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명한 디오게네스의 에피소드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왔는데, 빈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빈곤 개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다. 디오게네스처럼 햇볕 한 줄기면 족할 정도로 욕구수준을 낮출 수만 있다면 빈곤은 더 이상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오게네스의 시대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오늘날의 정글 자본주의 체제는 아니었으리라. 빈곤의 개념이란 연구할수록 어렵다.
구룡마을은 부동산 투기에 눈먼 부자들의 땅으로 알려진 서울 강남구에 자리한 비닐하우스 촌이다. 이 마을에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신부님이 세 분 살고 있다. 그런데 방의 길이가 신부님들의 키보다 작아 신부님들은 잠 잘 때 장롱 속에 발을 집어넣어야 한단다. 장롱이래야 벽돌 위에 선반을 얹어 커튼을 친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좀 이상하다. 구룡마을의 다른 집에 가보면 집이 무척 좁고 가난하게 느껴지는데 신부님들의 집은 그다지 좁지도, 가난해 보이지도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그 이유를 찾았다. 신부님들의 집에는 다른 집에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잡동사니며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이 없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장롱과 책상 하나, 그리고 성경책 한 권이 신부님 방에 있는 물건 전부이다.
이 때문에 신부님들의 방에 들어가면 영혼의 향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신부님들은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영성(靈性)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지난 여름 인도에 갔을 때 소나 돼지처럼 바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이들을 보자 문득 만화영화 ‘정글북’에서 곰 발루가 부르는 노래 ‘곰의 필수품(Bear Necessities)’이 생각났다. ‘걱정이나 불화는 잊어버려요. 그리고 물질은 최소한의 필수품으로만. 그게 우리 곰들이 쉽게 살 수 있는 이유죠.’ 이것이 이 노래의 가사다.
곰은 그저 먹이를 구할 수 있고,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면 행복해한다. 짝짓기 철에 잠시 수컷과 암컷이 사랑을 나누면 그만이다. 더 이상의 애정에 대한 욕구도, 식구의 생계에 대한 책임도 없다. 자신을 쫓는 천적에게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행복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곰에게 이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동물들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도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다른 어느 문명사회보다 높다고 한다. 그 이유가 어쩌면 그들이 자연에 순응해 욕구를 단순화했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깊은 신앙심으로 현세보다는 내세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의 우리들과는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라크에서 미국을 향해 벌어지는 테러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가운데 이라크에 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명분 없는 전쟁터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려는 겨울의 문턱에서 서로 다른 문명에서 겪은 경험이 사회 부적응을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몇 가지 상담사례를 떠올려본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최저 생계를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등재할 주민등록지가 없는 노숙자들은 이 법의 혜택 밖에 방치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역 앞의 한 쪽방상담소는 후원금으로 월세 15만원짜리 쪽방을 얻어놓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있는 장애인, 환자, 노인, 임산부 등 근로 무능력자를 입주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첫 생활비가 나오면 다음 노숙자를 위해 쪽방에서 나가게 하는 편법으로 좀더 많은 노숙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작년과 올해, 모두 28명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는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 중 세 명은 다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 육손이 C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알코올성 간염, 다발성 늑골골절, 왼쪽 어깨 관절염좌 등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게다가 발까지 다쳐 목발을 짚고 다닌다. 상담원들이 그를 위해 얻어둔 방으로 들어오라고 빌고 또 빌어도 C씨는 지하도에 널브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다. C씨와 3개월 동안 승강이를 벌인 끝에 쪽방상담소 소장은 포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육손이는 우리보다 진화된 인간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우겼다. 2개월이 더 지난 후 날씨가 유난히 춥던 어느 날 얼어죽을 지경에 놓인 C씨를 방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C씨는 봄이 되자 다시 지하도로 내려가버렸다.
C씨의 통장에는 매달 31만원의 돈이 쌓여가고 있지만 그는 돈을 찾아서 쓸 줄 모른다. 나머지 두 사람도 C씨와 비슷하다. 이들은 아무래도 우리 문명사회의 일원이 아닌 것 같다. 이들의 행복에 대한 욕구는 일반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서울 성북구의 어느 움막에는 독거노인 D씨가 살고 있다. D씨는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었지만 시가 1억원이 넘는 집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수급권이 박탈됐다. D씨를 돌봐주는 한 수녀님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전직 정보부 직원이었다고 한다. 매사가 귀찮아 연금도 찾지 않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새에 재산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D씨가 얼른 내비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D씨는 북파 간첩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북한에 잠입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겪은 절대공포 때문에 북한과는 전혀 다른 우리 사회의 일상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게 아닐까?
디오게네스나 구룡마을의 신부님이 추구하는 대안적 문명이 제1의 문명이라면,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따르고 사는 곰이나 인도 사람들의 문명은 제2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천적으로 삼고 서로 죽이는 경쟁을 해 집단적 승부를 가리는 전쟁은 제3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문명은 자본주의 체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문명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라크에 가서 과연 전쟁의 문명이 요구하는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설령 그들이 전쟁에 잘 적응하더라도 다시금 우리 사회로 돌아와 경쟁적 문명 법칙에 충실한 사람으로 환원되기 쉬울지 그 또한 의문이다. 행여나 성북구 독거노인 D씨처럼 두 문명 사이를 왔다갔다하느라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절대 빈곤층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