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환(이하 환) : 저는 8남매의 장남입니다. 누나 두 분 계시고 제 밑으로 다섯이죠. 아들 넷, 딸 넷. 막내 남동생과는 20년 넘게 터울이 져요. 옛날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그리 많은 숫자도 아니죠. 우리 부모님들 대단하세요. 이렇게 많이 낳아서 잘 기르셨으니. 오늘날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된 게 다 그 덕분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윤우진(이하 진) : 43년차 장남이며 3형제 중 맏이고 파평 윤가 37대 대종손입니다. 아버님은 6년 전 돌아가셨고 홀로 계신 모친과 아내, 밑으로 1남4녀를 두었습니다. 고향은 전남 여수지만 현재 직장(한국수력원자력 영광원자력본부)이 영광이라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죠. 윤 선생님 책을 열 권 사서 네 번 읽고 아홉 권은 주변의 장남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너무나 내 이야기 같아서요.
한기호(이하 호) : 저는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장남이라는 한마디에 제가 살아온 인생이 쭉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58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5남1녀의 장남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와서 지금까지 줄곧 제힘으로 살아왔습니다만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돈 없는 장남이 무슨 힘 있나요. 의무만 있지, 안 되면 다 장남 탓이고.
못나도 장남은 장남
“무녀리는 무녀리야!”
아버지는 내가 어디 가서 못난 짓을 하고 돌아오거나 동생과 싸우면 늘 한심하다며 그렇게 운을 떼셨다. 한꺼번에 10여마리를 낳는 새끼돼지들 중 가장 먼저 어미 돼지로부터 나오는 녀석을 ‘무녀리’라 불렀는데, 한 배에서 나온 다른 새끼와 달리 몸짓이 가장 보잘 것없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무녀리는 근골이나 몸짓에서 크게 열등해서 젖먹이 쟁탈에서 동생들에게 늘 뒤로 밀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다른 튼실한 새끼를 밀치고 무녀리에게 젖을 물게 하셨다. (윤영무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중에서, 이하 인용문의 출전 같음)
환 : 둘째가 저한테 이런 불평을 합니다. ‘제가 형보다 키가 작습니까, 힘이 적습니까?’ 무녀리는 문 열고 나오느라 지쳐서 제일 못났다고 하잖아요.
무 : 장남은 부모님의 첫 실험결과니 오죽했겠어요.
호 : 그래서 부모님은 맏이인 제게 산삼 한 뿌리 못 먹인 게 늘 마음에 걸리신 모양입니다. 5형제 중 제가 제일 작거든요(웃음. 한기호씨는 참석자 중 가장 덩치가 컸다). 어느 날 갈삼을 사다 꿀에 재워놓고 동생들 모르게 저 혼자만 먹으라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먹기 싫더라고요. 부모님 안 계실 때 동생들한테 다 나눠줘버렸죠.
진 : 저도 형제들 중 제일 작아요. 동생들은 키가 180cm 이상으로 장대만한데 저만 170대에요. 아버지 키가 190cm이셨어요. 임종하신 후 맞는 관이 없어 법석을 떨다 구례까지 가서 간신히 관을 구해올 정도였죠. 아직도 아버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저를 짓누를 때가 많습니다.
무 : 가장 먼저 장남의 위치를 배우는 게 밥상머리인 것 같아요. 아버지를 중심으로 장남인 제가 왼쪽, 어머니가 오른쪽, 제 옆에 둘째동생 이런 순서로 앉고 ‘큰애니까 더 먹어라’하며 손가락 길이만큼 생선살을 더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누립니다. 물론 이런 편애 뒤에는 몇 곱절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진 : 아버지는 제가 공부 잘하는 착실한 아들이기를 원하셨는데 공부보다는 운동 쪽으로 기울었죠. 유도에 빠지면서 성적으로 급전직하했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는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운동이 끝나 배가 고프면 아버지한테 달려가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졸랐죠. 자장면 곱배기에 통닭 등 당시로서는 참 대단한 음식들인데 아버지는 다 사주셨어요. 대신 “집에 가서 절대 말하지 말아라. 특히 아우들에게는”이라고 신신당부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