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배인순 외도가 이혼사유, 내 이름 상업적으로 이용 말라”

  • 글: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3-12-26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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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인순 자전소설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은 악의에 찬 거짓말
    • 책 내용 사실이고 확실한 증거 있다면 왜 그때 나를 ‘간통’으로 집어넣지 않았나
    • “조용히 물러나면 회사가 산다”는 신복영 전 서울은행장 말 철석같이 믿어
    • 동아 찾을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
    • 3차 리비아 대수로 공사, 중국 남수북조 공사 따낼 것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마음이 몹시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책은 읽어 보셨습니까.”“그 책 말이죠. 안 봤고,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했어요.”2003년 12월11일 서울 남산 끝자락에 위치한 최원석(61) 전 동아그룹 회장의 집 거실에서 간단히 인사를 마치자마자 숨돌릴 틈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한순간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나지막이 응대했다. 평소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던 부인 장은영(33)씨도 자리를 함께 했다. 필자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전에 책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셨나요.

    “전혀 몰랐죠.”

    -그렇다면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된 겁니까.

    “아뇨. 책이 나올 무렵 아내와 외국에 머물고 있었어요. 만날 사람도 있고 여행도 다녀올 겸해서. 그런데 하루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은혁(26·최원석씨와 배인순씨 사이의 첫째아들)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얘가 술에 취해 막 우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되물어도 좀체 대답을 않더니 ‘새어머니 좀 바꿔주세요’ 합디다. 둘이서 한참동안 얘기를 주고받는데 아들이 누굴 고소하겠다고 했는지 집사람이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 같더라고요. 전화를 바꿔달래서 은혁이와 통화하는데 ‘아버지 놀라지 마세요’라며 책 얘기를 꺼내더군요.”



    그와 이야기를 나눈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를 했지만 이렇게 어눌한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말주변이라고는 없었다. 묻고 또 물어도 늘 대답은 한 줄이다. 2~3시간이면 끝날 인터뷰가 장장 7시간이 걸렸다. 마치 실타래 풀리듯 매끄럽게 질문과 답변이 오간 것처럼 보이는 이 인터뷰는 사실 여러 차례 질문하고 답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장은영씨는 이틀 전, 서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책 출간 사실을 전해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만 며칠 만이라도 남편이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30여년 전 ‘커피 한잔’ ‘님아’ 등으로 가요계를 풍미했던 자매 듀엣 ‘펄 시스터즈’의 멤버였던 배인순(55)씨. 5년 전까지만 해도 최 회장의 부인이었던 그가 11월17일 자신의 히트곡 제목을 딴 자전소설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찬섬)을 출간했다. 책은 발간과 동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배씨는 책에서 전 남편인 최 회장(C로 등장)이 여러 명의 연예인(J, L, E, K 등)과 벌인 애정행각을 자세히 묘사했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책

    -책 내용은 들으셨지요.

    “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언급하고 싶지도 않아요. (배씨와) 사는 동안 그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 충분히 시달렸어요. 사실 일찍부터 결혼생활을 후회했어요. 그렇지만 나에게 소중한 아이들을 안겨줬다는 걸로 덮고 살았죠. 그런데 이혼하고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다는 게…”

    그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커피 한잔’과 나란히 놓인 보리차 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을 끄집어내기까지 적잖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악연인가 싶어요. 제가 선택했던 사람이니 누굴 원망하겠어요. 다만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이 안쓰럽죠. 그리고 저는 지금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남은 힘을 회사를 살리는 데 쏟고 싶을 뿐입니다. 나 한 사람만 생각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대응도 하고 싶지 않아요. (배씨가) 여기저기에 인터뷰를 하고, 방송출연을 하고…. 저러다 잠잠해지겠거니 했는데 급기야 영화까지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은혁이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몹시 힘들어합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지난 12월3일 책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셨죠?.

    “그것도 그 아이(은혁)의 뜻이었어요. 이 일로 귀국해서 엄마를 수 차례 찾아갔는데 ‘엄마가 없다고 생각해라, 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답니다. 은혁이는 ‘지능이 어린아이 수준인 막내 재혁(23)이를 앞세워 엄마가 인터뷰를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를 이용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해요. 엄마의 필요에 의해 재혁이를 이용하고 장충동에 보내곤 했으면서 거기(장충동)서 구박받고 살아 불쌍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더니 울분을 참지 못하더라고요.

