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1년 만에 90% 물갈이… 노무현식 ‘찔끔개각’ 밀착분석

‘실험내각’에서 ‘관리형 내각’으로 선회

  • 글: 김정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nghn@donga.com

    입력2004-08-25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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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처럼 여론에 밀린 국면전환용 ‘희생양 찾기식’ 인사는 분명 사라졌다. 그러나 참여정부 출범 1년 반이 지난 지금, 초대 내각에 참여했던 장관 가운데 남은 건 단 2명뿐이다.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이유도 제각각이다.
    1년 만에 90% 물갈이… 노무현식 ‘찔끔개각’ 밀착분석
    “사유가 생기면 언제라도 바꾸죠. 항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인사수석이 그런 준비도 안 하고 있으면 어떻게 국민 세금으로 녹을 먹을 수 있겠어요?”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인사문제를 총괄하는 정찬용(鄭燦龍)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은 기자들에게서 “장관이 바뀐다는데, 맞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똑같은 답변을 들려준다.

    고위공무원의 인사 추천작업과 검증작업을 분리하고, 인사추천회의라는 심사기구를 두는 등 청와대 내에 인사시스템이 갖춰지면서 현 정부에서 장관 인사는 상시 준비체제가 갖춰져 있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장관 교체 인사는 무려 11번이나 있었다. 지난해 7월 김영진 당시 농림부 장관이 새만금 방조제 건설사업을 중단하라는 법원 판결에 반발해 자진 사퇴한 이래 한 달에 한 번꼴로 장관이 교체된 셈이다. 가장 가깝게는 7월28일 법무, 국방장관이 교체된 것도 올 들어 5번째 장관 인사였다.

    정 수석비서관이 가지고 있는 인사파일에는 635명의 장관 예비후보자 명단이 확보돼 있다. 국무총리 후보자와 19개 부처 장관의 후보자들이다. 1개 부처에 30명 정도의 장관 후보자가 줄을 서 있는 셈이다. 이를 1차로 193명으로 압축하고, 2차로 60명으로 다시 압축한 유력 후보자 명단이 노 대통령에게 건네져 있다는 게 정 수석비서관의 설명이다. 심지어 여권의 한 유력 정치인은 이 인사파일의 5개 부처 장관 후보명단에 ‘겹치기’로 올라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인재풀에도 편차가 있다. 예를 들어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군은 수십 명에 이를 정도로 두텁지만, 농림부 장관이나 과학기술부 장관 후보는 3~5명에 그칠 정도로 빈약하다.

    어쨌든 노 대통령으로서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집무실 책상 서랍을 열어 리스트를 꺼내들고 곧바로 장관을 바꿀 수 있는 채비가 돼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으로 수시로 장관 인사가 단행됐고, 노무현 정부의 개각은 ‘찔끔개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래서 과거 정권에서 사고가 터졌다 하면 ‘희생양 찾기’식으로 해온 국면전환용 개각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확고한 방침이 거꾸로 “시도 때도 없이 장관을 바꾸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야금야금 장관들을 바꾸다 보니 초대내각에 들어온 뒤 현직을 지키고 있는 장관은 진대제(陳大濟) 정보통신부 장관과 지은희(池銀姬) 여성부 장관 2명뿐이다.

    청와대 보좌관은 ‘노무현 아카데미’

    집권 1기의 초대내각은 40대 군수 출신인 김두관(金斗官) 행정자치부 장관, 비(非)외교관 출신인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장관, 영화감독 출신인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부 장관, 여성 법조인인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 등을 파격적으로 기용하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삼성전자 CEO 출신인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나, 비(非)육사의 갑종 출신인 조영길(曺永吉) 국방부 장관도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1년 만에 90% 물갈이… 노무현식 ‘찔끔개각’ 밀착분석

    조영길 전 국방, 강금실 전 법무, 이창동 전 문화, 최낙정 전 해양, 박호군 전 과기

    그에 비하면 지금의 2기 내각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관리형 내각으로 변모해 있다. 해당 분야의 정통관료 출신이 10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학교수 출신(4명)과 여당 정치인(3명)이 각기 입각해 있다.

