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현 세종로네거리▶조선호텔 인근▶국세청 본청▶영풍문고 입구 로 네 차례 이사

  • 글: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입력2003-11-27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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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의 대표적 민족지로 꼽히는 황성신문. 그러나 황성신문은 사옥사진 한 장 제대로 전하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00년이 훨씬 넘는 우리 신문사(新聞史)의 서글픈 한 단면이다.
    • 한 학자의 '황성신문 사옥 추적 연구'를 통해 신문사 사옥의 위치가 갖는 언론사적 의미를 되새겨본다.(편집자)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구한말 황성신문은 국운이 급격히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필봉을 휘둘렀던 민족지의 하나였다.

    주독자층을 당시의 지도계층에 두고 있었던 황성신문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세계의 열강들이 서로 각축하면서도 이해가 맞으면 어떻게 약소국들을 침탈해나가는지를 알렸다. 안으로는 열강, 특히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야욕에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비장한 각오로 중지를 모으고 단합하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경고함으로써 지도층으로 하여금 크게 각성, 분발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황성신문은 또한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언론활동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파급되어 민족역량의 거족적 집결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한말의 민족지들은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같은 외풍을 막고 안으로는 내치의 난맥상에서 비롯된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의 회오리인 내풍을 가라앉힘으로써 꺼져가던 국운의 불길을 되살리려 많은 노력을 했다.

    구한말 국운과 함께한 민족지, 황성신문

    황성신문에 동시대의 다른 민족지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운을 되살리려는 몸부림의 기간이 가장 오랜 신문이었다는 점이다. 1898년 9월5일 발간된 황성신문보다 2년5개월 앞선 1896년 4월7일에 발행을 시작한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정부를 감시 비판해 선정으로 나가게 하고 백성들을 계몽해 국민의 힘을 키움으로써 위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나 3년8개월밖에 지탱하지 못하고 붓이 꺾이고 말았다.



    황성신문보다 26일 앞서 발행을 시작한 제국신문은 중류층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 자주정신 함양과 지식 계발을 통해 위의 목표를 달성하려 했으나 후반에 가서는 재정사정이 워낙 어려워 발행이 중단되는 일이 많았으며, 한일합방이 공식화되기 26일 전인 1910년 8월2일 재정난을 이유로 끝내 폐간됐다. 황성신문은 합방 후 일본 총독부 치하의 세상을 2주간이나 견뎌내다 9월14일자로 폐간당했으니 제국신문은 황성신문보다 42일 일찍 붓을 놓은 것이다.

    황성신문보다 5년10개월 늦은 1904년 7월18일에 영국인 기자 배설(裵說; E.T. Bethell의 한국명)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당시 이미 우리나라를 사실상 지배하기 시작한 일본의 언론탄압으로 민족지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국권수호 활동이 크게 위축돼 있을 때 외국인의 신분을 활용해 항일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우리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대변했다.

    그러나 배설의 대한매일신보도 일본인들이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정부를 통해 우회적으로 가해온 탄압에 예리한 필봉이 무뎌졌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5월초 배설이 사망한 후 신문발행을 맡아오던 만함(A.W. Marnham)에게서 일본 통감부가 1910년 5월 중순에 판권을 비밀리에 매입함으로써, 비록 신문은 계속 발행됐으나 더 이상 우리의 신문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대변지로서 대한매일신보는 발행기간 5년10개월 만에 강제 폐막된 것이다.

    필자는 역사가 똑같이 되풀이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구한말에 발행되던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 역사의 가르침 앞에서 현명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구한말 우리의 민족지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경각심과 분발,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구한말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성신문을 발행했던 사옥이 어디 있었을지에 초점을 맞춰 이 글을 쓴다. 그래서 황성신문 사옥의 당시 위치를 확인해보고 그 위치가 현재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찾아보려는 것이다.

