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통합을 가속화하는 유럽이나 미주와 달리 한중일 FTA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역사는 흐른다. 새로운 역사의 장(章)이 열리고 있다. 이 장(章)에는 지금까지의 역사책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담겨질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새로운 모습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역사는 서양 중심의 역사였다. 앞으로도 서양의 우위는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역사책에는 동양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 부분 실릴 것이고 서양 국가들도 동양의 발전 모형을 어느 정도 본받게 될 것이다.
지난 1세기반 동안 아시아는 서양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근대화(서양의 모방)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 1세기반 동안 아시아는 세 번의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최초의 성공은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서양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의 성공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오직 일본 국민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일본의 눈부신 근대화 성공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후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이 일본을 모방하고자 사절단과 학생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을 본받아 이웃나라들에 대해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끝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고 아시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의 근대화 성공은 1970~80년대에 이른바 ‘신흥공업국’ 칭호를 받은 4룡(龍),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계은행은 이것을 ‘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적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대내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이뤄낸 성과였다.
이 글의 관점에서 볼 때, 4룡(龍)이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냉전질서가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한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일본, 한국, 대만 등 아시아 반공국가들의 경제건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 나라는 국방문제는 미국에 맡긴 채 모든 국력을 경제발전에만 투입했다. 이들 나라에서 추진한 국가주의와 중상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수출주도형 정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일본은 대내지향적 정책에 머물러]
아시아에서 세 번째, 그것도 가장 극적인 경제발전 및 사회 근대화는 중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그리고 인도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이 세 번째의 발전은 그 규모에 있어서나 여타 세계에 대한 영향에 있어서 일본 및 4룡(龍)의 발전을 훨씬 능가한다.
일본 및 4룡의 발전과 중국 등의 발전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일본, 한국, 대만 등은 나라의 크기가 작고, 세계관은 대내지향적(對內指向的)이며, 정책기조는 대체로 중상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의 발전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이 나라들의 발전의 원동력은 미국과의 교역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발전은 이웃나라들과는 서로 격리 내지 독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이나 아세안 및 인도는 그 면적이나 인구가 방대하고, 고대로부터 이어받은 세계관이 전통적으로 대외지향적(對外指向的)인 데다 경제정책도 중상주의가 아니고 국제간의 교류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같은 특징은 이들의 발전이 일본이나 4룡(龍)의 발전에 비해 이웃나라들과 연계관계를 갖기 쉽도록 만들고 있다.
일본, 한국 및 대만은 냉전체제의 수혜국(受惠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발전전략의 패러다임은 본질적으로 국가주의적, 중상주의적, 그리고 배타적인 면이 농후하다. 지금 일본이나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 나라들의 사고와 체제가 본질적으로 세계화 추세에 적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데에 그 원인의 일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