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12월19일 서울.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 대사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마주 앉았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가졌던 인사와 그 나라에 파견된 강대국 대표의 만남. 포터 대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한국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와 산업 모든 측면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선 한국이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적극적으로 남북 접촉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방국들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한국 지도층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 알고 싶습니다.”
김형욱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포터 대사의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단언이었다.
“한국은 독일이나 베트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이 북한보다 나아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북측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을 가질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섣불리 남북대화를 추진하다가는 해체되고 말 정도로 구조가 허약합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북쪽 사람들과 접촉한다면 국민들은 당장 그를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나설 겁니다. 그때 야기되는 혼란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1973년 이후에는 한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설 수 있게 될지도. 그러나 그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이상의 대화는 포터 대사가 1970년 1월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From : Am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 1970.1.2, ‘Conversation with General Kim Hyung Wook, former Director, ROK CIA’)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 시기는 새로 등장한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의 관계개선 등 강력한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던 무렵이다. 이날 포터 대사와 김형욱의 만남은 미중 긴장완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남북의 긴장완화, 주한미군 감축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부담 경감을 원하는 미국의 의중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김형욱이 말한 ‘1973년 이후’라는 시점이 ‘유신선포 이후’를 암시하는지, 이미 1969년 당시 유신의 청사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분명한 것은 김형욱의 냉정한 반응이 미국의 계획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후에도 상당기간 한국의 지도층과 연쇄접촉을 가진 포터 대사와 미 국무부는 1970년 닉슨 독트린 발표와 함께 남북대화 추진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1972년 7월4일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합의·서명해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한의 주체적 결단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원칙’의 큰 합의를 만들어낸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관계를 한 차원 도약케 만든 일대 사건이다. 이후 30여년 동안 남북이 이 문서의 효력을 거듭 확인함에 따라 이 원칙은 어느 쪽도 부정하거나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는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이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공동선언이 모두 7·4공동성명의 원칙을 관철하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남북이 왜 이렇듯 갑작스러운 비밀협상과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특히 남북대화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게 된 일련의 과정 역시 실증적으로 밝혀지지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은 ‘미국과 중국의 담합이 남북한의 생존과 국익을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남한과 북한이 주체적으로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돈 오버도퍼의 분석이다. 그는 남과 북이 공동성명 발표 날짜를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잡은 것은 자주의 의미를 내외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학계의 흐름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한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