    집사람이나 저나 진흙탕 속에 같이 발을 담그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큰아이를 말렸죠. 사실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 이름으로 됐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어요. 아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려고 변호사를 찾아갔대요. 책 내용을 검토한 변호사가 ‘제1순위 피해자인 아버지가 생존해 있어서 아들이 신청을 하기에는 이유가 약하다’고 해서 이렇게 된 것이죠. 은혁이가 접수를 하고 와서야 전후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책에는 연예인들과의 애정행각을 소상히 밝혔죠.

    “그런 사람(연예인)들이 어떻게 대낮에 저희 집에 올 수 있답니까. 집에는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고 그 집이 무슨 안가도 아닌데.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는 가정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니, 남편이 ‘다른 여자가 집에 오기로 했으니 당신은 쇼핑이나 하고 오라’고 하면 순순히 ‘그러마’고 걸어 나갈 아내가 몇이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누워서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일이죠.

    세상에 그런 일을 저지른 남편이 있다고 칩시다.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아내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집으로 다른 여자를 불러들였을까, 그 여자는 남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남편이 다른 여자를 집에 들여도 가만히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거,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요. 재벌 아니라 황제 부인이라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업적으로 나를 이용하고 있다”

    -책에서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데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거, 제 정신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책에 묘사된 ‘상황설정’ 그 자체가 일반인이 납득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어느 연예인이 우리집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했다는데, 인적이 드문 시골도 아니고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온 동네가 시끄러웠을 테고, 그러면 순식간에 세상에 다 알려지지 않았겠어요.”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게(책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시 그 사람이 난리를 치지 않았겠습니까. 간통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그렇게 많은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참고 살았답디까. 그땐 제가 돈이 많았어요. 간통으로 집어넣겠다고 하면 돈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었죠. 아이들 생각해서 참고 살았다는데, 아무리 자식 때문이라지만 책 속에 묘사된 일들이 참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일인가요.”

    조용조용 말하던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배씨가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 물어봤다. “상업적으로 나를 이용하기 위해 출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방송활동도 해야 하고 지난 여름 문을 열었다는 카페를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뭔가가 필요했겠죠”라고 덤덤히 설명했다.

    이혼 사유는 아내의 외도

    배인순씨는 소설 형식으로 책을 냈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누구나 자서전임을 알 수 있다. 굳이 ‘소설’ 형식을 빌린 이유는 무엇일까. 최 회장측에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책을 낸 ‘찬섬’ 출판사의 변론을 맡은 이희영 변호사(좋은합동법률사무소)는 “그 책은 픽션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려는 의도는 없는 만큼 개인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6년 10월 결혼 당시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기업인 최원석씨와 가수 배인순씨는 1998년 4월7일 협의이혼했다. 한 해 전 1997년 5월 배인순씨가 기업인 K씨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다 신호 위반으로 사고를 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 당시 두 사람의 이혼 배경을 놓고 온갖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혼 당시 말들이 많았는데요. 이혼소송을 먼저 제기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내의 외도 때문이었죠.”

    -아내가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부부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그렇다면 아내의 외도를 눈치 챈 것은 언제부턴가요.

    “심증을 굳힌 것은 92년인가, 93년부터였지만 한동안 상대가 누군지 몰랐죠. 교통사고 당시에 K씨가 동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 이 남자구나’ 하고 알게 됐으니까요. 나중에 93년 초부터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의 해외여행 행선지를 살펴보니 입이 딱 벌어집디다. 조종사와 스튜어디스 관계라도 그렇게 같은 비행기를 타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1992년부터 교통사고 직전인 1997년 초까지 배씨와 K씨의 해외여행 기간과 장소가 중복된 것은 14차례. 이 중 다섯 차례는 출국과 귀국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배씨는 “남편이 이혼을 위해 단순한 동승을 불륜관계로 몰아세운다”고 주장했는데요.

    “어∼휴.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제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더 잘 알 겁니다.”

