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스 베버(Max Weber)의 통찰에 따르면 ‘닫힌 지위’는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열린 지위’와 구별된다. ‘열린 지위’는 시장과 민주주의라는 이상으로 투사된 반면, 인간사회의 현실은 늘 ‘닫힌 지위’를 차지한 자와 여기서 배제된 자들 간의 불평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열고 닫음의 기준, 즉 ‘구별짓기’의 형태만 달라졌을 따름이다. 한때는 신분이나 인종이 중요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자격증과 학벌, 그리고 과시적 소비가 중요해졌다.
밀집한 부티크와 성형외과와 오렌지족은 급조된 ‘문화자본’의 전시공간이 된 강남의 위상을, 그리고 월등하게 높은 대학진학률은 학력자본의 중심이 된 강남의 독보적 위상을 보여준다.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부동산가격은 한국판 ‘구별짓기’의 경계선 위로 높은 진입장벽이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일찌감치 그 안에 진입한 후 둘레에 높은 성을 쌓은 신 상류층과, 성벽을 타고 넘으려다 걸려 넘어지거나, 혹은 높은 성벽에 지레 주눅들어버린 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김의 핵심에 ‘강남 현상’이 놓여 있다.
‘닫힌 지위’ 둘러싼 경쟁
하지만 계층의 공간적 분화는 사회생태학의 고전적 주제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보편현상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발현 방식이다. 미국 대도시의 경우 대개 도심은 흑인들의 슬럼이고, 교외로 나갈수록 상류계층의 주거지가 나타난다. 보스턴 근교의 뉴턴이나, 시애틀 근교의 머서 아일랜드 역시 높은 부동산 가격에 좋은 학군을 낀 상류층 거주지라는 점에서 강남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완벽한 공간적 분리를 경험한 사회에서 계급간 관계는 무관심이나 선망으로 드러난다. 영국의 귀족들이나 미국의 갑부들은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작년 한 해 시애틀에서 생활하면서 빌 게이츠가 사는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수목의 터널 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며 대문만 보았을 뿐, 그곳을 통과해 한참을 더 가야 하는 곳에 숨어 있는 그의 집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깊은 단절의 거리만큼 ‘그들의 세계’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인식은 비현실적이다. 닭은 소를 질투하지 않는다. 영국 평민들에게 다이애너비는 꿈이자 희망이었다. 계급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조화된 미국이나 유럽에서 ‘부귀영화(Rich & Famous)’는 서민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TV 프로그램의 흥미로운 소재일 따름이다.
사회가 사람들을 엮는 거대한 그물망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물코에 해당하는 것이 개인이라면, 끈은 이들을 연결해주는 일상생활 속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내용은 다양한 것들로 채워지겠지만, 여기서는 상호 인지와 경쟁, 그리고 모방에 대해 주목하려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데, 이때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준거집단은 자신이 현실에서 속하고 싶고 닮고 싶어하는 비교 대상이다. 그런데 준거집단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현실감이 강할수록, 그리고 준거집단과의 차이가 갑자기 벌어질수록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낀다. 숲속에 숨은 빌 게이츠의 저택이나 강남 한복판에 우뚝 선 타워팰리스의 대비에서 계급의 수평적 공간 분리를 경험한 서구사회와, 대형 평형과 소형 평형이 공존하는 한국 아파트단지의 수평적인 공간통합이 교차한다.
서양의 동심원적인 계층분화 도식에 익숙했을 미국 인류학자 브란트(V. B rant)는 산꼭대기 달동네의 호롱불에서 다운타운의 네온사인까지 이어지는 1960년대 서울의 야경에서 ‘빈곤의 등고선’을 연상하였다. 그러나 이제 초고층 주거공간은 수평적으로 통합된 공간 위로 표출되는 수직적 위계화를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