    황성신문사 사옥이 있었던 곳은 모두 네 곳이다. 황성신문의 전신인 경성신문과 대한황성신문 사옥을 합치면 다섯 곳이 된다. 이들 다섯 곳의 주소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 이 주소가 현재의 어디인지에 관해서도 대강은 알려져 있다. 신문의 사고(社告)에 신문사의 주소나 위치가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사고에 난 주소들을 당시의 지도에서 확인해보고 이를 다시 현재의 지도에 대입해봄으로써 아직까지는 ‘어디 근처’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것을 좀더 정확히 ‘바로 여기’라고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행위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를 정확히 찾아 그곳에 표석이나 어떤 상징물을 세워놓는다면 그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의 피부에 와닿고 가슴에 와닿는 강도가 크게 다를 것이다. 이 점에서 구한말 기울어져가던 국운을 바로세우기 위해 일본의 총칼에 붓으로 맞서 싸웠던 황성신문, 그 역사적인 황성신문이 발행되던 사옥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려는 시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광고 1> 협성회회보에 난 경성신문과 대한황성신문의 광고. 두 신문사 발행소가 옛 전동의 윤치호 집이라고 나와 있다.

    황성신문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제호를 한자로‘皇城新聞’으로 바꿔 1898년 9월5일 창간했다.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계받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새롭게 인가를 받지 않고도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황성신문의 전신 대한황성신문은 원래 윤치호에 의해 1898년 3월2일 京城新聞으로 창간됐으나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뀌자 제호만 대한황성신문으로 바꿔 발행했다.

    윤치호는 당시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난 뒤인 1898년 5월12일부터는 독립신문의 제2대 사장을 맡아 독립신문을 관리 운영했으므로 대한황성신문을 황성신문에 넘겨주기까지 약 4개월간 2개의 신문을 운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성신문과 대한황성신문이 발행되던 위치는 협성회회보 1898년 3월12일자와 4월9일자에 난 광고에 밝혀져 있다( 참조). 협성회회보는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가 1898년 1월1일 주간으로 발행을 시작해 4월9일부터는   ‘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일간으로 발행했다. 독립신문에 앞서 우리나라 신문으로서는 최초로 일간 신문이었다.

    당시 우리 신문들은 광고란에 다른 신문의 광고를 실어주곤 했었다. 대개 ‘…유익하니 많이 사서 보시라…’는 내용의 광고들이었다. 경성신문에 관한 광고와 대한황성신문에 관한 이들 광고에 다같이 ‘…신문파 쳐쇼 젼동 전 협판 윤치호씨 집이오…’로 나와 있다.

    이들 두 신문의 발행소인 전동(典洞)의 윤치호 집이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 장규식 교수가 ‘종로·북촌 문화산책’(서울YMCA 도시문화·환경센터, 2000)이란 소책자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윤치호의 당시 집터는 현재 주소로는 견지동 68번지이다. 종로4거리에서 안국동 로터리로 가자면 오른쪽에 몇 년 전까지 제주은행이 있었던 건물 ‘天馬빌딩’이 나오고 그 바로 다음 빌딩이 ‘서흥빌딩’인데(현재 신한은행 종로지점이 들어 있음), 장교수는 이 서흥빌딩 자리를 견지동 68번지, 즉 옛 윤치호의 전동 집터로 지목하고 있다.

    옛 지도에서 전동을 찾다 보면 자칫 헷갈릴 수 있다. 그것은 전동 바로 옆에 있는 수송동의 일부가 옛날에는 박동(?洞)이었는데 이 박동의 한자 표기가 일부 지도, 예컨대 ‘한양경성도’(1900)‘최신경성전도’(1907) ‘경성부시가도’(1911) 등에 ‘?洞’으로 표기돼 있어 ‘전동’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의 ‘박’(?)은 ‘땅형세 박’ ‘가득할 박’ ‘넓게 덮힐 박’인데 이들 지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벽돌 전’ ‘기와 전’자인 ‘?’자가 쓰여 있다.

    황성신문 사옥 터는 모두 네 곳

    황성신문은 남궁억(사장)과 나수연(총무원) 등이 윤치호에게서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사들여 제호를 바꿔 1898년 9월5일부터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신문이다. 황성신문은 이로부터 1910년 8월말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잃을 때까지 12년간 신문을 발행하면서 사옥을 세 차례 옮겼다. 따라서 신문사 창간 사옥을 포함해 사옥이 있던 자리는 네 곳이 된다.