    배씨가 교통사고를 낸 그해 10월23일 최 회장은 서울가정법원에 이혼소송을 냈다. 이에 앞서 8월29일 “배씨 명의의 서울 장충동 일대 땅 등 50억원대 부동산을 되돌려달라”며 부동산 소유권이전소송도 냈다. 소송대상 부동산 가격은 공시지가로 9억800만원 정도. 서민들에겐 적지 않은 돈이지만 당시 재계 10위권의 그룹 회장이 이 정도의 재산을 찾기 위해 부부간 불화를 스스로 ‘드러낸’ 것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배씨 명의로 된 재산의 소유권이전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이 아니라 그 사람 명의로 된 장충동 땅(300평)을 K씨 앞으로 넘겨버릴지도 몰라서 마련한 제동장치였죠. 그 땅은 교통사고가 나던 해 6월 제 명의로 이전키로 약속하고 93년 그 사람 명의로 가등기해둔 것이었어요. 그 땅은 20여년 넘게 살아온 장충동 집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요. 그 사람 명의로 돼 있는 땅과 당시 살고 있던 장충동 집터, 그리고 옆에 있는 땅을 매입한 후 동아건설에서 고급빌라를 지을 계획이었어요. 그 사람도 장충동 땅 구입 목적을 잘 알고 있었죠. 그뿐 아니라 제가 그 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K씨에게 넘겨버리면 빌라를 짓기로 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그것을 막으려고 소송을 제기했던 겁니다.”

    이에 맞서 배씨는 위자료 30억원과 재산분할 명목으로 320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듬해 두 사람은 각종 송사를 모두 취하하기로 합의하고 완전히 남남이 됐다. 당시 합의한 위자료는 50억원으로 알려졌다. 배씨는 최근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 남편이 지급하기로 한 위자료 50억원 중 25억원은 현금으로 받았지만 나머지 25억원은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책에도 그렇게 썼다.

    -배씨는 위자료 25억원을 아직도 못 받았다고 했는데요.

    “위자료라뇨? 아닙니다. 이혼에 이르는 직접적인 계기가 오랫동안 이어진 그 사람의 부적절한 행실 때문이었는데.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증거와 자료들을 살펴본 사람들은 오히려 저더러 ‘위자료를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었겠구나’ 할 겁니다.”

    -위자료 50억원에 이혼합의가 이뤄진 것 아닌가요?

    “이혼하면서 그 사람 명의로 된 부동산과 재산을 그대로 넘겨줬어요. 그게 한 50억은 됩니다. 그 동안 살아온 정과 아이들 엄마라는 점을 배려해서 준 것이지 이혼에 대한 위자료는 결코 아니었어요.”

    -배씨는 25억원을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못 받았다는 것인데….

    “현금으로 건넸다는 그 25억원이라는 게 말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그 사람 명의로 된 장충동 땅에 동아건설이 빌라를 짓기 위해 시세대로 사면서 지급한 대금입니다.”

    -배씨가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위자료 25억원은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겁니까.

    “구두로 위자료 지급을 약속했다는 건데, 이혼소송이 몇 달 동안 진행됐고, 이번 책도 15년 동안 쓴 일기를 바탕으로 썼다는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 ‘구두’로 약속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겠습니까. 공증을 하든 각서를 받든 했겠지요. 사실 이혼에서 가장 중요한 게 돈(위자료)인데 내 말만 믿고 도장 찍을 사안이 아니지요. 마땅히 받아야 할 돈(위자료)을 못 받은 게 사실이라면 이혼 이후에라도 그 돈을 찾기 위해 고소를 하든지 법에 호소를 하든지 어떻게든 그 돈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겠죠.”

    “제가 그렇게 못된 인간인가요?”

    -이혼 소송을 제기하자 배씨는 어떤 입장을 취했습니까.

    “변호사에게 그 사람의 부정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주고 소송을 일임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 때문에 이혼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어요. 가타부타할 입장이 아니었죠. K씨와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책에서도 이혼하기 직전인지 직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K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시인했다면서요.”

    -배씨는 오히려 남편의 외도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놓았는데요.

    “살면서 외도를 한 적도 있긴 있었죠.”

    -유난히 연예인과 친한 ‘재벌’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업무상 한국을 방문하는 중동 손님이 많았어요. 회사 소유의 공관이 따로 없어서 장충동 집에서 주로 파티를 열었는데 그 파티에 연예인을 초청했습니다. 연예인들이 Y담을 곧잘 해서 저와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렇게들 과장되게 받아들이고…. 그래서 뒷말이 무성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연예인과 친하다고 해서, 업무상 파티에 초대한 연예인과 무슨 특별한 관계인 양 알려진 게 억울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그렇게 못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까. 그런 줄 몰랐어요. 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허허. 이런 얘기 처음 해봅니다.”

