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초선·다선 불문하고 공천 물갈이 할 것”

  • 글: 반병희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bbhe424@yahoo.co.kr

    입력2003-12-26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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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천 때 현역과 신인 공정하게 경쟁시키겠다
    • 외부인사 주축으로 공천심사위 구성
    • 대선 자금, 아는 대로 다 밝히고 용서 구할 것
    • 현행 5년 단임제 헌법, 국민 뜻 다시 물어야
    • 한나라당엔 저인망 수사, 노 대통령엔 강태공 수사
    • 노 대통령은 대통령 개념 정리가 안 돼 있다
    • 단식할 때 틈만 나면 눕고 싶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2003년 12월12일 한나라당 대표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최병렬대표.

    불법 대선 자금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나라당 최병렬(崔秉烈) 대표가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아는 대로 모든 것을 밝히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말했다.

    쉬쉬해봤자 오래 버틸 수 없는 데다, 검찰수사로 진실이 낱낱이 드러날 경우 한나라당이 치명적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먼저 모든 것을 밝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잔꾀를 부리다가는 국민들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신뢰를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다. 화법도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다. 간결 명쾌하게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최병렬식 수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응축된 의미는 복잡하다.

    우선 자신의 방식대로 정국을 풀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뒤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아직도 당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이회창 전 총재 진영에 대한 압박은 물론, 한나라당의 전면적 개혁, 다시 말해 17대 총선에서 대대적 인적쇄신을 단행하겠다는 의지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대선자금 의혹에서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면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도 이렇게 철저하게 부서지고 있는데, 노 대통령, 당신도 더 이상 장난치지 말고 정도를 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경남 산청 천왕봉 자락의 가난한 산골 소년이 한국 최대 정당의 총수로 서기까지 지탱해준 강단이 배어 있다. 이런 ‘깡’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최틀러’다.

    갑신년 세밑을 앞두고 이루어진 최병렬 대표와의 인터뷰는 이처럼 서로 밑자락을 까는 복선 없이 속사포 질문에 거침없는 답변으로 ‘화끈’하게 진행됐다. 단식을 끝낸 지 얼마 안 됐기에 먼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감정부터 건드려 보았다.



    -단식 중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분노랄까, 현실 개탄이랄까. 아니면 특정 인물에 대한 감정 폭발 같은 것이 없었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이 가라앉는 데다 틈만 나면 자리에 눕고 싶었어요. 책도 손에 안 잡히고. 그러니 특별한 잡념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믿거나 말거나지만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걱정은 끊임없이 떠오릅디다.”

    -대한민국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노 대통령이 엄청난 실정(失政)이라도 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현재 대한민국은 깊이깊이 주저앉고 있습니다. 동력(動力)을 잃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회가 다원화할수록 계층별 또는 분야별 갈등과 분열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런 실의와 혼돈을 극복하고, 경기를 성장시키고 해외 진출을 확대해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바로 사회적 동력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 대통령 집권 이후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일부 언론·운동권이 한나라 매도

    -그런 분열상은 해방 이후 전개된 우리 현대사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노 대통령 탓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 아닙니까.

    “국민과 국가에 봉사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이 대통령의 보람이자 기본 책임 아닙니까. 그런데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아요(이 대목부터 막 단식을 끝낸 사람답지 않게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으로서 자의식이 없습니다. 노 대통령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왜 대통령이 됐는지, 그리고 대통령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노 대통령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최 대표는 흥분을 누르기 위해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의 말. “노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좌절과 굴절의 역사’라며 한국사회의 주류를 범죄 집단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개혁한다는 것입니까. 대통령 주변엔 깨끗한 사람들만 모여 있습니까. 한국을 주저앉혀 북한과 빈곤의 평준화를 이루겠다는 것이 개혁입니까. 그래서 내가 비판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려면 제대로 잘해달라는 뜻입니다. 사회적인, 또 이데올로기적인 불만과 혼재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사회의 메인 스트림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메인스트림, 그 다수와 함께 가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일궈낸 뒤, 부수적으로 개혁을 실시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이를 어기다보니 한국사회는 분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노 대통령의 경우 직위와 인물이 불일치한다는 얘기입니까.

    “사람을 잘 뽑아야 합니다. 정말 잘 뽑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역할에 대한 개념정리가 안 돼 있습니다.”

    -그러면 한나라당은 제대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적으로 국민은 한나라당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나라당이 부조리 집단, 부패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수구꼴통’이니 ‘반(反)통일’ ‘친(親)재벌’이니 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습니다. 첫째로는 한나라당에 잘못이 있습니다. 잘한 게 별로 없으니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운동권과 일부 언론의 한나라당에 대한 매도도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나라당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건실한 온건 보수의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정강정책에 다 담겨 있습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에는 그것 말고 다른 배경이 더 있을 텐데요.

