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데서 벗어나 신사고·신기술·신산업 창출의 기틀이 돼야 한다. 사진은 부산 영재과학고의 영어 수업.
그럼에도 고교등급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현행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과 내신만으로는 우수한 학생을 선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고교간 학력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기에 이를 반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다. 경쟁이 치열한 대학일수록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고교등급제는 지방 학교나 상대적으로 경제적 지위가 낮은 지역의 고교에 재학중인 학생을 크게 차별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가난을 대물림하는 또 다른 ‘연좌제’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고교등급제가 민주적 평등을 깨뜨리는 아주 나쁜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입시전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응시자 중 동점 탈락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학생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는 모든 자료를 다 동원해도 타당하고 공정한 평가기준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수십 명의 학생이 모두 전과목 ‘수’를 받고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어 누구를 뽑아야 할지 난처하다”는 것이 대학 관계자들의 호소다.
상식적으로 납득되고 전문적으로 타당한 기준을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학교간 격차를 인정하고 이를 전형자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고교등급제가 나왔다고 본다. 대학측의 이러한 고충을 이해한다 해도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것은 그 객관성이나 신뢰성 또는 타당도 등을 고려하면 성급한 결정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모적인 고교등급제 논쟁이 아니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별할 공정한 평가기준을 확립하는 일이다. 이념논쟁으로 비화된 고교등급제 논란은 교육에도, 국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형 교육논쟁’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세계 각국은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 강화에 골몰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정한 학생선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경쟁률이 높은 대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골라낼 수 있는 입시전형 방법은 무엇일까. 본고사나 논술고사가 아닌 또 다른 평가방안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 수요를 늘리지 않고 우수한 실력을 갖춘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일까.
수십만 수험생 중에서 상위 1% 또는 5% 이내의 학생을 선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상권 대학들은 상위 0.1% 이내 혹은 그 이하 비율 안에 드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 이러한 욕구도 충족시키면서 현재의 수능을 급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환해 선진국에 버금가는 입학 제도를 마련할 길은 과연 없는 걸까.
고교등급제 대안 ‘표준화 평가’
지능검사 결과 나온 IQ 지수는 누구나 신뢰한다. 토플(TOEFL)이나 GRE시험 결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사람의 지능이나 실력을 집단 내에서 비교할 수 있고 과거에 응시한 집단과도 비교할 수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의 지능이 더 높은지, 또 몇년도 응시자가 더 실력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검사가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도와 타당도가 높으며 가비교성이 대단히 높다.
지능이나 학력을 측정하는 표준화 검사는 고도의 전문적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많은 연구와 비용이 소요된다. 문항 하나하나가 척도이기 때문에 정밀하게 검증된 문항 난이도 지수가 있고, 관련된 수많은 변인을 고려하고 통계적 분석도 해야 한다. 문제은행식 출제가 아닌 표준화 검사는 하나의 검사가 여러 개 문항으로 구성돼 여러 개의 배터리로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다.
이러한 표준화 검사로 학생의 학력을 평가한다면 우리 입시제도는 큰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모든 학년의 표준화 학력검사가 마련되면 홈스쿨링이나 검정고시 같은 제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올 것이다. 학교의 학력관리는 물론 교육행정제도의 혁신을 통한 선진국 수준의 교육도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