    그는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까지 저를 팔고 언론에 얼굴을 내비치면서 재기를 하려는 것이 딱할 뿐”이라면서 “더 이상 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했다. 선대가 물려준 ‘동아’의 회생을 위해 힘을 쏟아 붓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재계 서열 10위의 동아그룹 총수였던 그는 1998년 5월15일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의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IMF금융위기에 따른 국제신인도 하락으로 해외공사 수주난과 아파트 분양 중도금 입금실적 부진 등이 겹쳐 동아그룹의 자금사정이 급격히 악화됐다. 금융권의 협조융자로 버텨오다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채권은행들이 추가 협조융자를 조건으로 최 회장의 경영권 포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퇴임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원래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 건데…. 동아가 그렇게 된 것은 우선 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람을 너무 믿었고…. 그리고 겁이 많았습니다.”

    -누굴 믿었다는 겁니까.

    “은행을 믿었던 거죠. 당시 채권은행단 대표인 서울은행(지금은 하나은행과 합병) 신복영 행장의 말을 너무 믿었어요. (물러나면) 제가 맡을 때보다 동아가 10배는 더 잘될 줄 알았어요. 지금처럼 망가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죠. 은행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1997년 말 IMF사태 때 기업에 여유자금을 만들어놓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 채 무리한 투자를 하고 땅을 사고. 유동성 자금 위기를 가져온 책임은 분명히 저에게 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당시 동아는 부채보다 자산이 훨씬 많은 회사였어요. 유동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과정에서 ‘은행권의 요구대로’ 제 개인 재산과 보유하고 있던 전 계열사 주식까지 모두 담보로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협조융자라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기에 동아의 숙원사업이었던 김포매립지 개발 프로젝트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김포매립지는 원래 농업용지로 개발됐지만 자꾸 땅에서 염분이 올라오고 주변이 모두 개발되면서 농수공급이 불가능해져 용도전환이 꾸준히 논의되는 중이었어요. 9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이 선거공약으로 이 땅을 상업용도로 변경하겠다고 했던 터라 저는 이 사업을 더욱 밀어붙였고 마침내 ‘Price Water House’와 40억달러 개발 계약까지 맺었거든요. 그런데 분위기가 영 심상찮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하루는 신복영 행장이 저를 불러서 ‘최 회장이 있으면 더 지원해줄 수도 없고 매립지건(件)도 특혜 시비가 붙는다. 우리가 맡아서 잘할 테니 최 회장은 전면에서 물러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재산과 주식까지 다 내놨는데 먹고 살아야 하니 계열사 중에서 상장이 안된 국제운송과 협진 2개는 주겠다. 그러니 조용히 물러나라’고 해서 그 말만 믿고 물러난 겁니다.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2개 회사를 주기로 한 것에 대해 동석했던 증인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사안은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퇴임 당시 얘기가 나오니까 흥분이 돼서 담배를 좀 피워야겠다”며 불을 붙였다. 쉽게 그만두고 나온 것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는 듯했다.

    고위층에 밉보인 게 잘못

    -퇴임 당시 회사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제가 물러날 때 빚이 4조원, 자산이 4조5000억원 정도로 자산이 훨씬 많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워크아웃 결과 오늘날 동아건설은 자산이 거의 없고 빚만 4조 남았어요. 2001년 아시아 개발은행(ADB)이 ‘아시아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보고서를 내면서 한국의 워크아웃은 명백한 실패작이라 평하고 대표적인 사례로 ‘동아’를 꼽았어요. 저 하나 때문에 회사가 날아갈까봐 그것만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간단히 포기한 것 같습니다.”

    -회사를 위해 물러났다는 얘기입니까.

    “예. 회사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서 물러났는데 결국 지금은 제가 속은 기분입니다.”

    -속았다고요?

    “그래요. 사기당한 기분입니다. 저는 자본 잠식 상태의 회사를 나 몰라라 하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실적이 우량한 계열사가 여럿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단지 그날 당장 돌아갈 돈이 없어서 놓고 나온 거예요. 언론은 공적자금을 쓴 옛 사주들이 여전히 잘살고 있다면서 저도 그 부류에 포함시키는데, 제가 경영할 때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적도 없고 쓴 적도 없어요. 남들처럼 공적자금 지원도 받아보고 구조조정을 하면서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나가라고 했다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 때면 정말 가슴이 찢어집니다.