    이들 네 곳 발행소의 주소는 황성신문의 사고에 모두 나와 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연구자나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소를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 주소 자체만 알고 있을 뿐 그 위치가 당시의 서울 거리 어디였는지, 현재의 서울 거리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게 사실이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광고 2> 황성신문 사고(社告) 중 발행소의 주소를 알리는 부분들. 황성신문은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모두 네 곳에서 발행했다.

    황성신문이 창간되던 때의 사옥은 ‘中署 澄淸坊 黃土峴 제23통 7호 前 右巡廳’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4년을 발행하다 1902년 10월21일에 ‘南署 會賢坊 大公洞 前 紅箭門 內 北邊 第2谷 內 제27통 제10호’로 사옥을 옮겼으며, 1년6개월 뒤인 1904년 4월13일에 ‘中署 壽進坊 壽洞 前 管理監 (前前 濟用監)’ 터로 두 번째 이사했으며, 이로부터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04년 8월8일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사를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 都家 제20통 2호로 갔다. 황성신문은 네 번째 사옥인 이곳에 1910년 8월말 한일합방으로 폐간당하기까지 6년간 발행되었다( 참조).

    황성신문 발행소의 주소는 1907년 4월3일자 신문 제호 아래 사고에는 ‘中署 鐘路 제20통 2호’로 돼 있고 1910년 8월27일 황성신문이란 제호로 나간 마지막 신문에는 ‘中部 鐘路 제20통 2호’로 돼 있으나 이는 주소의 표기만 바뀐 것으로 사옥 위치가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창간 당시 사옥 터는 ‘기념비전’ 자리

    황성신문은 1898년 9월5일 제1호를 발행하면서 ‘본사고백(本社告白)’이란 사고를 통해 신문사 위치를 ‘中署 澄淸坊 黃土峴 제23통 7호 前 右巡廳’이라 밝혔다. 황성신문이 만일 ‘황토현 제23통 7호’라고만 했다면 그 위치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전 우순청 자리’임을 추가로 알려줬기 때문에 황성신문의 창간 당시 사옥 위치는 분명히 확인된다. 왜냐하면 김정호의 ‘도성전도’에서 보듯 옛 우리 지도에 ‘우순청’의 위치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옛 우순청 자리는 현재의 세종로 네거리 교보문고빌딩 바로 옆, 경복궁 쪽 대로와 종로 쪽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가 된다.

    우순청과 기념비전 자리, 그리고 황성신문의 첫 사옥에 관해서는 장규식 교수가 ‘개항기 서울의 개화·개혁운동 공간’이란 연구(서울시립대 국사학과,’典農史論’, 5집, 1999)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교수에 의하면 황성신문의 전신인 대한황성신문 때인 1898년 6월경에 이미 우순청 자리로 옮겼으며 이 자리에서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넘겨받아 9월6일 황성신문 제1호를 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장교수의 글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얼마 뒤인 4월6일(1898) 京城新聞은 대한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주식회사제를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이때 판권도 이상재 남궁억 등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6월 무렵에는 사옥을 전 우순청(巡撫使의 임시군영,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전 자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9월6일 장지연을 주필로 하여 (사장 남궁억) 국한문 홍용의 ‘皇城新聞’으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1902년 9월 우순청 자리에 고종 즉위 사십년 칭경 기념비전이 세워지게 됨에 따라 황성신문은 9월11일 부득이 정간을 하고, 남서 회현방 대공동 前 紅箭門 內 北邊 2谷內 27통 10호(지금의 소공동 근처)에 자리를 잡고 10월21일부터 속간을 하였다.”

