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이번호부터 황의봉 전 동아일보 베이징특파원과 국내 최고 중국전문가들과의 심층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를 통해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현장경험과 연구성과 등을 흥미롭게 풀어냄으로써 ‘거대 중국’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편집자)
김 이사장은 광복 후 이범석 장군 등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임정 요인과 애국지사들의 귀국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홀로 중국에 남아 난징(南京)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한 뒤 지금껏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또 교육자로서 김준엽은 고려대 교수와 총장, 아주대 재단이사장 등 근 반세기를 후진양성에 매진해왔다. 이밖에도 김 이사장은 이범석 초대총리와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정권으로부터 장관 국무총리 등을 거듭 제의받았으나 이를 모두 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준엽 이사장과 중국의 인연을 짧은 지면에서 다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중국대륙에서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과 학업과정은 생략하더라도 고려대에서의 중국근대사 강의 33년, 중국학회의 발기인 부회장 회장 역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시절의 공산권(주로 중공) 연구 및 학술활동 등 한국의 초창기 중국관련 연구의 산파역을 도맡아 왔다.
김 이사장의 중국전문가로서의 면모는 그가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느낌이다. 한중간 교류가 재개되면서 1988년 무려 39년 만에 다시 중국을 찾은 이래 그의 중국방문은 지금까지 48회에 달하고 있다. 한 해 평균 세 차례 이상 중국나들이를 하고 있는 셈. 1920년 생이니까 새해 들어 84세가 되는데, 도대체 김 이사장은 무슨 일로 노구를 이끌고 중국을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는 것일까.
항저우 임정청사도 곧 복원
-지난 11월 하순에도 중국을 다녀오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번엔 무슨 일로 다녀오신 것입니까.
“상하이(上海)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뒤인 1932년 5월에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1935년 11월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전장(鎭江)으로 옮겼습니다. 항저우를 방문한 것은 바로 그때의 임정청사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지요.”
-항저우 임정청사 자리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또 하나의 임정청사가 복원될 수 있을까요.
“그 동안 임정청사 자리에서 살고 있던 주민을 시에서 내보냈어요. 중국도 이제는 사유재산 보호문제가 간단치 않아서 보상금을 다 주어야만 집을 비우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규모는 상하이 임정청사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데, 진열실을 만들어야 하므로 옆집도 비우게 해야 할 겁니다. 항저우시측은 일단 2004년 6월까지 복원사업을 마무리하는 게 목표라고 하니까 멀지 않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김 이사장과 중국의 접촉면이 워낙 넓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요즘 김 이사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내 한국 역사유적지 발굴 및 복원사업 그리고 여기에 얽힌 한중교류사의 뒷이야기들과 한중간 학술교류사업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과거 독립운동 시절의 활약상은 흥미진진하기는 하나 이미 김 이사장의 저서 ‘長征’ 시리즈와 그의 학병동지인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돌베개’를 통해 자세히 소개됐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왕래가 재개되자마자 착수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유구한 한중관계의 상징물들을 찾아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짧은 기간이나마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상하이와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을 첫 사업으로 정했습니다. 1988년 말에 상하이에서 임정청사를 찾았는데, 임정이 시내 여러 곳을 전전했기 때문에 모두 복원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1926년에서 1932년까지 가장 오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봉창(李奉昌)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휘했던 마당로(馬當路) 306농(弄) 4호의 건물이라도 먼저 복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구공사에 앞서 이런 유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중국당국에 인식시켜 문화재로 지정받는 일이 시급했어요. 그래야만 도시계획 등으로 철거되는 일이 없고 앞으로 복구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전조치라고 보고 중국당국자를 설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89년에는 충칭의 치싱강(七星崗) 롄화츠(蓮花池)에 있는 임정청사도 방문하여 충칭시 당국에 똑같은 설득작업을 폈습니다. 그후 우리 정부나 광복회 그리고 큰 기업가들이 노력을 기울여 상하이와 충칭의 임정청사가 복원돼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상하이 충칭과 더불어 우리 임시정부가 활약한 3대 기지의 하나가 항저우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04년 중에는 한국독립기념관이 준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준엽 이사장은 최근 중국내 한국관련유적 복원사업 및 중국 명문대학의 한국학연구 진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상하이에는 또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훙커우공원(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뀜)이 있지 않습니까. 1990년대 초 처음 상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훙커우공원엘 찾아갔더니 안내인이 소개해준 의거현장이라는 곳에 아무런 표지도 없어 서운했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가보니 표지석도 서 있고 기념건물도 있어 무척 반갑더군요.
“10여년 전쯤 매헌기념사업회에서 윤 의사의 영혼을 모시는 매헌정(梅軒亭)을 건립했는데, 건물 앞에 있는 기념비가 너무 작을 뿐만 아니라 조각한 글도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1932년 4월29일’이라고만 돼 있었어요. 윤 의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 무슨 의거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당시 상하이 한국총영사 경창헌(慶昌憲)씨와 함께 상하이 시정부 외사부처장이었던 저우밍웨이(周明偉) 박사를 찾아가서 비석을 크게 할 것과 의거내용을 상세히 기록할 것을 부탁했지요. 그 뒤에 경 총영사 후임인 손상하(孫相賀) 총영사가 꾸준히 노력해 현재 큰 비석이 매헌정 앞에 새로 건립돼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습니다.”
