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이라크 저항세력, “후세인 운명과 反美 투쟁은 별개”

사담 후세인 체포 그후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12-26 19: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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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체포는 이라크 사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라크 민주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는 쪽인가. “이라크 수렁에 빠졌다”는 부시 행정부엔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특별법정에 선다면 후세인은 무슨 항변을 할 것인가. 후세인 체포 뒤 이라크와 미국을 둘러싼 난기류를 분석해본다.
    이라크 저항세력, “후세인 운명과  反美 투쟁은 별개”

    미군에 체포돼 도피행각 268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사담 후세인.

    12월13일 붙잡힌 후세인은 1979년부터 24년 동안 이라크를 철권 통치한 인물이다. 그러나 미군에 생포된 그는 ‘파워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2000년 12월31일 바그다드 ‘승리의 광장’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한 손으로 라이플을 쏘던 위풍당당했던 후세인이 아니었다. 2003년 4월 바그다드 함락 뒤부터 밀실에 숨어 지난날의 영광을 되새기며 “절대권력을 잃는다는 것이 이리도 비참한 것인가”를 곱씹었을, 지치고 쇠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후세인 체포로 이라크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 동안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수렁에 빠졌다”는 비난을 들었다. 잊을 만하면 대미 지하드(聖戰)를 촉구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방송 메시지 전략을 빌려 후세인이 알 자지라, 알 아라비야 등 아랍 언론매체들을 통해 반미투쟁에 불을 지르는 육성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부시는 가슴을 졸였다. 이라크 무장 게릴라들의 저항이 지금처럼 이어진다면 부시로선 위기다. 늘어나는 부상자와 전쟁비용으로 2004년 대선에서 이기리란 보장이 없다. 미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자들은 이라크전쟁을 다가올 대선의 호재로 삼았다. 부시는 이라크 침공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조차 찾아내지 못해 전세계적인 반전 비판에도 몸을 사려야 했다.

    “전쟁 끝난 건 아니다”

    후세인 체포 다음날 TV에 비친 부시의 얼굴엔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부시는 “이라크 국민은 이제 사담 후세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는 후세인이 체포됐다고 해서 이라크 상황이 짧은 시일 안에 안정을 되찾을 걸로 낙관하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정보 채널을 통해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의 반미 무장저항이 아랍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반외세 감정임을 잘 알고 있다. 반미 게릴라 활동이 후세인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이라크를 점령한 외국세력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굳이 드러내서 강조해봤자 이로울 게 없기에 말하지 않을 뿐이다.

    후세인 체포 다음날 부시 대통령이 미 국민에게 “후세인이 체포됐다고 해서 폭력(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며 앞으로도 ‘테러와의 전쟁’은 이어질 것이라 말한 것도 정보보고를 통해 이라크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03년 여름 아랍 지역 취재길에 만났던 이집트·요르단·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은 1953년 미 중앙정보국(CIA)이 이란 쿠데타에 개입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모사데크 정권이 친서방 팔레비 왕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영국의 석유이권을 몰수하자 당시 미국은 영국 대신 적극 쿠데타에 개입했다.

    모사데크 정권이 무너지고 팔레비 왕이 권좌에 다시 앉자, 이란 내 석유 이권은 미국 4, 영국 4, 이란 2로 쪼개졌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아랍권 지식인들은 친이스라엘 일변도 정책을 펴온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후세인 독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이라크 석유 침탈을 겨냥한 영미 두 나라의 음모라고 여긴다.

    9·11테러 뒤 애국적 성향이 강해진 미 언론에,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곳에 상당 부분 기대는 일부 국내언론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라크 국민의 대미 감정은 흉흉하기 짝이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반외세 아랍민족주의 감정이다. 최근에 작성된 미 CIA의 현지 정세보고서도 이라크 민심이 갈수록 미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보고서는 “점점 더 많은 이라크인들이 이라크에 무력개입한 미국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다시 말해 석유가 아닌가)를 의심스런 눈길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 침공 전 미 CIA는 후세인 정권 아래서 탄압을 받아온 시아파를 ‘후세인 정권 붕괴 뒤 미국의 협조세력’으로 분류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아파 가운데 일부 강경파들은 대규모 군중집회에서 “미국의 새로운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쳐대고 있다. 후세인이 체포되면 반미 무장게릴라 활동은 잠잠해지리란 일부 언론매체의 분석은 이라크 사람들의 자존심과 반미정서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라크 저항세력, “후세인 운명과  反美 투쟁은 별개”

    1988년 화학무기 공격으로 숨진 한 쿠르드족 부자.

