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박근혜 발목 잡은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

부산일보· 문화방송 ‘기부 승낙서’ 인감 위조했다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08-25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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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김지태 주식 ‘기부 승낙서’ 사본 단독입수 3개의 다른 인감과 필체, 작성된 날짜 ‘二十日’→‘三十日’로 조작
    • 박용기 전 중정 부산지부장 회고록 “박정희, 1962년 1월2~3일 김지태 조사하라 지시했다” “김용순 사령관, “부산일보, 문화방송 헌납조건 절충 요구”
    • 1963년 10월21일 국방장관 명의 공문 “1962년 4월11일 10만평 기부출원 이사진 결의에 감사”
    • 일본 병원진단서 기록 - 1962년 4월2일 김지태 입원사실 확인, 김씨 & 유가족 “이사회 결의 없었다”
    • 고원증 변호사 “김지태 혐의는 구속 사안 아니었다”
    • 5남 영철, “박정희의 반환 약속 박근혜 대표도 알고 있다”
    박근혜 발목 잡은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
    《장면 ①》

    1962년 6월20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내 법무관실. 부산일보 사장 겸 부일장학회 이사장 김지태씨는 흰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엔 5·16 직후 법무장관을 지냈던 고원증 장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씨가 자리에 앉자 고 장군은 미리 작성한 서류를 꺼내놓았다. 김씨가 14년간 애지중지 가꿔놓은 부산일보와 4년간 막대한 재산을 들여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한국문화방송 및 부산문화방송을 자진해 국가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기부승낙서였다.

    아버지 김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인감도장과 인주까지 챙겨들고 달려온 장남 영구씨는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씨와 고 장군 사이에 실랑이가 오갔다. 김씨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버텼고 고 장군은 설득과 협박을 병행했다. 한동안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때 영구씨가 김씨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고, 구속돼 있는 회사간부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구씨는 눈물을 흘리며 김씨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 이거 없어도 살아요. 그냥 포기하세요.”



    김씨는 더 버틸 생각이었지만 아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파왔다. 김씨는 결국 고 장군이 원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후 김씨와 함께 구속돼 있던 회사 임원들은 군 검찰의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장면 ②》

    1962년 6월20일 부산 대신동 교도소 면회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5·16장학재단 설립을 준비하던 고원증 장군과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김지태씨가 마주앉았다. 김씨는 수갑이나 포승줄에 묶이지 않은 채 하얀 모시옷 차림으로 자유스런 상태였다.

    고 장군은 박 의장으로부터 김씨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속했으니 그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관련 서류가 미비했다. 무엇보다 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교육부에 제출할 김씨의 기부승낙서가 필요했다. 일종의 요식행위였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날 고 장군이 김씨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침 김씨의 장남 영구씨가 도장을 들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고 장군은 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리 준비돼 있던 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김 사장, 이미 중정에 재산을 헌납하기로 약속했다면서요? 필요한 서류가 있으니 좀 찍어줘야겠어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김씨는 “내가 기증했으니 (도장을) 찍어야죠”라며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이틀 후 김씨와 임원들은 모두 풀려났다. 군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중정 발표 김지태 혐의는 8개 항목

    장면 ①은 김지태씨 유가족측의 주장대로, 장면 ②는 고원증 변호사의 진술을 토대로 1962년 6월20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날짜만 같을 뿐 장소는 물론 상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한쪽은 강압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본인 스스로 순순히 재산을 헌납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년 전의 일인 만큼 어느 쪽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다. 당시 관계자들의 상당수가 고인이 된 상태여서 객관적 진술을 얻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 5·16장학회는 과연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수장학회의 탄생배경과 성격, 박 대표와 정수장학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단 조성래 단장은 “김지태씨 사건은 군사정부에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 언론사 사주의 제보를 빌미로 확대 시나리오를 짰다는 말도 있다”며 “철저히 조사해 반드시 그 진실을 밝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고 김지태씨가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을 당시의 외압 여부, 만일 있었다면 누구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느냐는 것, 그리고 부일장학회에서 5·16장학회로의 석연치 않은 재산이동 과정이다.

    ‘신동아’는 이 같은 주요쟁점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는 새로운 문건들을 단독 입수하는 한편 현존하는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확보했다.

    먼저 김씨의 재산기부가 외압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1962년 김씨가 구속되는 과정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2년 3월27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부산지부는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국내재산해외도피 등의 혐의로 김씨를 비롯한 회사간부 10명에 대한 구속수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김씨가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후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러 있던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씨에게는 무려 8개항의 혐의가 적용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씨의 부인 송혜영씨도 관세법 위반 및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일본에 머물던 김씨는 4월말 귀국했는데, 김포공항에서 중정에 연행돼 곧바로 부산교도소에 구속 수감됐다.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김씨는 5월24일 결심공판에서 7년형을, 나머지 임원들은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5년까지 모두 실형을 구형받았다.