    구한말 우리 신문들은 사고에서 자기 신문사의 위치를 글로 풀어서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옛 신문사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만일 신문사의 위치를 ‘어느 동 몇통 몇 호’라고 옛날 우리식 주소로만 표시했었다면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의 과문 탓이라 생각되지만 조선·구한말 주소를 매긴 기준이나 원칙이 아직 연구 발표된 바가 없고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제가 자기식대로 주소를 매기면서 당시 우리나라 주소 시스템을 무시했기기 때문이다. 옛 우리 지도에 동(洞)간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것도 당시의 건물이나 지점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은 청구요람에 나와 있는 김정호의 ‘도성전도’(1834년경 작성)의 일부로서 황성신문의 첫 사옥 터인 우순청이 나와 있고 세 번째 사옥이 있었던 옛 제용감도 나와 있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 있었던 제용감 터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대로 넘어가고자 한다.

    는 일본인들이 1907년에 만든 ‘最新京城全圖’의 일부로서 삼각측량법으로 측량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방향과 거리가 실제와 부합된다. 이 지도에 황성신문 창간시의 사옥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보았다.

    이 지도에는 황성신문의 주소에 나와 있는 황토현이 표기돼 있다. 고종황제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은 1902년에 세워졌으니 표기가 되었을 만도 한데 나와 있지 않다. ‘전 우순청 터’라는 설명 앞에 표기한 숫자는 황성신문 사옥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①은 첫 번째 사옥 터임을 나타낸다. 제용감 터 앞의 ③은 이곳이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 터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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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오늘날의 지도(중앙지도문화사, 2001) 위에다 황성신문의 첫 번째 사옥의 위치를 표시해본 것이다. 황성신문을 창간한 곳, 그러나 고종황제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이 그곳에 세워지는 바람에 불과 몇 호만 내고 이사가야 했던 곳인 세종로 네거리 ‘기념비전’이 표시돼 있다.

    황성신문 두 번째 사옥 터의 당시 주소는 ‘南署 會賢坊 大公洞 前 紅箭門 內 北邊 第2谷 內 제27통 제10호’다.

    구한말 한성부(서울)의 행정구역은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서(署)가 있고 그 아래 방(坊), 그 아래 계(契), 그 아래 동(洞)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남서(南署)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광통방, 회현방, 명례방 등 11개 방이 있었고, 회현방의 경우 미동계, 소공동계, 정동계 등 14개 계가 있었다. 다시 소공동계에 小公洞, 銅峴洞, 司畜洞의 3개 동이 있었다. 황성신문에서는 대공동(大公洞)이라고 했는데 공식적인 동명은 소공동으로 돼 있다. 앞서 김정호의 지도에도 소공동은 나오는데 대공동은 안 나와 있다. 에서 보듯이 1903년 지도에는 공동(公洞)으로만 나와 있다.

    두 번째 사옥 터는 현 삼화빌딩 자리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에서 보면 원구단 남쪽에 동서로 난 길이 있는데 이 길에 홍전문전(紅箭門前)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한자인 홍전문은 우리식 말로는 홍살문이다. 옛날에 능, 묘, 궁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을 일컬어 홍전문 혹은 홍살문이라 했다. 원구단 자리가 원래 남별궁이란 궁터였기 때문에 홍전문이 세워져 있었다.

    황성신문 사고에 난 주소를 풀어보면 ‘전에 홍전문이 서 있던 안쪽 동네의 북쪽 지역 두 번째 골목 안에 있는 27통 10호’가 된다. 에서 27통 10호 지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곳의 골목들이 모두 긴 골목이 아니기 때문에 골목이라도 찾게 되면 황성신문 사옥이 있었던 위치를 정확히 찾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 같다. 필자는 황성신문에 난 주소를 이렇게 읽고 위에 황성신문의 사옥 터로 추정되는 곳에 원을 그려놓았다.

