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남북공동성명 내막

박정희 권력욕·美 압박이 대북협상 물꼬 텄다

  • 정리: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3-12-26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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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남북공동성명 내막
    [분단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히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방북과 박성철 당시 북한 부주석의 서울 방문을 통해 이루어진 비밀협상은 이후 현대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박정희 정부가 이를 추진한 배경과 이유는 ‘확인되지 않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 과정을 설명해줄 1차 자료인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정보보고,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사이에 오간 서신,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차관보의 보고서 등이 비밀문서로 묶여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잠자고 있었던 까닭이다.최근 공개된 이 문서들을 2003년 봄부터 정밀분석한 박건영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박선원 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기획실 국장, 우승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의 논문 ‘제3공화국 시기 국제정치와 남북관계 : 7·4공동성명과 미국의 역할을 중심으로’는, 대통령이 남북협상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미국의 강한 회유와 압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입장에 반발했으나 국내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결국 남북협상을 수용했다는 게 이들이 내린 결론이다.‘신동아’는 아직 공개된 바 없는 이 논문을 입수해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의 전문용어와 내용 일부를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1969년 12월19일 서울.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 대사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마주 앉았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가졌던 인사와 그 나라에 파견된 강대국 대표의 만남. 포터 대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한국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와 산업 모든 측면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선 한국이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적극적으로 남북 접촉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방국들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한국 지도층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 알고 싶습니다.”

    김형욱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포터 대사의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단언이었다.

    “한국은 독일이나 베트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이 북한보다 나아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북측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을 가질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섣불리 남북대화를 추진하다가는 해체되고 말 정도로 구조가 허약합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북쪽 사람들과 접촉한다면 국민들은 당장 그를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나설 겁니다. 그때 야기되는 혼란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1973년 이후에는 한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설 수 있게 될지도. 그러나 그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이상의 대화는 포터 대사가 1970년 1월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From : Am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 1970.1.2, ‘Conversation with General Kim Hyung Wook, former Director, ROK CIA’)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 시기는 새로 등장한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의 관계개선 등 강력한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던 무렵이다. 이날 포터 대사와 김형욱의 만남은 미중 긴장완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남북의 긴장완화, 주한미군 감축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부담 경감을 원하는 미국의 의중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김형욱이 말한 ‘1973년 이후’라는 시점이 ‘유신선포 이후’를 암시하는지, 이미 1969년 당시 유신의 청사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분명한 것은 김형욱의 냉정한 반응이 미국의 계획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후에도 상당기간 한국의 지도층과 연쇄접촉을 가진 포터 대사와 미 국무부는 1970년 닉슨 독트린 발표와 함께 남북대화 추진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1972년 7월4일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합의·서명해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한의 주체적 결단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원칙’의 큰 합의를 만들어낸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관계를 한 차원 도약케 만든 일대 사건이다. 이후 30여년 동안 남북이 이 문서의 효력을 거듭 확인함에 따라 이 원칙은 어느 쪽도 부정하거나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는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이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공동선언이 모두 7·4공동성명의 원칙을 관철하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남북이 왜 이렇듯 갑작스러운 비밀협상과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특히 남북대화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게 된 일련의 과정 역시 실증적으로 밝혀지지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은 ‘미국과 중국의 담합이 남북한의 생존과 국익을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남한과 북한이 주체적으로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돈 오버도퍼의 분석이다. 그는 남과 북이 공동성명 발표 날짜를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잡은 것은 자주의 의미를 내외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학계의 흐름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한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에 따른 것이었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남북공동성명 내막

    1968년 정일권 총리와 비밀회담을 마치고 악수하는 윌리엄 포터(오른쪽) 주한 미 대사.

