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인텔|‘월드 와이드 리더’ 꿈꾸는 디지털시대의 두뇌집단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08-26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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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종 전자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시가 있다.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인텔의 부품이 제품 속에 들어 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제품의 기술력과 성능을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일종의 ‘인증서’다. 완제품이 아닌 부품만으로 브랜드 가치 세계 5위에 오른 인텔.
    • 과연 그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인텔|‘월드 와이드 리더’ 꿈꾸는 디지털시대의 두뇌집단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인텔 본사 건물(맨 위)과 건물 1층 박물관 내부를 배경으로 창업자 세 사람을 합성한 사진. 왼쪽부터 앤디 그로우,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미국 서해안에 인접한 샌프란시스코의 7월은 안개 낀 날이 많다. 한낮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다가도 금세 안개가 온 도시를 뒤덮는다. 한여름인데도 저녁이 되면 긴팔 스웨터를 걸쳐야 할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인텔(intel)을 방문하기로한 날도 샌프란시스코에는 안개가 가득했다. 인텔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샌프란시스코만(灣)을 따라 남쪽으로 약 40~50분 거리에 있다.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미션칼리지 블루버드(blvd. 대로라는 뜻).

    샌프란시스코 시내 숙소에서 출발해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 20분 남짓 달렸을까.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는 사라지고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렸다. 안개 속에 갇힌 도시를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샌타클래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국을 대표하는 최첨단 기술연구단지인 ‘실리콘밸리’가 바로 이 일대 팰러앨토에서 샌타클래라, 산호세, 새너제이에 걸쳐 길이 48km, 너비 16km의 띠 모양으로 형성돼 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은 반도체의 재료인 ‘실리콘’과 이 지역 중심부에 펼쳐져 있는 샌타클래라 ‘계곡(밸리)’의 합성어다. 겨울철인 12~3월을 제외하고는 연중 비가 내리지 않는 이 지역은 습기가 적으면서도 크게 덥지 않아 전자산업의 최적지로 꼽힌다.

    인근에 스탠퍼드대학과 버클리대학, 샌타클래라대학 등 명문대학이 있어 우수인력 확보가 쉬울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적극적인 전자산업 유치정책도 밸리 형성에 크게 한몫했다. 사업설립 초기 갖가지 세제 특혜로 소자본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이 지역에는 반도체 생산업체뿐만 아니라 반도체로 여러 가지 제품을 만들어내는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벤처비즈니스, 벤처캐피탈 등의 분야에서 무려 1만여개의 벤처기업들이 성공을 꿈꾸며 미래에 도전하고 있다.

    인텔은 휴렛패커드, 컴팩 등과 함께 이들 벤처기업이 꿈꾸는 성공한 기업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2004년 현재 인텔의 총직원은 연구원 7000여명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무려 8만5000여명에 달한다. 2003년 한해 총매출은 301억달러로 한화로 치면(1달러/1200원) 물경 36조1200억원이나 된다.

    공장은 5대양 6대주에 걸쳐 없는 곳이 없다. 먼저 미국 내에는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를 포함해 폴섬, 오리곤주 힐즈버러와 알로하, 워싱턴주 듀퐁, 애리조나주 챈들러, 뉴멕시코주 리오 란초, 유타주 아메리칸 포크 등 8개 지역에 공장이 세워져 있다.

    유럽에는 독일 뮌헨과 영국 스윈던, 아일랜드 레이크슬립, 아시아·태평양에는 호주 시드니, 홍콩, 필리핀 마닐라, 일본 쓰쿠바, 말레이시아 페낭, 인도 방갈르, 싱가포르, 중국 상하이 등에 공장이 세워져 있거나 건설중이다.

    중동·아프리카지역에선 이스라엘 하이파와 예수살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카리브해 연안인 푸에르토리코 라스-페이드라스에 공장이 세워져 있다. 인텔은 이처럼 전세계 23개의 공장을 통해 제품을 생산, 지구촌 전역에 판매하고 있다. 인텔이 이처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과 비결은 무엇일까.

    깔끔하고 단촐한 하늘색 건물

    인텔 본사건물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101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미션칼리지 대로 방향으로 2~3분 남짓 달리자 곧 파란색 간판에 ‘intel’이라는 흰색 글씨가 쓰인 건물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 최고의 기업치고는 본사건물이 단출했다. 온통 파란색 유리로 깔끔하게 지어진 6층 건물로 국내 대기업들 본사건물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로비에 방문객들을 위해 마련된 소파가 보이고 그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회사 설립자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인터뷰를 약속한 인텔그룹 하워드 하이 전략공보이사가 직접 나와 기자를 맞았다.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뜻밖에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무실과 깨끗하지만 허름하고 오래된 복도로 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실용주의적인 인텔의 기업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건물을 봐도 실용적이지 않은가. 비싸게 꾸미거나 하지 않는다. 회장이건 사장이건 일반 직원이건 좋은 자리에 주차하려면 일찍 오면 된다. 직위가 높다고 해서 더 좋은 자리를 주지 않는다. 식사도 모두 똑같은 식당에서 한다. 불필요하게 그런 데 돈을 쓸 이유가 없다. 돈이 있으면 기술개발이나 품질을 높이는 데 쓰고, 그래도 남으면 투자자에게 돌려준다. 그게 회사의 운영방침이다.” 하이 이사의 설명이다.

