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매우 어두웠다. 말도 없이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은 혼자 앉아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동안 그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 남짓 지나 궁금하던 차에 권씨는 TV와 신문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노인은 그 날 이후 나흘 만인 14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권씨는 또 노인이 등산 중 넘어져 뇌진탕 증세가 있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태였다는 것도 가족을 통해 나중에 전해들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 이영로(李永魯·63)씨. 그가 쓰러진 것은 SK 비자금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망이 자신을 향해 조여오자, 강한 압박과 정신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은 이씨가 입원하던 무렵인 9월 중순께 노대통령에게 SK 비자금 사건의 정황을 보고했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이씨는 그 파장을 예상했던 것일까.
이씨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崔導術)씨가 연루된 SK 비자금 11억원 수수사건은 대통령 ‘재신임 폭탄선언’에 이은 검찰의 대대적인 대선 비자금 수사로 확대되면서 정·재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단일 사건으로 이처럼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킨 경우는 거의 드물다.
검찰 수사결과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은 최씨가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25일 노대통령 장남 결혼식 당일 저녁, 부산상고 선배인 이씨의 중개로 서울 P호텔 일식당에서 손길승(孫吉丞) SK회장으로부터 1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11장(11억원 상당)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최씨는 이 CD를 다시 이씨에게 전달했으며, 이씨는 부산 신라대 교수인 자신의 부인 배모씨 계좌로 입금시켰다고 한다.
검찰에 따르면 이후 11억원은 현금 3억원, 수표 8억원으로 인출돼 이씨에게 2억원, 최씨에게 3억9000만원, 그리고 전 장수천 대표 선봉술씨에게 2억3000만원이 건너간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확인된 8억20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8000만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검찰이 추적중이다.
그렇다면 손회장에서 출발한 11억원이 이씨를 거쳐 그 중 일부가 최씨와 선씨 등에게 건너간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사자들은 모든 원인과 책임을 이씨에게 떠넘기고 있는 모습이다.
검찰에 따르면 구속된 최씨는 “이씨로부터 3억9000만원을 받았는데 민주당 부산선대본부가 (대선 때) 진 빚을 갚는 데 쓰라는 뜻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3억9000만원 가운데 차명계좌에 입금된 1억원을 확인하는 한편 최씨가 별도로 보관 중이던 1억8000만원을 찾아내 압수한 상태다. 최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1억원 정도는 대선 때 진 빚을 갚거나 일부 생활비로 사용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반면 손회장은 팀장급 간부들을 상대로 한 사내 비공개 연수교육에서 문제의 11억원과 관련해 “대선과 관계없다. 이영로씨가 이전부터 생명공학사업 연구개발 자금지원을 요청했는데 노대통령이 집권하고 보니 역시 안 줄 수 없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최도술씨에게 가 이렇게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손회장의 이같은 발언은 최근 ‘주간동아’의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