    시키는 대로 다 포기하고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후에 벌어진 동아의 문제까지도 제게 책임을 지웁디다. 1998년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된 이후 채권단이 신규지원을 거부해 동아건설은 2000년에 부도가 발생했고, 같은해 11월4일 법정관리가 신청됐잖아요. 그런데 워크아웃 기간동안 전문경영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잘못까지도 모두 제게 화살이 날아와요. 두 번 죽는 것 같아 참 속상하죠. 아버지가 세운 회사를 사막의 모래바람 맞아가며 반평생 동안 일궜는데 하루하루 무너져 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러날 때 일부에서 외압설이 제기됐지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벌 길들이기’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본보기로 제가 걸렸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아 다녔잖습니까. 한번은 제 누이에게 ‘최고위층에서 (최 회장을) 안 좋게 보고 있으니 처신을 잘하라’는 말을 해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DJ 정부가 들어서자마자였어요.”

    -최고위층에게 밉보인 게 있습니까.

    “글쎄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무렵 가정문제로 시끄러웠죠. 그때문인지 집권당인 민주당이 대선 공약으로 약속한 김포매립지 개발 건도 정부측과 참 많이 부딪쳤습니다. 당시 DJ는 ‘달러를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했어요. 그때 외국회사와 40억달러라는 거액의 개발 계약을 맺어 훈장이라도 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농림부장관이 노발대발하며 ‘국기 문란’이라고 비난을 하고, 언론도 비우호적이고, 최고위층에선 밉게 보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려오고, 그러다 얼마 후 주거래 은행장이 사퇴를 종용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기업사에 그런 일이 없었어요. 단순히 은행장 혼자의 생각으로 그룹 전체를 내놓고 나가란 소리는 못합니다. 아니, 할 수가 없는 일 아닙니까. 윗선에서 뭔가 결정하지 않았겠습니까.”

    -워크아웃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전문경영인 고병우씨를 잘못 쓴 것 같아요. 2년여 동안에 회사가 거덜났습니다. 김포매립지 개발은 추진도 안하고 시가도 아닌 공시지가의 60% 가격에 정부에 팔아버렸어요. 뒤에 현대의 서산간척지는 공시지가가 아닌 시가로, 그것도 ‘선 매입, 후 분할판매’로 정부가 사 준 것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김포매립지는 정부가 사들인 지 1년도 안 돼서 98년에 동아가 제안했던 방식 그대로 개발계획이 발표되더라고요. 고씨는 공사 수주는 단 한 건도 못하고 자산 매각만으로 구조조정을 했는데 김포매립지뿐 아니라 다른 자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상식 이하의 일들이 벌어졌어요.”

    “2년 만에 회사 거덜났다”

    -자산매각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많은 자산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디로 얼마에 흡수·매각됐는지 불투명해요. 경기도 파주에 있는 골프장 ‘서원밸리’는 제가 1000억원을 들여서 만든 겁니다. 그런데 180억엔가 팔았다고 합디다. 호주 골드코스트에 그렉 노먼이 설계한 ‘글레이즈’라는 골프리조트가 있어요. 그 옆에 주택지까지 붙어 있어 1000억원은 거뜬히 나갑니다. 요즘 골프잡지나 여행잡지에 호주 최고의 리조트라고 극찬을 받는 곳인데 190억원 받았답니다. 누가 어떤 과정으로 사갔는지도 알 수 없어요. 지금은 세종증권으로 이름이 바뀐 동아증권은 21억원에, 인천 부평의 시티백화점은 반값도 안되는 400억원 정도 받았다고 알려졌어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이렇게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정말.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시작할 때 830억원 출자전환과 1400억원 추가융자를 해 주고는 무려 1조4000억원을 회수해 갔다고 해요. 그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문 열고 장사하는 것보다 문 닫는 게 더 이익이라면서 파산선고가 내려졌고요. 헐값에 자산을 팔고 은행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해주면서 이자와 원금을 무섭게 회수하면 대한민국 1,2위 기업이라도 무너지고 맙니다.”

    동아 살려낼 복안 있다

    2000년 여름 고병우씨가 회장에서 물러난 후 채권단이 동아건설을 이끌어갈 전문 CEO를 공개 모집하자 그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한다.