    인텔|‘월드 와이드 리더’ 꿈꾸는 디지털시대의 두뇌집단

    인텔 최초 사원 9명 가운데 한 사람인 제인 존슨이 본사 건물 1층에 마련한 박물관의 내부 모습. ‘2+3=5’라는 간단한 연산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흐름도를 따라 한 눈에 알 수 있다.

    몇 년 전 신문을 통해 읽었던 인텔코리아 한 간부의 본사방문 체험담이 떠올랐다. 인텔의 최고책임자인 앤디 그로브 회장이 직접 운전한 것도 의외였지만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주차장 주위를 몇 바퀴씩 맴도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것. 그로브 회장의 사무실이 5층 한켠의 2평 남짓한 칸막이 사무실이라는 것과 퇴근 무렵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도 국내 기업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68년 7월,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두 사람에 의해 설립된 인텔. 과연 이 회사의 독특한 기업문화는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하이 이사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하이 이사는 회사 설립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설립자 노이스와 무어는 1956년 경 샤클리(Shockley)라는 반도체회사에서 처음 함께 일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샤클리가 ATT벨 연구소를 그만두고 고향인 샌타클래라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회사였다. 노이스는 ATT벨 연구소에서 샤클리와 함께 ‘트랜지스터 개발 공동프로젝트’에 참여해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인연이 돼 이 회사에 합류했다.

    캘텍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학자 무어는 집적회로(IC)와 와 LSI메모리 분야의 전문가로 샤클리에 의해 영입됐다.

    노이스와 무어, 두 사람의 젊은 과학자는 샤클리에서 실리콘밸리의 첫 장을 열었지만 이내 한계를 느꼈다. 샤클리가 기술적인 면에서는 똑똑하고 훌륭했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는 소름끼치도록 잔인했던 것.

    최초 회사명은 ‘매우 시끄럽다?’

    결국 직원 8명이 회사를 떠났는데 그 중에 노이스와 무어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당시 동부의 페어차일드라는 큰 회사에서 투자를 받아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Fair child Semiconductor)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8명 모두 유능한 과학자이고 기술자였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에서 회사를 운영해나갔다.

    특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때 그 분야의 전문가가 리드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상하관계’는 없었다. 몇 년 후 그중 일부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그러자 투자자인 페어차일드사는 운영자를 직접 뽑아 이 회사로 보냈다. 자신들에게 회사 운영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노이즈와 무어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의기투합, 2페이지 분량의 간단한 투자제안서를 작성해 15명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230만달러의 초기 자금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 회사 이름은 두 설립자의 이름을 딴 ‘Noyce-Moore(NM) Electronics’. 그런데 회사 이름이 자칫 ‘매우 시끄럽다’로 오인받기 쉬웠다. 이들은 오랜 고민 끝에 ‘통합하다’ 또는 ‘완전한’이라는 뜻을 가진 ‘INTegrate’와 ‘ELec tronics(전자공학)’를 합친 ‘intel’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문제는 어떤 작은 회사가 이미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노이즈와 무어는 결국 그 회사로부터 이름을 사버렸다. 그 직후 제조부분 책임자로 앤드류 그로브를 영입했다. 그로브는 바로 지금의 인텔 회장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노이즈와 무어, 그로브 세 사람은 9명의 직원과 함께 인텔이라는 조그만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들은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 회사를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각자 젊은 나이에 큰 회사에서 중역을 맡아 대기업 문화와 인사관리의 문제도 느껴봤고, 직접 회사를 설립해 동등한 관계에서 운영해보기도 했으며, 투자자의 부당한 압력을 받기도 하는 등 숱한 경험들 속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하이 이사는 “창업자 세 사람은 본인들은 물론 직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회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HP가 동등한 기업문화를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HP도 처음에는 기존 기업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됐었다. 동등한 기업문화는 사실 인텔이 처음이다. 그후 실리콘밸리의 많은 회사들이 인텔을 따라서 운영시스템을 바꿨다. HP도 그중 한 회사다”라고 주장했다.