    그런데 이때 군검찰은 김씨에게 농지개혁법 위반 및 관세법 위반에 대한 혐의만 적용했다. 재판부의 선고도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 바로 김씨가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문제의 6월20일이다.

    박정희 “곧바로 내려가 풀어줘라”

    당시 김씨로부터 도장을 받았던 고원증 변호사(1963년 준장 예편)는 최근 기자와 두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털어놨다. 바로 김씨의 혐의사실 자체가 터무니없는 내용이었고, 당시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지시로 이틀 뒤에 석방했다는 것. 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내가 도장을 받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 박 의장이 (수사)기록까지 다 보고 올라오라고 했다. 다음날 김용순(군수기지사령관)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박 의장을 만났을 때 김용순이 김지태씨를 집행유예로 석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면 김씨에게는 전과가 생긴다. 사실 김씨는 명의 신탁한 토지를 등기하는 과정에 몇 사람이 생사도 확인 안 되고 연락도 안 돼 도장을 파서 찍은 것과 부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준 것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박 의장에게 ‘당시 10억 가까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등 좋은 일을 했는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럴 필요 있느냐. 앞으로 경제건설이 중요한데 공소취하해서 풀어주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의장이 김용순에게 ‘너 곧바로 내려가서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김용순은 그날 전용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풀어줬다.”

    -김지태씨 입장에서는 억울했겠다.

    “그렇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 변호사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인 5월20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법무장관을 지냈고, 그해 7월 5·16장학회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장학회 설립과 동시에 5·16장학회 상임이사와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는 등 장학회 초기단계에 누구보다 깊숙이 개입했다. 그만큼 내막을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처음부터 모든 게 박 의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고 변호사가 5·16장학회 설립작업을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박 의장이 이후락(당시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통해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만나보니 ‘몇 달 전에 기부를 다 받아놓았는데 재산이 자꾸 유출된단 말이야. 자네가 문화방송 사장을 하면서 김지태가 기부한 3개 회사로 장학재단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1주일 후 이번엔 평소 친한 후배인 신직수(다잇 최고회의 의장 법률특보)를 통해 또 연락이 왔다. 장학재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법률지식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맡아달라는 거다. 두 번씩이나 거절할 수 없어 ‘경험이 없으니 성과가 없더라도 책망은 마시라’며 결국 받아들였다.”

    -김지태씨가 박 의장에게 이미 기부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문서를 본 적이 있나.

    “그건 중정이 갖고 있겠지. 난 알 바 아니었고, 박 의장 말만 듣고 법률적으로 필요한 서류가 부족해서 보완작업만 한 것이다. 재단등록을 하려면 기부하겠다는 서류가 필요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걸 받으러 부산에 내려갔다가 온 거지.”

    -5·16장학회 30년사를 보면 10만평의 땅을 장학회에서 국방부로 무상 양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전혀 기억이 없다. 내가 장학재단을 설립했을 때 땅은 없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기본재산은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등 3사뿐이었다.”

    5·16장학회 설립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2년 7월7일 재단법인 창립총회가 열렸고, 1주일 뒤인 7월14일 교육부, 7월18일 서울시로부터 설립허가가 떨어졌다.

    고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장학금을 지급할 재원 마련이 시급했다. 3사를 기본재산으로 등록하긴 했지만 이들 회사들은 장학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었던 것. 한국문화방송의 경우 사옥을 지으면서 오히려 2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게 고 변호사의 주장이다.

    -장학회 창립임원을 보면 이관구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이 이사장을 맡았고, 윤일선(학술원 종신회원), 김연수(삼양사 회장), 이병철(삼성물산 회장), 김용우(전 국방장관)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누가 선정한 것인가.

    “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지명했다.”

    ‘신동아’가 입수한 중정 부산지부장 박용기씨의 회고록을 보면 김지태씨 사건의 배후에 박 의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2000년 3월 발간된 ‘진주지(晋州誌)’에서 박씨는 1962년 1월2~3일경 박정희 의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김지태씨에 대한 조사를 지시받았다고 밝혔다. 박씨는 김씨를 구속했던 장본인이다. 그 내용 중 일부다.

    [박 장군은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김지태씨에 대해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한 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다,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철저하게 조사할 것 지시.구속수사중 김용순 장군은 현재 최고회의 의장의 심정은 김지태씨 재산 중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절충 합의하라며 본인이 직접 하라는 요지였음. 후일 최고회의 법률고문인 신직수(후일 법무장관, 중정부장 역임)씨가 교도소를 직접 방문해 재산헌납에 날인 받았다 함.]