    지도에 원구단으로 나와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3대 태종의 둘째 공주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출가해서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이 ‘작은 공주 골’ 즉 소공주동이라 불리게 됐고, 이를 줄여 지명이 소공동으로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하나가 여기에 본부를 두었고 명군의 지원으로 한성이 수복됐을 때는 명나라 대장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머물렀다. 19세기 중엽 이후 지도에는 이곳이 남별궁(南別宮)으로 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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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은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9월에 원구단(圓丘壇)을 세우게 했다. 고종은 10월12일에 이 원구단에서 황제(皇帝) 즉위식을 올리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하늘은 둥근 것이기에 원(圓)은 황제를 상징하는 글자다. 둥글게 만든 원구단은 이런 뜻에서 고종의 황제 등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지 3년 뒤 1913년에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었다. 이 호텔이 조선호텔로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경내에는 원구단의 일부로서 원구단보다 2년 뒤에 지어진 3층 팔각지붕의 황궁우(皇穹宇)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하늘과 땅의 여러 신위를 모시고 조선조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

    는 해방 직후인 1947년에 만들어진 지도인데 1903년의 지도에서 황성신문의 두 번째 사옥이 있었던 지역의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는 황성신문 두 번째 사옥이 있었던 자리의 현재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호텔에서 미도파백화점에 이르는 길은 그대로 남아 있어 ‘소공주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으나, 이 길 북쪽 편의 옛 골목들은 큰 건물들이 들어서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게 됐다. 소공주길에서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을 잇는 자동차 통로가 현대판 골목이 돼 있을 뿐이다.

    남대문로 쪽의 우리은행(전 한빛은행) 빌딩과 소공로 쪽의 조선호텔 사이에 소공주길에서 좀 북쪽으로 들어가 ‘三和빌딩’(원으로 표시)이 서 있는데 이 삼화빌딩 자리가 옛 황성신문의 두 번째 사옥이 있던 터로 추정된다. 삼화빌딩에는 현재 외환은행 소공동지점이 들어 있다.

    세 번째 사옥 터는 현 국세청 본청 자리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황성신문은 소공동에서 1년6개월 동안 신문을 발행하다 1904년 4월 중순에 수송동 쪽으로 두 번째 이사를으로 가서 4월13일부터 그곳 세 번째 사옥에서 신문을 발행한다. 세 번째 사옥은 첫 번째 사옥 근처로 당시 주소는 ‘中署 壽進坊 壽洞 前 管理監 (前前 濟用監)’이었다.

    앞서 황성신문의 첫 번째 사옥에 관해 이야기할 때 보았던 에는 제용감 터의 옛날 위치와 현재 위치가 나와 있다. 이들 세 지도에서 ‘전전 제용감’ 위치 부근만을 따다가 을 엮어보았다.

    의 맨 위 왼쪽의 지도는 김정호가 1834년경에 작성한 ‘도성전도’의 일부로서, 중학천에서 송현으로 가는 길과 수진궁 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동쪽 편 터에 제용감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삼청동 쪽에서 경복궁 담을 끼고 내려오는 중학천에 걸린 다리 중학교(中學橋)에서 송현 쪽으로 가는 길(중간에 일본대사관이 있음)과 수진궁 쪽으로 가는 길(끝에 석탄회관이 있음), 그리고 수진궁 쪽에서 안동(안국동) 쪽으로 가는 길(중간에 수송동 소공원과 조계사 후문이 있음), 이들 세 길로 이뤄진 삼각형에 가까운 구역은 오늘날에도 구한말 당시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현재 일본대사관 쪽으로 가는 길과 석탄회관 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동쪽 터에는 국세청 본청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옛 제용감이란 관아가 있던 자리다.

    황성신문이 사고에서 세 번째 사옥의 위치를 알리면서 전 관리서만으로는 부족해 전전 제용감을 추가한 것은 관리서보다는 제용감 쪽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용감(濟用監)은 조선조의 관아로서 왕실에서 쓰는 각종 물품들에 관한 업무를 관장해오다 1904년에 폐지됐다. 제용감이 폐지된 뒤 그 자리에 관리서가 잠시 들어섰다가 폐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용감 터와 관련해 한 가지 부연할 것은 현재 종로구청 자리, 좀더 정확히는 종로구청 종합민원실 건물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제용감 터 표석(標石)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곳은 옛 제용감 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 표석의 제목은 ‘정도전 집터’로 그 내용을 보면 정도전 집터에 제용감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 그 표석에 적힌 표문은 다음과 같다.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이 표문에 따르면 ‘종로구청 자리가 조선조 초기에 개국 1등 공신 정도전이 살던 집터였고 그 뒤 사복시와 제용감 등이 들어섰으며 일제 때는 수송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

