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호에 실린 상편에서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상부의 ‘배신 아닌 배신’으로 감옥에 갔던 김영일은 1995년 10월 6년여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감한다. 열악한 교도소에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그는 출감 후에도 골동품과 장어를 외국에 내다 파는 외화벌이 사업을 계속한다.
- 1990년대 북한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그의 진술서는 처참한 경제상황과 밀무역 실태, 북한 최고위층의 방탕한 생활 등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편집자).
죄수들은 대개 절도, 강도, 살인, 강간을 저지르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자강도에 있는 조선인민군 제4군단(황해남도 해주) 소속 저격여단에서 복무했던 최상철이라는 죄수가 있었다. 그는 1982년에 12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들어왔다고 했다. 당시 군대에서 중앙의 대학에 가려면 컬러 텔레비전 2대, 녹음기, 선풍기 등을 준비해야 하며 조선 돈 10만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최상철은 부소대장과 한패가 되어 강도와 절도를 본업으로 삼고 해주, 사리원의 귀국교포와 협동농장의 양돈장, 정미소 등을 상대로 절도행각을 벌였다.
이들은 훔친 양식과 돼지를 금으로 바꿔 외화상점에서 귀중품을 구입하여 연대의 정치위원, 간부과장, 중대 정치지도원 등에게 뇌물로 주었다. 결국 최상철은 대학 진학을 추천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학비가 없었다. 이번에는 학비 마련을 위한 범죄가 시작됐다.
당시 중국에선 많은 수달피가 필요한 상태였다. 이에 상당수 국영농장과 외화벌이 장사꾼들이 수달피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해주 수달피 농장은 규모가 꽤 큰 농장이었다. 상철은 정찰조 1개 소대를 인솔하고 수달피 농장을 상세히 살펴본 후 완전무장한 5명의 군인을 데리고 새벽 2시에 차를 몰고 가 농장 정문에 세운 뒤 연속사격을 가했다.
“경비천막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사살해버려!”
갑작스레 인민군의 협박을 받게 된 경비원들 중 누구 하나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 2명은 위협사격을 담당했고, 3명은 상철의 지휘하에 수달피를 훔쳤다. 총소리에 놀란 수달피들은 도둑들을 물어뜯었다. 경험이 없는 인민군 한 명이 수달피에 물려 손가락 두개가 잘려나갔다.
상철은 훔친 수달피 50마리를 사리원에 가서 팔았다. 그 당시 수달피 한 마리에 조선 돈 1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건이 해주에서 발생했고, 농장 책임자는 수달피에 물려 잘려나간 손가락을 들고 인근 부대를 찾아다녔다. 부대마다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상철이 소속된 부대의 전투조장은 농장 책임자의 장녀와 정혼을 한 사이였다. 인민군 무장 전투병이 농장을 습격하여 수달피 50마리를 훔쳐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전투조장은 이 사실을 보위지도원에게 보고했고, 사단과 군단에까지 보고되었다. 결국 상철은 체포되어 재판에서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감옥 안에서 탈옥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밀고자로 인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결국 사형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 농장의 3분조장 김창선의 경우는 더욱 기구했다. 대대로 농사꾼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농민이 되어 40세에 농장 분조장이 되었다. 그는 일개 분조를 이끌고 열심히 일해 모범 농장원과 모범 분조장으로 선발되었다.
농장관리위원회는 매년 가을 각 분조로부터 양식을 거두어들여 관리위원회의 비용으로 사용했다. 김일성 혁명사상 연구실을 건축하기 위해 창선은 앞장서서 분조의 양식을 이용했다. 그런데도 감사처의 감사에서 이 사안이 전형적인 횡령사례로 지적을 받았다.
농촌 지도자가 시찰을 왔을 때 잡은 돼지와 식사 때 먹은 옥수수, 가을 수확기에 분조가 먹은 옥수수, 연구실 건축에 사용한 양식, 비료와 교환하는 데 사용한 양식, 경운기 타이어 교환하는 데 사용한 양식, 이 모든 것을 창선이 횡령했다는 것이다. 도합 1.8t의 양식을 횡령한 죄였다. 북조선에서 양식 100kg 횡령은 징역1년이며, 현금 1000원 횡령 또한 징역1년이다.
창선 개인이 소비한 양식은 채 50kg이 안 되는 것이었고, 모든 것은 리 당위원회와 관리위원회의 지시로 사용한 양식이었다. 그런데도 창선은 8개월의 예심을 거쳐 18년형을 언도받고, 사회안전부 제7노동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범죄가 급증하자 이에 따라 감시도 가혹해졌다. 한마디로 공화국 전체가 범죄의 소굴, 철창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기술자에게 그날의 노동 할당량이 배분되듯, 사법 감사기관의 감사처, 안전부, 파출소 등 각 기관 담당자들에게도 그날그날 채워야 할 건수가 있었다.
감사처는 매분기 자기 관할기업에 대해 경제감사를 실시했다. 감사를 받은 회사나 기업에서는 항상 1~2명이 붙잡혀서 처벌을 받았다. 안전원도 개인별 완성목표량이 있었다. 예를 들면 파출소 주재원 한 명이 시장에서 규정에 위배되는 상품(외국에서 들여온 식품이나 물건, 의약품 등) 판매행위를 적발하면 적어도 15명 이상을 처벌해야 하고 가택수사도 해야 했다.