    “제가 오죽하면 원서를 냈겠습니까. 그때 회사를 살렸어도 파산까지는 안 갑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채권단이 ‘최원석은 절대 안 된다’면서 언론과 인터뷰까지 합디다. 저, 월급 같은 거 안 받아도 좋으니 리비아만 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평생 공들인 일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하더니, 또 한 명의 전직 장관을 회장 자리에 앉히고는 불과 3개월 후에 워크아웃 지원 중단을 발표했어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고병우씨가 있는 동안 대충 기업 분해작업을 끝냈고 더 이상 살려둘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거죠.”

    2002년 4월 그는 소액주주의 추대로 동아건설의 대표이사 회장에 복귀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회사는 이미 파산절차를 밟고 있었고 파산 관재인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진 상황이라 그는 동아건설의 회생을 바라는 주주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경영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9월26일 최 회장을 비롯한 2명의 이사와 주주가 “동아의 파산절차를 중지하고 강제화의(파산절차가 진행중인 회사를 채권단 등이 화의를 통해 다시 살리는 것)를 인가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냈다.

    -강제화의 신청이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은 생을 다 바쳐서 회사를 살릴 겁니다. 회사 실적이 좋던 당시에는 좀 오만했던 것 같아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일하면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동아를 다시 한번 살려보고 싶어요. 정말, 이렇게 무너지고 만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회사를 정상화시킬 복안이 있습니까.

    “먼저 리비아, 지금 가장 시급한 게 리비아 문제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발주처와 협상이 불가능하거든요. 우선 대등한 위치를 회복해야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있습니다. 회사의 파산절차가 중지되고 저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진다면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는 여지는 크다고 봅니다. 현재로서는 리비아와의 채널 복원이 가장 큰 문제예요. 이를 위해서라도 동아건설이 정상화돼야 합니다. 총 5차까지 진행되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세계적으로 처음 시도되는 것이다 보니 경험도 없었고 1, 2차 공사 때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3차부터는 그 동안 축적된 경험으로 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국회에서 울 뻔 했다

    -또 다른 방안도 있습니까.

    “중국 남수북조 공사를 통해 정상화를 앞당길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중국북부 지역은 만성 가뭄에 시달리고, 양쯔강 지역은 매년 범람을 겪고 있잖아요. 중국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양쯔강 물줄기를 인공수로를 통해 북쪽으로 돌리는 일명 ‘남수북조’라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리비아 대수로와 거의 비슷한 공사인데 다만 사하라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중국 수리부에서 수 차례 서울 본사(동아건설)와 리비아 현장을 방문했고, 제가 퇴임한 후에도 저를 중국으로 초청해 사업 전반에 관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년 초 입찰이 있을 예정인데 동아건설이 정상화되어야만 입찰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약 160억달러 규모인 이 입찰에 참여만 한다면 세계 어느 기업보다도 우선 순위를 선점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수단 정부의 초청으로 현지를 방문해 관개수리부, 전력자원부, 산업부 장관들을 만났어요. 수단은 1990년대 중반부터 석유 수출을 본격화하면서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마치 70년대의 중동 같아요.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모든 면에서 낙후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력과 물 공급 상황이 굉장히 안 좋더라고요. 수단은 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정·재계 인사들은 리비아에서의 동아건설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정부관료와 기술고문들 중에는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에서 동아의 현지 소장으로 일한 분들도 많이 있습디다.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했거든요.”

    -공사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수력발전과 관개수리용 댐을 3곳에 건설하는 것인데 총 공사 규모가 22억5000만달러에 달합니다. 회사가 조속히 정상화된다는 조건하에 6개월 이내에 정식 계약을 맺기로 관계부처 장관들과 양해각서를 체결한 겁니다.”

    회사의 회생방안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한층 표정이 밝아진 그의 얼굴에서 그 동안 묻어두었던 기업가 기질이 발동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공사에서 절반의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파산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국가경제에 큰 부담을 덜고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그의 말에서 어떤 신념이 느껴졌다.

    10월1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는 최 회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동아건설의 공적자금 유입 여부와 퇴임을 둘러싼 외압설 및 파산선고에 이르게 된 책임 소재, 향후 동아건설의 진로 등에 대한 질의와 답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0일 건설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김광원 의원이 동아건설의 강제화의 신청과 관련해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에게 “국가가 (동아건설을) 파산시켜서 덕볼 게 아무것도 없다. 건교부 장관이 강제화의 신청을 받아들여서 동아가 다시 대한민국 건설업계에서(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기를 당부한다”면서 정부차원에서 하루 빨리 해결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2년여 동안의 워크아웃 끝에 2000년 11월 최종부도처리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듬해 5월 법원의 파산선고가 내려진 동아건설을 되살리기 위한 국회 차원의 논의가 시작됐다.

