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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 신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공격적 개방’ 부르짖는 ‘FTA 전도사’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김현종 신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공격적 개방’ 부르짖는 ‘FTA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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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잘하는 데는 부모의 힘이 컸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을 익힐 수 있었고, 주말과 방학에는 어머니가 국어, 국사 등 한국 교과서를 펴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고교과정까지 모두 마쳤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내오는 소년일간지와 소년월간지도 유용한 텍스트였다. 만화, 교양물, 학습물,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의 읽을 거리가 담겨 있어 총체적인 언어학습교재로 활용했다는 것. 특히 만화는 ‘실용 언어의 보고(寶庫)’였다. 그래서 김 본부장은 대학원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새로 나온 만화책을 열심히 구해 읽었고, 미국 로펌에서 일할 때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인기 만화 시리즈를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훗날 자신의 아들에게도 미국 만화책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14세부터 홀로 미국 생활

김 본부장은 14세부터 혼자 미국에서 생활했다. 미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던 부친이 외무부로 복귀하게 되자 잦은 환경 변화로 부담을 줄 것 같아 그를 미국에 남겨두기로 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시킨 것. 기숙사를 나와본들 갈 곳도 없는 ‘산골짜기’ 학교라 탈선의 여지도 적었다.

김병연 전 회장은 “어떤 어려움도 스스로 이겨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그때 길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 격려하고 ‘감시’했다. 다만 공부 잔소리는 필요없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 “미국 아이들이 2시간 공부하면 나는 4~5시간은 공부해야 이길 수 있다”며 책상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그 시절부터 몸에 배 지금도 잠이 적다. 자립심과 경쟁심이 강해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는 독불장군 기질도 지녔다.



김 본부장은 1977년 컬럼비아대학에 진학, 국제정치학 학부과정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법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당시 네덜란드 대사관에 근무하던 부친을 방문했다가 사적인 모임에서 우루과이 출신의 국제사법재판소장과 일본 출신 재판관을 만나 대화하면서 법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도 이 무렵 가진 듯하다. 그들에게 “나도 열심히 법률공부를 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가 “한국은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않아 당장은 어렵겠다”는 답을 듣자 크게 실망하면서 한동안 심각하게 ‘나라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8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들어가 3년간 국제상거래와 통상법을 공부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가 컬럼비아대에 머문 8년은 한국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힌 시간이기도 했다. 틈만 나면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벌였다. 덕분에 ‘세련된 한국어’를 생생하게 익혔고, 혼자 신문만 봐서는 종잡기 어려웠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한국 사정에 대해서도 나름의 지식체계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변호사가 된 1985년부터는 기업 인수합병 업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그는 외교통상부 부인회 소식지 ‘외교등(燈)’에서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많이 읽고 비평을 쓰는 훈련을 통해 글쓰기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기에 월스트리트의 법률회사에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에 속하는 대기업 고객의 일을 맡으려면 영어 회화와 문장력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미국의 기업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변호사들은 영어 의사소통이나 고객과의 접촉을 요구하지 않는 세법 분야를 주로 담당하는데, 이런 경우 법률회사에서 주류에 들지 못한다.”

고객의 首長이 되다

미국 로펌에서 근무하던 중 단기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김 본부장은 1989년 귀국해 김·신&유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국제 상사 중재와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관련 법률상담, 지적 재산권 업무 등을 주로 맡았다. 그중 하나가 노드롭 항공기 비자금 사건.

1984년 미국 노드롭사(社)는 한국에 F-20 전투기를 판매할 목적으로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625만달러의 비자금을 건넸다. 그러나 1986년 F-20기가 연습비행 중 추락하는 등 결함이 드러나 판매에 실패하자 노드롭사는 박 전 실장의 유가족을 상대로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하고 국내 법원에도 소송을 냈다. 김 본부장은 박 전 실장측 변호를 맡아 모두 승소했다.

1993년에는 홍익대 교수 공채에 응모해 무역학과 조교수로 채용됐다. 한국이 국제통상 분야에 취약한 것은 노하우도 없거니와 리서치도 안 돼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와 관련한 연구·조사활동에 주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교수 노릇은 그리 즐겁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 함께 근무한 교수는 “연구활동 여건이 기대보다 못한데다, 과제물을 많이 내주고 영어로 수업을 하는 등 미국식으로 터프하게 가르쳐 학생들이 따라오기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동료교수들이 보다못해 “학생들이 그렇게 어려워하면 수준을 좀 낮춰서 가르치라”고 조언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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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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