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불꽃 튀는 美 정계 保革 대결

진보세력 싱크탱크 결성… ‘꼴보수’ 헤리티지재단과 ‘맞짱’

  • 글: 이흥환 미국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3-12-26 1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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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 튀는 美 정계 保革 대결

    진보 성향의 미국 민주당 내에서도 ‘급진’으로 알려진 하워드 딘(왼쪽) 대통령후보가 최근 민주당 대선후보 중 선두로 올라섰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오른쪽)은 공화당 내에서도 ‘극우’로 통한다.

    최근 미국 워싱턴에 새로운 싱크탱크가 탄생했다. 이름은 미 진보센터(CAP,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8년 10월부터 2001년 1월까지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던 존 포데스타(John D. Podesta)가 이 싱크탱크의 수장이다.

    우선 이 센터는 인권, 환경, 군사, 여성, 의료, 안보 같은 특정한 주제를 전면에 세우지 않는다. 그저 진보라는 이념적 성향만 내세울 뿐이다. 웹 사이트(www.americanprogress.org)에도 눈에 띄는 구체적 ‘미션’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들이 하겠다는 일은 대체로 네 가지이다. 미국의 진보적인 장기 비전 개발, 새로운 진보 사상 및 정책 제안 확산, 보수적 의제에 대한 효과적이고 신속한 대처, 대중을 상대로 한 진보적 메시지 전달 등이 그것이다. 얼른 보아서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종잡기가 쉽지 않다.

    포데스타가 만든 이 미 진보센터는 창립 이전부터 워싱턴 정가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워싱턴 시내 한복판 NW 15번가에 임시 사무실을 연 이후 워싱턴의 정계를 비롯한 언론계 학계 재계 인사들은 과연 이 센터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우선 턱없이 광범위하게만 보이고 애매모호한 것만 같은 센터의 4가지 임무는 곰곰이 뜯어보면 다른 싱크탱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첫째 이 싱크탱크는 ‘진보’라는 사상적 간판을 분명히 내세웠다. 둘째는 센터가 장기 전략의 산물임을 감추지 않았으며, 셋째 센터가 보수진영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점을 명시했고, 넷째 대중에게 진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구체적 전술도 드러냈다. 한마디로 진보진영이 미 보수진영을 상대로 전면 대결을 선언한 출사표인 셈이다.

    워싱턴 최초의 진보적 싱크탱크



    2003년 10월23일자 ‘워싱턴포스트’는 미 진보센터 탄생에 대한 기사를 싣고 ‘진보 인사들, 그들의 싱크탱크를 갖다(Liberals Get a Think Tank of Their Own)’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기사의 제목대로라면 미국의 진보진영은 지금까지 그럴듯한 싱크탱크 하나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는 사실이다. 포데스타의 미 진보센터가 화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진보센터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포데스타의 야망은 보수의 물결에 맞서서 진보적 의제(agenda)를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고, 진보의 대변인이 될 새로운 세대를 찾아내 교육시키고 장려하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미 정치 스펙트럼의 오른쪽에 있는 헤리티지재단에 맞서 정치 스펙트럼의 왼쪽에 존재하는 새로운 싱크탱크로 자리잡겠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은 미 보수 우파의 사상적 거점이자 본산이다. 진보센터는 이런 헤리티지재단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싱크탱크는 말 그대로 두뇌 집단이지 이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아니다. 그러니 재원 없이는 출발 자체가 불가능하고, 출발을 했더라도 마르지 않는 재원의 샘물 없이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다. 아무리 훌륭한 두뇌가 많이 모여 있고, 목표가 그럴듯해도 돈줄이 마르는 즉시 생명을 다한다. 헤리티지재단의 이름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재원이 튼튼하다는 얘기다. 재원이 튼튼한 만큼 헤리티지재단은 우파 사상 전파의 거점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을 비롯해 케이토연구소(Cato Institute), 미 기업협회(AEI) 등 보수 싱크탱크들이 1990년대 10년 동안 보수 이념을 개발 확산시키는 데 쓴 돈은 무려 10억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헤리티지재단의 경우 180명의 직원에 인턴만도 60명이나 된다. 1년 예산이 3000만달러에 이르는 거대 공룡 헤리티지재단 연구원들은 라디오와 케이블 TV 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들이다. 출범 당시 우파 사상을 부화시키기 위한 제한적 역할에서 벗어나 이제는 보수 이념의 도매상이자 프로모터이며 보수진영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헤리티지는 보수 두뇌 네트워크의 중심축 역할을 유감없이 해내고 있다.