    -국회에 증인으로 참석하고 난 심정은.

    “눈물이 날 뻔했어요. 나와는 안면도 없는 의원들이 국가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며, 그리고 쓰러져가는 동아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동아건설 회생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어요.”

    아내는 생명의 은인

    마주앉은 지 벌써 5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오후 햇살이 거실에 드리우자 그는 문득 “다방커피, 어때요? 마시지 않을래요” 했다. 그는 “이른 아침에 마시는 원두커피도 좋지만 가끔은 다방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며 화제를 돌렸다. 60세의 최원석, 33세의 장은영 부부. 두 사람은 27년이라는 물리적 세월을 뛰어넘어 1999년 7월31일 조용히 ‘혼인신고’만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갖은 억측과 구구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혼 이후 최씨 부부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처음이다.

    -책이 출간된 후 부인의 마음 고생도 심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죄인이죠. 살면서 누구에게도 못할 짓 한 게 없는데 죄를 지었다면 아내한테 가장 큰 죄를 진 겁니다.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옆에 있던 장은영씨가 “여보” 하고 조용히 부르며 최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듯. 장씨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의 남편을 선택할 것”이라며 “이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것은 ‘감’도 잡히지 않는 일”이라고 수줍게 고백한다.

    “저라고 죽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이 여자에게 미안한 걸 다 갚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내이기 이전에 생명의 은인이에요. 아마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쑥스럽지만 ‘아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편안하고 포근한 것인지 평생 처음 느끼면서 살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생전에 ‘여자가 똑똑하면 남자를 살린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이도 어린데 참 의젓한 사람입니다.”

    -참 결혼식은 올렸습니까.

    “허허. (혼인)신고만 했어요. 앞으로 해야겠죠. 결혼식을 하잔 말은 몇 번 건넸지만 제 처지가 이래서…. 아내는 하고도 싶겠죠. 지난 6월 은혁이 결혼준비를 할 때는 많이 미안했어요.”

    -함께 살면서 종종 싸우기도 하는지요.

    “왜 없어요. 있지. 아무리 서로 좋아서 죽고 못사는 부부라도 살다보면 ‘이 사람과 결혼을 안 했다면’ 하고 후회할 때가 있죠. 우리도 보통 부부처럼 싸우고 살아요. 싸우고 나면 저는 그냥 자요. 제가 잠든 모습을 보면 아내의 마음이 약해진다고 합디다. 자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방 풀어진다고 해요.”

    -전략적으로 잠을 청하는 거네요.

    “하하. 그건 아닙니다.”

    -아내가 살림은 잘하나요.

    그가 “잘해요”라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장씨가 “잘하긴요. 반찬도 제대로 못하는데”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가 “살림을 잘한다는 게 김치를 잘 담그고 청소를 잘하고 그런 게 아니라 남편을 사랑하고 편안하게 ‘요리’ 잘하는 여자가 진짜 살림을 잘하는 여자”라며 “아내는 내 마음을 잘 요리한다”고 했다.

    -남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요.

    “그냥 남자로 좋아요. 남자로서뿐만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좋아요. 남편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우리 어머니를 빼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마음밭이 예쁜 사람이에요. 남편은 저한테 미안하다고 그러는데,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고맙게 느껴져요. 착한 남자랑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가끔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이 아니라 엄마가 아들한테 느껴야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참 애틋하다고 할까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최 전 회장은 아내 장은영씨에 대해 “나이도 어린데 참 의젓한 사람”이라며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결혼 당시 온갖 소문이 난무했죠. 가장 대표적인 게 처가에 캐나다 골프장을 건네줬다는 건데요.

    “그거 누가 찾아서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최 회장이) 캐나다에 골프장을 갖고 있었나요.

    “없어요. 찾는 사람이 가져가도 좋다니까요. 골프장을 찾아서 나와 관련이 있다면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내 목을 내놓을 게요.”

    -현금 100억원을 내놓았다는 소문도 떠돌았는데요.

    “골프장 얘긴 들어봤어도 100억원은 처음 들어보네요. 그 돈도 누가 찾아서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장인, 장모는 훌륭한 분들인데 그런 소문에 시달리게 한 게 미안할 따름이죠.”