    7·4공동성명과 관련된 논의가 갖는 이러한 한계는 관련된 1차 자료가 부족한 탓이 컸다. 또한 약소국인 한국의 경우 당시의 데탕트 무드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이 좀더 체계적인 연구를 가로막은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등의 문서들은 이러한 틈새를 메울 수 있는 귀중한 팩트들을 밝혀주고 있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와 닉슨 사이에는 남북협상을 둘러싸고 거센 밀고 당기기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남북협상을 유도하기 위해 닉슨 행정부가 취한 여러 조치들,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반발하던 박정희 정권이 결국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후 유신이 선포되고 남북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원인 등을 이 문서들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7·4공동성명 전후 한미간의 정치적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은 7·4공동성명에 얽힌 국제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남북대화에서 미국 영향력의 조건과 한계 등을 확인하는 데 핵심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좀더 강력한 수단’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포터 대사를 비롯한 미국측 인사들의 적극적인 행보는 한국정부 수뇌부들의 인식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남북간 선의의 경쟁’을 제안한 1970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그러나 1971년 2월 6만6000명의 주한미군 중 2만2000명을 철수시키고 있던 미국은 더욱 획기적인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해 4월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던 이 무렵 한국주재 미 대사관에서 국무부에 보낸 전문(From Amembassy Seoul to SecState, 1971.2.18, ‘Proposal for Increased Display of U.S. Interest in Dialogue between ROK and North Korea.’)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향후 한국정부는 자신의 시간표와 방법으로 (북한에 대한) 어떤 접근법을 만들어갈 테지만, 이 접근법이 과연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한국정부가 처음부터 우리의 관점을 고려하도록 하기 위해 조용한 설득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방식이 자주 필요하며, ‘직접접촉을 통한 긴장완화’라는 방식을 압박하기 위해 ‘좀더 강력한 수단(a little more leverage)’도 필요할 것이다.”

    쉽게 말해 ‘남북간의 직접 대화를 통한 획기적인 한반도 긴장완화’야말로 주한미군 감축의 명분을 찾던 미국의 요구에 딱 맞는 이슈였다. 박정희가 마지못해 보여준 ‘뜨뜻미지근한 방식’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같은 전문의 다른 문장은 그 구체적인 속내를 보여준다.

    “우리는 덜 소극적이어야 하며…덜 관용적이어야 한다. 미군 주둔으로 한국의 방위를 약속하고 있는 이상 한반도 긴장완화는 우리와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으며, 한국정부가 우리를 경직된 적대상태에 붙잡아두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박정희가 선출되든 야당후보(김대중)가 되든…이산가족 문제부터 시작해 문화교류와 무역 등 북한과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만약 한국정부가 긴장 완화를 위한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우리가 북한측과 비공식 대화를 위한 채널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통고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박대통령이 긴장완화를 미룰 경우 김대중으로 정권이 교체돼도 미국에 불리할 이유가 없다’는 판세 해석이다. 덧붙여 한국정부를 배제한 채 미국이 직접적으로 북한과 비밀협상에 나설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 전문이 말하는 ‘좀더 강력한 수단’이란 무엇이었을까. 1971년 7월3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UN측 수석대표 로저스 소장은 제317차 회담에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방안’을 제기하면서 “판문점 회담을 남북간 정치회담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다. 8월6일에는 “한국의 집권당과 만날 수 있다”고 밝힌 김일성의 ‘8·6제의’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한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는가 하면,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가 완료된 1972년 4월에는 “1975년부터 미국의 대한(對韓) 무상원조가 종식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에 지시를 내려 북한 적십자사에 남북회담을 제의토록 했다. 이틀 후인 8월14일 북한 적십자측은 이를 수락하여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리게 된다. 이에 관한 미 국무부의 정보보고(Fm : EA-Wintrop G. Brown To : The Secretary (Information Memorandum), 1971.8.16, ‘New Developments in Korea May Lead to Contacts between North and South’)는 “이 모든 것은 한반도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같은 조짐에 고무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변화의 신호를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미국의 강경한 입장과 대화 압박은 박정희 대통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국무부 문서들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말 1·21 사태 등 북한 도발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입장인 반면 닉슨 행정부는 한국전쟁과 푸에블로호 사건 등 북한의 모험주의적 행동 때문에 당혹해했던 중국이 북한의 불필요한 행동을 제어할 것으로 보았다. 남북대화에 대해서도 미국의 긍정적 평가와 박정희의 인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박정희의 반발과 미국의 ‘쐐기’