    미 진보센터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사람들은 골수 민주당원들이다. 금융가 조지 소로스, 허버트 샌들러 같은 억만장자들도 지갑을 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 출발했던 30여년 전의 헤리티지보다는 넉넉하게 시작한 셈이다.

    공화당 뒷북만 쳐온 민주당

    미 진보센터는 보수 우파를 상대로 전면적인 이념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념은 개인의 소신에 불과할 뿐이다. 이념의 생명력은 어느 정도의 지지세력을 얻느냐에 달려 있다. 효과적인 확산과 전파가 이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대중에게 이르는 소통 과정이 제대로 작동해야 이념은 뿌리내릴 수 있다.

    포데스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내부에 강력한 소통(communication)의 힘을 발휘하는 공화당 싱크탱크의 위력을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파는 단순히 정치 철학을 개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철학을 잘 팔았다. 이것이야말로 소통의 힘이다.”

    불꽃 튀는 美 정계 保革 대결

    ‘미 진보센터’의 인터넷 홈페이지.

    민주당이 목말라했던 것이 바로 이 이념의 소통이다. 민주당은 진보적 이념의 싹을 틔우는 재간은 있지만 발육시켜 시장에 내다 파는 재주가 부족했다. 사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우위를 지켜왔던 교육, 의료, 환경 현안에서도 민주당은 공화당에 주도권을 빼앗긴 채 뒷북만 치고 있는 형편이다. 현안을 이슈화하는 데에는 강하지만 메시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선거 때마다 나오고 있지만 별다른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결국 공화당의 부시 후보에게 정권을 빼앗기면서 진보 이념의 전파력 부재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지난 대선에서의 패배는 미 진보센터의 가장 직접적인 탄생 배경이다.

    마라톤 선수였던 올해 54세의 포데스타에게 지휘권이 맡겨진 것은 그가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정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적이 거의 없이 신망 있고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포데스타는 백악관 비서실장 시절부터 민주당 내에서 가장 날카롭고 추진력을 갖춘 작전통으로 통했던 인물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미 진보센터는 이념의 ‘판매 전략’ 분야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특히 미디어 전략에 초점을 맞춘다. 정책 설정 못지 않게 정책 홍보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새 싱크탱크의 초기 인력구조에서도 드러난다. 학자나 전직 고위 관리 등 연구원보다는 홍보 담당 스태프의 수가 훨씬 더 많고 진용도 튼튼하게 갖추어졌다.

    진보센터는 CNN의 간판급 토론 프로그램인 ‘십자포화(Crossfire)’의 선임 프로듀서 데비 버거를 영입했다. 미디어 전쟁터에 내보낼 ‘토론의 전사’를 훈련시키면서 동시에 텔레비전과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 ‘부킹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경험자가 필요해서다.

    그러나 자칫 미 진보센터가 TV 부킹 에이전시 노릇만 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센터 출범에 잔뜩 기대를 갖고 있는 인사들은 진보센터가 헤리티지나 미 기업협회가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디어 공장이 되기를 원한다.

    ‘TV 토론의 달인’ 양성

    텔레비전이든 라디오든 미국 방송매체는 전통적으로 보수진영의 텃밭이다. 라디오 토크쇼의 경우 보수진영은 전국적으로 무려 1500명에 달하는 보수 논객들을 가동시키고 있다. 진보적인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물에 콩 나는 정도다. 이러니 미디어 게임에서는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맥을 못 출 수밖에 없다. 특히 토론 프로그램 비중이 큰 케이블 TV에서 진보진영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토론의 달인(talking heads)’을 확보하는 것이 미 진보센터의 급선무다.

