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 앞 광장에서 펄럭이는 중국 국기. <br>2.조지 부시 미대통령을 만나 합장하고 있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br>3.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
버스에 탄 한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통역을 자청한 한 중년남자가 “이 남자는 티베트인인데 난징에 오면서 인민폐를 가져오지 않아 달러와 환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몇몇 승객들이 환전을 해줬고 버스가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남자는 사라졌다.
사기사건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이 사건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선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원이지만 그 언어가 확연히 달라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민폐다. 그 사기꾼이 사용한 10위안(元) 짜리 인민폐는 앞뒤에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의 인물 두상과 조모랑마봉(히말라야산)이 찍힌 구권(1988년 발행)이거나 아니면 앞뒤에 마오쩌둥 두상과 장강삼협이 찍힌 신권(1999년 발행)이었을 것이다. 신권 50위안 짜리 후면에 티베트 포탈라궁이 등장하는데, 인민폐에 티베트 관련 도안이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화폐 도안은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치상황까지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이 경우 인민폐에 티베트궁이 도안된 것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티베트는 중국 서부의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티베트를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3대 지역은 티베트의 중심지인 위(중앙 티베트) 지역과 남부의 짱 지역(통칭하여 위짱 지역), 현재 중국 쓰촨성 서부 지역과 창두(昌都) 지구를 포함하는 캄(동부 티베트), 그리고 칭하이(靑海)성과 깐쑤(甘肅)성 남부를 포함하는 암도(동북부 티베트)다.
중국은 1951년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접수하고 티베트의 국가적 존재를 부정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13세기 부터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만약 티베트인들이 중국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이른바 ‘티베트 사변’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 분쟁의 중심에 있던 샤거파를 비롯한 망명 티베트인들은 중국과 매우 상이한 주장을 펴고 있다. 즉 1951년 5월23일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17개조 협의’가 체결되기 전까지 티베트는 독립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티베트를 둘러싼 국제적인 ‘논쟁’은 치열하지만, 실제 티베트에서의 ‘분쟁’은 얌전한 편이다. 다른 분쟁 지역처럼 전투나 폭탄테러가 빈발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티베트에는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청대의 티베트 정복, 국민당 시대의 세 차례 전쟁, 1950년 무렵 공산정부와의 전쟁, 1959년의 독립운동 등을 거쳐서 나타난 국면이다.
고강도 논쟁과 저강도 분쟁
과거 티베트인들은 ‘티베트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7세기 초반에서 9세기 중엽까지 중국 한족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티베트 지역의 토번(吐蕃)제국에서 연유한다.
토번왕조 전에도 중국과 티베트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가간 접촉은 7세기초 토번 왕조의 쏭쳰감포(569∼650)가 티베트 고원을 통일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전쟁과 화친을 반복한 토번과 당(唐)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은 영토 분쟁이었다. 634년 시작된 토번과 당의 외교관계는 846년 토번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토번왕조 때 티베트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런 경험은 티베트인들이 중국과 티베트를 대등한 위치에 놓게 한 역사적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