-이밖에도 중국대륙에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도처에 많습니다. 특히 만주지역이나 한중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 많은데요. 이를테면 청산리 대첩 현장 같은 곳은 현재 어떻게 보존되어 있나요.
“청산리 대첩 현장에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습니다. 광복회에서 세운 거죠. 봉오동 전투 현장에도 기념비가 있습니다만, 중국대륙 도처에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산재해 있어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哈爾濱)역 현장에도 기념비가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와서 남긴 의미있는 발자취를 찾아내 복원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데요. 가장 관심이 큰 유적은 어떤 것입니까.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내 기념관을 만드는 일 다음에 착수한 것이 항저우에 있는 고려사(高麗寺)의 복구였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항저우를 처음 방문한 것이 1948년인데 그후로 지금까지 20여차례는 찾았을 겁니다. 항저우는 남송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도시예요. ‘하늘에 천당이 있고, 지상에 소항(蘇杭 : 쑤저우와 항저우)이 있다’고 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고 미인이 많다는 곳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전한 일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제 처도 어렸을 적에 임시정부를 따라 부모님과 함께 항저우로 피난해 일본군이 진격한 1937년까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항저우의 고려사 복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文宗)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혜인사(慧因寺)로 당시 유명한 정원(淨源)대사가 있던 곳이었어요. 의천은 정원의 가르침을 받을 목적으로 모친과 맏형인 12대 임금 순종(順宗)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세의 나이에 밀항하여 자오저우(膠州) 카이펑(開封)을 거쳐 항저우로 찾아가 정원대사에게 사사했어요. 그후 의천은 모친의 독촉으로 중국체류 1년4개월 만에 돌아와야 했는데, 귀국 후 혜인사에 많은 재물과 불전을 보낸 연유로 혜인사가 고려사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려사는 현재 약간의 초석만 남아 있을 뿐 병란으로 소실된 상태입니다. 의천이 직접 창건한 절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당국이 주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원의 복구가 어렵다면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의천이 밀항하면서 처음 상륙했던 자오저우시에 어떤 유적지가 있지 않을까 해서 수소문한 끝에 현지 박물관 자료실장의 도움으로 의천의 상륙지점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의천이 20일 정도 머물렀던 곳도 알아냈고, 상륙지점에는 기념비도 세워놓았습니다.”
-의천이라면 나중에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장경을 간행하는 등 우리나라 불교사상 대단히 위대한 인물 아닙니까. 고려사는 말하자면 한중 불교교류의 중요한 사적지인 셈이군요. 대각국사 의천이 항저우까지 가서 불교 공부를 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과 고려의 왕래가 그만큼 잦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당·송(唐宋)시대에 중국의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어요. 그래서 주요 항구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무역업무나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관장토록 했습니다. 시박사를 설치한 곳은 장쑤성의 양저우(揚州), 저장(浙江)성의 항저우와 닝보(寧波), 푸젠(福建)성의 취안저우(泉州) 등 양쯔(揚子)강 유역과 남쪽지역 즉, 강남에 많았고, 강 북쪽으로는 북송시기 산둥성 자오저우에만 설치했어요. 따라서 무역거래차 중국의 강남지역을 오간 한국인이 매우 많았고 그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베이징이나 동북3성에만 많은 관심을 쏟아왔는데, 사실은 이 강남지역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지역은 비단 한국과의 교류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고, 최근엔 경제발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중국대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느껴볼 수 있는 얼굴과도 같은 곳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오늘날 상하이 장쑤성 저장성 등 중국동해안 지역에 많은 한국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데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실감케 됩니다. 중국과의 무역이 성행했던 곳인 만큼 상인들의 왕래와 관련된 유적도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했던 우리나라 상인들이 체류할 상관(商館)을 주요항구에 건립했지요. 흔히 고려사관(高麗使館) 고려정관(高麗亭館) 고려관(高麗館) 등으로 명명했는데, 역시 닝보 양저우 자오저우 등지에 있는 것들이 유명합니다.”
-시박사가 설치된 곳 중에서도 닝보가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닝보는 지금도 상하이 부근의 주요 도시로 꼽히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도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요충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1990년대 중반쯤 한국인 탐험대가 옛날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이 바다를 건너는 데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뗏목배를 타고 중국에서 한반도를 목표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고생한 일도 있었지요. 그때 탐험대의 출발지가 바로 닝보 앞바다의 저우산열도(舟山列島)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에도 많은 유적들과 사연이 있을 법한데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대외 무역항구로서 상하이가 가장 각광받는 곳이 되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닝보 항저우 양저우 취안저우 광저우(廣州) 등지가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와 무역하던 배들이 가장 활발하게 드나들던 항구는 산둥반도의 펑라이(蓬萊, 당시 지명은 登州)와 닝보(당시 지명은 四明 혹은 明州)였어요. 대각국사 의천도 귀국할 때는 닝보에서 고려선에 탑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왕래가 빈번하였던 곳이 닝보였으므로 당연히 상인들이 머물던 고려사관이 설치됐었지요.”
