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 폭탄 발언

“DJ 측이 ‘이명박 폭로’ 대가로 3년치 영국 유학비 약속했다”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7-04-09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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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폭로 전날 이종찬이 ‘유학 보장’
    • DJ도 “만반의 지원…”이라며 보증
    • 범여권, ‘증인 매수’ ‘공작 정치’ 의혹 부담
    • “정인봉이 갑자기 나를 폭로전에 끌어들였다”
    • 모 변호사(현 청와대 비서관)와 ‘이명박 폭로’ 상의
    • 이명박 측, ‘의원직 상실’ 판결 나자 돈 지원 끊어
    • “유찬아 살살 하자” “뭘 살살해, 사람 뭉개놓고…”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 폭탄 발언

    3월13일 서울 전경련회관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김유찬(오른쪽) 서울 IBC 대표. 김 대표가 이명박 전 시장 관련 의혹을 수집해 ‘신동아’에 제공한 방대한 양의 자료.

    2007년 2월15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법률특보를 지낸 정인봉 변호사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996년 선거법 위반 및 범인해외도피죄로 실형을 선고받은 내역(소위 ‘이명박 X-파일’)을 한나라당 경선준비위원회에 제출했다.

    다음날 이 전 시장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인 김유찬(서울IBC 대표)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박 전 시장은 1996년 선거법위반 사건 재판과 관련, 내게 위증(僞證)을 교사하면서 그 대가로 1억2050만원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선거법 위반, 범인 해외도피, 위증교사, 재산문제 등 이 전 시장 관련 비리의혹을 망라한 저서인 ‘이명박 리포트’를 3월에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검증’이 이번 대선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이 전 시장에 대한 폭로전이 본격 개시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씨는 2월21일 2차 기자회견을 열어 위증교사 의혹과 관련해 20여 차례에 걸쳐 이 전 시장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날짜·장소·금액 등이 적힌 금품 수수명세서, 이 전 시장의 종로지구당 간부인 권영옥(이 전 시장의 친척)씨와 한 전화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이명박 검증’을 맡은 한나라당 ‘2007 국민승리위원회’는 김씨로부터 자료를 건네받아 조사를 벌인 끝에 3월12일 “이 전 시장은 법적 하자가 없고 도덕성도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 한나라당의 이 같은 발표에 대해 김유찬씨, 열린우리당, 통합신당모임 측은 ‘이명박 봐주기’라며 반박했다.

    ‘신동아’는 우선 김유찬씨가 작성한 200자 원고지 1500여 장 분량의 ‘이명박 리포트’ 초안을 입수, 내용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자구(字句) 하나하나를 숙독한 끝에 ‘이명박 선거법 사건’과 관련, 김씨가 건너뛴 듯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어 리포트에 등장하는 10여 명의 사람과 고교 동문 등 김유찬씨의 지인들을 상대로 1996년 9월(선거법 위반사건 발생)부터 2007년 3월까지 10여 년간의 김씨 행적을 취재했다. 그런 다음 3월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17층 서울IBC 사무실에서 김유찬씨를 단독 인터뷰했다. 김씨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밝힌 내용은 질의에서 뺐다.

    이날 일찍부터 김씨의 016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했으나 “휴대전화를 분실했으니 사무실로 전화해달라”는 그의 음성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사무실로 전화를 해도 김씨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고 김씨의 사무실로 곧장 찾아갔다. 김씨는 회의실에서 누군가와 얘기 중이었다. ‘룸살롱 전무’라고 했다. 40여 분 뒤 김씨와 마주앉게 됐다.

    공격, 투항, 공격, 투항, 공격…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 폭탄 발언

    김유찬 대표는 인터뷰 도중 이명박 전 시장 측에 공격과 접근을 반복한 자신의 행보를 그림을 그려가며 ‘변증법적’으로 설명했다.

    ▼ 한나라당은 김 대표가 제기한 의혹들에 대해 모두 ‘근거 없음’ 결론을 내렸는데.

