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이순신은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 ‘임진왜란 해전사’

  • 글: 김탁환/소설가·한남대 교수 tagtag@mail.hannam.ac.kr

    입력2004-08-27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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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 ‘임진왜란 해전사’

    ‘임진왜란 해전사’ 이민웅 지음/청어람미디어/ 376쪽/1만8000원<BR>이 책은 김탁환의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낯익은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카키색 근무복을 입고 열을 지어 행진하는 생도들, 수면으로 튀어오르는 날치, 박물관 옆에 정박해 있던 실물 크기 거북선. 이 책의 저자 이민웅 해군소령도 그 틈에 끼여 충무공을 기리는 군가를 불렀을 것이고, 해군사관학교 교수가 된 뒤로는 그 길로 행진하는 후배이자 제자들을 날마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해전사’는 바다로 난 그 길 위에서 바다에 젊음을 바치고자 하는 청년들이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던 충무공 정신에 대한 정직한 탐구다.

    저자는 산뜻하고 세련된 길보다 우직하고 품이 많이 드는 방법을 취해왔다. 조선 수군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를 확보하려 1997년부터 동료교수들과 ‘실록 발췌 수군 관련 사료집’(신서원)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 해양사’ 집필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조선 수군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사료로써 말하는 이 방식은 ‘임진왜란 해전사’ 전체를 관통한다. 무수히 나오는 지도와 표와 사진은 이 책 위에 쏟은 땀방울의 흔적이다.

    사료 없인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겠다는 저자의 자세는 역설적이게도 이 부분의 논의를 백 보 전진시킨다. 그것은 저자가 조선의 여러 사료를 발굴, 숙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7년 전쟁에 참여한 일본과 명나라의 사료까지 일일이 대조하여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극적일 순 없다



    7년 전쟁은 조선 조정의 당쟁 때문에 일어난 것도, 이순신과 원균의 대립 때문에 일어난 것도 아니다. 정두희 등 선학들의 지적처럼,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과 명나라, 동아시아 최강 3국이 지닌 저력이 충돌한 국제전이었다. 따라서 세 나라 사료들을 비교 검토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만 동아시아 최강 3국이 품었던 욕망과 상처를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7년 전쟁 동안 조선 수군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만 그려도 이보다 더 극적일 순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연구과정에서 두 번 놀랐다고 말한다. 첫째는 관련 사료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역사 전공자들에 의한 이 분야 연구 성과가 매우 한정돼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번째 경우에는 놀랐다기보다 실망했다는 것이 바른 표현이라는 솔직한 심경도 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해전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전 기간을 조망해볼 수 있는 최초의 개론적 역사서다.

    우선 7년 전쟁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규모와 장수들의 면면을 살핀다. 저자는 일본 수군이 센고쿠 시대의 해적에 뿌리내리고 있고 국가적으로 체계화된 수군 조직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한편, 와키자카 야스하루나 가토 요시아키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장수들이 지닌 용맹은 따로 조망한다.

    개전 초기 경상도 수군의 행적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휘하 세력을 결집하여 함대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각 수영에 군선을 한꺼번에 모아 자침(自沈)시켰다는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함대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전투에 임한 것은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강화 교섭기에 조선 수군의 활동은 전투가 적었기 때문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다. 저자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둔 조선 수군의 시련과 도전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꼼꼼히 짚어나간다.

    1594년 극에 달한 전염병은 조선 수군 최대의 적이었다. 전체 병력 1만8500명 가운데 3분의 1인 5663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1904명이 죽었다. 조방장 어영담이 이때 병으로 죽었고, 이순신 자신도 1594년 3월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생했다. 군량미 확보도 큰 문제였다. 이순신은 둔전을 일구기 위해 선산부사를 지낸 정경달을 선전관으로 뽑기 위해 장계까지 올린다.