    에서 1834년경 지도와 2001년 지도를 대비시켜보면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가 옛날 사복시의 남쪽 부분 일부에 들어서 있으나 사복시와 제용감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위 표석의 표문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도전 집터 표석의 표문은 정확히 바로잡아야 한다. 또 제용감 표석은 제자리인 국세청 본청 앞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황성신문은 세 번째 사옥인 이곳 ‘전전(前前) 제용감 터’에서 4개월도 채 안 된 1904년 8월 초순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종로 네거리 종각 건너편 서린동 쪽으로 사옥을 옮긴다.

    장규식 교수에 의하면 전 관리서(전전 제용감) 건물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고 황성신문은 이로써 셋집살이를 청산하게 됐던 것인데 그 자리에 정부가 새로 농상공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4개월도 채 안 되어 다시 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고종황제가 하사금을 내려 이 돈으로 종로의 전 면주전(명주를 팔던 가게) 도가(동업자들이 모여 장사에 대해 의논하는 집) 건물을 매입해 사옥으로 삼았다고 한다.

    영풍문고 입구 자리가 마지막 사옥 터

    황성신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의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 都家 제20통 2호’였다. 황성신문은 이 사옥에서 1904년 8월8일부터 1910년 8월27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할 때까지 6년20일간 신문을 발행했으며 합방 후에도 한성신문(漢城新聞)이란 제호로 9월14일까지 2주간 더 발행하다 폐간됐다.

    이 네 번째 사옥에서 황성신문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제에게 강탈되고 마는 과정 속에서 필봉을 휘둘러보려 했으나 엄청난 힘에 밀려 꺾이게 되었던 것. 1905년 11월18일 을사보호조약이란 미명하에 강제로 체결된 늑약(勒約)에 분노해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을 쓴 것도 이 사옥에서였다. 이 논설로 장지연 사장은 일본 경무청에 체포됐고 황성신문은 압수 정간을 당했다. 장지연 사장은 다음해 1월 하순 65일 만에 석방됐으나 사장직을 떠나야 했으며 황성신문은 2월부터 복간됐다. 이후 일제의 황성신문 탄압은 한층 심해져갔다.

    황성신문이 이같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신문 발행을 계속했던 이 네 번째 사옥은 어디에 있었을까.

    ‘新聞評論’ 1975년 6월호에서 당시의 원로 언론인 3명은 옛 신문사의 사옥 위치에 관해 대담(‘金乙漢, 柳光烈, 崔慇喜 대담: 韓國의 新聞街, 舊韓末·日帝 때 解放直後’)하면서 ‘(황성신문이) 뒤에는 종로의 종각 뒤로 이전해서 발행했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장규식 교수는 ‘개항기 서울의 개화·개혁운동 공간’이란 연구논문에서 ‘보신각 서쪽 건물을 매입하여 8월6일 이사를 하였다. 정확한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전 綿紬廛 都家) 20統 2戶…’라고 했고, 서울YMCA 도시문화·환경센터를 위해 집필한 ‘종로·북촌 문화산책’이란 소책자에서는 황성신문이 이사를 간 곳인 ‘면주전’의 위치를 현재 영풍문고의 종로 네거리 쪽 입구에 표시해놓고 있다.

    장규식 교수가 명시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급을 연결하면 영풍문고의 종로 쪽 입구 옆에 표시한 ‘면주전’ 자리가 황성신문 사옥 터였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제부터 옛날의 지도와 자료 그리고 현재의 지도를 동원해 황성신문사 ‘종로 사옥’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은 ‘조선말 종로 네거리의 시전(市廛) 위치 평면도’다. 일제 때 경성부가 편찬 출판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나와 있는 것을 박경룡의 ‘개화기 한성부 연구’ 104면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황성신문 주소에 ‘백목전’과 ‘면주전’이 나와 있고 이들간의 관계 속에서 황성신문의 위치를 지목해주는 ‘후곡’이란 말이 나와 있다.