    “그렇게 성급하게 발표하면 나중에 감당이 안 될 텐데…. 나는 중도보수 성향이다. 한나라당을 적극 지지하지도 않지만 적극 반대하지도 않는다. 후보검증기구가 20일 만에 발표한 것은 졸속이다. 중차대한 검증이 제 식구 감싸기로 흐른 것이다. 검증기구는 이 전 시장에게 유리한 말을 할 사람들만 증인으로 채택했다. 예를 들어 최영 서울시 국장은 이 전 시장의 오른팔 아닌가. 권영옥씨는 이 전 시장의 친척이자 선거 참모이면서 검증기구 이사철 대변인의 고교 동문이고.

    한나라당 검증기구에 자료를 제공하고 협조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아니 후회라기보다는…. 향후 한나라당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 한나라당은 ‘객관적 근거 제시 없이 이 전 시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것은 명예훼손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했다.

    “내가 ‘이명박 리포트’를 발간하면 형사고발할 수도 있다고 엄포도 놓더라. 그러나 우리나라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다. ‘주장’(이 단어를 큰 소리로 강조)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이 나를 압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김유찬씨는 1996년 9월10일 국민회의 당사에서 자신이 보좌하던 이명박 당시 신한국당 의원의 선거법 위반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기자회견 며칠 뒤 김씨는 폭로 내용을 전면 부인하는 편지를 이 전 시장 측에 써줬다. 이어 이 전 시장 측이 제공한 1만8000달러를 받고 해외로 도피했다.

    다음달 귀국한 김씨는 검찰에서 이 전 시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 전 시장 선거참모 2명이 구속됐고 이 전 시장은 불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그 후 법정에 선 김씨는 이 전 시장 편에 섰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의 폭로로 촉발된 이 사건으로 이 전 시장은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김씨는 “당시 법정에서 이 전 시장 편에 선 것은 위증교사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폭로하면서 다시 ‘이명박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 이 전 시장에 대한 공격과 접근을 반복해왔는데, 왜 그처럼 자꾸 왔다갔다하는가. 또한 집요하게 특정인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손으로 갈 지(之) 자를 그어 보이면서) 나도 그 점이 안타깝다. 국민회의와 손을 잡았으면 끝까지 국민회의와 함께 갔어야 했다. 그런데 회군(回軍)을 하고 말았으니….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신뢰성에 문제가 생겼다. 세상을 살면서 특정인과 척을 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 전 시장의 박덕(薄德)이 1차 원인이다. 그를 모시면서 정이 다 떨어졌다. 이 전 시장을 공격했다가 그를 다시 돕게 된 것은 이 전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측근들과의 인간적 관계를 차마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어 김씨는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자신의 ‘갈 지(之) 자 행동’을 변증법의 정(正)과 반(反) 논리로 설명했다. 이 전 시장에 대해 폭로한 행위들은 진실을 추구한 정(正)이었으며, 이 전 시장을 도와준 행위들은 사(私)적인 관계로 인해 진실에 역행한 반(反)이었다는 것. 김씨는 “2007년의 폭로는 반(反)에서 ‘최후의 정(正)’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결론지었다.

    “돈 되돌려주마”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 폭탄 발언

    1996년 9월10일 김유찬 대표가 국민회의 당사에서 이명박 의원 선거법 위반 폭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지난 2월16일 김 대표가 전경련 회관에서 이명박 전 시장의 위증교사 의혹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광경.

    ▼ 이 전 시장을 공격하면서 김 대표도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다.

    “내 명예가 크게 훼손됐다. 사람들이 나에게 ‘배신자’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금권(金權)정치 개혁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고백한 것일 뿐이다.”

    ▼ 그런데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주니 답답할 것 같은데.

    “부정한 돈을 받은 당사자가 ‘돈 받았다’고 털어놓는데도 왜 안 믿는지 모르겠다. 내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 전 시장에게서 받은 돈은 모두 돌려줄 생각이다(김씨가 이 전 시장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한 돈은 해외도피자금 1만8000달러와 위증 대가 1억2050여만원).”

    ▼ 누구에게 돌려줄 건가. 1만8000달러는 1996년 이명박 의원의 전 비서관 이광철씨에게서 받았고 1억2050여만원은 이 전 비서관과 권영옥씨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에게 돌려준다는 건가.

    “아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줘야지. 그 돈이 다 이명박 호주머니에서 나온 거니까. 권영옥씨가 100만원, 200만원씩 준 생활비까지 다 돌려줄 것이다.”

    ▼ 언제 돌려줄 건가.