    이런 흐름은 1기 내각의 파격적인 실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청와대측은 “지난 1년 동안 ‘개혁 로드맵’을 완성한 만큼 이제 그 성과물을 거두기 위해선 정책 집행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해서다”라고 변모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개각부터는 조각 당시의 실험적 기용보다는 안전하게 가겠다는 기류가 반영됐다. 대통령외교보좌관을 지낸 반기문(潘基文) 외교부 장관과 국방보좌관 출신 윤광웅(尹光雄) 국방장관의 기용도 결국은 노 대통령의 뜻을 잘 알고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기용했다는 흐름에 놓여있다. 그래서 청와대 안팎에서는 연달아 2명의 장관을 배출해낸 대통령보좌관 자리를 ‘노무현 아카데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정동영(鄭東泳) 전 의장과 김근태(金槿泰) 전 원내대표 등 차기 대권주자의 입각이야말로 2기 내각에서 가장 유의미하게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일상적인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겸하게 해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총괄하게 한 점,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사회복지문화 분야를 총괄하게 하겠다는 구상은 2기 내각을 분권적으로 운영하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다.

    물론 이들에게 최고권력자로서 대통령의 권력을 부분적으로 넘겨주는 것은 아니지만, 노 대통령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여권의 실력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내각에서도 집단지도체제와 유사한 실험적 성격을 담은 셈이다.

    즉 이 총리는 내각을 총괄하면서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국가적 논란이 되는 중요사안을 추진하는 데 총대를 메고, 경제 분야는 이헌재 부총리, 과학기술 분야는 부총리 승격이 예정된 오명 과기부장관,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정동영 통일부장관, 사회복지문화 분야는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눠 맡는 ‘책임 분담형’ 내각 형태가 됐다.

    여하튼 집권 1기 장관들은 대체로 조직 장악력에 문제가 생겨 교체된 경우가 많다. 7월28일 강금실 법무장관과 조영길 국방장관의 교체도 이런 사유에 속한다. 두 장관 모두 특수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군과 검찰을 이끌어가는 데에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판단이었다. 물론 조 전 장관은 교체가 어느 정도 예고돼 있었고, 강 전 장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교체였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두 장관의 교체 이면을 더듬어 보면 오래 전부터 교체가 검토돼왔다. 이런 면면을 살펴보면 노 대통령의 ‘장관 교체’에 대한 시각을 시사하는 대목이 많다.

    4차례나 교체설 시달린 국방장관

    조 전 장관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경질설이 꾸준히 나돌았고, 노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한 5월 중순 이후 서너 차례나 바뀔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첫 교체설은 5월 초 신일순(申日淳)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되면서 나왔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신 장군 구속사태로 인해 조 전 장관에 대한 강한 불신임 기류가 흘렀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신 장군의 비리는 이미 오래 전에 여러 차례 제보가 있었다. 조 장관이 일찌감치 신 장군을 자진 전역시켰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사건이 커졌다. 급기야 ‘호남 군맥 숙청’이니 하는 말이 나오면서 대통령과 청와대만 대미지를 입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두 번째 고비는 5월 말 한 일간지에 ‘차제에 미국처럼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을 기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칼럼이 실렸을 때다. 노 대통령은 이 칼럼을 직접 읽고 나서 윤광웅 당시 대통령국방보좌관에게 이 문제를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미 집권 초기부터 군에 대한 문민(文民) 통제에 관심이 많던 노 대통령의 눈에 확 들어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윤 보좌관은 외국의 사례 등을 면밀히 살펴본 뒤 ‘미국은 전역 후 10년이 지나면 민간인으로 간주하는데, 한국의 경우 안보 현실을 감안해 전역 후 5년 정도 지나면 민간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는 순수한 민간인으로서 국방장관을 할 만한 군사전문가는 거의 찾기 어렵다는 점도 포함됐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간인 국방장관 기용설이 퍼졌고, 조 전 장관 교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힘을 얻어갔다. 그러나 6월30일 개각에서도 국방장관 교체는 실행되지 않았다.