    김지태씨의 재산 기부행위는 이 같은 박씨의 회고록과 앞선 고 변호사의 진술로 알 수 있듯 분명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게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씨의 재산이 5·16장학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군부주체세력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김지태 인감도장은 하나였다

    ‘신동아’가 입수한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의 ‘기부승낙서’ 문건에는 누군가 조직적으로 관여, 조작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은 사장 김지태씨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닌, 윤우동 윤수동 김대윤 정종철 김종한 등 회사 주요 임원들의 명의로 분산돼 있었다. 비록 ‘명의신탁’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3사의 재산이 5·16장학회로 귀속되기 위해서는 김씨 뿐 아니라 임원들이 직접 작성한 ‘기부승낙서’가 있어야 한다.

    ‘기부승낙서’는 5·16장학회가 정당하게 기부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서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됐고, 일부 내용에서 가첨(加添)된 흔적이 발견됐다면 기부원인 무효에 해당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실소유주인 김지태씨의 ‘기부승낙서’는 모두 3부다. 그런데 부산일보 주식에 대한 ‘기부승낙서’에 찍힌 도장이 한국문화방송 문서에 찍힌 도장과 다르고, 부산문화방송 문서의 것과도 다르다. 미리 작성된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김씨 유가족들의 주장을 감안할 때 필체가 다를 수는 있지만 도장이 다르다는 것은 누군가 인감을 위조해 허위로 서류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다.

    ‘혹시 회사별로 별도의 인감을 사용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김씨의 장남 영구씨는 “아버지의 인감도장은 하나고, 1962년 6월20일 군법무관실로 가져갔던 것도 바로 그 도장이었다”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헌데 문서 작성일자를 보면 한자로 6(六)월20(二十)일로 돼 있던 것이 ‘二’ 위에 ‘一’이 가첨돼 30(三十)일로 조작된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유가 뭘까. 누가 이 문서를 위조, 조작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추론해보자면 20일은 김지태씨와 임원들이 구속된 상태인 만큼 차후 누군가 문제제기를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인 30일에 작성된 것처럼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다른 임원들의 문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김씨 처남인 윤우동씨의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서울문화방송 3개사 주식 ‘기부 승낙서’에 찍힌 도장이 모두 다르다. 윤씨의 문서는 심지어 주소까지 틀리다. 부산문화방송과 서울문화방송 기부 승낙서상 주소는 ‘동래구 거제동 840’인데 반해 부산일보 주식 기부 승낙서에는 ‘동래구 온천동 315’로 적혀 있다. 누군가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당시 3사의 임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김종한(당시 부산일보 부사장)씨는 이와 관련 “기부승낙서라는 문서를 본 적도 없고, 그 문서에 도장을 찍은 일도 없다. 물론 인감증명서를 내주지도 않았다”면서 “재산을 강탈해갔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아마도 누군가 도장을 새겨서 찍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는 김성은 국방장관 명의로 1963년 10월21일 한국생사주식회사 이사장인 김지태씨에게 ‘감사의 공문’을 보냈다.

    “1962년 4월11일자 구 부일장학회 이사진 결의에 의거 정부에 기부하신 부산시 동래구 우동 1127번지의 10 외 246필지 지적 9만9451평을 5·16장학회 이사장 이관구씨로부터 우선 양도 받아 등기 이전중에 있습니다. 위 재산은 군사상 지극히 긴요한 영구시설 부지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막대한 사재를 기부하여주신 귀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김씨측에서 봤을 때 국방부의 공문내용은 좀 엉뚱하고 황당하다. 문제는 국방부가 거론한 4월11일에 부일장학회 이사진에서 기부를 결의한 바 없고, 특히 그날 김씨는 국내가 아닌 일본에 있었다는 것. 김씨의 유가족은 그 증거로 같은해 4월2일 일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진단서를 제시했다. 유가족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씨는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감사편지를 받은 셈이다. 기분이 어땠을까.

    김씨의 유가족들은 5·16장학회에 빼앗긴 재산을 되돌려받기 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명예회복과 ‘아버지 김지태씨의 생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다.

    김씨의 5남 영철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여러 차례 되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오랜 기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서 “박 대표가 정수장학회, 그 전신인 5·16장학회의 설립과정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바람처럼 재산을 되돌려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개인재산이 아닌 공익재산이기 때문이다.

    고 김지태씨가 생전에 쓴 ‘나의 이력서’를 읽다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와 문화사업의 공익재단이 5·16장학회의 공영제 운영으로 넘어가서 당초 기약했고 목적했던 사회봉사라는 이상이 확대되고 또 영원할 것이므로 나는 이와 같은 운영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또 만족스레 생각한다. …내어던진 재산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면 모름지기 공영제의 운영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박근혜 발목 잡은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
    ▲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씨와 전무 윤우동씨가 소유했던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주식 기부 승낙서. 세 문서에 찍힌 도장이 모두 다르다. 작성일은 6장 모두 1962년 6월30일로 돼 있는데 ‘二十日’의 ‘二’자 위에 ‘一’자가 가첨된 흔적이 분명하다. 아래 윤우동씨의 경우 한국·부산문화방송 문서상 주소와 부산일보 문서상 주소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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