    1971년 9월20일(현지 시간)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로 향하는 김용식 당시 외무장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셜 그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나러 가는 그의 가방 속에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대중국 관계개선과 주한미군 감축을 시도하고 있는 백악관과 펜타곤에 대한 분노가 절절이 녹아있는 편지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 대해 끊임없이 침투공작과 무력도발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정책은 ‘중공’의 지원을 공공연히 받아왔습니다…중공은 북한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의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키기 위해 군사원조 합의를 통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공의 목적이 한국과 여타 아시아에서의 미군철수에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됩니다…한반도에서 외국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붉은 중국’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만약 붉은 중국이 진정으로 긴장완화와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 공산집단의 무력 통일정책 지원과 북한을 강화하는 군사지원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북한이 한반도 긴장완화를 돕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Fm : EA-Marshall Green to : The Secretary, 1971.9.20, ‘Letter from President Park to President Nixon’)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중국정부를 한번도 정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지 않고 대신 ‘중공(Communist China)’ 혹은 ‘붉은 중국(Red China)’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수뇌부 사이의 인식 격차를 뚜렷이 드러낸 것이다. 적십자회담 성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북관, 대중관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이 서신은 중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박정희가 당시 상황을 긴장완화가 아닌 긴장고조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전쟁재발 방지와 한반도 안보에 필수요소인 한미상호방위체제는 강화되어야 하며, 한국군 현대화 프로그램도 신속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목적이 아시아와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인 만큼 중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해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셜 그린 차관보의 보고서에 따르면, 편지를 전달한 김용식 외무장관은 그에게 “북한이 한국의 적십자회담을 수락한 것은 한국을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린 차관보는 “중국은 결코 한반도 전쟁 발발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꾸함으로써 한국 수뇌부 인사들의 인식에 쐐기를 박고, 한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중국 관계개선과 이에 따른 남북협상 압박방침은 변화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

    ‘파도를 타는 수’

    이렇듯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확인한 한국은 그해 10월 키신저가 두 번째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고 미중 정상회담 계획이 공개되는 등 데탕트가 완성단계에 이르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과는 달리 중국과 북한은 긴밀하게 정책을 조율하고 있었다. 11월1일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함께 미중 관계 변화를 상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한국정부는 대세에 역행하기보다는 먼저 ‘파도를 타는’ 수를 택한다.

    1971년 11월19일 중앙정보부 간부이자 한국적십자 회담대표인 정홍진은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 회담대표에게 별도의 비밀접촉을 제의한다. 이튿날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접촉을 한 두 사람은 이후 1972년 3월22일까지 열한 차례 만나 이후락-김영주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워싱턴은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11월29일 닉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에는, “북측과 대화와 교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길 희망한다…방위력 분담을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은 한국경제의 성숙도와 국민적 자부심을 보여준 것으로 미국과 전세계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격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Fm. The White House to Amembassy Seoul, 1971.11.29, ‘Text of the Letter from Nixon to Park Chung Hee’). 이 편지에서 닉슨이 박정희와는 달리 중국을 공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일관되게 칭하고 있음은 재미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남북공동성명 내막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닉슨 대통령.