    “내가 수년 전부터 서울 상암DMC 사업권(초고층빌딩 건설 등)을 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사업이 진척되지 않으면서 30억원 가까이 손실을 봤다. 이 사업이 매듭지어지면 가능한 한 올해 안에 돈을 돌려줄 것이다. 서울IBC의 내 주식을 매각해서라도.”

    서울IBC가 올해 중순으로 예정된 서울시의 상암DMC 사업 공개입찰에서 사업권자로 확정, 수십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게 되어 30억원의 차입금도 갚고 주가도 오르면 이 전 시장에게 돈을 돌려주겠다는 얘기로 들렸다.

    1996년 9월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는 ‘사면초가’였다. 5개월 전 4월 총선 때의 부정선거 의혹으로 국민회의에 대해 여론의 질타가 봇물을 이루던 상황이었다. 정국 주도권이 여권에 넘어가면 김대중 총재가 출마할 다음해 대선도 위험했다.

    그러던 차에 여당인 신한국당의 중진 이명박 의원의 전직 비서라는 김유찬씨가 여당의 부정선거 증거자료를 들고 국민회의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정치 1번지 종로’라는 상징성까지 있었다. 국민회의로선 정국을 반전시킬 만한 호재였다. 특히 종로에서 이명박 의원과 맞붙어 고배를 마신 이종찬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에겐 이명박을 낙마시키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유찬씨의 폭로는 승진 누락에 따른 불만이 개인적 동기였다. 총선 때 유세지원-전화홍보를 맡으며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나 당선 후 이 의원이 자신을 6급 비서에서 5급 비서관으로 진급시켜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1996년 6월20일 사표를 던졌다. 이후 이재창 당시 의원이 그를 잠시 보좌관으로 채용했으나 이내 해고했다. 김씨는 이 역시 이명박 의원이 뒤에서 입김을 넣은 것으로 생각했다. 김씨는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다.

    “실직상태가 오래되다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8월 말까지 기다려도 별무소식일 경우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처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막노동판이라도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이명박 리포트 초고)

    “옥스퍼드에 3년 정도는 있어야…”

    ‘이명박  리포트’ 김유찬 폭탄 발언

    김유찬 대표가 곧 발간할 예정인 ‘이명박 리포트’ 가제본 책자(왼쪽). 오른쪽은 ‘신동아’가 입수한 ‘이명박 리포트’ 초안.

    김유찬씨가 자신의 폭로가 국민회의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해 9월 김씨는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를 만나 이명박 의원의 선거법 위반 자료를 제공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이에 이 부총재는 김씨에게 직접 폭로 기자회견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9월9일 밤 9시30분 뉴서울호텔 객실에서 김씨는 이 부총재와 다시 만났다. 다음은 이날 상황에 대한 김유찬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폭로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승진 누락에 따른 불만도 있었지만 불법선거의 실상을 밝혀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 왜 이종찬 부총재를 택했는가.

    “여권의 살아 있는 권력에 직격탄을 날리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폭로 이후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이종찬 부총재는 야당 중진이며 종로에서 이명박 의원과 대결한 바 있다.”

    ▼ 국민회의 측에 폭로 대가로 3억원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나.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

    그의 폭로 직후 ‘국민회의 3억원 제공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됐으나 김씨는 이를 부인한 바 있다. 그런데 ‘이명박 리포트’에는 영국 유학파 출신인 윤모씨가 이명박 의원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김씨가 승진을 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리포트에 따르면 이후 김씨는 자신도 가족을 데리고 영국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아올 계획을 세운다. 김씨는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 국민회의 측에 사후보장을 요청하지 않았나.

    “나는 자료만 주겠다고 했으나 이종찬 부총재는 내가 직접 기자회견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게 효과가 가장 크다면서. 나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므로 사후보장의 확신이 없으면 못 한다’고 했다.”

    ▼ 그 사후보장이 영국 유학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나.

    “이 부총재에게 ‘모시던 의원을 겨냥해 폭로 기자회견을 하면 한국 사회에선 배신자로 규정되어 살기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또 ‘사후보장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 후폭풍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정치학 박사 과정 3년 정도는 뒷받침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 이 부총재가 뭐라고 대답하던가.

    “이 부총재는 ‘영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DJ의 개런티가 필요하다”

    ▼ 그 말을 듣고 나서 어떻게 했나.