    에서 보면 백목전이 세 곳에 있고 면주전이 두 곳에 있다. ‘후곡’이란 ‘뒷골목’이란 뜻인데 백목전 뒤 골목에 있는 면주전이라고 하면 ‘면주전 A’가 틀림없다.

    는 에서 백목전과 면주전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황성신문 사옥 터에 면주전이 둘 있다. 황성신문사가 면주전 둘을 다 사옥으로 썼을까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썼을까. 전에 면주전 도가였던 집이라고 했는데 둘 중 어느 집이었을까.

    필자는 아직 이에 관한 자료나 문건을 찾지 못했다. 둘 중 어느 집이든 이 곳이 현재 어느 지점이냐를 정확히 지목할 수만 있다면 황성신문의 사옥 터 찾기는 90% 이상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에서 A부분은 1911년에 삼각 측량법으로 측량해서 제작한 지도이고, B부분은 황성신문이 있었던 면주전의 위치를 나타내주는 약도이다. C부분은 1911년 지도에 나와 있는 당시의 형무소 한성전옥(漢城典獄)의 평면도(‘서울600年史’ 2권 153~154쪽)다.

    우선 A부분의 지도를 보면 유치감이 있고 그 뒤쪽에는 ‘전옥후동(典獄后洞)’ 즉 전옥의 뒤 동네가 있다. C부분의 전옥 평면도를 보면 동쪽 서쪽 북쪽이 염가(閻家), 즉 민간인 집들로 되어 있다. 한성전옥에 대한 설명에는 동쪽 남쪽 서쪽이 염가이고 북쪽이 길로 되어 있다. 1911년 지도에서 보면 남쪽과 북쪽이 다 염가로 되어 있다. A부분의 지도에 전옥의 북쪽이 ‘전옥후동’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 즉 청계천 쪽이 전옥의 앞쪽이었음에 틀림없다. C부분의 전옥 평면도에서 대문이 아래쪽, 즉 남쪽으로 나 있음을 볼 수 있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B부분의 ‘백목전 후곡 면주점’의 위치를 A부분 지도에 대입해보면 황성신문 사옥이 있었던 이전의 면주전 도가는 전옥후동을 남북으로 가르는 작은 골목의 바로 동쪽, 즉 가장 작은 원으로 표시한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황성신문 사옥은 한성전옥 뒷담 중간쯤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골목의 동쪽 바로 옆집이거나 옆의 옆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좀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1927년의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과 1929년의 ‘경성부 일필매 지형명세도’와 현재의 지도를 대비시킨 것이 다.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둬야 할 점은 서울 4대문 안의 경우 구한말 당시의 지형이 현재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으며 구한말과 일제 초기에 매긴 주소도 큰 변동 없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도로를 냈거나 도로 폭을 확장했거나 큰 빌딩을 짓느라 지번을 합친 경우에는 일부 바뀌었으나 그럼에도 일제 때의 지도나 지적도는 옛날의 그 어떤 지점의 현재 위치를 찾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1911년 지도에서 한성전옥 유치감으로 나와 있는 터가 1929년의 지도(지형명세도)에도 나와 있는데 주소가 ‘서린동 42-1번지’로 나와 있다. 1927년 지적목록에서 서린동 42-1번지 터를 찾아보니 대지가 824평 2합이고 소유자란에는 국유로 돼 있다. 1929년 지도에 북쪽으로 난 골목도 그대로 나와 있다. 이는 그 터가 한성전옥 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29년 지도에서 서린동 42-1번지 터를 표시해 구분했다. 또한 1929년 지도상에서 이전 면주전 도가 터, 즉 황성신문 사옥 터에는 원을 그려 넣었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다음으로는 현재의 지도에서 서린동 지역을 따서 선(線)과 글자를 부각시켜 표시했고, 나머지 면(面) 부분은 그 밑에 비치게 만들어서 1929년 지도 위에 포갠 뒤 거리와 방향을 바닥에 깔아놓은 1929년 지도와 같게 했다. 이것이 에 나타나 있다.