    인텔의 6대 경영가치

    이 같은 설립초기 운영방침은 오랜 세월 속에서 지금의 ‘6대 경영가치’로 정립됐다. 이는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회사, 주주에게 최대의 이익을 돌려주고 종업원에게는 최상의 근무여건을 제공하는 회사를 위한 지향점인 것.

    그 첫 번째가 ‘고객중심(customer orientation)’이다.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호간 의견을 분명히 교환하면서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 최고의 파트너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원칙이다.

    두 번째는 ‘결과중심(results orientation)’. 도전적이고 경쟁적인 목표를 세워 과정보다 결과에 중점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건설적으로 통합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위험감수(risk taking)’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에 주력하고 도전을 과감히 수용하며 계획된 위험부담을 감수하도록 장려한다는 원칙. 서로의 다양한 의견에 귀기울이고 성공과 실수 모두에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다.

    인텔|‘월드 와이드 리더’ 꿈꾸는 디지털시대의 두뇌집단

    ① 인텔 초창기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내장된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 ② 인텔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는 방문객들. ③ 노트북 하단의 ‘인텔 인사이드’ 로고를 가르키고 있는 하워드 하이 공보이사.

    네 번째는 ‘일하기 좋은 직장(great place to work)’이다. 이를 위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팀워크를 이루고, 결과물에 대해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면서 공정한 업무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다섯 번째는 ‘질(quality)’이다. 최상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올바른 방법으로 일하고 끊임없는 자기개발을 통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지속적인 ‘훈련(discipline)’으로 엄격한 전문가주의에 입각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인텔 직원이라면 직위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 6대 경영가치가 적힌 카드를 사원증과 함께 걸고 다녀야 한다. “인텔은 8만5000여명 사원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시작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라는 게 아그네스 콴 보도지원 담당 매니저의 설명이다.

    인텔에서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이런 원칙을 기초로 상하 관계없이 다함께 토론하는 게 보편화돼 있다.

    물론 서로 의견이 다를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 ‘disagree but commit’라는 게 바로 이럴 때를 위한 인텔만의 기업문화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인 것.

    동등한 입장에서 자유스런 대화와 토론을 중시하는 인텔에서 ‘동의하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한다’는 게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이런 기업문화가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이 이사의 설명이다. “첨단 기업인 인텔도 신문처럼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자신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 같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길이다.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반영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현명한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것이다. 그 다음 좋은 방법은 잘못된 결정이라도 빨리 내리는 것이다. 그래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되고, 어떻게 고쳐야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와 토론만 하면서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많은 회의를 통해 좋은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하지만 차선을 위해서라도 빨리 결정을 내리고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disagree but commit’라는 묵시적 약속이 문화로 정해진 것이다.”

    -팀원 중 일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처음 회사에 입사해 트레이닝을 받을 때 직원들은 인텔의 기업문화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게 된다. 매년 직원 평가를 할 때도 얼마나 우리 기업문화를 잘 알고 있고 그 문화에 합당하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때문에 그런 일은 많지 않다. 만일 그런데도 결정된 사항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텔에서의 경력은 짧아질 수 밖에 없다.”

    -인텔은 세계 여러 나라에 공장과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국가마다 기업문화가 다르다. 인텔의 기업문화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지 않은가.

    “다른 나라 직원들을 교육시킬 때 보면 아시아인들은 말이 별로 없고,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에게는 도전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기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 때문에 아시아인들에게는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 말이 많다. 그들에게는 말을 조금 줄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교육한다. 이런 다국적 문화를 다 합해서 인텔 기업문화가 생겨나는 것이고, 출신에 상관없이 가장 좋은 관리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텔의 기업문화와 맞지 않는 직원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기업문화 자체가 직원이나 일하는 사람에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격이 다른 것처럼 기업문화도 하나의 성격이고 기업마다 다르다. 자기 성격과 기업문화가 맞는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인텔에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우리만의 기업문화를 잘 수용하고, 잘 맞추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래도 불행해지기 쉽고, 그래서 그만두고 나간 경우도 있다. 회사가 점점 성장하면서 기업문화와 비슷한 성격의 직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현지법인인 인텔코리아의 사정은 어떨까.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특히 ‘상명하복식’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강하다.

    김명찬 사장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인 영향으로 정이나 의리, 위계 등에 익숙해져 있다. 때문에 인텔에 입사한 직원 대부분이 처음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2~3주간 ‘1-on-1’이라고 불리는 집중면담시스템을 거치면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한다”면서 “이런 시스템을 통해 직원들은 개별적인 업무파악 이외에도 회사 전체적인 흐름을 읽고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1-on-1’은 자신의 직위나 업무내용에 관계없이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면담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다. 면담요청을 받은 사람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단 ‘1-on-1’에서 논의할 안건은 면담을 요청한 사람이 철저히 준비해 사전에 미리 알려줘야 한다.