    5년여의 결혼생활 동안 장은영씨의 마음을 짓누르는 아픔은 정상적인 가정에 자신이 ‘끼어 들어’ 가정파탄을 낸 것으로 세인에게 비쳐진다는 점이다. “아내에겐 온통 미안한 일들뿐이죠. 아내나 저나 양심에 손을 얹고 고백하건대 제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면 우리 둘 사이에 연애감정이 생기지도 않았고 연인으로 발전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배경과 조건을 보고 선택한 사랑이라는 소문도 무성하잖아요.

    “저희 어머니께서 며느리보고 ‘다 먹은 김칫독에 들어와 사서 고생한다’며 늘 불쌍하게 생각하세요. 이 사람은 제가 승승장구할 때 무임승차한 게 아닌데(…). 언젠가 아내가 ‘여자가 결혼할 때 남자가 능력이 있고 배경 좋은 것을 고려한다고 해서 나쁜 여자라고는 볼 수 없다’면서 ‘그러나 결혼을 위해 순위를 매긴다면 그런 조건들은 가장 하위에 속할 것’이라 얘기 합디다. 동아에서 나온 후 비서 한 명을 데리고 미국에 암치료 받으러 갔을 때 집사람이 병원 수속을 도와주면서 굉장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건강도 안 좋지, 회사도 그렇게 됐지….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을 때 아닙니까. 그런 저를 사랑해서 선택한 겁니다. 이 사람에게는 늘 고맙고 미안하고 그러죠. 당시 저는 회사를 살리겠다고 모든 것을 내놓고 나왔는데 사람들은 마치 젊은 여자한테 재산 다 빼돌려놓고 오아시스로 떠나려는 것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아내나 저나 참기 어려울 만큼 많이 괴로웠죠.”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거네요.

    “아내가 그래요. ‘그런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지옥에 가도 좋다’고요. 그러면서 ‘더 이상은 표현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렇게까지 자신의 인생을 (돈에) 파는 여자가 있을까요. 그건 아니죠.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번 일에도 아내가 큰 힘이 됐어요. 저를 매장시키자고 작정하고 쓴 책인데 아내가 절 위로하면서 ‘악의에 찬 그 책 때문에 흔들리는 사랑은 결코 아니다’고 해요. 그 책 내용대로라면 제가 엄청난 패륜아라는 얘긴데, 만약 그런 기미가 보였다면 어떻게 저와 살겠어요. 아내는 ‘남들이 말하는 남편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남편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곤 해요.”

    - (장은영씨가) 다시 방송을 하고 싶어하진 않나요.

    “방송은 아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예요. 오래동안 하고 싶어했죠. 나이가 들어서도. 과거의 인기나 그런 게 그리워서가 아니라 아내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열린 음악회에 많을 때는 수만 명씩 모여드는데 그 사람들이 돌아간 텅 빈 객석에 악보가 휘날리는 것을 바라볼 때의 그 느낌, 그런 느낌이 그립다’는 말을 하더군요.”

    -아내가 방송에 복귀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적극 후원을 해야죠.”

    -(장은영씨가) 방송 복귀계획을 갖고 있는지요.

    “지금은 생각이 없다고 해요. 얼마 전부터 아내가 학교 일(동아방송대학 재단이사)을 보고 있거든요. 새로 시작한 일이고 방송과 무관한 분야가 아니니까 그쪽에서 성취감을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막의 모래바람을 그리며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세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아내와 24시간 붙어 지내요. 아침에 일어나 신문 보고 사람들 만날 일 있으면 나가고. 가끔 집 앞 남산에 올라가요. 주일엔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고요. 독실한 크리스천인 집사람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신앙이 뭔지 잘 모르지만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건 알겠어요. 젊었을 땐 뭐가 감사한 건지, 뭐가 좋은 건지도 모르고 살았거든요. 참 교만했죠. 지금처럼 어려운 때 마음속으로나마 기도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고 살아요.”

    인터뷰를 하면서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이렇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는 그는, “그처럼 막된 사람이라면 이런 자리에 얼굴 들고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녹색신화’로 불리는 ‘리비아 프로젝트’를 척척 이끌어 나갔던 최원석 전 회장. 그는 “동아건설을 꼭 되살려서 국가경제에 원동력이 되고 싶다. 그게 마지막 소원이자 남은 힘을 다해 이룰 꿈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눈빛에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가르고 뛰어다니던 시절의 ‘젊은’ 혈기가 엿보였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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