    “그분 말씀만으로는 미덥지 않았다. 확실한 보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김대중 총재로부터 ‘개런티(지급보증)’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부총재는 이날 밤 11시30분쯤 나를 김 총재의 일산 자택으로 데려갔다. 서재에서 김 총재, 이 부총재와 함께 얘기를 나눴다. 김 총재는 내게 ‘김 동지와 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승리한다. 당 차원에서 김 동지에 대해 만반의 지원을 해주겠다. 걱정 마시오’라고 말했다.

    이 부총재는 나와 관련해 이미 김 총재에게 보고한 것 같았다. 김 총재가 명시적으로 ‘영국 유학 지원’이라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 부총재가 영국 유학 지원을 약속한 직후 김 총재가 ‘만반의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 것을 상당히 함축된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다음날 오전 김유찬씨는 국민회의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김씨는 “4월 15대 총선 때 이명박 의원은 법정선거비용(9500만원)을 초과해 6억8000만원을 선거운동자금으로 썼다”면서 선거자금 사용명세 및 3800만원 규모의 영수증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국민회의 의도대로 김씨의 폭로는 정국 최대 이슈로 급부상했다. 검찰이 이 사건을 당초 경찰에 넘겼다가 다시 직접 수사에 나서면서 ‘봐주기 수사’ ‘축소은폐 수사’ 의혹까지 터졌다. 여권 전체의 도덕성 실추로 비화됐다.

    그해 10월 검찰은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가 김유찬씨에게 3억원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국민회의 측은 검찰을 고소하겠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반면 당사자인 이종찬 당시 부총재는 10월1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김씨에게 어떠한 대가도 약속한 적 없다. 김씨에게 3억원을 주기로 약속하기는커녕 김씨로부터 단돈 3원도 요구받은 사실이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그런데 당사자인 김씨가 ‘신동아’를 통해 ‘기자회견 뒷거래’를 처음으로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3년치 영국 유학비 지원 약속’은 지난 한 달간 대선 정국을 달군 ‘김유찬 사건’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반전이다. 우선 당사자인 김씨가 이같이 증언함에 따라 국민회의의 후신인 범(汎)여권 진영은 ‘증인 매수’ ‘공작 정치’ 의혹이라는 부담을 안을 수 있다.

    반면 이 전 시장 측에 대한 위증교사 의혹은 희석될 소지가 있다. 이명박 선거법 위반 재판 때 김유찬씨는 “이종찬 전 의원이 3억원을 주겠다고 제안해 폭로회견을 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는데, 김씨는 지난 2월 바로 이 증언이 이 전 시장 측 보좌진의 지시에 의한 ‘위증’이었다고 여러 언론에 밝힌 바 있다.

    위증교사 의혹에 ‘위증’이 없다?

    언론 보도와 ‘신동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 김씨는 ‘폭로회견 전날 이종찬 부총재로부터 3년치 영국 유학비 지급을 약속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3억원 제공을 약속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김씨 개인의 처지에서는 ‘3년치 유학비’와 ‘3억원’은 분명히 다른 것이므로 구분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회의에 대한 법적, 윤리적 책임 차원에선 3년치 유학비와 3억원은 50보, 100보라 할 수 있다. 사안의 핵심은 공당인 국민회의 측이 폭로회견 대가로 거액의 금품 제공을 약속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가족(김씨의 부인과 자식들)을 이끌고 3년간 영국 명문대 박사 코스에서 유학하는 데 따른 학비와 생활비를 고려하면 3년치 유학비와 3억원은 비슷한 규모일 수 있다.

    이럴 경우 ‘이종찬 전 의원이 3억원을 제안해 폭로회견을 기획했다’는 김유찬씨의 법정 증언이 과연 위증인가라는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유학비와 현금을 구별하는 김씨의 관점에선 ‘3억원’이라고 증언한 것은 위증이다. 그러나 재판부가 그 증언을 청취한 취지는 폭로회견의 순수성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폭로 대가로 거액의 금품제공 약속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단지 유학비용을 현금으로 표현한 것만 갖고 위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이명박 전 시장 측의 위증교사 의혹에서 핵심이 되는 ‘위증’ 자체가 있었는지가 모호해진다.