매월 집결소, 강제노동수용소, 감옥에 보내는 숫자도 할당되어 있었다. 안전원은 매주, 매월, 매분기별로 처리한 인원의 숫자와 몰수한 금액에 따라 자신의 정치성적을 평가받았다. 많은 인원을 적발할수록 그의 출세는 보장되는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죄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개중에는 인민을 동정하는 안전원도 있어 눈감아주거나 뇌물만 받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대개 일찍 옷을 벗거나 10년이 지나도 출세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강도 혜산에서 잡혀온 최창만이라는 죄수가 있었다. 철도 안전원이었던 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수감생활 중이었다. 그가 일했던 평양에서 혜산 구간은 우선 평양의 안전원이 담당하다 길주에서 혜산의 안전원과 교대를 한다. 평양-길주는 평양의 안전원이, 길주-혜산은 혜산의 안전원이 맡는 셈이다. 최창만은 상관에게 뇌물을 주고 열차검사 안전원이 되었다.
조선의 금, 은, 동, 해삼, 성게, 골동품 등 귀중품은 보통 신의주, 혜산, 무산, 온성 등 국경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갔다. 김정일은 이를 막기 위해 국경지대를 상업 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치도록 했다. 해당지역 철도 안전원과 10호 초소, 임시초소는 돈을 벌 기회가 자주 생겼다.
이틀에 한 번 근무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평균 20만원 가량의 돈을 승객들로부터 강탈, 몰수했다. 운이 좋아 골동품이나 귀중품을 몰수하면 큰돈이 생겼다. 한번은 평양의 황금 상인을 만나 그가 갖고 있던 금 3kg을 몰수해 다른 안전원과 나누어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상인이 중앙의 일급 간부와 안전원이 뒤를 봐주는 큰 상인이었던 것. 곧바로 중앙 사회안전부에 횡령사실이 전해졌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던 창만과 검사조장은 시 안전부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서야 각각 15년, 10년형으로 ‘타협’할 수 있었다.
1년보다 긴 겨울
수감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내와의 면회가 허락되었다. 1년 만에 만난 것뿐인 데도 아내는 10년은 늙어 보였다. 갑자기 소식이 끊기니 초조해하다가 평양에 있는 용철에게 겨우 부탁해 내 소재를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잡혀간 후 집은 두 번이나 수색을 당해 남은 물건이라고는 옷 몇 벌과 그릇 몇 개뿐이라고 했다. 아내를 감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정성 들여 먹을 것을 준비해온 아내는 나의 깡마른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울기만 했다.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운 뒤 나는 이것저것 물었다.
“어머니 건강은 어떠오. 둘이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있나….”
“어머니와 향미(딸)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집 걱정은 하지 말아요. 당신 건강이 제일입니다.”
“개성 친정집은 어떻게 지내요?”
“모두 편안해요. 친구들도 도와주고 있어요.”
몇 마디도 나누지 못했는데 면회시간이 끝났다.
“이봐, 시간 다 됐어. 배불리 먹었으면 됐지,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아.”
수감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겨울이었다. 감방 안에는 난방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30평방미터도 안 되는 방에 모인 90여명 죄수들은 밤새도록 추위에 떨어야 했다. 보통 두 사람이 함께 다 떨어진 이불을 덮고 앉아서 잠을 청하곤 했다. 그나마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잠이 깨는 수가 많았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난 후 아침이 오면 죄수들의 얼굴은 모두 부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석탄난로가 하나 있었지만 석탄은 사리원 봉산에서 캐낸 저열량탄뿐이었다. 그나마 석탄난로 주변은 반장, 조장, 제품검사원, 통계원, 창고보관원 등의 자리이기 때문에 일반 죄수는 가까이 갈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재봉틀 부품 가공작업반의 선반공 일을 배정받았다. 소형 선반을 사용하여 재봉틀 볼트와 너트를 깎아 나사를 때려넣는 작업이었다. 작업장은 높이가 20m나 되었고 방은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선반은 1950~6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소음이 상당히 커서 상대방의 말소리를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선반공을 맡은 지 7일 만에 견습기간을 마치고 작업을 맡아 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하면 모든 선반공구는 개인이 준비해야 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우선 공구상자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없으면 작업복이나 공구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는 것이었다. 공구상자를 구하려면 그들에게 너댓 끼의 식사를 바쳐야 했다. 모든 공구와 작업복도 식사를 바쳐야만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노동교도소 안에서 식사는 화폐대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죄수의 눈에는 콩 한 알이 소다리 하나나 다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한 끼의 감옥식사를 주는 것은 자기 피와 살을 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공구가 없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금식처벌을 받는다.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반장, 조장, 검사원은 일반 죄수의 식사를 빼앗아 먹었다. 그들은 흡혈귀였다. 그나마 식사를 바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간수들에게 들키면 그 또한 금식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 명언을 학습해야 했다. 너무 추운 나머지 앉아서 외울 수 없게 되자 죄수들은 ‘기차놀이’라는 운동을 고안해냈다. 앞사람 허리를 잡고 5명이 한 무리가 되어 줄을 서서 빙빙 돌면서 교시와 명언을 외우는 것이었다. 외우지 못하면 당연히 벌을 받았다.
추위와 배고픔, 금식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처벌, 이것이 바로 지옥생활의 하루였다. 노동교도소에는 위생설비가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적잖은 죄수들이 각종 질병을 앓다 죽어갔다. 죄수가 죽으면 안전원은 시체를 차에 실어 산골짜기에 매장하거나 화장해버렸다. 북조선에서는 복역중 죄수가 죽어도 그 시체를 가족들이 인수하여 처리할 수가 없다. 시체가 많아 제때에 처리를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악취가 코를 찌르곤 했다. 살아남은 죄수가 시체를 신고하지 않고 자기 옆에 둔 채 그들의 식사를 수령하여 먹어치우기도 했다.