-닝보의 고려사관은 지금 복원이 됐습니까.
“처음 닝보시를 방문한 것이 1992년 11월이었는데, 고려사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당국에 이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고속도로가 없어서 항저우에서 기차로 갔는데, 2시간 반이나 걸리더군요. 가보니 다행히도 시에서 고려사관을 문화재로 지정했어요. 그러나 시 문화국의 안내로 현장에 찾아가보니 남아 있는 건물은 고려사관 내에 있었던 절 보규묘(寶奎廟)뿐이었습니다. 문헌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설명돼 있는데 화재로 파괴됐고 그나마 보규묘도 목공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고려사관이 들어섰던 터를 확인하고는 시당국과 복원에 관해 의논했는데, 20만달러의 경비만 있으면 복원을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귀국 후 잘 아는 기업인들을 설득해 기꺼이 부담하겠다는 답을 듣고는 다시 닝보 시당국과 의논했더니 요구액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200여만달러는 있어야겠다고 하더군요. 주변 건물을 매입하고 도로도 확장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내 능력으로는 그런 거금을 모금하기가 힘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원 시급한 닝보의 고려사관
-그러면 현재 고려사관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제가 복원을 위한 경비조달을 포기한 후, 그러니까 1999년 봄에 닝보시 문화국에서 고려사관터를 발굴했다며 발굴보고서와 함께 곧 복원한다는 희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 여름에는 복원사업이 완료됐다는 소식을 알려주기에 그해 11월 부랴부랴 찾아갔지요. 그때는 막 개통된 항저우-닝보간 고속도로를 이용했더니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더군요. 닝보대학 교수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현장을 둘러봤는데, 보규묘만 새롭게 단장했을 뿐이었고, 사관 건물 자체는 그 모형만 진열돼 있는 겁니다. 건물의 유적은 보규묘 뒤 새로 조성한 공원 지하에 묻혀 있었어요. 경비가 부족해 그렇게 됐다는 것을 알고 실망스러웠지만 이만큼이나마 보존한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을 떠나오면서 공원내 유적이 묻힌 자리에 석조기념비와 안내판이라도 설치해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나 기업에서 출자하여 본건물을 완전히 복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닝보의 고려사관은 어느 정도 규모였습니까. 단순히 고려인들이 머무는 숙소의 기능을 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역할도 했었나요.
“중국 문화부에서 설계도를 만들어 보내온 것을 보면 단층으로 규모가 꽤 크고 양식은 역참(驛站)건물과 비슷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박사에서 선박의 출입이나 세금징수 등을 관장했는데 시일이 꽤 걸렸어요. 그래서 많은 고려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고 또 이곳에서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므로 규모가 컸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관이 복원되면 제법 볼 만하겠습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10여년 전부터 항저우시 당국에 복원문제를 제기했는데, 아직도 못하고 있어요. 이번에 갔을 때도 또 독촉을 했습니다. 그쪽 관계자들 말로는 곧 될 거라고 합니다. 저장성 성장하던 분이 지금 저장성인민대외우호협회장인데 이 문제에 관심이 많고 영향력이 크니까 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닝보에 그밖에 다른 유적들은 없습니까.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고 불교방면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유적들이 널려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2001년 봄에 닝보대학 총장 일행이 내한하였기에 제가 동국대학과 자매관계를 맺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대학 총장에게 첫 번째 사업으로 의통(義通)대사가 세운 보운사(寶雲寺)에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제의했어요. 아마 두 대학의 노력으로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닝보 남쪽의 린하이(臨海)라는 곳은 1488년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처음 도착한 곳으로 여기에도 기념비가 건립됐습니다.”
한국의 마르코폴로 최부
-최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최부(1454~1504)는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되는 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중요한 인물입니다. 원래 과거합격 후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추세경차관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사람이었어요. 옛날에 죄를 진 사람들이 제주도로 많이 도망가 정부에서 죄인을 체포해오곤 했는데, 그 책임자로 제주도에 간 것이지요. 그런데 제주도에 가자마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가 1488년(성종19년) 1월3일로 난파된 배에 탄 일행 43인과 함께 표류하다가 1월17일 저장성 해안(臺州府 臨海縣)에 도착했어요. 처음엔 왜구로 오인받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만, 필담을 통해 왜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게 됐습니다. 135일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닝보 항저우 양저우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베이징(北京)까지 간 뒤 귀국했는데 이때 거쳐간 거리가 무려 8000여리에 달합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 표해록입니다. 당시 중국의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런 중요한 기록이 그 동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메모를 아주 상세하게 해 명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최부가 직접 경험한 해안의 경비상황, 즉 해방(海防)이라든가 지방의 군사제도, 특히 지명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운하의 상황이라든가 수차(水車)도 자세히 기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차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부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79년에야 비로소 최부의 17대손인 최기홍(崔基泓)씨에 의해 표해록 한글번역본이 나왔어요. 일본에서는 이미 1769년에 일어 초역본이 나왔고 이를 근거로 한 영역본도 1965년에 존 메스킬이라는 사람에 의해 나왔으니까 매우 늦은 셈이지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무역거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주로 어떤 물자들을 서로 사고 팔고 했습니까. 화폐도 통용됐습니까.