    센터는 인터넷 기고가(blogger) 데이비드 시로타도 채용했다. 매일 새벽 인터넷을 뒤져 그날그날의 핵심 현안을 가려 뽑은 뒤 그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담아내는 것이 시로타의 임무다. 진보센터는 진보적 의제의 설정과 확산이라는 장기 전략을 세웠지만 매일매일의 ‘1일 전투’에도 큰관심을 쏟고 있다. 1일 전투 역시 보수진영이 늘 우세를 점하는 분야이다. 센터가 ‘신속한 대처’를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작동된다 해도 효과적인 판매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이념 전파에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이런 사실은 포데스타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헤리티지의 활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헤리티지는 워싱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구재단도 아니다. 규모 면에선 브루킹스연구소를 따라갈 곳이 없다. 그러나 헤리티지는 생산물을 들고 나가 시장을 점유해 버리는 판매력이 월등하다. 포데스타는 헤리티지를 이렇게 분석한다.

    “헤리티지는 1970년대 처음 설립됐을 때 급진적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 아이디어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다. 헤리티지의 아이디어는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주류가 되었다. 개발해낸 아이디어를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미 보수진영의 급진적인 이념 성향은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정점을 이루고 있다. 이 급진성은 외교의 일방주의로 나타난다. 공화당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도 우파나 온건한 보수주의자들이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강경 보수파의 급진성이 보수파 내부 갈등의 주 원인으로,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과의 대화 단절, 국제사법재판, 교토조약, 러시아와의 요격탄도미사일 조약(ABM Treaty) 파기 등 굵직굵직한 외교 현안에서 부시 행정부의 급진 보수성은 국제질서 재편을 가속화시켰고, 이라크전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워싱턴은 현 국제질서의 바탕이 된 다자주의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2002년 9월에 발표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은 군사력 우위에 바탕을 둔 선제공격 독트린을 탄생시켰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근간은 이 부시 독트린이라는 큰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불꽃 튀는 美 정계 保革 대결

    금융계의 큰 손 조지 소로스는 ‘부시반대운동’에 거액을 기부했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대일본 무역협상을 이끌었던 보수파 인사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Clyde Prestowitz)는 최근 발간된 ‘부랑국-미국의 일방주의와 실패한 선의(善意)’라는 책에서 부시 행정부의 급진성을 신랄하게 공박하고 있다. 프레스토위츠는 보수주의와 급진주의는 구분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라 불리는 제국주의 프로젝트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급진주의고 이기주의며, 전통적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모험주의”라고 질타했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 급진적 색채를 앞장서서 성토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조지 소로스이다. 사상가도 논객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그의 말엔 힘이 실린다. 바로 재력 때문이다. 대중 연설이 매끈하지도 않고 감칠맛도 없지만 그의 생각은 단순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자기 금고 문을 열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둘러대지 않고 딱 잘라서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이념 전쟁의 군수품 조달자’임을 자처하고 나서,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 전쟁의 전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소로스는 돈이 필요한 곳과 돈의 위력, 효용성을 꿰뚫고 있다. 그는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돈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는 유권자 등록 운동인 ‘함께하는 미국(ACT, America Coming Together)’에 1000만달러 기부를 약속했다.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떨어뜨릴 표를 결집시키는 움직임에 직접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MoveOn.org 유권자기금에도 250만달러를 지원한다.

    디지털 군대 MoveOn.org

    민주당원의 ‘디지털 군대’로 불리는 MoveOn.org는 진보 인사들의 이메일 네트워크로, 이미 상당한 정치 기반을 확보했다. 160만명에 달하는 이메일 리스트가 영향력의 핵심이다. 해외에도 7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회원 대부분은 반전 운동가들. 33세의 잭 엑슬리(Zack Exley)가 이끄는 이 인터넷 운동은 부시의 실정을 집중적으로 성토한다.

    MoveOn.org는 정치적 영향력의 개념을 일거에 확 바꿔버렸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외치지 않는다. 단지 메시지 하나로 200만명을 움직인다. 수백만명의 동시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방송 시대를 디지털 시대로 대체시켰다.

    2004년 대통령선거는 대규모 인력이 일시에 한 전투에 참가하는 ‘스타 워즈’의 전투 장면을 연상시킬 것이라고 이들은 예고한다. 수천만이 매일 온라인 전투에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보수진영이 MoveOn.org를 ‘온라인 군대(online army)’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의 주무기는 이메일이다. 이들은 또 웹 사이트를 구축해놓고 앉아서 참여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기존의 정치 운동 모델도 거부한다. 대신 이라크전 등 현안이 터질 때마다 이메일 회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라크전이 과연 옳다고 보느냐고. 그러면 수만명이 동시에 응답을 해온다. 이러한 참여자들의 응답이야말로 MoveOn.org를 움직이는(move on) 핵심 원동력이다.