지옥 같은 생활에 지친 죄수들은 고의로 병을 만들어 감옥을 벗어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한 죄수는 상처가 난 다리에 인분을 바르고 헝겊으로 싸두었다가 똥독에 감염되어 죽었다. 어떤 죄수는 눈에 탄화물을 집어넣어 장님이 되기도 했다. 황근호라는 죄수는 전기톱으로 손을 절단했는데, 그는 고의로 교도소 규정을 위반한 죄로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당했다.
살아 나가기가 죽어 나가기 못지않게 어려운 곳이었다. 웬만한 각오나 수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흔히들 힘이 세거나 성질이 있어야 겨우 버텨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지만, 나는 반대로 생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을 안 먹고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좀 편하게 지내고자 했던 것이다. 모두들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침식사를 반환하면 이는 반장이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반장은 그런 죄수가 고마울 것이고 여러 모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비록 배고픔이 계속됐지만 한동안은 효력이 있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자아비판이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반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내가 식사를 반환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오히려 어쩌다 반환하지 않는 날에는 나에게 강제로 이것저것 시키고 금식처벌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방법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부대에서 근 10년 동안 단련한 권투솜씨를 써먹을 시기가 된 것이다.
일은 금세 벌어졌다. 2월13일 오전 10시, 가공1반 연마실에서 나는 반장의 똘마니 연마공 몇 명과 조장 3명을 반 죽도록 두들겨 팼다. 전신에 피를 흘리면서도 연마공들은 쇠몽둥이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10년간 정찰소대장을 지낸 나를 당할 수는 없었다.
본때는 단단히 보여준 셈이지만 대신 처벌은 가혹했다. 보고가 올라가자 나는 바로 안전과에 끌려갔다. 손을 뒤로 묶이고 머리를 숙이고 바닥에 꿇어앉혀진 채 구둣발로 채이다 보니 정신착란이 될 지경이었다. 10일간의 독방감금 처분이 떨어졌다. 독방은 20m의 쇠창살로 만든 사방 1.2m의 정방형 작은방이었다. 바닥에 작은 화장실 구멍이 있고, 높이는 겨우 1.5m로 마치 동물원의 새장 같았다. 겨울에 독방에 감금되면 내의밖에 입지 못하게 했다. 그때가 2월 중순이었으니 방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하루 종일 추워서 부들부들 떨었다. 식사는 일반 죄수의 5분의 1도 안 되었다. 독방에 감금된 죄수는 하나같이 손발에 동상이 걸린다. 나도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15일을 보내고 돌아오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1992년 나는 김일성의 80세 생일과 김정일의 50세 생일을 맞이해 3년의 감형을 받았다. 다시 3년이 지난 1995년 10월21일, 드디어 대사면과 감형으로 앞당겨 출옥할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바깥 세상이었다.
허약한 몸을 끌고 출옥했으나 아내는 보이지 않고 여동생과 매제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내와 딸은 물자 부족시대를 견디기가 어려워 개성 친정집에 가 있기 때문에 나의 출옥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가는데 5일이 걸렸다. 차창에 비친 깡마른 얼굴 속에 예전의 내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내가 감옥에 있던 6년의 세월은 최악의 경제난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질서는 붕괴된 지 오래였다. 간리 역에서 기차를 타지 못해 이틀을 묵어야 했다. 여관은 운영이 어려워 문을 열지 않았고 기차 대기실과 역문 입구는 승객들로 붐볐다. 안전원, 규찰대, 질서유지대 등 기관원을 피하는 평양 시민들과 승객들이 어울려 노점상을 차려 놓고 옥수수 빵, 국수, 콩비지 등을 소리 내어 파는 광경은 영화에서 보았던 1950년대의 전쟁 난민을 연상케 했다.
청진에 도착하여 여동생 집에서 며칠 요양을 했다. 나의 출옥소식을 듣고 많은 친구들이 나를 찾아 왔다. 그 가운데 내가 예전에 일하던 815훈련소에서 청진지사장으로 근무하는 태영은 일본 닛산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자본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815훈련소의 새 사장도 찾아와 다시 일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번 나를 배신한 사람들과 다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다시 감옥에 갈지 모르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처가에 편지를 몇 번 보냈는 데도 답장이 없었다. 직접 가보기로 마음먹고 처가가 있는 개성으로 길을 떠났다. 태영은 나를 기차역까지 배웅해주면서 미화 500달러를 주었다.
청진역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차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벌써 며칠째 역에 머물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태영이 기차역의 직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기차에 유리창이 없었다. 비닐을 쳐서 바람막이를 한 객차도 있었지만, 눈발이 날려들어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렇게 추운 날 기차지붕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객차 안은 발 디딜 자리도 없어 소변을 보고 싶어도 기차가 역에 정차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기차가 정차를 하면 붐비는 사람들이 떠밀고 나가는 바람에 나갈 길이 없었다. 어떤 승객은 비닐을 준비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열차 안전원들은 끊임없이 증명서나 차표검사를 했다. 장사하는 사람이나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붙잡아 무조건 물건이나 돈부터 압수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서민 월급 30원, 고위층 술값 3만원
금주를 지나자 날리던 눈발이 눈비로 변했다. 청진에서 금주까지 오는 도중 기차지붕에 숨어 있던 여자 2명이 감전으로 사망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인민군 장교는 “승강대 발판에 숨어 있던 사람이 열차가 역내에 진입할 때 시멘트벽에 부딪쳐 머리가 깨져 죽었다”면서 혀를 차며 탄식을 했다.