“시대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습니다만, 고려와 송나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쪽에서 수출한 것은 금 은 동 인삼 잣 종이 붓 먹 부채 등이고, 중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은 비단 서적 자기 약재 향료 악기 등입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화폐가 발달해 무역거래에도 사용됐는데, 대개는 물건 판 돈으로 다시 물건을 사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 외에도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닝보 등지의 항구와 한반도와의 무역도 따지고 보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옛날 바닷길의 개척에 따라 무역의 거점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요.
“중국 남방과의 교통로를 학계에서 해상실크로드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명나라 때는 멀리 아프리카까지 갔을 정도로 해외교류가 활발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만 해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해상교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처음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연해를 따라 항해를 했어요. 대동강 앞에서 랴오둥(遼東)반도로 해서 발해만을 건너는 식이었는데, 차차 교통이 발달해 황해를 직접 건너 산둥반도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출발지가 경기 남양만이었어요. 그러다가 삼국시대 무렵부터는 닝보쪽으로 직접 항해했습니다. 따라서 무역의 거점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요. 고려시대에 금나라가 생겨 중국북부를 점령하자 칭다오(靑島) 남쪽의 자오저우가 대한반도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강남지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시박사가 설치된 곳 가운데 장쑤성의 양저우는 바로 양쯔강 연안도시인데요. 이곳도 우리와 교류가 많았던 곳인가요.
“당·송대에 대외항구로 유명한 양저우에는 최치원(崔致遠)이나 고려관의 유적이 있어서 우리나라와 대단히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들어가 18세에 진사 합격을 했어요. 그후 880년부터 884년까지 5년간 양저우에서 벼슬을 하다가 이듬해 신라에 귀국했는데, 이런 연유로 중국에서도 문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남긴 업적이나 일화 같은 것이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까.
“많습니다. 저 유명한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할 때 격문을 쓴 사람이 바로 최치원입니다. 명문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최치원이 양저우에서 5년간 벼슬할 때 남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도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또 최치원이 양저우로 오기 전에 난징 동남쪽의 율수(?水)라는 고장에서 요즘으로 치면 치안국장에 해당하는 현위라는 벼슬을 했는데 지방출장 갔다가 두 자매의 묘지(雙女墓)를 보고 쓴 시가 아주 유명합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두 자매의 집안이 그런대로 괜찮게 살았는데, 부모가 열몇 살된 두 딸을 소금장사에게 시집보내려 했어요. 당시 저장성 일대에서 잘나가던 직업이 소금장사거든요. 그런데 두 자매는 소금장사에게 시집가기가 싫어 자살을 해버렸어요. 그러자 죽은 두 딸을 선산에 묻지 않고 한지에 묻어버린 것인데 이 사연을 들은 시인 최치원이 멋진 작품을 남긴 것이지요. 이 시는 지금도 중국의 창희(오페라)에 나올 정도입니다.”
-당시 중국에선 외국인에게도 벼슬을 하게 했습니까.
“그럼요. 당시 당나라는 아주 국제적인 나라였어요. 우리나라의 고선지 장군도 그렇고 안록산도 선비(鮮卑)족 사람이었습니다.”
의상대사와 선묘의 러브스토리
-양저우라면 중국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그런 일화가 있었군요. 그곳의 고려관은 복원이 되었나요.
“2001년 정월에 양저우시 인민대표대회 주임 일행이 서울로 저를 찾아왔기에 최치원에 관한 일화를 전해주면서, 고려관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랍이나 페르시아 상인들과 함께 과거 우리나라 무역상들도 빈번하게 양저우를 내왕하였다, 이때 상인들이 머물렀던 곳이 고려관인데 이곳에 기념비라도 건립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해 7월에 제가 직접 양저우를 방문했더니 기념비를 훌륭하게 건립하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10월에 양저우 시정부의 지원으로 최치원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해서 갔더니 최치원기념비와 자료진열실이 설립돼 있었고, 양저우 시내에 고려관 기념비가 잘 건립돼 있었습니다.”
-중국의 강남지역 못지않게 우리와 관련이 많은 곳이 아마도 산둥성 지역일 것입니다. 이곳에 깃든 사연이나 한국유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산둥성에서 주목할 곳은 역시 시박사가 설치돼 무역이 활발했던 자오저우(膠州)입니다. 이곳에도 고려정관이 있었는데 제가 시당국에 거듭해서 기념비 건립의 필요성을 설득하자 흔쾌히 동의하고 2000년말에 시 자체 비용으로 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1083년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 순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양경략(楊景略)을 사절로 파견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어요. 자오저우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항구입니다. 자오저우와 함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지역이 의상(義湘)대사가 상륙한 곳이자 아리따운 처녀 선묘(善妙)와의 미담이 전해내려 오는 펑라이(蓬萊)입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보낸 배가 출발한 곳으로 유명한 ‘봉래’가 바로 그곳이지요.”