    그렇다면 이 무렵 박정희는 미국이 주도한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에 동의했던 것일까. 그는 정말로 남북대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로 마음을 바꾼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론이 우세하다. 1970년 말 박정희의 특별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북한 내부를 세밀히 관찰·분석한 결과 ‘북측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 남침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바 있다. 심지어 1972년 4월에 이르러서도 주한 미 대사관이 분석한 박대통령의 의중은 여전히 ‘북한 위협론’에 기울어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Secstate, 1972.4.16, ‘President Park’s View of North Korea Threat’).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가 남북협상을 준비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대북한 노림수와 대내용 노림수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한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은 “박정희가 정홍진에게 대북 비밀접촉을 제의하도록 한 것은 적극적인 남북대화 추진 그 자체보다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전하고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 Secstate, 1972.7.7, ‘Assistant Secretary Green’s Conversation with President Park Chung Hee, July 6, 1972’).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일방적인 평화공세를 역전시켜 통일문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내적인 노림수로는 세계적인 데탕트 무드를 국내 통치체제 재편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닉슨의 남북대화 촉구에 응답하는 대신 이를 거세지는 국내정치적 도전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1971년 겨울 박정희 정부가 취한 일련의 ‘내부단속조치’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1971년 12월6일 한국정부는 “중국의 UN 가입에 의한 국제정세의 급변에 수반하여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북한의 무력남침 준비 등을 주시한 결과 현재가 한국의 안전보장상 중대한 시점으로 판단되어 비상사태를 선언한다”는 대통령 담화를 발표했다. 향후 추진될 남북접촉 개시를 위한 준비조치라는 강조가 이어졌다. 한마디로 ‘북한과 대화하려면 우선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통한 내부단속으로 총력안보태세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무렵 박정희 정권이 처해 있던 국내 정치상황은 미묘했다.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신민당 윤보선 후보가 40.9%, 공화당 박정희가 51.4%를 득표했지만, 1971년 4월 대선에서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45.3%, 박정희 후보가 53.2%를 얻어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총선의 경우 1967년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50.6%를 득표해 129석의 의석을 차지했고, 신민당은 32.7% 득표에 45석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71년 5월 총선에서는 크게 달라졌다. 공화당이 48.8% 득표에 113석을 차지한 반면 신민당은 44.4% 득표에 89석을 차지하여 4년 전과 달리 개헌 저지선인 1/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특히 1971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통일문제를 제기하며 근소한 표 차이로 자신을 추격해왔다는 사실은 박정희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무작정 금기시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박정권 내부 세력관계도 정리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남북대화를 해선 안된다고 보는 정일권, 김종필 등 정권 내부의 초강경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에게 도전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제적 데탕트 무드에서 국내의 정치적 도전과 압력은 박정희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추진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정치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국가비상사태 선언 등 박정권이 취한 일련의 정치적 조치는 한반도 정세를 좀더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었다. 이 시기 미 국무부의 한 정보분석자료(The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DOS (Intelligence Note), 1972.1.18, ‘North Korea’s Peace Offensive’)는 “북한의 새로운 유연성(flexibility)에 대한 반응으로 최근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경직된 정책노선을 택했다”고 전하고 있다.

    비상사태 선언 이후 미 국무부와 한국정부는 공개적으로 불협화음을 빚게 되지만 대세가 어그러지지는 않았다. 정홍진과 김덕현을 채널로 한 실무 밀사의 상호방문이 3월28일과 4월19일로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4월26일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대통령 훈령’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하달했고, 이 부장은 5월2일부터 3박4일간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그 친동생 김영주를 면담하고 돌아온다. 5월29일에는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이 2박3일간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시기에 오고간 토의내용을 바탕으로 7월4일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초 남북협상에 부정적이었던 한국 정부와 달리 북한은 1970년대 초반 내내 공세적으로 남북협상을 주장해왔다. 북한의 이러한 ‘평화공세’는 한미관계를 갈라놓겠다는 전술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7·4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이 통일문제 해결에서 일체의 국제정치적 요인을 사상하고 순수한 국내문제로 단순화한 것도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71년부터 계속된 남북대화 분위기가 7·4공동성명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김일성의 ‘남조선 고립’ 계획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이 1972년 2월말 미중정상회담과 5월말 미소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중국, 소련으로 이루어지는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대화 지속이 기대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은 공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남과 북은 공동성명 직후부터 그 문구의 해석을 두고 대립한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7월4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박성철은 “(통일 3원칙은) 김일성 수령이 내놓은 제안에 남조선측이 찬동한 것”이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상 미제국주의자들은 더는 우리나라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침략 군대를 걷어 가지고 지체 없이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8월19일에는 ‘제정당·사회단체의 연합성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공동성명 이후) 한국에서는 비상사태를 해제하는 동시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대중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9월17일 김일성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미제가 남조선에서 나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한국의 체제 내 문제에 대한 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적대감 고조 즐기고 있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북한의 태도가 변화하자, 미중·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챙길 것은 모두 챙긴’ 미국 입장에서는 이제 북한을 곱게 봐줄 이유가 없었다. 이 무렵 미 국무부 실무분석가들은 당초 박정희가 주장했던 ‘북한위협론’을 수용해 대한(對韓) 정책 원상복귀 및 한미관계 정상화를 주장하게 된다. 국무부 정보분석국 폴 포플은 1972년 7월7일자 보고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한국의 대북 입지를 완전히 침식해 버릴 것이므로 주한미군의 규모에 어떤 변동도 있어선 안 된다…부분적 감축도 박정희 대통령의 협상력과 정치적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므로, 결국 미국정부와 의회 모두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을 추진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Fm : INR/REA-Paul M. Popple to : EA-Marshal Green (Memorandum), 1972.7.7, ‘The Impact of the Korean Talks’).