5일째 되는 날 기차가 간리역에 도착했다. 나는 평양의 용철네 집에 전화를 했다. 용철은 역에까지 나를 마중나왔다. 용철은 여전히 평양시 안전국정치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평양. 그러나 오가는 사람들은 매우 힘들고 지쳐 보였다. 용철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용철의 부모에게 감옥에서 막 나온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과거에 황금장사를 할 때 알고 지냈던 만년보건회사(제약회사) 판매과장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광복가 잡기원(서커스단) 앞에 있는 신식 아파트였다. 판매과장 부부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들은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조총련계 동포로, 1980년대에는 간첩으로 몰려 보위부 구류소에 감금된 적도 있었다.
“영일 동무,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붙잡혀갔을 때 나는 불안해서 밤에 잠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는 내가 안전부에 붙잡혀가서도 자신의 이름을 팔지 않은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판매과장 부부는 내 어려운 상황을 듣고는 할 일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가장 경기가 좋은 장사는 역시 골동품과 중고차량 장사라고 했다.
“고려청자 하나만 구하면 몇 년 고생한 것을 만회하고도 남습니다. 이번에 개성에 내려가면 주변의 상황을 잘 살펴보세요.”
일본의 친척으로부터 자주 돈을 전해 받는 그는 평양에서 상층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모두 외화상점에서 구입했다. 이미 평양시의 일반 상점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물자부족 상태는 평양에서도 심각해다. 한두 달치 양식배급을 연기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나마 연기분을 나중에 보충해주는 일도 없었다.
화력발전소가 가동이 안 되어 평양시에는 전기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았다. 아파트는 난방이 끊겨 방 안에서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야 했다. 전기가 없으니 수돗물을 사용할 수가 없었고, 화장실 사용도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20~30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대소변을 보고 비닐에 싸서 창문을 열고 아래로 던졌다.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만년보건회사 사장의 소개로 1여단의 외화벌이 사장을 만났다. 1여단은 김정일의 지하별장을 관리하는 부대로 경호사령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동무도 1여단에 와서 일하는 게 어떻겠소? 1년이면 미화 1만달러는 벌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오? 거주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문제는 내년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그 이튿날 판매과장이 1여단의 외화벌이 사장과 조직지도원을 안산관으로 초대했다. 안산관은 평양에서 최고의 식당 중 하나다. 결국 그 자리에서 나의 직업이 결정되었다. 나는 먼저 가족을 평양으로 데리고 온 후 1여단에서 일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날 저녁 판매과장은 미화 150달러를 초대경비로 썼다. 조선돈으로 환전하면 3만원 정도였다. 일반 인민은 20~30원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시장에서 추위에 떨었다. 그러나 상층 간부와 장사하는 사람들은 하루저녁 먹고 마시고 노는 데 미화 500달러를 썼다. 공화국의 빈부 격차도 천지 차이였다.
1여단 사장 차를 몰고 개성으로 향했다. 통행증이 없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평양 교외의 장경초소와 개성의 삼가초소는 경호사령부 차라면 그냥 통과시켰다. 점심 때 처가에 도착했다. 그러나 차라리 아니 온 것만 못했다.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딸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참담하기가 그지없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옥수수 장사를 했다. 하루 종일 시장에서 바쁘게 뛰어다녀 버는 돈은 겨우 50원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 딸 향미를 학교에 보내고 남은 돈으로 겨우 죽을 마셔가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찌끼를 먹고 탈이 나 수술을 받던 중 정전으로 처치가 지체되면서 출혈이 심해져 생명을 잃었다. 엄마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딸 향미는 어느 마음씨 좋은 장교가 데리고 가버렸다는 것이 장모의 이야기였다.
정신이 멍해졌다.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가. 향미를 데리고 간 장교를 찾으려 했지만 부대는 이미 이동했고 행방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를 찾아갔다. 10년이 지나 아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부대 역시 식량난을 겪고 있는 터라 손님이 찾아와도 이전처럼 반가워하는 기색은 보기가 어려웠다. 정전이 심하고 난방도 부족한 데다 식사마저 부실했다. 그래서 전투병이 영양실조에 걸려 보양소로 후송되어 요양을 받는 경우도 많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군사부 중대장이 불평을 터뜨렸다.
“이런 군대가 어떻게 제주도까지 쳐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제주도는커녕 아마 서울도 못 가서 다 전멸할거야.”
문제는 결국 돈이었다. 돈이 없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일을 하기 위해 개성에서 이름이 높은 골동품 거래상을 만났다. 평양에서 만난 만년보건회사 판매과장 부부가 만들어준 5000달러로 장사를 시작했다. 평양부대의 큰손이 왔다는 소식이 돌자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골동품을 꺼내 보여주었다. 도굴꾼들도 만났다. 개풍군 고남리, 상동리 부근의 산은 거의 다 도굴된 상태였다. 마치 전쟁을 겪은 참호처럼 난장판이었다.
예전에 일할 때만 해도 없던 위조품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특히 개성의 위조기술이 날로 발전해 진품과 구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개성의 골동품 거래상들은 위조 골동품을 도굴 현장에 몰래 가져다놓고는 진품으로 팔아먹었다.