-선묘와의 미담이란 건 무슨 내용입니까.
“의상대사와 선묘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이거 아마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겁니다. 의상이 중국유학길에 올라 처음 상륙한 곳이 산둥성 펑라이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선묘란 아가씨를 만나게 됐는데 그만 연애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마터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살 뻔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단단히 마음먹고는 창안(長安, 오늘날의 西安)으로 떠났어요. 의상의 마음을 빼앗은 선묘란 아가씨는 추측건대 신라방에 있던 우리 동포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사람은 말이 안 통해 필담으로 감정을 나누었던 것 같아요.
창안에 도착한 의상은 교외의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화엄종의 제2대 교주인 지엄대사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는데, 1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배를 타기 위해 다시 산둥반도의 펑라이로 왔는데, 이때 11년 전의 애인 선묘가 생각난 겁니다. 이 대목부터가 기막힌 사연입니다. 의상이 몰래 선묘를 찾아가보니 결혼을 안한 것은 물론 삭발한 모습으로 불상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를 목격한 의상은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워 아무말 없이 슬며시 떠나 배를 타고 귀국했어요. 의상이 떠난 뒤에야 선묘는 꿈속에 그리던 옛 애인이 왔다 간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길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날려 자살을 합니다. 자신이 바다의 용이 되어 의상을 무사히 건너가게 해달라는 염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선묘가 실존인물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후일 사료에 의해 실존인물임이 확인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찬녕(贊寧)이 쓴 송고승전에 나옵니다. 일본의 교토에는 선묘를 기리는 절이 있고, 교토박물관에는 선묘의 목상조각이 있습니다. 화엄종이 의상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는데 선묘 덕분이라고 해서 우러른다는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세운 영주 부석사를 가보면 지금도 선묘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저도 부석사에 여러 차례 가봤는데 선묘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한 가지 소개하면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절이 들어설 자리가 명당이었는데, 산적들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어 어찌 해보지를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어요. 이때 저승의 선묘가 내려다보니 의상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대웅전 자리 옆에 큰 돌이 있는데, 이 돌을 하늘로 떠오르게 했다는 겁니다. 깜짝 놀란 산적들이 의상대사의 힘이 엄청난 줄 알고 달아나는 바람에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가로챌 뻔했던 장보고 유적
-또 산둥성 지역에는 한중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유적이 있지 않습니까.
“장보고는 산둥성 끄트머리에 있는 스다오(石島)를 근거지로 무역이나 해상교통을 지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상황은 일본인 승려 엔닝(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국에 갈 때와 돌아올 때 모두 신라선을 타고 갔었는데, 일본에 귀국해서 이 순례행기를 썼습니다.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유명한 학자 라이샤워의 박사논문이 바로 이것을 연구한 것이에요. 이 기록이 없었다면 장보고의 활약상이라든가 당시 신라방의 사정 등등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한때 일본사람들이 엔닝을 들먹이며 장보고 유적지 복원 운운했어요. 그래서 제가 언론사에 문제제기를 해 고찰단이 파견되기도 했는데, 그뒤 불교계 등의 협조로 일이 잘 풀려 지금 가보면 법화원 등 유적지가 아주 잘 복원돼 있습니다.”
노학자의 중국이야기는 끝이 없을 만큼 술술 풀려나간다. 도대체 그 많은 역사적 일화들을 어떻게 자료도 보지 않고 소상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만큼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중국과의 교류사를 귀중한 유산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듯싶다. 그래서 펑라이의 고려관에 기념비 설립하는 일이 김 이사장에게는 ‘소원’이 된 것 같다. 한중간 역사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정말 우리가 알고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나 유적들이 중국대륙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언제까지나 김 이사장 혼자 다 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학계에도 관심있는 분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많지는 않지만 관심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당사(唐史)를 전공하는 아주대변인석(卞麟錫) 교수도 그런 분 중 하나입니다. 3년 전에 정년은퇴를 했는데 시안을 20여차례나 방문했을 정도로 열의를 갖고 있는 분이지요. 변 교수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도사 김가기(金可記) (?∼859)의 행적을 조각한 암석을 발견했어요. 시안 교외 종남산 중턱의 암석에 조각돼 있던 것인데 명나라때 지진으로 떨어져나가 한동안 논에 방치돼 있다가, 현재 시안시내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변 교수는 또 혜초(惠超)가 당 대종(代宗)의 청으로 기우제를 올렸던 흑수 옥녀담에 있는 암석을 발견하여 중국당국과 교섭 끝에, 흑수의 댐공사로 수몰되어 이전하는 근방의 절(仙遊寺)에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조계사의 도움으로 혜초기념비를 그곳에 건립하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밖에 학계의 김문경(金文經), 조영록(曺永祿), 최병헌(崔炳憲) 교수도 이 방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종남산이라면 세속적인 영달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에만 뜻을 둔 사람들이 은둔했던 곳으로 유명한 산인데요. 김가기 도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중국의 종남산 오대산 등 몇 군데가 불교 혹은 도교의 성지입니다. 종남산은 우리나라 경주의 남산과 비슷해요. 김가기 도사는 원래 신라의 왕자라고 하는데 어느 왕의 자식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엔 중국에 와서 유교를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후 도교로 돌아 도사가 됐어요. 우리나라 도사로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김가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가기를 잘 모르지만 우리와 달리 도교의 영향이 매우 큰 중국에서는 유명한 분이에요. 김가기 선인(仙人)을 연구하는 한국김선학회에서 2년여 전에 종남산에 아주 훌륭한 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중국의 성인이 된 김교각대사