    저자는 당시 이순신이 품은 최고의 야심을 250척 규모의 대함대 건설이라고 보았다. 이순신은 군선 250척만 있으면 “일본 수군의 동향과 관계없이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각 수영별로 할당량을 내렸지만 140척 확보에 그치고 말았다. 비록 목표량을 채우지는 못했으나 이때 증조한 군선은 정유재란까지 왜 수군이 감히 조선 수군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명량해협에 철쇄는 없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몇 가지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았기 때문인데 그중 하나가 합포해전이 벌어진 장소가 마산이 아니라 진해라는 걸 밝혀낸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1차 출전의 두 번째 해전이 벌어졌던 합포가 지금의 마산시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이은상의 ‘완역 이충무공전서’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임진장초’에서 창원땅 마산포(고려시대 합포)를 따로 지칭했고 현재 진해시에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당시 전투상황을 재구성하더라도 거제도 북단에서 오후 4시경 추격하여 해질녘에 상륙할 수 있는 곳은 진해시에 위치한 합포밖에 없다.

    칠천량 패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새로 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이 조정의 명에 따라 군선을 둘로 나누어 번갈아 부산 쪽으로 나아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 원균을 불러 직접 곤장까지 치고 출정을 종용한 끝에 원균이 조선 수군 함대 전체를 이끌고 부산으로 진격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구체적인 전황과 조선 수군의 패착 요인을 자세히 짚은 것은 물론이고 원균의 부족한 리더십이 패전의 중요한 이유였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논쟁적인 주장을 편다. 먼저 해협에 철쇄를 가설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허구라고 단정짓는다. 기록에선 일본 군선 31척 격침사실만 확인될 뿐 철쇄를 통한 전과는 아군이나 적군 기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명량해전의 격전지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곳이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실제로 해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는지는 의심스럽다. 지형이 좁을 뿐 아니라 물살이 급한 곳이라 정조기(停潮期)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은 어느 곳에서 펼쳐졌을까. 그 해답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9월16일자 서두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충무공은 아침 일찍 별망군이 전한 일본 함대의 접근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후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일함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명량해전의 전장은 우수영 바로 앞바다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해협을 통과해 우측으로 구부러진 곳’이 전투를 벌인 곳이라는 새로운 주장이다.

    탁월한 리더십 본격 분석

    현역 해군 장교인 저자에게 이순신은 역사의 위인일 뿐만 아니라 대양 해군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해군 장교의 한 표본으로 다가선다. 그는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준비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자세이다. 거북선을 만들고 전라좌수영 함대를 조련하며 뱃길을 살피고 왜 수군을 정탐하며 출전 직전에 점까지 친 이순신의 모습은 완벽한 승리를 위해 온힘을 다하는 장수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열린 자세이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이순신은 밤 늦도록 부하장수들과 논의를 하고 있다. 배울 것이 있다면 군졸이나 목동에게까지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열린 리더십이야말로 적재적소에 장졸을 배치케 해 저마다의 장점을 극대화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였으니, 이제 ‘이순신 평전’이나 ‘조선 수군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쓰는 것이 저자의 몫이리라. 사료와 사료 사이의 검은 구멍을 메우는 몫을 어리석은 소설가에게만 맡기지 말고, 저자가 이순신이란 한 수군 장수의 내면으로 침잠하고, 이름 없는 수군 장졸들의 고충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작업을 했으면 한다.

    저자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내는 몬하요. 김 선생이 하소” 할지도 모르겠지만, 7년 전쟁 동안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 거둔 승리의 기록을 이렇게 꼼꼼히 또 재미나게 기록할 필력이라면, 그것은 욕심이 아닐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필자는 저자와 함께 해군사관학교에 근무한 인연이 있다. 그 작은 인연에 기대어 ‘불멸’ 초고를 쓰고 ‘불멸의 이순신’을 개작할 때, 이 교수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특히 전투가 없었던 시기에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어떻게 재정비하였고, 또 부하장수들을 어떤 리더십으로 이끌었는가 하는 부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바다와 해군을 사랑하는 저자의 갯비린내 나는 다음 글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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