내가 전방부대에서 근무할 당시 개성시는 전방 신해방구였고 봉쇄된 지역이었다. 개성 시민들은 공화국에서 가장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내 아내만 해도 다시 만나기 어려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기 좋았던 개성이 이제는 전공화국에서 아사자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첫 거래에서 3000달러 이윤
골동품 가격도 많이 올랐다. 골동품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거래상들이 줄줄이 개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순박한 개성 사람들의 손에 미화 500~1000달러를 쥐어주고 고려자기 화병, 모기 향로, 청자 베개 등 귀중품을 구입하여 신의주로 가지고 가서 열 배 스무 배의 가격으로 화교 등 큰손들에게 팔아넘겼다.
사람들이 몰리자 속고 속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서로 죽이는 일도 심심찮게 생겨났다. 외지에서 온 골동품 거래상의 지갑을 털어내자는 말은 개성 사람들의 공동구호나 다름없었다. 조용하고 말없던 우물 안 개구리가 맹수로 둔갑을 한 것이었다. 돈 때문에 부자지간, 부부지간의 살인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가보위부가 나섰다.
국가보위부는 우선 ‘골동품은 남조선의 안기부가 사들인 후 깨부셔버린다’거나 ‘미화를 뿌리는 것은 안기부의 공작’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강연회를 개최해 “모든 골동품 장사꾼은 남조선과 내통한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리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곧 굶어죽게 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먹힐 리 없었다. 이들은 붙잡혀 죽을 것을 각오하고 개성시 주변의 작은 산들을 벌집처럼 쑤시며 마구 도굴을 자행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김정일은 전당, 전국, 전군에게 벼 뿌리에 영양이 많다고 하여 벼 뿌리를 캐어 잘 씻어서 옥수수와 섞어 국수를 만들면 좋은 음식이 된다고 선전했다. 개성 시민들은 한겨울에 논에 가서 벼 뿌리를 캐어 집집마다 200kg을 햇볕에 말려 옥수수와 섞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산토닌 성분이 과다하게 함유된 벼 뿌리를 먹는 바람에 수천 명이 사망했다. 결국 사람들은 “김정일은 이제 못 믿는다. 골동품만이 살 길”이라고 수근거렸다.
작은처남 경수를 데리고 개성 주위 농촌에 가서 골동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개성 주위에는 서울에서 날아온 전단이나 비닐로 포장된 식품과 공산품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군에서 복무할 당시 안전부와 보위부는 “서울의 선전품은 건드리기만 헤도 살이 썩어 떨어져나간다”고 외쳐댔다. 그래서 인민들은 이런 물건을 발견하면 전단은 찢어버리고 물건은 안전부와 보위부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아이들까지도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개성 사람들은 보위부의 말을 안 믿고 남조선 물건을 믿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적군 물건을 먹거든요.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들 하지요. 또 보내달라고 기도까지 한다니까요.”
15일간 개성에 머물며 높이 32cm의 최상급 상감흑백 자기를 구했다.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처남과 함께 아내의 묘를 찾았다. 송악산 자락에 만들어진 풀도 없는 공동묘지였는데, 그 앞에 서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너울댔다.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평양을 향해 나서기로 했지만 나는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골동품을 소지하고 있었다. 만년보건회사 판매과장과 용철에게 전화를 하자 용철은 직접 차를 몰고 왔다. 이 첫 번째 거래로 나는 미화 30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1996년 신정을 평양에서 보냈다. 새해가 되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가정을 불행에 빠뜨린 것은 과연 누구인가. 인민에게 재난을 가져다준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김정일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김정일 정권을 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해 신년이었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골동품 판매상이었지만, 속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들로 조직을 결성해 북조선 인민들을 각성시키겠다는 행동강령이 하나둘씩 다듬어지고 있었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나는 국가보위부 6처 외화벌이회사 사장인 석성재의 집에서 지냈다. 평양 동부 선교구의 고급아파트 3층에 있는 방 세 칸짜리 집이었다. 그의 부친은 사회안전부의 참모장이었고 장인도 중앙당 지도원으로, 잘나가는 집이었다. 성재는 골동품 장사 3년에 미화 32만달러를 벌었다. 신년이나 2·16이면 평양의 모든 집은 필히 주택조사를 받아야 했으나 그의 집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국가가 나서서 밀수를 한다”
그를 알게 된 것은 감옥에 가기 전이었다. 부대 회사에서 지도원 일을 하던 성재는 부친의 덕으로 몇 년 사이에 갑부가 되어 보위부 소속회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어느 날 밤 술자리에 마주 앉은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일이,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려면 여하튼 기댈 만한 고위 간부가 있어야 한다네.”
“그렇다면 자네는 누구에게 기대어 출세를 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부친 덕분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그렇지만 사회안전부 참모장이 뭐 그리 대단한가? 김정일 장군의 한마디면 우리 집도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어. 공화국 정부의 총리나 부주석은 모두 속 빈 강정이야. 보다 높은 배경에 기대야지.”
“보다 높은 배경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건가?”
약간 취기가 오른 성재는 배포가 커졌는지 술술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성택이지. 김정일의 매제. 김정일 다음으로 제2의 권력자야. 공화국의 간부나 장사꾼은 모두 장성택을 배경으로 해서 국가에 돈을 바치고 김정일의 표창장을 받아내고 있다네. 영일이 자네도 돈을 벌어 미화 10만달러만 가져다 주면 돼. 내가 장성택에게 다리를 놓아 자네가 김정일의 표창장을 받도록 해주지. 김정일의 표창장 하나만 있으면 누구도 감히 자네를 건드리지 못하네.”
성재는 벽에 걸려 있는 김정일의 표창장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자네는 저 표창장을 얼마 주고 샀나?”