-지금 도교의 김가기 도사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 중국대륙에 산재해 있는 우리의 관련유적들 가운데는 역시 불교 고승들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각국사 의천 말고도 누구나 알 만한 분들만 연대순으로 꼽아보면 신라시대의 원측대사(613~696), 원효대사(617~686), 의상대사(625~702), 김교각대사(696~794), 혜초대사(704?~?)가 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천태종의 제16대조가 된 의통대사(927~988)를 들 수 있습니다. 역사유적도시로 유명한 시안 근교의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에 가보면 원측(圓測)대사의 사리탑이 현장(玄훻)대사의 사리탑과 나란히 서있습니다. 불교에 관심있는 중국인들과 얘기를 해보면 이들 대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김교각대사의 경우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데, 중국사회에서 대단한 성인으로 우러르는 것을 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요즘은 김교각대사가 열반한 지우화산(九華山)에 성지순례차 관광을 가는 한국인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불교계에서 관심이 크고 많이 찾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지우화산은 멀기도 하거니와 유적이 잘 단장돼 있다고 해서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김대사가 수도하고 99세에 입적한 절(化城寺)이 있는데요. 현재 김대사의 동상이 99m의 높이로 건립되고 있는데 2004년 중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교각대사는 우리나라보다도 중국사람들이 더 존경하고 있더군요.
중국기록에 의하면 김교각대사는 신라 왕실에서 태어났는데 키가 7척에다 용모는 험상궂어도 마음이 어질고 총명해 10명의 상대를 당할 힘이 있었다는 겁니다. 원래 지우화산은 신선이 노니는 민간신앙의 숭배지였는데, 김교각대사가 들어와 절을 짓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오늘날의 성지가 됐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4대 불교성지가 있는데, 다른 세 군데의 성지(문수보살의 성지 산시성 오대산, 보현보살의 성지인 쓰촨성 아미산, 관세음보살의 성지 저장성 보타산)가 보살이 현신했던 곳인데 비해 이 지우화산은 지장보살이 직접 와서 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지우화산에 살았던 인간 지장보살이 바로 신라의 왕자였던 김교각이라는 것이지요.”
낙양성 십리밖에 묻힌 의자왕
-얼마전 신문을 보니 북망산에 있다는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작업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백제의 의자왕이 중국에서 일생을 끝마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뤄양(洛陽)엘 들렀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역사에 너무 무지했다고 자책한 적이 있습니다. “낙양성 십리허에---”로 이어지는 노랫가락이 그대로 역사를 읊은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묘한 감상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혹시 낙양성이나 그 인근의 북망산에 가보셨는지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할 때 의자왕을 비롯해 1만2000여명의 백제인이 당으로 압송됐습니다. 왕자만도 88명이었다는 설도 있어요. 북망산에도 가봤는데 거기가 공동묘지예요. 의자왕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이 없어 찾기가 아주 힘든 실정이에요. ‘낙양성 십리허에’ 하는 노래도 아마 의자왕과 관련있는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만, 아무튼 묘지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까 말한 의천대사가 상륙한 지점을 찾는 데도 3년이 걸렸으니까요.”
-그동안 우리는 조상들의 발자취와 한중간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대개 어떤 문헌에 많이 나와 있습니까.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많이 나오는데 아직 연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승려들에 관해서는 혜교(慧皎)의 고승전,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찬녕의 송고승전 등이 대표적인 중국문헌이고, 한국측 문헌으로는 신라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 고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등에서 당시 승려들의 내왕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대문의 고승전은 지금 소실돼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절에 가서 기록들을 뒤져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처럼 무궁무진한 중국내 한국관련 유적의 현황을 어느 정도나 파악하고 있고 또 발굴이나 복원 혹은 기념비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동안 국교가 단절돼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사실이나 유적이 많습니다. 우선 학자들이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을 고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고증하고 발굴을 하더라도 이를 복원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는 중국당국의 허락과 사업 자금이 필요합니다.”
중국내 한국 관련 유적들의 의미
-중국 당국이나 학계인사들은 한국관련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국측에서 자금을 대면 응하는 정도인가요.
“한중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근래에는 중국측이 고구려나 발해문제 이외에는 매우 협조적입니다. 그것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자오저우시나 양저우시 닝보시가 타지역에 비해 훨씬 적극적입니다. 특히 양저우와 닝보는 당나라때 대단히 중요한 항구였기 때문에 우리 말고도 일본이나 페르시아 상인들이 많이 와서 거주한 일종의 국제도시였습니다. 양저우에서 황소의 난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랍상인도 약 80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양저우에 와서 한 3년간 지방행정 고문역을 한 일도 있어 마르코 폴로 기념관도 건립돼 있습니다.”
