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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하)

“마약·황금 밀무역 총책임자는 김정일 매제 장성택”

  • 글: 김영일 전 평양 1여단 소속 외화벌이 일꾼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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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호에 실린 상편에서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상부의 ‘배신 아닌 배신’으로 감옥에 갔던 김영일은 1995년 10월 6년여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감한다. 열악한 교도소에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그는 출감 후에도 골동품과 장어를 외국에 내다 파는 외화벌이 사업을 계속한다.
  • 1990년대 북한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그의 진술서는 처참한 경제상황과 밀무역 실태, 북한 최고위층의 방탕한 생활 등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편집자).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하)
내가 수감된 사리원 제7노동교도소는 25개의 각종 공장과 농장, 금광을 가지고 있으며, 3000여 명의 죄수를 수용하고 있었다. 원래 수용능력은 800명에 불과하나 물자부족사태가 시작된 이래 범죄자 수가 증가해 3000명까지 늘어난 것이었다. 감방이 부족하자 창고와 복도바닥도 죄수들의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죄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할당 받은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금식처벌을 받았다.

죄수들은 대개 절도, 강도, 살인, 강간을 저지르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자강도에 있는 조선인민군 제4군단(황해남도 해주) 소속 저격여단에서 복무했던 최상철이라는 죄수가 있었다. 그는 1982년에 12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들어왔다고 했다. 당시 군대에서 중앙의 대학에 가려면 컬러 텔레비전 2대, 녹음기, 선풍기 등을 준비해야 하며 조선 돈 10만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최상철은 부소대장과 한패가 되어 강도와 절도를 본업으로 삼고 해주, 사리원의 귀국교포와 협동농장의 양돈장, 정미소 등을 상대로 절도행각을 벌였다.

이들은 훔친 양식과 돼지를 금으로 바꿔 외화상점에서 귀중품을 구입하여 연대의 정치위원, 간부과장, 중대 정치지도원 등에게 뇌물로 주었다. 결국 최상철은 대학 진학을 추천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학비가 없었다. 이번에는 학비 마련을 위한 범죄가 시작됐다.

당시 중국에선 많은 수달피가 필요한 상태였다. 이에 상당수 국영농장과 외화벌이 장사꾼들이 수달피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해주 수달피 농장은 규모가 꽤 큰 농장이었다. 상철은 정찰조 1개 소대를 인솔하고 수달피 농장을 상세히 살펴본 후 완전무장한 5명의 군인을 데리고 새벽 2시에 차를 몰고 가 농장 정문에 세운 뒤 연속사격을 가했다.

“경비천막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사살해버려!”



갑작스레 인민군의 협박을 받게 된 경비원들 중 누구 하나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 2명은 위협사격을 담당했고, 3명은 상철의 지휘하에 수달피를 훔쳤다. 총소리에 놀란 수달피들은 도둑들을 물어뜯었다. 경험이 없는 인민군 한 명이 수달피에 물려 손가락 두개가 잘려나갔다.

상철은 훔친 수달피 50마리를 사리원에 가서 팔았다. 그 당시 수달피 한 마리에 조선 돈 1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건이 해주에서 발생했고, 농장 책임자는 수달피에 물려 잘려나간 손가락을 들고 인근 부대를 찾아다녔다. 부대마다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상철이 소속된 부대의 전투조장은 농장 책임자의 장녀와 정혼을 한 사이였다. 인민군 무장 전투병이 농장을 습격하여 수달피 50마리를 훔쳐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전투조장은 이 사실을 보위지도원에게 보고했고, 사단과 군단에까지 보고되었다. 결국 상철은 체포되어 재판에서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감옥 안에서 탈옥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밀고자로 인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결국 사형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 농장의 3분조장 김창선의 경우는 더욱 기구했다. 대대로 농사꾼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농민이 되어 40세에 농장 분조장이 되었다. 그는 일개 분조를 이끌고 열심히 일해 모범 농장원과 모범 분조장으로 선발되었다.

농장관리위원회는 매년 가을 각 분조로부터 양식을 거두어들여 관리위원회의 비용으로 사용했다. 김일성 혁명사상 연구실을 건축하기 위해 창선은 앞장서서 분조의 양식을 이용했다. 그런데도 감사처의 감사에서 이 사안이 전형적인 횡령사례로 지적을 받았다.

농촌 지도자가 시찰을 왔을 때 잡은 돼지와 식사 때 먹은 옥수수, 가을 수확기에 분조가 먹은 옥수수, 연구실 건축에 사용한 양식, 비료와 교환하는 데 사용한 양식, 경운기 타이어 교환하는 데 사용한 양식, 이 모든 것을 창선이 횡령했다는 것이다. 도합 1.8t의 양식을 횡령한 죄였다. 북조선에서 양식 100kg 횡령은 징역1년이며, 현금 1000원 횡령 또한 징역1년이다.

창선 개인이 소비한 양식은 채 50kg이 안 되는 것이었고, 모든 것은 리 당위원회와 관리위원회의 지시로 사용한 양식이었다. 그런데도 창선은 8개월의 예심을 거쳐 18년형을 언도받고, 사회안전부 제7노동교도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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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영일 전 평양 1여단 소속 외화벌이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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