“어허, 말조심해야지. 그것은 우리 장군님이 주신 거야. 돈 주고 산 게 아니라고. 자네도 잘해봐.”
이야기가 무르익는 와중에 성재의 아내가 들어왔다. 외화상점의 책임자가 왔다는 전갈이었다. 40세 정도 나이의 이 책임자는 대동강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들고 왔다. 성재는 수고했다며 미화 100달러를 그에게 주었다. 큰 돈이었다.
성재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아내와 책임자도 따라 웃었다. 겉으로는 나도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밥 한 끼 지을 쌀을 구하기 위해 60세가 넘은 지식분자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세상이었다. 전에 나와 친분이 있던, 종합대학 교수와 인민대학습당의 강사를 지낸 박선생님은 추운 겨울에 딸과 함께 시장에서 잎담배 장사를 했다. 그러나 석성재는 3칸짜리 아파트에, 전기난로와 가스난로가 있는 따끈따끈한 응접실에서 일반시민이 1년 동안 쓸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외화상점 책임자가 돌아가자 석성재가 말을 이었다.
“영일이, 들어봐. 지금 국가는 돈이 없어요. 우리는 외화벌이를 위해 마약과 황금을 해외에 팔러 다닐 사람을 선발하고 있는 중이야. 장성택의 책임하에 하는 거지. 나도 그 중에 하나야. 2·16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출발해야 하네.”
“그렇다면 나도 가야지. 어느 나라로 가는데?”
“마약과 가짜 황금을 가지고 합법적인 장사를 할 수 있는 나라는 없지. 공해로 나가서 밀수하는 자들과 거래를 하는 거지. 연락책과 무력부 정찰국이 호위 임무를 맡고 있거든.”
결국 성재의 말은 국가가 나서서 밀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위조황금이라니. 결국은 사기가 아닌가.
“최근 군수제조창에서 생산한 일종의 금속으로 진짜 황금과 똑같아. 품질과 광택실험 결과 황금과 전혀 차이가 없어. 전문가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지. 1년 생산량이 5~6만t 정도 되지.”
며칠 후 성재가 출국했다. 떠나면서 성재는 나에게 개성에 가서 고려자기 화병이나 향로 좋은 것을 구해 달라고 했다. 중국인이나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제시장에 가져다 팔 계획이니 신의주까지 가져다달라고도 했다. 신의주에 가려면 검문소를 5군데나 거쳐야 하며 검문소마다 돈을 주어야 하니 더 좋은 가격을 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재는 미화 2만달러를 나에게 주었다.
난장판 평양
성재가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 통일가에 있는 친구 서철을 찾았다. 서철의 부친은 평양 전기기기공장의 제조기술자였다. 통일가를 새로 만든 후 서철의 부친은 집 한 칸을 배정받았다. 집은 새집으로 바뀌었지만 생활수준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통일가를 정전구 냉한동이라고 불렀다. 집 안의 벽이란 벽마다 온통 서리가 서렸으며 솜옷에 솜양말, 목도리까지 걸치고 살았다.
한 집에서 부모와 서철 부부, 그리고 동생부부까지 세 가정이 살았다. 서철의 부모는 방을 아들에게 주고 자기들은 거실에서 살았다. 비닐을 둘러쳐 작은 온실처럼 만든 뒤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물은 대동강에서 길어다 마셨다. 서철의 부모는 낮에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져 헝겊쪼가리와 신발, 비닐 등 쓰레기를 주워 재활용해 썼다. 헝겊쪼가리는 가려내어 잘 씻어서 실을 빼내 장갑을 만들어 팔고, 남는 것은 베란다에서 밥을 지을 때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평생 일밖에 모르고 지낸 노동자이자 충성스러운 당원이었던 서철의 아버지는 김정일 시대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친아들처럼 생각하던 서철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만난 내게 이야기했다.
“영일아, 나는 일제시대도 겪었지만 생활이 지금 같지는 않았다. 5000년 조선 역사상 지금과 같은 때는 없었을 거야. 조선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당이 말했잖아요. 그래도 장군을 믿으라고. 장군이 있어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고.”
“그런 이야기라면 이미 50년도 넘게 들어왔다. 고난의 행군은 1년만 기다리면 끝이 나니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간부들은 자기들만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여자들과 놀아났지.”
서철의 부친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서철의 어머니는 나를 위해 정성껏 점심상을 준비했다. 콩비지와 짠지와 옥수수로 만든 콩비지밥이었다. 서철의 아내는 밥상을 들고 들어오며 상당히 부끄러워했지만 나는 감옥생활을 생각하고 맛있게 먹었다. 서철의 어머니에게 미화 100달러를 꺼내 드리고 그 집을 나왔다.
수 년째 계속된 경제난에 공화국의 자랑스런 수도, 평양은 난장판이었다. 대중교통수단인 궤도버스는 정전으로 자주 운행을 중단했고, 지하철에는 제비와 소매치기가 들끓어 하루에도 몇 번씩 소란스런 일이 일어났다.
목욕도 문제였다. 평양 시민들도 겨울에 목욕 한번 하려면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정전으로 일반 목욕탕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큰 호텔의 목욕탕과 볼링장의 지하목욕탕은 외화를 받기 때문에 일반 시민은 이용할 수 없었다. 일반 시민이 갈 수 있는 창광원 목욕탕은 새벽 3~4시에 일어나 줄을 서야 겨우 순서가 돌아왔다. 사정이 이러니 평양에는 도처에 이가 들끓었다.