    “사실 대통령 중심제하에서는 대통령이 전부입니다. 원내 다수당도 말만 다수이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몇몇 안건도 각 당의 원내총무간 합의가 없으면 안건 상정이 불가능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다수당은 마음대로 안건을 상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한나라당은 다수당이지만 책임지고 의회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나라당이 욕을 먹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수당이 의회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을 다음 총선의 선거 공약으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가 다수당이 되면 교육제도를 확 뜯어고치는 등 실질적인 개혁을 확실하게 추진할 것입니다.”

    “공천혁명 이뤄야 당이 산다”

    -내년 총선 얘기가 나왔으니까 물어보겠습니다. 한나라당이 대선 2연패(敗)의 불임(不姙)정당 소리를 듣는 것은 시대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영남)지역기반에만 의존한 나머지 노선의 재정립에 실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다음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총선은 회고 지향적 투표, 즉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고, 대선 투표는 후보의 정책과 매력이 주요 기준이 되는 미래지향적 경향이 있습니다. 내년 총선 역시 노무현 정권의 엄청난 실정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대안세력으로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과감한 자기혁신과 공천 물갈이를 통해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 할 작정입니다.”

    -내년 총선과 관련해 관심사항 중 하나는 물갈이입니다. 한나라당도 60대 퇴진론, 5,6공 세력 용퇴론 등으로 내홍을 겪었고 앞으로도 상당히 골치 아플 텐데요.

    “바꿔야죠. 당내에선 초선·다선을 불문하고 공천혁명을 해야 당을 살릴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다만 물갈이 폭과 방법이 문제인데, 목표 수치를 미리 정해놓고 여기에 맞추는 식의 물갈이는 가능하지 않고 옳은 방법도 아닙니다. 공정한 룰과 합리적 시스템에 의해 공천혁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 방안에 대해 논의중이며 공천 기준은 경쟁력, 즉 당선 가능성이 될 것입니다. 도덕성과 개혁성,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지요. 이를 위해 지역 인지도가 낮은 신진인사들에게 가점을 주는 방안, 그리고 1차 심사는 당 차원에서, 2차 심사는 중립적 외부인사들이 주축이 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진행시키는 방안도 생각중입니다.

    1차 심사 대상은 현역 의원과 지구당 위원장으로 하며, 지역구 여론조사와 당무감사 결과 및 현지 여론 등을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차 심사는 지구당위원장들에 대한 1차 심사 자료를 바탕으로 외부 영입 인사들과의 경쟁력을 비교 검증하는 것입니다. 이때 ‘선호도’와 ‘인지도’ 개념을 도입해 외부영입 인사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겠지요.”

    “SK 100억 수수, 나도 몰랐다”

    -시스템에 의한 물갈이로 인적쇄신을 단행하겠다는 것으로 압축되는군요. 물갈이의 핵심은 당의 기반인 영남권의 물갈이 폭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남권 물갈이 바람은 수도권 선거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혁규 경남 지사의 탈당에 따른 열린우리당의 PK권 공세도 차단할 수 있을 터이고.

    “일부에서 떠도는 영남 50% 물갈이설은 사실과 다릅니다. 일부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영남권의 현역정치인 교체 요구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목표 수치에 맞춰 억지로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부 중진들의 용퇴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도 들리는데.

    “거듭 말하지만 ‘나이’나 ‘선수(選數)’가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정한 룰에 의해 결정할 예정이기 때문이 나이 많은 다선 의원도 살아날 수 있고, 젊은 초·재선 의원도 좌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인사 영입은 잘 되고 있습니까. 거물급 인사 영입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 중진과의 사(私)적 인연이나 당내 세력간 역학관계에 따라 영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전문가 그룹,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책을 주도할 수 있는 유능하고 참신하며 경쟁력 있는 인물들을 전략적으로 영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정도로 한나라당이 부패정당의 때를 벗고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불법 대선 자금에 대한 좀더 솔직하고 진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비자금 수수 경로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던데.