    이후 9월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제2차 본회의 등을 통해 북한측의 ‘오버’가 계속되자 한국에서는 반공 열기가 뜨거워졌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이미 바뀌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같은 분위기를 국내 정치에 최대한 활용했다.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마셜 그린이 로저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Fm : Marshal Green to : the Secretary (Information Memorandum), 1972.10.6, ‘A Status report on Contact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는 “한국정부는 북한 인사들의 선전적인 연설을 들은 남한의 언론과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적대반응에 상당히 놀라면서 동시에 무척 즐거워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북 비밀접촉을 시작한 지 두 주일 남짓 만인 1971년 12월6일 비상사태를 선언했듯, 7·4공동성명 발표 후 북측 인사들의 서울 방문 1개월여 만인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10월 유신을 통해 남북대화에 대한 국내구조의 역기능을 해소하고 국력 배양, 국력의 조직화, 국론통일, 개인생활의 혁신이라는 4대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인민혁명전략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었다. 이어 12월에는 북한에서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어 김일성의 지배체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과 관련해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의견 가운데 하나는 박정희와 김일성이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남북대화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견해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미 국무부 자료는 없지만, 한 정보보고는 그 단초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과 10월 유신, 국민투표 실시 등 일련의 계획을 북한측에 사전에 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단정적인 분석이다.

    “어떤 경우든 평양은 박정희의 국내정치 동향에 대해 신중하게 행동했다. 한국정부는 (아마도 미국에게 말하기 전에) 10월17일 계엄령 발동에 대해 (북한에) 통보하였으며 아마 박정희 자신의 장기집권과 권력강화 전반의 계획에 대해서도 사전에 알렸을 것이다.”(Intelligence Note, 1972.12.18, ‘ROK/ DPRK : South-North Talks, a Pause Follows Rapid Progress’)

    남북관계도 미국 뜻대로?

    1972년의 7·4공동성명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1969년 11월의 닉슨 독트린 발표와 이듬해 3월 발표된 주한미군 감축문제, 71년 7월 키신저의 방중으로 형성된 데탕트 분위기, 높아가던 한국 내의 반(反) 박정희 기류와 10월 유신이 모두 연결된 사슬의 가장 도드라진 고리였을 뿐이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과 긴장완화를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베트남전 문제를 명예롭게 해결하려 했던 미국은, 미중 관계개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대화를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박정희 정부에 북한과 대화하라는 직접적인 압력 혹은 회유를 행사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미국의 남북대화 압력에 대해 초기에는 불안해하며 저항했고, 1971년 10월까지 소극적으로 순응해갔다. 그러나 71년 말부터 장기집권과 권력강화의 동기가 부여되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북접촉과 대화를 추진했다. 박정희는 71년 12월 비상사태 선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빠르게 진전시켰으며, 가속된 대화는 이듬해 10월 유신체제의 출범을 가능케 했다.

    1970년대 초의 화해 국면이 남북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후 미국의 입장이 바뀌자 남북관계도 다시 긴장 국면으로 되돌아갔다는 결론은 미묘한 서글픔을 남긴다. 남과 북의 긴장 완화 또한 미국의 국제정세 판단이나 세계전략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은 2004년에도 여전히 진실이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강경 드라이브를 고집하는 한편 2차 6자회담이 계속 연기되는 지금,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가오는 미 대선에서 대북 유화책을 추진할 정권이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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