    이들의 목표물은 명확하다. 부시 대통령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때도 그랬다. GWBush. com이라는 웹 사이트를 만들어 부시를 두드려댔다. 부시는 참다못해 기자회견에서 엑슬리를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엑슬리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지금 MoveOn.org는 ‘부시 30초(Bush in 30 Seconds)’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부시의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30초짜리 광고 경연대회다. 이 광고들은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의 사임을 촉구하고, 백악관 정책 참모들의 비리 혐의를 수사하자고 요구한다.

    MoveOn.org 회원들은 돈도 기부한다. 2002년 7월부터 2003년 6월까지 MoveOn.org는 기부금 230만달러를 지출했다. 1년 전에 비해 25만달러가 더 모금됐다. 2003년 봄 이라크전쟁을 둘러싼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이 단체는 ‘뉴욕 타임스’에 낸 광고에서 “5만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루만에 40만달러가 모였다. 대부분이 40달러 기부자들이 낸 돈이었다.

    MoveOn.org는 별도로 정치행동위원회(PAC, Political Action Committee)도 가동한다. 2002년 대선 때는 이 위원회를 통해 420만달러를 모금했다. 2000년의 310만달러에 비해 100만달러가 더 걷혔다. 진보진영의 이 디지털 군대가 유권자기금을 통해 소로스의 돈까지 지원받게 되었으니 이제 날개를 단 셈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처럼 소로스의 돈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보수진영은 소로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비영리단체에 불법 지원을 했다는 논리였다. 그러자 소로스는 2003년 12월5일자 ‘워싱턴포스트’에 ‘나는 왜 돈을 댔나(Why I Gave)’라는 딱 부러진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있을 자리를 되찾는다는 의미다. 부시의 정책을 승인해준다면 우리는 적개심으로 가득한 이 세계를 살아가야만 하고 폭력이 거듭되는 사악한 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소로스는 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보수그룹이 모금해서 사용하는 액수에 비하면 내가 기부한 액수는 새 발의 피”라면서 “부시 대통령은 선거 자금 모금 방법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거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썼다.

    MoveOn.org는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속한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 주요한 대안 매체로 떠오른 이후부터 지금까지 몇몇 정치인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유권자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온라인 무기를 가동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거론하면 grassroots. com, speakout.com, voter.com 등이다.

    정치판 이념 전쟁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큰 글자의 현수막이 내걸리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가지 전투다. 텍사스대의 한 학생이 창립한 ‘텍사스 보수 청년회(YCT, Young Conservatives of Texas)’가 그런 유형이다. YCT를 이끄는 사람은 텍사스대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올해 21세의 오스틴 킹혼(Austin Kinghorn). 그는 우파라고 자부한다. 킹혼은 이 그룹이 운영하는 YCT의 웹 사이트 www.yct.org에 감시 대상 교수 명단(watch list)을 올려놓았다. 강의실을 좌파 이념의 전파 수단으로 활용하고 학생들에게 좌파 이념을 주입한다고 판단한 좌파 교수 명단이다. 10명이 올라 있는데 이중 아홉이 진보 인사이고 보수 인사도 한 명 끼여 있다.

    YCT의 블랙리스트는 얼른 학생 대 교수의 갈등처럼 비쳐지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역시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적 갈등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감시 대상 교수 선정 이유 등을 올려놓은 YCT 웹 사이트 내용 중 일부다.

    대학 학생회는 보수파가 장악

    “정부학 담당 교수 제니퍼 수클랜드/사회학 교수 크레첸 웨버 : 미국인의 성별과 인종, 계급의 불평등에만 초점. 행정학과 교수 클러멘트 헨리 : 친(親) 팔레스타인 견해 전파. 슬라브 언어학과 교수 토마스 가르자 : 미국의 외교 정책과 부시 행정부 비판. 정부학 담당 교수 데이비드 에드워즈 : 보수주의와 자본주의 혐오. 인류학과 교수 에드먼드 고든(흑인) : 흑인에 대한 백인 지배 과장. 경제학과 교수 해리 클리버 : 자유시장 반대. 역사학과 교수 펜 레스터드 : 극좌적인 미국 역사관.”