평양이 이 정도라면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된 물자부족과 경제난은 온 공화국을 병들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버텨나가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겨울이 되면 개성의 도굴꾼은 당분간 도굴을 그만둔다. 땅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이 풀리는 5월까지는 장어를 잡아 팔아야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고려호텔의 부장을 통해 서매라는 중국여자를 알게 되었다. 40세 정도의 나이에 중국 심양의 모회사 부장이었다. 나는 그녀와 장어 10kg 구매 계약을 맺었다. 한 마리당 미화 1달러, 기한은 5월 중순까지였다. 서매는 1980년부터 장어장사를 시작해 15년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장어 어획량이 15년 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고 했다. 나는 개성과 황해남도 배천, 남포에 가서 장어잡이 전문가와 중개상을 소개받고 그들과 구매계약을 맺으려고 나섰다. 3월 초인데도 장어시장은 벌써 인산인해였다. 개성의 예성강 하류는 장어잡이 철이 안 됐는데도 물 위를 덮은 고기잡이 배들로 강물이 안 보일 정도였다. 물주와 중개상들이 미리 어민에게 돈을 주었으므로 어민들이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농사 대신 장어잡이
강가에 나가 선장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미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은 터였다. “금년에는 장어가 많이 잡힐 것 같으냐”고 묻자 선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딴소리를 시작했다.
“조선의 장어는 참 가련도 하지. 태어나기가 무섭게 외국인에게 팔려나가니 말이야. 작년에는 장어를 잡다가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파도 때문에 시체도 건질 수 없었지요. 저기 벽란도 나무다리 위에는 군인이 지키고 있어요. 시체가 강화도로 흘러가는 것이 두려워 포를 쏘고 총격을 가해 시체와 배를 전부 없애버리지요.”
“그럼 왜 이 위험한 일을 합니까?”
“몰라서 묻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 짓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데. 전에 있던 회사에서 인사이동이 있어 여기로 왔어요. 지금 돈을 미리 받아서 배를 움직이지만 고기를 못 잡으면 그게 다 빚이 되고 돈을 못 갚으면 집과 아내까지 빼앗깁니다.”
“아내를 빼앗기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일단 빚을 지고 돈을 못 갚으면 빚쟁이와 회사가 와서 집의 물건을 가져가고 나중에는 폭행까지 합니다. 그런 일이 어떤 때는 일년이나 계속되지요. 참다 못한 아내가 도망을 가 떠돌이생활을 하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같이 사는 일도 드물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이야기를 멈췄다. 나를 믿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곳 군단의 외화벌이 사장과 만나 그와 장어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군인들은 전기 철조망을 쳐놓은 초소 밑에서 장어를 잡는데 어획량이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성강 다리를 건너 황해남도 배천으로 갔다. 거기서 황금장사 시절에 알던 중개인을 통해 강호리 농장의 부위원장을 만나 그의 농장에서 잡은 장어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나는 가지고 온 맥주와 담배로 농장 부위원장 집에서 농장 관리위원장, 리 당서기 등 간부를 대접했다. 관리위원장은 선금을 원했다. 나는 그에게 신분증과 부대증명서를 보여주고 돈을 많이 가져오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미화 1000달러를 먼저 주며 물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지은 농사로 전 북조선이 먹고 사는데, 당신들이 농번기에 장어를 잡고 있으면 농사는 누가 합니까?”
관리위원장이 답했다.
“땅을 갈아도 기름이 필요하고 묘목을 심어도 비닐덮개가 필요하지요. 비료와 농기구도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요. 모두가 외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농사를 지으면 국가가 전부 가지고 가니 우리는 무얼 먹고 삽니까? 우리도 이렇게 돈을 벌어야 그 돈으로 기름을 사서 모를 심고 식량을 구하는 형편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나는 북조선 사회의 앞날이 새삼 한심스러웠다.
떠도는 아이들
해주로 향하는 도로에서 차에서 내려 바깥 풍경을 둘러보았다. 들판에서는 농민들이 지게를 지고 괭이와 곡괭이를 들고 밭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낙네와 아이들은 끼니를 잇기 위해 소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나물을 캐고 있었다. 모두 기아 때문에 얼굴이 부어오른 참담한 모습이었다.
시골의 작은 길에서는 등짐을 지고 가는 행인들이 차가 지나가면 담배와 술을 손에 들고 차를 태워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렇지만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군인들이 길을 막고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차량의 물건을 압수하거나 아예 차를 빼앗아버리는 일도 있었다.
차 소리를 듣고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멈춰서 손을 들고 차를 태워달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다가 내 차를 자세히 보고는 높은 간부의 차량이라고 생각했는지 힘없이 손을 내리고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할머니와 아이를 업은 아낙네 그리고 어린 제비(정해진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 3명을 차에 태웠다. 어린 제비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목욕을 안 했는지 온몸이 새까매서 영락없는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검은 몸에 두 눈만 반짝거렸다. 다섯 살 정도 된 아이는 아예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너는 이름이 뭐냐?”
“이름은 대철이고 집은 황해도 평산이야요. 형과 같이 이모네 집에 왔는데 이모부가 내쫓아서 지금 해주로 가는 길입네다.”
어린아이는 말이 없고 가운데 아이가 대신 대답을 했다. 그들 셋은 한 형제로 2년 전에 부모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평산의 우라늄 광산에서 일을 하던 부모는 추락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다고 했다. 우라늄 광산은 방사능 때문에 인부들이 40세를 넘기기 힘들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런데도 차출을 당한 사람들은 우라늄 광산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몇 살이냐?”