    “반복해 강조하지만,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모금 문제에 정정당당하게 임할 것이며 책임질 부분은 책임을 질 것입니다. 다만,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검찰은 야당에 대해서는 ‘저인망식’ 수사를,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태공 낚시질식’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5대 그룹이 이회창 후보측에 준 돈만 밝히고, 노무현 캠프로 흘러간 돈에 대해서는 소극적입니다. 대기업이 과연 이 후보에게만 돈을 줬겠습니까.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과 관련해 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상수 전 민주당 총장의 지난 3월 ‘기업으로부터 120억원 모금했다’는 발언과 썬앤문 그룹에 대한 수사는 왜 제대로 안 하는 겁니까. 이러고도 불공정 수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최 대표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당 차원에서 제대로 파악해 정확히 진상을 밝힌 다음 대선 자금 문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는 뉘앙스로도 들리기에 재빨리 물어보았다.

    -이회창 전 총재측은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보다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특검을 먼저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던데. 즉 대선자금 특검을 실기(失機)하다보니 청와대와 검찰에 계속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불만이 크던데요.

    “(목소리를 높이며)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야, 없는 사람들이야. 우리 정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불법 대선자금 문제나 대통령 측근 비리를 정치공학과 정치게임식으로 접근할 때라고 생각합니까. 지금이 그렇게 한가한 상황입니까. 검찰수사건 특검이건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번 사건은 안풍(安風)이나 세풍(稅風)과는 엄연히 달라요. 안풍이야 우리가 떳떳하니까 계속 싸워 온 것 아닙니까. 세풍은 서상목 의원의 구속으로 일단락됐고. 그런데 이번 불법 대선자금 모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됐어요. 어느날 갑자기 SK그룹으로부터 100억을 받았다는 사실이 터졌습니다. 어디 국민만 몰랐습니까. 나도 모르고 한나라당원들도 몰랐습니다.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아 쓴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검찰에 맞섭니까. 국민이 용납하리라 생각합니까. 맑은 정치를 위해서 털 것은 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다만 검찰이 야당 죽이기식 편파 수사를 계속한다면 그때는 특검 도입을 포함한 비상수단을 강구할 작정입니다.”

    -대선자금 정국을 탈피하려면 최 대표 불신임문제를 포함해 재창당 수준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데요.

    “한나라당이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도 했고, 여러 사람이 얘기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정강정책을 좀더 세밀하게 검토해 바꾸는, 그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불신임이라니요. 금시초문입니다. 서청원 전 대표측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가보죠. (웃으면서 농담조로) 한번 더 대표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씁쓸한 반응을 보이기에 당내 반(反)최 대표 진영에서 제기하고 있는 ‘최 대표 단식 농성의 다목적설’에 대해 한번 더 반응을 떠보았다.

    단식으로 국회 공전 송구

    -당내에선 최 대표의 단식이 실상은 당내 모든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용이라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치적 암수나 목적을 가지고 잔꾀를 부리는 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나의 단식을 당 장악력을 노린 행동쯤으로 보는 것은 나의 충정을 모르거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문제, 부안사태, 자유무역협정, 노동문제, 교육문제 등 시급한 국가 현안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경제는 최악이고, 민생은 파탄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외교 역시 불안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다 한미동맹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국정을 외면하고 총선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 나라는 주저앉고 만다, 무너지는 나라를 온몸으로 막아보자’는 절박한 심정에서 단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단식으로 국회가 잠시 멈춰 서고,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서는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단식의 한 원인이었던 대선 자금 문제는 결국 현행 대통령선거제가 고질적인 ‘돈 선거의 주범’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맞아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개헌 문제를 꺼낼 수밖에 없군요. 이번에 하도 쓴 경험을 했기에 어떻게 하면 돈으로부터 선거를 해방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선거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양심적으로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치를 하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을 만나 봤습니다. 그들의 앞뒤를 볼 때 솔직히 말해 이회창처럼 도덕적 스탠더드가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된 것은 대통령제에 따른 우리의 선거구조 때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계속되면 다음 2007년 대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결국 돈 안쓰는 선거를 위해서는 개헌밖에 답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하나는 내각제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제하의 분권형제입니다. 노 대통령이 현행 제도 아래서 책임총리제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권력을 놓고 부자간에도 싸우는 법입니다. 자칫하면 대통령과 총리간 갈등으로 행정공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헌을 통해 권력구분을 확실히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분권형제가 되면 돈 선거를 막을 수 있지요. 또 임기동안 안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이건 내각제이건 정치에는 상황과 타이밍이 있습니다. 총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꺼내는 것 자체가 정략적이라고 오해받기 쉽습니다. 국민의 동의를 얻기도 힘들고요. 더구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혼란한 지금 권력구조논의 자체가 적절치 않고, 개헌절차에 필요한 시간을 감안하면 총선전 개헌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소선구제는 빅딜 대상 아니다

    -개헌문제를 총선 공약사항으로 내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 안팎에서 실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상황변화를 지켜볼 생각입니다.”