    정치인 후세인은 이미 바그다드 함락과 함께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다. 그가 ‘침략자’로 규정한 미군 병사들 손에 붙잡힘으로써 후세인은 ‘정치적 식물인간’ 대접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가 식물인간이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크다. 다름아닌 법정투쟁을 통해서다. 그럴 경우 아랍권의 반미감정은 더욱 흉흉해질 것이다. ‘사담’이란 이름은 아랍어로 ‘(억압에) 맞서는 자’란 뜻을 지녔다. 이름의 뜻대로 “내가 그냥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그는 품고 있을 것이다.

    후세인(1927년생)은 혁명아로 자부해왔다. 20대 청년시절엔 이집트의 풍운아 가말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 영향 아래 이라크 혁명에 뛰어들었고, 31세 때인 1968년엔 바트당의 무혈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3년엔 부통령으로서 외국 석유자본의 저항을 무릅쓰고 석유 국유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라크를 ‘아랍의 선진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따라서 이라크 근대화에 이바지했다고 자부해온 후세인이다.

    미국은 후세인에게 ‘정치적 빚’이 있다. ‘가말 낫세르를 잇는 아랍 지도자’의 야망을 키워온 후세인을 지원, 40만명의 사망자를 낸 이란-이라크 전쟁(1980∼88년)의 배후가 바로 미국이다.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란의 친미 독재왕조가 무너지면서 이란 석유 이권을 잃은 미국은 후세인에게 무기를 대주며 이라크에 비해 인구로나 면적으로나 덩치가 큰 이란을 괴롭혔다.

    후세인이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 레이건 정권에 이어 대(對)이라크 유화정책을 펴온 시니어 부시 행정부를 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후세인의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그로부터 후세인의 정치적 몰락이 시작됐고 13년 뒤 그는 오늘의 고단한 처지에 이르렀다.

    미군 수사요원들은 무엇보다 후세인으로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와 관련한 정보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숱한 전문인력을 투입하고도 지금껏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탓에 “침공명분을 조작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아온 부시 행정부로선 WMD가 제1차 신문사항이다. 그러나 지금껏 이라크 핵심 당국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과 증언으로 미뤄 후세인에게서 이렇다 할 놀라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후세인이 9·11테러의 배후라는 주장이 허구임은 이미 드러났다. 9·11테러의 주역 알 카에다 세력과 후세인 정권 연루설은 말 그대로 ‘설’로 끝났다. 부시를 비롯한 미 행정부 고위관리들은 이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다).

    미국의 신문절차가 끝나면 후세인은 지난날 그의 정적이었던 이라크인의 손으로 넘겨져 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미 점령당국이 지난해 5월 임명한 25인 이라크과도통치위(IGC)는 후세인 체포 바로 며칠 앞선 12월10일 “후세인이 체포되지 않더라도 이라크 국내 특별전범재판소를 열어 궐석재판을 통해 후세인을 단죄하겠다”고 밝혔다. IGC 위원이자 폴 월포위츠(미 국방부 부장관)를 비롯한 미 펜타곤의 강경파들이 후세인을 이을 차기 이라크 지도자로 점찍은 아흐마드 찰라비도 후세인 체포 직후 “후세인은 공개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관심의 초점은 “후세인이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마찬가지로 법정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아랍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그의 법정 주장은 유엔 안보리의 푸른 신호등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의 재선 가도를 위협하는 지뢰밭이 될 수도 있다.

    생포된 후세인은 1990년대 발칸반도의 독재자 밀로셰비치(전 유고 대통령)와 엇비슷한 존재다.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전쟁에서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돼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문제는 독설가이자 법과대학 출신답게 ‘세르비아 민족주의’ 논리로 무장한 밀로셰비치를 검사나 증인들이 제대로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는 법정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 횡포를 질타, 제3세계의 소리 없는 박수를 받고 있다.

    후세인이 법정에 선다면 미국으로선 달갑지 않은 소리들이 나오게 될 게 틀림없다. 우선 지난날 미국과의 거래(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무기지원 등)가 들춰질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WMD를 둘러싼 ‘진실 찾기’ 공방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다.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을 강제점령해온 이스라엘은 국가안보를 내세워 생화학무기는 물론 핵무기까지 갖추고 있는데, 아랍권의 자존심 이라크가 WMD를 개발하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주장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1990년대 유엔 무기사찰을 받으며 WMD 개발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했는데, 부시 행정부는 그것을 빌미로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독식하려 침공해 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은 체포·투옥·고문·총살로 시아파 반체제 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혐의를 받아왔다. 1979년 이래 이라크를 24년간 철권통치했던 후세인은 피할 수 있었거나 없었거나 간에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후세인은 많은 이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88년), 쿠웨이트 침공전쟁(1990년), 두 차례에 걸친 걸프전쟁이 그러하다. 후세인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쿠르드족 학살을 둘러싼 전쟁범죄 혐의는 특히 국제적인 관심사항이 돼왔다. 그러나 후세인이 법정에 선다면 부시 행정부가 그의 잔학상을 말할 때마다 선전해온 ‘쿠르드족 화학무기 학살설’에 대해서만큼은 강력한 반론을 펼 것으로 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 정권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명분의 하나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국 국민을 화학무기로 죽였다”고 주장해왔다. 그 보기로 흔히 꼽히는 것이 1988년 3월 이라크 북부 할랍자 마을에서 쿠르드족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5000명이 화학무기 공격으로 무참하게 죽어간 사건이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접경지대인 할랍자 마을의 쿠르드족 주민들을 화학무기로 죽인 것은 이라크군이 아니라 이란군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군 정보요원들이 작성한 두가지 기밀서류가 뒷받침한다.