“형은 15살, 나는 12살, 동생은 8살입네다.”
형과 동생은 계속 말이 없고, 가운데 녀석이 대답을 했다. 영양실조로 자라지 못해 그런지 8살짜리는 겨우 5살정도로 보였고 형이라는 아이도 10살이 안 되어 보였다.
나는 먹을 것을 꺼내 차에 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할머니는 해주에 사는 딸네 집에 먹을 것을 얻으러 가는 길이며, 아낙네는 아이가 병이 나서 도립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30세 정도로 보이는 그 아낙네 역시 영양실조로 인해 얼굴에 황달기가 있었다. 엄마가 그 모양이니 아이인들 제대로 먹일 수가 있었겠는가.
해안가를 지날 때 20~30명의 군인이 나와 길을 막았다. 그 중에서 대위 계급장을 단 중대장 같아 보이는 장교가 내 차로 달려왔다.
“지금 군인 한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투임무 중 부상을 당해 생명이 위급합니다. 바로 해주 군단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차 좀 태워주십시오.”
나는 차에서 내려 환자를 보러 갔다. 무슨 전투임무인지 모르겠으나 얼굴에 멍이 들었으며 가슴에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구에게 맞은 것 같았다. 붕대도 없이 헝겊조각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대위동무, 미안하지만 이 차가 무슨 차인지 알겠지요? 나도 평양에서 지시를 받아 사람을 태우고 있습니다. 다른 차를 이용하십시오.”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달려와 공격자세를 취했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이리 떼 같았다. 기세가 흉흉한 것이 조금만 실수해도 떼로 공격당할 판이었다. 나는 명함을 꺼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대위동무! 좀 점잖게 행동하시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내 말은 즉각적인 효험을 일으켰다. 경호사령부의 차량 번호판과 나의 위엄 있는 말투, 당당하게 내민 신분증이 그의 세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 실례했습니다.”
대위가 사과를 하자 군인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차에 올라 계속 차를 몰았다. 무슨 화를 당할까 두려워 숨도 못 쉬고 있던 사람들은 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불평을 했다.
“차라리 전쟁이 낫다”
“그놈들은 국방군보다 더 악랄하다고. 무슨 전쟁임무 중에 부상을 당했겠어? 어디서 물건 훔치다가 잡혔거나 서로 싸우다가 상처를 입었거나 했겠지. 그러니 아들 둔 부모 중에 누가 자기 자식을 군에 보내려고 하겠소? 집에 먹을 것만 좀 있으면 자식을 절대 군에 안 보내고 싶지. 군에 가봤자 좀도둑질이나 하고 영양실조로 죽기도 하니 어떤 부모가 마음이 놓이겠냐고. 그러니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한테는 차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게 더 나아. 죽으려고 해도 안 되고 살아보려고 해도 안 되니 이게 무슨 팔자란 말인가.”
할머니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자 뒤에 있던 아낙네도 한마디 거들었다.
“3일 전 해주에서 우리 염전에 소금을 실으러 왔던 기사가 돌아가는 길에 군인한테 맞아 죽었대요. 소금을 실은 트럭에 1개 중대 70명이 타려고 하는 걸 기사가 겨우 달래 20명만 태웠대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 ‘중대 전원이 차를 못 타 군사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됐다’며 책임을 기사에게 떠넘기더래요. 그러더니 군법으로 처리한다며 기사를 두들겨 팼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창자가 튀어나오자 해주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죽었어요.”
나는 아낙네에게 물었다.
“그 사람을 때려죽인 군인들은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그 군인들을 어떻게 찾아요. 군인에게 맞은 경우에는 안전부도 눈감아주고 군인을 찾아도 모른다고 잡아떼는데요. 순순히 김정일 장군의 군대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할 리 있겠어요? 잘못 보았을 거라고 잡아떼겠지요. 그러니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합니까?”
할머니의 눈물이 전염되었는지 아낙네도 이내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해주에 도착해 차에 탔던 사람들을 내려주려 하자 제비 삼형제가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를 좀 데려가주세요. 우리는 의지할 곳이 없어요. 꼭 데려가 주세요. 무슨 일이든 다 하겠어요.”
아이들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음으로야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아내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이 그들을 데려다가 어떻게 하겠는가. 잃어버린 딸을 생각하면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나 또한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한 마당에 별 도리가 없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만, 지금은 너희들을 데려갈 방법이 없단다. 나는 집도 가족도 없거든. 가족을 찾으면 그때 돌아와서 데려가마.”
아이들에게 거짓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돈을 주었으나 미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 헤어진 다음날 보니 차 안에 이가 옮아 있었다. 온몸이 가려웠다. 이를 박멸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 김영일의 원고는 여기까지 남아 있을 뿐 나머지 부분(전체 분량의 10분의 1 가량 추정)은 유실된 상태다. 표지에 있는 개요설명에 따르면 이후 김영일은 외화벌이 사업을 계속하는 와중에 한국으로 망명한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탈북을 꿈꾸기 시작한다.
1990년대 들어 평양에서도 부동산매매가 이뤄지는 등 경제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중앙당 차원의 시도가 있었지만 뇌물과 상납으로 점철된 부패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이에 절망한 김영일은 1996년 10월 ‘김정일 타도동맹’을 결성해 반북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위당국이 그의 ‘수상쩍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김영일은 북중 국경을 넘지만 1999년 여름 중국 공안에 검거되었다. 이후 북으로 송환된 것으로 전해진 김영일은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