    이곳 서린동 지역은 남쪽으로는 청계천로가 넓게 확장돼 곧게 뻗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북쪽으로는 종로 1가 대로가 서린동 쪽, 즉 남쪽으로 확장돼 있다. 종로 1가를 포함해 종로 거리는 북쪽에 ‘피마골’이라는 샛길이 있는데 종로 대로를 확장하기 전까지는 남쪽에도 북쪽의 피마골과 같은 샛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린동 동쪽 남대문로 1가의 경우는 도로를 확장할 때 동쪽이 많이 철거됐고 서쪽도 일부 철거됐다.

    에서 보면 황성신문사의 사옥이 있었던 전 면주전 도가 터를 가리키는 원이 현재의 영풍빌딩 종로 네거리 쪽 입구 북쪽 모서리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여기가 황성신문사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옥 터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는 앞에서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포개서 찾아낸 황성신문사 터를 현재의 지도에다 표시해본 것이고, 는 이상의 논의에서 찾아진 옛 황성신문사 사옥 터 네 곳을 하나로 모아 제시해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논의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쪹황성신문사의 첫 사옥은 옛 中署 澄淸坊 黃土峴 제23통 7호 前 右巡廳(우순청)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자리는 세종로 네거리 기념비전이 서 있는 자리다.

    쪹두 번째 사옥은 옛 南署 會賢坊 大公洞 前 紅箭門 內 北邊 第2谷 內 제27통 제10호에 있었는데 현재의 자리는 중구 소공동 소공주길 북쪽 조선호텔과 우리은행 사이에 있는 외환은행 지점 건물 자리다.

    쪹세 번째 사옥은 옛 中署 壽進坊 壽洞 前 管理監 (前前 濟用監)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자리는 종로구 수송동 국세청 본청 자리다.

    쪹구한말 황성신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은 옛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 都家 제20통 2호에 있었는데 현재의 자리는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빌딩의 종로 네거리 쪽 입구 북쪽 모서리 일대다.

    사옥 위치 추적을 끝내며

    구한말 민족지 황성신문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투쟁, 그 과정에서 경험한 좌절과 통분이 100여 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깊이 새기면서 당시 황성신문이 발행되던 현장인 사옥 터를 찾아보았다.

    선행연구들을 길잡이 삼아 옛 지도에서 황성신문 사옥의 위치를 추정해보고 그 지점이 현재의 지도에서 어디인지를 필자 나름대로는 될수록 정확히 확인해보고자 했다. 필자의 이 추리가 어느 정도 인정된다면 지도(地圖)와 제도(製圖)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할 경우 황성신문 사옥들의 보다 정확한 위치(어디쯤이나 어디 부근이 아닌)가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황성신문의 사옥 터 찾기를 일단 끝내면서 필자에게 남는 아쉬움 가운데 하나는 황성신문사의 사진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필자는 얼마전 ‘구한말의 독립신문사 사옥의 위치를 찾는 연구’(‘신문과 방송’ 2002년 10월)에서 “독립신문사 앞에서 서재필 주시경 취재기자 식자직원 배달원 등이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 나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했었는데 황성신문의 경우도 “남궁억 장지연 취재기자 공무직원 배달원 등이 황성신문사 앞에서 신문사 간판이 보이게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 한 장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이 역시 크나큰 흥분을 자아낼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촬영이 시작된 것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서양인 여행자들이 들르면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때 외국인 기자들이 들어와 취재를 하면서 비롯됐으니 19세기 말엽부터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울에는 사진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구한말 황성신문사의 사진을 누군가가 찍었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열 마디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사실감 있게 전해주고 증언한다. 이런 뜻에서 황성신문을 비롯한 구한말 우리 신문과 관련된 사진들, 언론활동과 관련된 사진들이 발굴된다면 언론사 연구에 많은 도움과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록의 가치와 중요성을 늘 이야기하면서도 기록의 보존과 발굴에는 소홀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소홀히 다루고 있다. 불과 90여 년 전, 길게는 100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신문사의 위치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이런저런 방증자료들을 동원해 그 위치를 찾아내려 한다는 것 자체가 기록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 내지는 경시 풍조를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별것 아니기에 다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작업을 하면서 너무나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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