    미국인의 인종과 계급 불평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워치 리스트에 오른 수클랜드 교수는 “이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너는 반미주의자이니 입 다물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명단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있는 사람은 저널리즘을 담당하는 로버트 젠슨 교수이다. 젠슨 교수는 2001년 9·11 테러사건 발생 직후 ‘테러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는 이유로 명단에 올랐다. 젠슨은 베트남전, 니카라과, 1차 걸프전 때의 미국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더 큰 의미에서 테러리즘을 정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폭스 뉴스 등 보수 언론의 논객들은 기회만 되면 미 동부지역 유명 대학의 교수들 중 80%가 좌파라고 공격해댄다. 그러나 미 대학에는 일반적으로 보수 단체의 조직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다. 9·11 테러, 이라크전 등 미 안보 위기 때마다 이 단체들은 민첩한 기동성을 발휘했다. 보수 단체인 미 대학 이사 및 동창협의회(American Council of Trustees and Alumni)가 2001년에 발간한 한 보고서는 100개가 넘는 대학의 교수와 대학 행정가, 학생들이 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국 대학 공화당원 위원회(College Republican National Committee)의 자료에 따르면 1999년 이후 대학 내에 설립된 공화당원 지부는 3배가 늘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대학 내 우파 학생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교내 지도자 프로그램(Campus Leadership Program)은 2003년 가을 불과 두 달 사이에 전국 대학에 프로그램 지부 45개를 추가 설립하는 실적을 거둬 모두 216개 지부를 갖게 되었다.

    보수 이념의 학생 언론인 교육을 전담하는 대학 네트워크(Collegiate Network)라는 단체도 있다. 이 네트워크에 따르면 미국 내 대학에서 발행되는 보수 색채의 교내신문은 최소 80종으로 1995년에 비해 두 배가 늘었다.

    YCT가 이념 전쟁의 최전선인 워싱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YCT는 미 대학 내의 이런 보수 조직에 단순히 숫자 하나만 보탠 것 이상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YCT가 작성한 워치 리스트는 처음으로 학생단체가 주도해 명단이 작성되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보수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YCT를 이끄는 킹혼은 이미 폭스 뉴스의 토크쇼 손님으로 초대되는 등 전국적 인물이 되었고, YCT의 블랙리스트는 학문 자유의 침해 논란 차원을 뛰어넘어 대학 내 보수-진보 투쟁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0대1의 싸움

    포데스타의 미 진보센터는 헤리티지를 모델로 한다. 그러나 미 진보센터는 갈 길이 멀다. 전투력이 완벽하게 갖춰진 것도 아니다. 포데스타는 미 진보센터가 2004년 대선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민주당의 기관이 아니라고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센터가 코앞에 닥친 대선에서 얼마나 자유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2004년 대선에 써먹을 아이디어가 궁핍하다. 민주당 대선 후보들은 공화당 싱크탱크들이 개발해놓은 세금 감면 같은 이슈에 끌려다닌다.

    중도파 싱크탱크인 브루킹스도 현안마다 헤리티지에 맞서 싸우는데 정작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브루킹스는 우파에 맞서 싸우는 싸움닭이 아니다. 이념성도 약하고 자체 추진력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보수 우파는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랄 만큼 넉넉한 싱크탱크를 가동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포데스타의 미 진보센터 탄생으로 이제 겨우 하나의 진보 싱크탱크를 얻었을 뿐이다. 진보 좌파는 보수진영의 매력적인 슬로건을 부러워한다. 보수파에게는 ‘작은 정부’ ‘적은 세금’ 등 자신들의 정치 이념을 확실하고 확고하게 전달하는 표어가 있다. 이른바 ‘자동차 범퍼 스티커’ 표어다.

    미국의 진보진영은 이제 ‘빅 아이디어’를 원한다. 포데스타의 미 진보센터가 그 산실을 자처하고 나섰다. 하지만 공화당이 갈라져 있듯이 민주당 내부도 분열되어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 하워드 딘과 MoveOn.org가 진보진영의 좌파를 대변하고, 조지프 리버만 상원 의원이 중도를 표방한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전략가 포데스타는 이들과 거리를 두면서 양쪽을 다 아우르려고 애를 쓴다.

    미국에서 진보진영은 약체다. 그러나 이제 포성 없는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두뇌들의 전쟁이고, 싱크탱크들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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