    세 번째 고비는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金鮮一)씨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다.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성 경질인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기왕에 교체설이 나돌던 조 전 장관은 또다시 교체설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책임이 있는지를 따져본 뒤 인사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즉각적인 문책 인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으로 국방장관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네 번째 고비는 북한 경비정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시 남북간 교신 누락사건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조 장관 교체설은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고, 노 대통령이 추가조사를 지시하면서 조 전 장관은 더욱 강력한 교체설에 시달렸지만, 경질 인사는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된 7월28일에야 이뤄졌다.

    조 전 장관은 7월27일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고 다음날인 28일 자연스럽게 교체되는 형식을 취했지만, 장관 교체방침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사의 표명 5일 전인 7월22일 청와대는 인사추천회의에서 윤광웅 당시 대통령국방보좌관을 후임 장관으로 내정하고도 ‘문책성 경질’이 아니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적당한 발표 시기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7월19일 노 대통령이 “국방부의 조사결과가 미흡하다”면서 추가 조사를 지시할 때 조 전 장관 교체를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조 전 장관의 교체 과정에 노 대통령 특유의 인사스타일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여론에 밀려 장관을 내치는 식으로 바꾸지는 않겠다는 고집이 깔려 있다. 결국에는 바꾸더라도 무작정 책임을 묻는 식이 아니라 엄밀한 평가에 의한 인사 관행을 정착시키겠다는 얘기다.

    이런 스타일은 6월 말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살된 사건이 벌어져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궁지에 몰렸을 때도 나타났다. 노 대통령은 반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사건 경위를 보고받은 뒤 오히려 신임을 표시했다.

    지난해 9월 야3당이 공조해 국회에서 김두관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설령 국회의 결정이 부당하더라도 국회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으나 오히려 “시골 군수 출신인 김 장관은 코리안 드림의 상징”이라고 옹호했다. 노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해서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장관을 자르면 어느 장관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유가 있다면 언제라도 ‘인사’

    그렇다고 장관의 목이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다. 여론에 밀린 ‘희생양 찾기식 인사’는 없겠지만, 이는 거꾸로 사유가 있으면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의외의 교체’라는 평을 받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현 정부의 장관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려왔고, 여권 내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차기 대권주자로 발돋움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런 탓에 7월28일의 전격 교체는 일반 국민에게도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강 전 장관의 후임으로 전남 광양 출신의 김승규(金昇圭) 현 장관을 임명한 것은, 호남 출신인 조영길 전 국방장관을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윤광웅 신임 장관으로 바꿀 경우 호남지역에서 일 반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김승규 법무장관’ 카드는 4월 총선 이전에 청와대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검토돼 왔다. 김 장관은 강 전 장관이 총선에 출마할 경우에 대비해 유력한 예비 장관후보로 인재풀에 올라 있었고, 여기에는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인 문희상(文喜相)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천거도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강 전 장관은 총선 이후 집권 2기내각의 진용을 갖추는 과정에 교체 대상에 잠시 올랐으나, 노 대통령의 재신임을 받고 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런 연유로 롱런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6월 중순경 대검 중수부 폐지 문제로 청와대와 검찰이 정면충돌할 뻔하면서 교체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었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이 정부 출범 초기 검찰 개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적격이었으나, 검찰과의 의사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검찰 고위간부 출신을 새 장관에 기용하는 ‘안정적 검찰 개혁 추진’ 쪽으로 컨셉트도 바뀌었다.

