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제11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9월8일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국내외 언론들은 ‘북한이 정권수립 55주년 기념일 행사장에서 사거리 4000km의 신형 미사일과 노동미사일을 공개하는 등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일 예정’이라는 보도를 쏟아냈다. 이 때문에 6자회담으로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을 것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추석 연휴와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던 통일부와 외교부 등 관계기관은 갑작스러운 뉴스에 분주해졌다. 소식은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만큼 빠른 속도로 파급됐다. 한 석간신문이 9월9일자에서 ‘노동미사일 등을 비롯한 각종 신구형 무기들을 총동원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는 기사를 ‘미리’ 출고했을 만큼 ‘9·9절 무력시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각군 의장대가 집결한 열병식과 시민 100만명이 참가한 군중행사는 있었지만 미사일 무력시위는 그림자도 없었다. 결국 수많은 언론들은 ‘빗나간 예측’ 혹은 ‘뼈아픈 오보’를 남긴 셈이 됐다.
그날 저녁 기자와 만난 통일부 관계자는 “언론이 최근 평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외신보도를 과신한 측면이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지난 일이니 쉽게 말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부 내에서는 ‘9·9절 위기설’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오히려 경제개방정책을 보다 극적으로 선언하는 조치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뚜렷한 결과가 없어 아쉽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더 이상 초강수는 없다”
한편 9·9절 직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인사는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행사준비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무력시위나 군사 퍼레이드 연습 같은 건 없었다”고 전했다. 북한의 분위기가 지난 봄과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했다면 무더기로 빗나간 예측보도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촌평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8월 이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인사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우선 미국이 선제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한다. 평양에서 열린 학술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주당 김성호 의원은 “여유가 느껴졌다. 지난해 10월 방문했을 때보다 에너지 사정도 나아진 듯했고 평양 시민들도 안정돼 있는 등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것이 확실해 보였다”고 전했다. 김의원은 또 “대남사업 담당기구인 아태평화위 리종혁 부위원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핵무기 보유가 목적이 아니라고, 미국이 우리를 오해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또한 경제를 개방해도 체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2월에 이어 8월말 다시 평양을 방문해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인사는 “외무성 사람들이 ‘우리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2월 방북했을 때 상황을 주도하고 있던 군부 강경파들이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계기로 정책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전언이었다.
“2월에는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결국 1994년 제네바합의 때처럼 미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클린턴과 부시는 다르다’고 아무리 설득해봐야 말이 먹히지 않았다. 4월 3자회담에서 리근 대표가 ‘핵보유 선언’을 한 것 또한 ‘미국을 움직이려면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고 들었다.
위기가 고조되면 강경한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월만 해도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불안감이 최대치에 이를 때였다. 이 무렵에는 김정일 위원장도 군부에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지난해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납치 시인’으로 망신을 당한 후 외부활동에도 은근히 견제를 받아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외무성 당국자들, 그 중에서도 경제파트나 대외협력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한 40~50대 인물들이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 결코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이들은 대화 분위기를 유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핵실험이나 무력시위, 초강경 발언 등으로 섣불리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