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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포용력과 다양성으로 불지핀 ‘문명의 용광로’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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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이스탄불 최대의 모스크인 블루 모스크. 미나레트가 여섯 개나 세워져 있어 그 품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이곳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드넓은 정원을 앞으로 거느린 채 미나레트를 여섯 개나 달고 있는 블루 모스크다. 정식명칭은 술탄아흐메트 모스크인데, 블루 모스크라고 부르는 것은 내부를 장식한 이즈니크(Iznik) 스타일의 청화(靑華) 타일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청화백자 제조기술을 배운 터키인들이 그것을 모방해 그들 스타일로 재현한 이즈니크 도자기는 빼어난 색상을 자랑하는데, 바로 그 청화 타일로 내부를 치장했다면 그 화려함을 과연 무엇에 비길 것인가.

설령 이즈니크 청화 타일의 빼어난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스탄불 최대의 모스크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미나레트를 보는 순간 그것을 지팡이 삼아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싶은 욕망만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블루 모스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미나레트는 육성으로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모스크 주위에 세우는 첨탑이지만, 그 숫자가 모스크의 품격을 말해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니(메카의 카바 신전과 블루 모스크가 6개로 최다를 자랑한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결코 무례한 일은 아니리라.

수많은 꽃이 다채로운 색채를 뽐내는 블루 모스크 앞의 정원을 거닐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fya·신성한 지혜) 성당으로 향했다. 비록 몇 발짝 떼어놓았을 뿐이지만, 그렇게 해서 만나는 세계는 근세에서 중세로 한순간에 바뀐다. 블루 모스크는 근세의 장을 연 오스만 제국이 세운 최대의 모스크인 데 비해 하기아 소피아는 중세를 대표하는 비잔틴 제국(일명 동로마제국)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붉은 벽체 위로 둥근 모자를 쓴 형상의 이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Emperor Justinianus ·483∼565, 재위 527∼565)가 세운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세운 것이 532년 대폭동 때 화재로 타버리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심혈을 기울여 재건한 것이다.

신심(信心)이 누구보다 깊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하기아 소피아의 낙성식에서 자신이 세운 대성당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훌륭하다며 “솔로몬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이다”라고 자화자찬했다고 전한다. 둥근 천장과 십자형 평면구도, 모자이크 성화 장식으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란 평가와 함께 ‘이것이야말로 돌과 빛, 색채와 공간이 이루는 일대 교향곡’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는 그 후 기독교 교회당의 전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수많은 모스크의 모델이 되기도 했으니 유스티니아누스의 자신에 찬 말이 앞뒤 모르고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스만, 비잔틴을 밟고 서다

2500여 년에 걸친 이스탄불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를 들라면 나는 이런 그의 열정 때문에라도 유스티니아누스를 단연 첫손꼽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Mehmed Ⅱ·1432∼81, 재위 1444∼46 및 1451∼81)다. 그는 무라드 2세의 셋째아들이었으나 형들이 일찍 죽자 열세 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가 2년 뒤 부왕에게 다시 왕위를 빼앗기고 5년 동안 근신하는 등 쓰라린 경험을 했다.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과감하게 행동하는 스타일인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역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전반 지축을 흔들며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불러온 두 번의세계대전이 그것이다. 하지만 세계 전쟁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전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미 15세기 중엽 동방의 오스만 제국과 서방 기독교 왕국인 비잔틴 제국 사이에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전장은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걸쳤고, 그 결과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 개의 대륙에 미쳤다. 그것은 또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전쟁의 승자였던 오스만 제국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는 그곳을 이슬람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내친김에 이름마저 ‘이슬람의 도시’란 뜻의 이스탄불로 바꿨다. 따라서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이 두 신앙간의 대결이란 성격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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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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