    7월 중순경부터는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전 의장, 김근태, 정동채(鄭東采) 의원 등이 입각한 6·30 개각에 이은 후속 개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노 대통령은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와 서너 차례 협의를 거쳐 법무, 국방, 국가보훈처 장관, 통상교섭본부장 4명을 바꾸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정원은 청와대의 지시로 김승규 신임 법무장관에 대한 검증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이어 노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한일정상회담을 하던 7월22일 청와대의 인사추천회의에서 김 장관이 신임 법무장관으로 내정됐다. 이틀 뒤인 24일 노 대통령은 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면접을 하고 법무장관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는 후문이다.

    국가보훈처 장관에는 김진(金振) 주택공사 사장이 내정돼 있었으나, 발표를 앞두고 검증작업을 하는 과정에 비리 첩보가 입수돼 교체방침이 급히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장관이 저러면 안 되는데…”

    강 전 장관의 교체는 ‘도대체 왜 바뀌었나’ 하는 의문을 낳았지만, 인사 문제에서만큼은 여론에 개의치 않겠다는 노무현식 인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의 사례들이 여론에 밀려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었다면 강 전 장관의 경우는 높은 대중적 인기에도 아랑곳않고 바꾼 정반대 사례인 셈이다.

    여론에 따른 즉각적 인사보다는 장관의 업무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인사를 하겠다는 방침이 적용된 것은 지난해 12월 단행된 연말 개각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의 개각은 12월15일 산업자원부 장관, 12월23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12월28일 과학기술부 건설교통부 기획예산처 장관이 세 차례로 나뉘어 모두 5명이 교체됐다. 당시 대통령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교체된 박봉흠(朴奉欽) 기획예산처 장관을 빼고는 업무 평가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점수를 받은 것이 주된 교체 이유였다.

    이중 박호군(朴虎君) 과학기술부 장관의 교체는 부처 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박 장관은 지난해 10월 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과학기술부를 정책 집행 부서에서 국가과학기술정책 전반을 기획하는 순수한 기획부서로 전환시키려는 노 대통령의 의사에 역행해 과기부의 집행 권한을 내놓기 어렵다면서 완강히 버텼다고 한다.

    그 회의에서 사회를 봤던 김병준(金秉準) 당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은 장시간 토론에도 박 장관의 버티기로 결론이 나지 않자 “다음에 다시 회의를 열자”며 회의를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잠자코 회의를 지켜보기만 하던 노 대통령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몇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오늘 결판을 내야 한다”며 회의를 계속하게끔 지시했다고 한다. 이날 회의를 지켜본 한 인사는 “박 장관이 저러면 안 되는데, 머지않아 바뀌겠구나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런 반면 지난해 10월 돌출행동으로 전격 경질된 최낙정(崔洛正)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경우는 대표적인 문책성 교체였다. 이 경우는 장관으로서의 자질이 문제가 됐고, 당시 고건(高建) 국무총리가 강력하게 해임을 건의했으며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것이었다.

    정치적 인사는 현실적인 한계?

    과거 정부와 달리 장관 인사에 국무총리의 입김이 크게 반영된 점도 현 정부 장관 인사의 특징 중 하나다.

    고 총리는 최 전 장관의 경질을 관철시키기도 했지만, 그 후임 임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승우(張丞玗) 장관이 임명된 것도 고 총리의 강력한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지난해 7월 농림부 장관 인선에서도 노 대통령은 민병채(閔丙采) 전 양평군수를 점찍어뒀으나 고 총리가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 때문에 3명의 후보자를 불러다 놓고 고 전 총리와 청와대 수석들이 심야에 집단 면접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고, 결국 허상만(許祥萬) 현 장관으로 낙착됐다.

    이처럼 ‘평가’에 근거한 장관 교체와 인선이 시도된 것은 인사문제를 시스템화하겠다는 현 정부의 노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여권의 ‘총선 올인’ 전략에 따라 4명의 장관이 총선 출마를 이유로 1년도 안 돼 중도 퇴진하는 등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내각 진용이 흔들린 것은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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