    미 해병이 걸프전쟁 직전인 1990년 12월 작전 참고자료로 작성한 ‘이란-이라크 전쟁의 교훈’ 기밀문서(FMFRP 3-203)는 부록에서 이란-이라크 양쪽의 화학무기를 분석했다. 이 부록(http://www.fas.org/man/dod-101/ops/war/docs/3203/appb.pdf)은 “(5000명에 이르는) 할랍자 마을 쿠르드족을 죽인 문제의 화학무기는 혈액제제로 보인다. 이라크군은 이런 종류의 화학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이란군이 쿠르드족을 공격했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라 적었다.

    이라크군의 화학무기는 겨자 가스다. 쿠르드족 주민들은 양쪽 군대가 벌이는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에 끼여 있다 이란군이 뿌린 혈액제제 화학무기에 참변을 당했다. 또다른 근거는 미 국방정보국(DIA) 기밀보고서다. 미 CIA의 고위 정세분석가 출신인 스테판 펠리티르가 지난해 ‘뉴욕 타임스’를 통해 밝힌 DIA 기밀보고서에 따르면 쿠르드족을 죽인 것은 이란군의 청산칼리 혈액제제였다. 후세인이 실제로 이라크 전범재판소에 기소된다면 법정에서 이 문제의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아랍권의 반미감정을 증폭시킬 법정다툼도 미국으로선 바라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후세인을 실제로 재판정에 세우기보다는 그를 장기간 가둬 그가 병사(病死)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 체포보다는 사살 쪽을 바랐다. 부시는 오사마 빈 라덴의 운명과 관련, “죽든 살든(dead or alive)”이란 표현을 썼지만, 빈 라덴도 마찬가지다. 사살 쪽이다. 지금 헤이그 법정에 선 밀로셰비치처럼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는 것을 미국은 바라지 않는다. 정예 특수부대인 델타포스와 CIA 현지요원들은 후세인 사살지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세인을 체포한 것은 육군 제4사단 소속 장병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합동작전을 벌인 미 CIA 현지 태스크포스 미 소속 특수작전요원들이었다. 두 아들과 달리 후세인의 목숨은 일단 연장된 셈이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지 않을 경우 후세인은 상징성은 지닐지라도 정치적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지내다 숨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후세인 체포로 인해 구시대(ancient regime)로의 복귀 가능성은 사라졌다. 후세인 독재체제에 진저리를 치던 적지 않은 이라크인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상황 반전(?)이 반미 게릴라 활동을 주춤하게 만들고, 이라크 시민생활을 포함한 경제활동과 공공부문 활동을 정상화시키며, 나아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 그에 이은 점령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킬 것으로 보는 것은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부시 행정부의 입맛에 맞춘 장밋빛 분석이다.

    일부 미국 언론에선 지난해 7월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살된 뒤부터 이라크 무장세력의 저항이 더 거세졌지만 이제 후세인이 체포됨으로써 가라앉으리라고 분석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이라크 사람들의 강한 반외세 아랍민족주의 감정이 후세인의 체포로 쉽게 가라앉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라크 행정책임자 폴 브리머도 후세인이 잡히기 전인 11월 미국의 ‘애국주의적’ 방송매체인 폭스 TV와의 대담에서 “사담 후세인이 잡히더라도 미군에 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었다.

    후세인이 자신의 생포 또는 사망을 내다보고 제2, 제3선의 예비 지도자들을 점찍어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통신장비 하나 없이 체포된 상황으로 미뤄 그가 과연 대미 항전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지난날 후세인 체제아래서 기득권을 누리던 전 바트당원, 페다인 민병대, 정보기관원, 공화국수비대 출신 등으로만 구성돼 있는 게 아니다. 이슬람 원리주의 종교세력, 토착 민족주의 세력 등 다양한 분파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후세인의 체포와 관련 없이 반미 게릴라투쟁을 펼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신식민지화에 강하게 반발하는 세력이 후세인 체포 소식을 듣고 손에서 총을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5년말 총선으로 이라크에 새 정부를 띄운 뒤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출구전략이 후세인 체포를 전환점으로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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