    -청와대가 중대선거구제를 전제로 한 분권형 책임총리제를 얘기해왔기 때문인지 일부에서는 청와대와 한나라당간 빅딜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분권형을 양보하는 대신 한나라당으로부터 중대선거구제를 받아낸다는 시나리오지요. 또 일각에선 최 대표가 분권형 이후 총리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얘기하던데.

    “맹세컨대 나는 내 자신의 입신을 위해 정치상황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가의 기본틀을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 문제를 개인의 정치적 야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거구제 빅딜 같은 얘기는 호사가들이 꾸며낸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또 우리 당론은 소선거구제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을 보십시오. 모두가 소선거구제입니다. 몇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양원제로 하거나 비례대표제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선진국형 선거구제인 소선거구제를 왜 바꿉니까. 국민의 정치불신 정도를 볼 때 의원 정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350명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현재로서는 총선 후에 어마어마한 불법 대선 자금 문제와 대통령 측근 비리를 낳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과연 계속할지 여부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묻는 것이 합당한 순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 등 차기 대권을 꿈꾸는 인사들은 분권형 개헌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있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웃으며) 결단코 정치적 음모는 없습니다.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음모입니다.”

    충청 못잡아 대선 실패

    -개헌문제와는 별도로 정치개혁을 추진 할 수는 있겠지요.

    “물론이지요. 한나라당은 이미 후원회와 지구당제 및 합동유세 폐지, 선거 완전 공영제 실시 등 전면적인 정치 개혁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국회에 설치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등을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정치개혁을 추진할 작정입니다.”

    -화제를 바꾸어 보지요. 요즘 한나라당을 들여다보면 집권에 대한 꿈을 버렸나 할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흥행 요소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차기 대권 후보로 어떤 유형의 리더를 상정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상징조작 또는 이미지 조작으로 대통령을 뽑는 실수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노 대통령을 보면서 ‘저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고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나라당에는 진짜 실력을 갖춘 알짜배기 인재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차기 주자로는 정치적으로 원숙한 50대, 또는 60대 초반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대선 때는 충청도를 잡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좋은 인물에 제대로 된 전략이라면 승리할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손학규 지사 등 몇 명으로 한정될 것 같은데요.

    “차기 대선이 치러지는 2007년을 기준으로 추정하면 대략 폭이 압축되지 않겠습니까. 당내 인사뿐 아니라 외부 영입인사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고.”

    -직접 나설 생각은 없습니까.

    “(두 손을 내저으며)절대 아닙니다. 한나라당을 수권정당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목표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총선 승리를 위해 JP를 포함해 다른 정당과 제휴할 의향은 있습니까.

    “원칙적으로 국정안정과 민생회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목표라면 민주당, 자민련을 포함한 모든 정당과의 정책 공조는 물론이고 연대도 못할 것은 없습니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총선전 통합 가능성 얘기가 솔솔 나오고 있던데,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멀쩡한 집권여당을 반으로 쪼갠 지얼마나 지났다고. 또다시 통합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통합 자체도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통합을 하더라도 국민이 용서를 하겠습니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노 대통령은 큰 정치 해야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입당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 좀 해주시죠.

    “노 대통령이 사실상 열린 우리당의 당원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입니다. 입당은 단지 형식적 절차에 불과합니다. 노 대통령이 가장 적절한 시점에,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에 입당하겠다고 했는데, 그런 궁리할 시간이 있으면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는 데 노력해달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잔머리를 굴리면 안됩니다. 큰 정치를 해야 합니다.”

    리더십 얘기 끝에 최 대표가 예전에 유석(維石) 조병옥 선생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유석 선생은 잔꾀나 계략을 멀리하고 선 굵은 정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리를 앞세우지 않고 개인보다는 당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분입니다. 유석의 반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늘 작업모에 작업복을 입고 산업현장에 섰던 165cm의 작달막한 박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부를 증진 시켰습니다. 노 대통령은 정반대로 강연이나 토론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 대표와의 인터뷰는 대변인이나 비서실장이 배석하지 않은 채 진행됐다. 인터뷰 도중 걸려오는 휴대전화도 직접 받았다. 그만큼 그는 실용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 그에게 따라붙는 ‘보수정치인’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미래연대 등 당내 소장 개혁파 의원들로부터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보수’로 통한다. 과연 그의 ‘열린 보수’가 얼마나 시대의 호응을 받을지, 또 4월17대 총선에서 얼마만큼 지도력을 발휘할지 여부가 그의 향후 정치생명뿐 아니라 2004년 한국정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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