    인텔|‘월드 와이드 리더’ 꿈꾸는 디지털시대의 두뇌집단

    ④ 회전하고 있는 반도체 원판 ‘웨이퍼’. ⑤ 웨이퍼에 메스킹(masking)된 회로도를 한 직원이 검사하고 있다.

    인텔이라고 성공의 길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인텔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어야했다. 인텔이 처음 생산한 제품은 1969년 바이폴라(bipolar)램이라는 반도체 메모리 칩이었다. 그 전까지 메모리 기능을 하는 제품은 크기가 굉장히 크고 가격도 비싸서 정부나 대학연구소 정도밖에 구입할 수 없었다. 대중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이폴라램의 개발은 반도체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그 시장은 후발주자들에 의해 금세 장악 당했다. 만들기 쉽고, 하나의 디자인이 있으면 자동생산이 가능한 반도체칩을 일본의 큰 회사에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덤핑공세를 펴기 시작한 것.

    회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텔은 큰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인텔은 이때 사업방향을 메모리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바꾸는 모험을 시도한다. 메모리칩보다 분명한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정은 결과적으로 인텔이 지금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일명 CPU(Central Processing Unit)라고도 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주기억장치와 연산장치, 제어장치, 특수 레지스터 등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로 컴퓨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것.

    1971년 인텔이 발표한 ‘인텔 4004’마이크로프로세서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개발품이었다. 3000입방피트의 면적을 차지하는 에니악(eniac)의 성능과 맞먹는 컴퓨팅 능력을 손톱만한 크기의 소자에 집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이어왔다.

    1978년 인텔 8086 마이크로프로세서 → 1979년 인텔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 → 1982년 i286 마이크로프로세서 → 1985년 i386 마이크로프로세서 → 1989년 i486 마이크로프로세서 → 1993년 펜티엄 프로세서 → 1995년 펜티엄 프로 프로세서 → 1997년 펜티엄 Ⅱ 프로세서 → 1998년 모바일 펜티엄 Ⅱ 프로세서, 인텔 셀러론 TM 프로세서 → 2000년 펜티엄 Ⅲ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 4 프로세서 → 2001년 모바일 펜티엄 Ⅲ 프로세서 1GHZ → 2002년 인텔 XScale TM 기술기반 프로세서 → 2003년 인텔 센트리노 TM 모바일 기술 → 2004년 초전력 인텔 펜티엄 M 프로세서 1.3GHZ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의 새로운 제품을 쏟아냈다.

    “반도체에 집적된 트랜지스터의 수는 18~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유명한 창립자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지금까지 한번도 깨지지 않고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어려운 시기에 더욱 투자를 강화한다’는 원칙하에 끊임없이 이어져온 기술투자가 있다. 인텔은 2001년 35억달러, 2002년 40억달러, 2003년 44억달러에 이어 올해 48억달러를 기술개발에 투자할 계획이다.

    미션은 최고의 빌딩블록 제공사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은 90%로 거의 절대적이다. 세계 1위 품목을 보면 데스크톱 PC용 마이크로 프로세서(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 노트북용 마이크로프로세서(모바일 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용 칩셋 제품군, 플래시 메모리(인텔 스트라타플래시) 등이다.

    그러나 인텔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세계 인터넷 경제에 최고의 빌딩블록 제공사(Building Block Supplier)가 되는 것이 인텔의 목표기 때문이다. 하이 이사는 이에 대해 “빌딩블록이라는 것은 컴퓨터를 만드는 하나의 재료다. 큰 회사에서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서 “미래의 디지털시대에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제품에 인텔이 관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인텔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인텔코리아 마케팅본부 곽은주 차장은 “모든 직원들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지속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며 “실제 직원들 마음속에 ‘우리가 리더다’ ‘직원 모두가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텔 본사 1층에는 ‘인텔 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인텔 최초 사원 9명 가운데 한 사람인 제인 존슨이 27년간 일한 후 회사를 그만두면서 세운 것이다.

    회사 설립 당시에 대한 존슨의 기억은 이렇다. “당시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 사람들 중 일부가 로버트(노이스)와 고든(무어)을 위해 일하게 됐죠.” 그녀는 인텔이 지금처럼 거대한 회사가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다. 존슨도 처음에는 회사를 창업할 때만 잠시 돕기로 하고 입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창립자인 노이스와 무어의 비서로 근무했다. 그만큼 인텔은 그녀에게 매력적인 회사였던 것. 그리고 지금, 인텔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인텔 본사를 나올 때 스쳐지나간 강렬한 인상의 광고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World wide Leader!’ 바로 그것이 인텔의 모든 직원들이 꿈꾸는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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