    이 전 시장의 변호를 맡았던 양인석 변호사(노무현 정부 첫 사정비서관 역임)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누군가 위증을 교사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했다면 중간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실제로 영국 유학이 성사되지 않은 것에 대해 “국민회의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기자회견 후 다시 이명박 의원 편으로 돌아서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권영옥씨로부터 생활비를 받은 경위는.

    “이명박 전 시장 측은 매번 공판을 전후로 해서 내게 150만~200만원의 생활비를 줬다. 권영옥 당시 국장과 주종택 당시 조직부장이 주로 돈을 전달했다. 어떤 때는 40~50일 만에 지급하는 통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1998년 4월28일 2심에서 이 의원이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자 생활비 지원이 끊겼다.”

    이에 대해 권영옥씨는 “내 월급과 사무실 운영비로 김유찬씨에게 생활비를 줬다. 위증하라면서 돈을 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지난 1월 ‘이명박 리포트’ 공동 집필을 권씨에게 제의한 이후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있나.

    “최근 한나라당 검증기구에서 권씨와 조우했다. 권씨는 완전히 이명박 편에 서 있었다. 권씨가 손짓을 하며 오라고 하길래 다가갔더니 ‘유찬아, 좀 살살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뭘 살살해, 사고 터지니까 사람 뭉개놓고’라고 쏘아붙였다.”

    ▼ 이광철 비서관으로부터 8500만원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 시점에 이 비서관은 수감 중이었다. 이 때문에 폭로의 신뢰성이 크게 떨어졌다.

    “오히려 내 폭로가 그만큼 순수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비서관의 구속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래된 일이라 시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 5500만원은 전세금으로 사용했고 2000만원, 1000만원은 구청장선거에 나갔을 때 선거비용으로 썼다.”

    ▼ 이 비서관으로부터 8500만원을 받았다는 객관적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는데, 정황 증거라도 내놓아보라.

    “1997년께 현금 5500만원이 든 쇼핑백을 이명박 의원 측 이광철 비서관으로부터 건네받은 뒤 바로 일산4동 ‘풀소리 부동산중개소’로 가서 전세금을 치렀다. 풀소리부동산 사장이 5500만원 쇼핑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확인해본 결과 일산 ‘풀소리부동산’은 상호는 그대로인 채 2000년 업주가 바뀌었다. 1997년 당시 업주였던 노모씨는 현재 인천시 강화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씨는 “현금을 들고 와 부동산 거래하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더욱이 10년 전의 일이라 현금 5500만원이 든 쇼핑백을 받아 전세 거래를 중개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광철의 석연치 않은 잠적

    위증교사 의혹에서 이광철 비서관이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그런데 이 비서관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2004년까지는 LA에서 인터넷 등을 통해 이명박 당시 시장을 돕는 일을 하다 2005년부터 외부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서관의 오랜 잠적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 이광철 비서관의 소재를 아는가.

    “내 지인이 최근 이 비서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이 비서관은 자신의 소재를 외부에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해외도피와 관련, ‘이명박 리포트’ 초안에 따르면 김유찬씨가 먼저 이광철 비서관에게 “나를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전 시장이 주도적으로 김씨를 해외로 빼돌렸다’는 기존 의혹과 상반된다. 다음은 리포트 내용.

    “나(김유찬)는 (기자회견 뒤) 현재의 심경이 너무 괴롭다고 이광철 비서관에게 말했다. 형님들(이광철 비서관 등)을 뵙자고 한 것은 그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고 사과를 드리고자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캐나다나 다른 나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여의치 않으면 세계를 다니며 여행이나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형들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관련, 김씨의 우신고 선배인 이범래 변호사는 “김씨는 폭로 기자회견 전에 이미 캐나다로 갈 것이라는 말을 내게 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 변호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김유찬씨가 언제 찾아왔나.

    “1996년 9월9일 서울 서소문에 있는 내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 평소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고교 동창회장직을 맡았고 그는 동창회 행사 때 사회를 보기도 했다. 유찬이는 ‘이명박 의원의 선거법 위반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캐나다로 가려 한다’며 나와 상의했다. 유찬이는 캐나다 업체와 서울우유 사이의 무역사업을 하면서 캐나다를 왕래한 적이 있어 그에게 캐나다는 그리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 그에게 뭐라고 말해줬나.

