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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 (10)|중국 vs 티베트

‘중화민족론’ 거부한 政敎合一정권의 1000년 투쟁

  • 글: 박장배 한국산업기술대 강사· 사학 plantinoid@freechal.com

‘중화민족론’ 거부한 政敎合一정권의 1000년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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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제국의 붕괴 후 티베트는 400여 년간 분열되었다. 그러는 동안 티베트에는 불교가 가장 중요한 사회구성원리로 자리잡았다. 송(宋)대에 이르러 티베트의 일부 세력은 송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불교와 중국 왕조에의 책봉조공 관계는 이후 티베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원(元)대 이래로 티베트는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원대에 중국과 티베트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티베트에는 몽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인 싸카파 종파에 의한 정교합일 정권이 형성됐고 몽골족은 중원을 통일해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원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기존의 책봉조공 관계 외에 ‘최왼’ 관계가 나타난다.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정신적·종교적 지지와 세속적·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법주-시주, 즉 종교적 지도자-세속적 군주)’ 관계가 맺어진 것. 최왼 관계는 당시 싸카파 종파의 고위 승려인 싸카파디따(薩迦班智達)와 칭기즈 칸의 손자인 고댄 사이에 처음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전쟁 없이 티베트를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고 싸카파 종파는 티베트에서 정교합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싸꺄빤디따를 이어 싸카파 종파를 관장하던 팍빠(八思巴)와 몽골의 쿠빌라이 칸 사이에도 맺어졌다.

상부상조 ‘최왼’ 관계

이러한 최왼 관계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들이 원나라에 순순히 귀순하도록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원나라는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정교합일정권을 현실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당시 원나라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즉 단순히 원나라의 통치 대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원나라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나라 붕괴 후 명(明)나라가 들어섰지만,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은 원나라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명 초기인 1409년 티베트 내부에서 총카파(1357∼1419)가 창립한 겔룩파 종파(黃敎)가 교단의 정화와 계율을 강조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겔룩파 종파는 총카파가 사망한 후 활불전세(活佛轉世)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승이 사망하면 교단에서 어린 전생자(前生者)를 찾아 계보를 잇는 독특한 승직 계승 방식이다. 이는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는 3대 달라이 라마 쐬남갸초(1543∼88)에서 시작됐다. 정교일치 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통치력은 중부 티베트에만 미쳤을 뿐 티베트 전역을 포괄하진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를 넘어 몽골과 만주 일원에까지 미쳤다.

겔룩파 종파는 만주에서 청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도 몽골 세력과 최왼 관계를 맺으면서 몽골 부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교합일정권을 지켜왔다. 명대에 이르러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연맹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510년 이후 동몽골 부족들이 부족간 갈등을 겪으면서 칭하이(靑海) 쪽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의 접촉 과정은 몽골군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이 아니라 원대 이래의 최왼 관계를 회복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몽골의 지도자 알탄 칸(1543∼82)은 1578년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최왼 관계를 맺었다. 이 만남은 몽골인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 신앙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1637년 서몽골 준가르 부족의 일원인 구시칸(?~1656)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에 들어와 5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6년 후 구시칸은 티베트의 내분을 틈타 티베트 전역을 통일하고 티베트 통치권을 5대 달라이 라마에게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인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5대 달라이 라마 시대가 열렸다.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티베트에게는 최왼 관계의 수립을 의미했으나 청조의 입장은 몽골인에 대한 통제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최고위 승려인 달라이 라마를 우대했다. 하지만 점차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전제조건은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1720년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역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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