-중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관련 유적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한국과 중국이 말로만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중국의 불교나 유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또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밀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역사유적 이야기 한 가지만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이쯤에서 화제를 김 이사장이 요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한중간 학술교류사업으로 돌려보자.
-김 이사장께서는 요즘 유적지 복원사업과 함께 중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일에 정력을 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은 어떤 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1950년대 말 제가 하버드대에 객원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 가운데 하나가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한국인이나 한국이 제대로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외국에서 한국학을 발전시키는 일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후 힘이 닿는 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내의 한국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술교류라는 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상대국에서도 연구를 발전시켜야만 원만히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이런 학술교류를 통해 서로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것이 국가간 친선의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 한국과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한국에 대한 연구랄까 이해의 폭이 넓고 깊을 것 같은데요. 비록 40여년 단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만, 중국의 한국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대만에서는 이미 20여년 전에 한국학회를 조직해서 우리와 학술교류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만, 중국대륙은 수교 이전까지는 학술이나 문화교류가 전무한 상태였어요. 일제통치와 6·25전쟁 국공투쟁 등으로 전후 근 80년간 학술교류가 거의 두절된 상태였지요.
예를 들어 중국은 북한과 근 40년간이나 혈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은 몰라도 북한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전됐으리라고 추측했습니다만, 막상 현장을 돌아보니 그렇지가 않아요. 중국의 각 대학을 순방해보니까 학술교류는 거의 없고 동북지방의 옌볜(延邊)대학과 창춘(長春)에 있는 동북사범대학이나 지린(吉林)대학 그리고 지린성 사회과학원에 있는 조선족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연구결과는커녕 자료조차 전무한 상황이었어요. 북한유학생은 더러 있었지만 모두 자연과학이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나마 한중수교 이후에는 거의 모두가 북한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중국학자들이 북한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을 정도였으니까요.”
-북한과 중국의 과거 혈맹관계로 미루어 서로간에 상당한 수준의 연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해왔는데 예상과는 다르군요. 중국과 북한의 학술교류와 상호연구가 그처럼 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부나 당차원에서는 교류와 연구가 활발했겠지만 대학 등 민간차원에서는 북한이 아직도 폐쇄사회여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중국학자들이 김정일정권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것도 중국과 북한 사이의 학술교류가 저조한 이유라고 봅니다.”
-중국에서의 한국연구를 진흥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중국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관련연구소를 설립하는 게 지름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명문대학에 한국연구소를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우선 대학내에 한국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진력할 교수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대학당국이나 중국정부에서 동의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또 연구사업을 추진할 재원이 필요하고 말입니다. 특히 중국사정으로 보아 중국내에서 재원을 얻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가 한국내에서 모금하여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재원이 필요했을텐테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군데서 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대우재단이나 진로문화재단 국제교류재단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지원을 해주었고, 또 사회과학원이나 정부도 지원했습니다.”
-중국 대학의 한국연구는 주로 어떤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대학별로 조금씩 중점연구분야가 다릅니다. 베이징대 저장대 산둥대 난징대는 주로 한국의 역사 문학 철학 등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는 주로 한국독립운동사, 랴오닝(遼寧)대 둥난(東南)대는 한국경제, 베이징어언문화대학은 한국어, 양저우대는 최치원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 대학에서 외교와 안보도 연구하고 있지요.”
-학술교류를 통해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것이 국가간의 친선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와 관련해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중국측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학문에는 실사구시라는 게 있습니다. 증거를 가지고 얘기해야지요. 증거라는 게 문서뿐 아니라 유물도 있잖아요.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발해시대 유적도 발굴해보면 거기서 나오는 게 다 우리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는 실사구시의 원칙을 지키면서 양국간 이견을 일치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유물발굴작업이 돈이 많이 들어 학자 개인적으로 하기는 어려우므로 정부지원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중국의 한국학 연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우리도 중국연구와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에 김 이사장의 협력으로 한국연구소가 설치된 대학은 모두 8개로 베이징대를 비롯해 한결같이 최고의 명문대학들이다. 지금까지 약 200권에 달하는 한국관련 연구서적이 간행됐고 수시로 학술회의가 열려 중국내 한국학연구가 본궤도에 올랐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데에는 김 이사장의 중국인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한국통들과의 인연
-말하자면 중국의 한국통들을 총동원해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학 연구를 독려하신 셈인데요. 처음에 어떻게 중국학자들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까.
“1945년 해방이 된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귀국할 때 저는 그대로 중국에 남아 있었어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남경 중앙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때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중국은 장차 독립한국과의 교류를 담당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우리 임시정부에 그 교수요원 파견을 요청했는데 제가 추천을 받아 가게 된 것이지요.
현재 베이징대학의 한국연구소 소장인 양퉁팡(楊通方) 교수와 베이징어언문화대학의 한국연구소 소장인 쉬웨이한(許維翰) 교수가 바로 나의 옛 제자입니다. 양 교수는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의 1기 졸업생이고, 쉬 교수는 양 교수의 2년 후배입니다. 50여년 전에 가르친 제자들이 오늘날 한중 학술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이 중국의 초창기 한국통을 길러내는 역할을 한 것을 보면 그가 요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한중 학술교류사업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필생의 과업인 셈이다.