    “나는 ‘그렇게 해서 네게 이득이 될 게 뭐가 있냐’고 했다. 다음날 그의 기자회견 사진이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내 사무실 직원들이 ‘어제 왔던 분 아니냐’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명박 의원 측이 먼저 내게 해외도피를 제의했다”고 주장했다.

    ▼ ‘이명박 리포트’ 초안에는 김 대표가 먼저 해외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관계가 다르지 않나.

    “‘이명박 리포트’를 완성하기 위해선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참모이면서 친척인 권영옥씨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명박 리포트’ 초안을 제공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준 초안에는 해외도피 등 그를 자극할 만한 내용은 빼거나 완화했다.”

    “하여튼, 天運을 타고났다니까”

    ▼ 이범래 변호사는 김 대표가 기자회견 전 이미 캐나다행을 마음먹고 있었다고 하는데.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기자회견 전날 그의 사무실에 간 사실 자체가 없다. 이 변호사는 현재 한나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으로, 이명박계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 이광철 비서관이 1만8000달러를 줄 때 그 돈을 이명박 의원의 승용차 트렁크에서 꺼낸 것이 확실한가.

    “그건 모르겠다. 이 비서관이 자신의 마르샤 승용차 트렁크에서 돈을 꺼낸 것 같기도 하고…”

    ▼ 검찰 발표에 따르면 이광철 비서관은 김 대표에게 달러를 줄 때 이명박 의원에게 보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반면 이 전 시장 측은 ‘수사가 정치적으로 진행됐다’며 반박한다. 대선주자의 도덕성과 관련된 부분이므로 이 전 시장이 1만8000달러 부분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이 비서관의 검찰 조서에는 자세히 기록돼 있을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재판부에 제출된 이광철 비서관 수사 기록 열람을 법원에 신청했다.”

    ▼ 자료를 입수했나. 이광철 비서관은 김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의 연결고리이므로 그의 검찰 진술은 매우 중요한데.

    “법원은 ‘이광철씨 관련 수사기록은 모두 폐기됐다’고 내게 통보했다. 하여튼 이명박, 이 양반은 천운(天運)을 타고났다니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특보였던 정인봉 변호사가 2007년 2월15일 이명박 X-파일을 제출하고, 다음날 김유찬씨가 이명박 위증교사 의혹을 폭로한 것 때문에 박 전 대표-정 변호사-김씨의 관계에 대해 의혹이 제기됐다. 기자회견의 동기와 관련, 김유찬씨는 “결과적으로 정 변호사가 폭로전에 나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했다.

    ▼ 1월29일 정인봉 변호사가 김 대표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1996년 종로 선거 때 정 변호사가 이 전 시장을 도와줬기 때문에 나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 전 시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묻더라. 나는 ‘책으로 나가니 그걸 보라’고 했다. 그에게 비빔밥을 대접했는데 그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더라.

    그가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해서 회사 유선전화로 연락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집요하게 내 휴대전화 번호를 원해 할 수 없이 가르쳐줬다. 그런데 2월15일 정 변호사가 이명박 X-파일을 한나라당에 제출한 뒤 갑자기 내 휴대전화로 기자들의 전화가 폭주했다. 업무를 못 볼 정도였다. 정 변호사가 내 휴대전화 번호를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다. 기자들에게 일일이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다음날 내 사무실로 한꺼번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기자회견이 열린 것이다.”

    “정인봉 때문에 어설프게…”

    ▼ 사전에 계획된 폭로가 아니었다는 얘긴가.

    “나는 내용을 충분하게 검토한 뒤 ‘이명박 리포트’를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 변호사 때문에 뜻하지 않게 폭로전에 휘말린 것이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언론에 너무 일찍 터지다 보니 여기저기 허점이 노출됐다.”

    ▼ 언론은 김 대표의 폭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언론계에 친(親)MB(이명박 전 시장의 이니셜) 기자가 많지 않은가. 언론사 데스크들이 MB에게 불리한 진술은 ‘커트’하는 것 같다.”

    ▼ 불구속을 전제로 한 수사협조 등 검찰과의 ‘딜’은 시도하지 않았나.