-두분 교수는 저도 만나봤습니다만, 한국어도 능통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이 분들과 김 이사장의 남다른 인연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주시지요.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는 나중에 베이징대학과 합병된 학교입니다만, 제가 가르친 이 학교 1기 졸업생 중 4명을 1948년에 한국으로 유학시킨 일이 있습니다. 국내 지인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해서 서울대에 보낸 것이지요.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양 교수는 송대 이후 10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유학한 중국인이라고 하더군요. 지난 2000년에 고려대에서 양 교수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것도 중국학자로 한국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시초라는 겁니다. 양 교수는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중 6·25가 발발하면서 귀국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는데,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전환하면서 1986년 9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극적으로 해후 했습니다. 그 후 양 교수는 저의 중국내 활동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중국내 한국학연구와 관련된 김 이사장의 역할은 그가 베이징대를 비롯해 모두 8개 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추대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직접 강의하는 기회는 드물겠지만 아무튼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중국대학의 교수가 된 셈이다. 힌중 학술교류에 끼친 공으로 김 이사장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지난 2000년에 중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중국 강남 발음과 유사한 우리 한자음
-평소 궁금하던 것을 좀 묻겠습니다.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엔 한자를 좀 아니까 쉬울 줄 알고 덤벼들었는데, 조금만 해보면 그게 아니더라는 거지요. 무엇보다도 중국어의 발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독음과 다른 데다가 성조까지 있어서 매우 애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자의 발음이 서로 달라진 것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요.
“중국어는 한자뿐 아니라 4성이라는 성조 때문에 외국인이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은 또 땅이 넓기 때문에 지방마다 사투리가 심해 외국인은 더 배우기가 어렵지요. 상하이어나 광둥어가 통역 없이는 알아듣기 힘든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한자음은 오음(吳音)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나라가 지금의 장쑤성 저장성 일대였으니까 이 지역의 발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중국 강남지역의 발음과 우리 한자음은 실례를 들어보면 어떤 유사점이 있겠습니까.
“닝보지역에서는 쉐성(學生)을 ‘학상’으로, 마치 우리의 사투리처럼 발음합니다. 또 항저우에서는 한궈(韓國)를‘안국’으로 발음하는데, 성조까지 감안해 들으면 꼭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만에 가면 저장성과 붙어 있는 푸젠성 출신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궈지환뎬(國際飯店)을 ‘국제본덴’이라고 발음합니다. 우리 발음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아까 해상실크로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한반도와 중국과의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것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봅니다. 왕래가 많으면 말도 자연히 퍼지는 것이니까 말이죠. 오늘날 베이징 지역의 중국어가 표준어가 된 것은 북방에서 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오히려 선사시대부터 내왕이 활발했던 강남지방의 발음과 유사하다는 것이지요. 발음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강남지역의 문화적 연관성이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쌀만 해도 과거엔 산둥반도에서 들어온 것으로 여겼는데 요즘은 강남에서 5천년 혹은 7천년 전의 쌀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또 지석묘도 북쪽에서만 온 줄 알았으나 지금은 중국 남쪽에서도 전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금까지는 화북지역에 치우친 감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남지역에 좀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한국인을 상대로 대외호감도를 조사한 것을 보면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무척 높게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근거없는 혹은 막연한 우호감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에 문화적으로 동화되거나 종속화돼 민족의 자주적인 입지가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집니다만,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조선시대에 모화사상이 심했다고 비판합니다만, 그때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국이었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태도와 비슷한 것이지요. 그런데 청일전쟁 후에 일본이 중국을 멸시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덩달아 중국을 깔보았거든요. 이런 건 시정하고 객관적으로 있는 대로 보아야겠지요. 최근에 와서 중국이 크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이제 중국에 대해 일종의 공포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국제관계라는 게 늘 변화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자주적인 국가로 대접받고 존경받으려면 국력이 강하고 문화가 발전해야만 됩니다. 국제관계에서 위기는 항상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비롯되는 게 철칙입니다. 결국 우리 내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중국인은 한국이나 한국인, 한국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겉으로는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국인이 많다지만 속으로는 대국의식을 갖고 한국이나 한국인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사람이 민족정신이 강하고 재능 있고 근면하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해서 한국의 경제발전상에 감탄하면서 그 노하우를 배우려고 열심이에요. 이른바 한류(韓流) 현상도 이 같은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인을 우습게 보지 않느냐는 것은 글쎄요,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닙니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아직도 중국인을 깔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한국학이나 중국학이 발전함에 따라 서로 상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미래의 중국통들에게 도움될 말씀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늘 강조하는 게 있어요. 외국을 연구할 때 우선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해야 하고 그 나라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또 하나 강조할 것은 그 나라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사람이거든요. 중국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은 아마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중국유학생이 급속도로 늘고 있는데, 나는 이런 현상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남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는 식의 유학은 곤란하겠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이 가서 중국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