    “내가 해외 도피하고 있던 기간에 A기자가 나 대신 검찰과 딜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이명박 폭로 기자회견과 관련 김씨 주변에선 ‘여권 사주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씨는 “과거에 이명박 폭로 건과 관련해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모씨(현 청와대 비서관)와 상의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2007년 이후의 폭로 기자회견과 관련해선 청와대 관계자 등 여권의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 지인들의 증언과 ‘이명박 리포트’ 초안에 따르면 김씨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며 연설솜씨가 뛰어나다. 그러나 그는 “직장생활은 잘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대학원 졸업 후 1991년 8월 현대건설에 취업했으나 한 간부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다음달에 그만뒀다. 이어 연수원 사업, 캐나다와의 무역업 등 몇 가지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많은 돈을 잃고 접어야 했다.

    이후 그는 옛 직장인 현대건설 회장 출신의 이명박 의원에게 이력서를 넣어 이 의원의 비서가 됐지만 1996년 총선 후 사직하고 폭로회견의 주역이 됐다. 이 폭로로 이명박 전 의원뿐만 아니라 김씨 본인도 기소됐다. 1998년 김씨는 서울 영등포구청장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부인 등 가족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하는데 그는 많은 돈을 쓰고 낙선했다고 한다.

    ‘종로 리포트’와 ‘2002년 버전’

    이어 김씨는 기능성 여성 속옷을 생산, 유통하는 네트워크마케팅업체 E사의 해외사업본부장으로 취업했다. 그는 수완을 발휘해 다단계 회원 교육용 책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뒤 회사를 그만두고 네트워크마케팅협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부 조직에 밝은 국회 경력을 활용, 서울지검 형사6부장을 초빙해 100개 네트워크마케팅 업체와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비리의 온상으로 여겨지던 네트워크마케팅 업계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다단계 회원 450만명이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협회 회장의 대외내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얼마 뒤 이 자리를 그만뒀다. 2002년 8월엔 라오스 정부의 26억달러 규모 신도시건설 국책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이내 철수했다. 김씨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M건축 A사장의 소개로 미국 댈라스에 소재한 세계적 부동산투자회사 NAI사의 한국법인인 NAI Korea사 대표를 맡게 됐다. 이후 김씨는 NAI사의 자본을 끌어들여 서울시가 추진한 상암DMC 사업권을 따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후 NAI사와 결별한 김씨는 서울IBC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새로운 투자망을 구축해 현재 상암DMC 사업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NAI Korea사가 수의계약으로 DMC 사업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이명박 당시 시장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시 측은 “DMC사업은 공개경쟁입찰 방식으로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에게 이 전 시장은 자신의 승진을 부당하게 누락시키고 사업까지 방해한 인물로 각인돼 있었다.

    ▼ ’이명박 리포트’ 초안에서 이 전 시장뿐 아니라 김 대표가 거쳐간 조직의 장(長), 동료, 가족, 친했던 A 기자 등 주변 사람에 대해 서운함을 드러냈던데.

    “책이란 발행된 최종본을 갖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A 기자가 최근 나를 찾아왔다. 초안에는 그의 이름이 실명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종본에선 익명으로 처리할 생각이다.”

    ▼ 리포트 초안이 어떻게 외부에 유출됐나.

    “1996년 종로 선거 때 유세팀장 등으로 이명박 의원 선거운동을 하면서 그 세세한 내용을 정리해 ‘종로 리포트’를 만들었다. ‘이명박 리포트’는 ‘종로 리포트’를 토대로 했다. 내가 올해 초 권영옥씨에게 제공한 리포트 초안을 권씨가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 것으로 안다. 이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또한 나는 지난 10년 동안 직원들에게 워드프로세스 작업을 시켜 ‘이명박 리포트’를 만들어왔는데 이들 중 누군가 파일을 외부에 유출했을 수도 있다.”

    “존경심은 변함없습니다”

    ▼ 지난해 말 모 언론사에 리포트 초안을 제공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초안을 무단으로 빼낸 측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안다.”

    ▼ 이 전 시장 측은 2002년 버전 ‘이명박 리포트’ 내용과 지금의 폭로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전 시장 측은 남의 저작물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그 경위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 2002년 이명박 전 시장은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했다. 서울시장도 도덕적 검증이 필요한 자리다. 그때 ‘이명박 리포트’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종로 이명박 선거(1996년) 10주년에 맞춰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전 시장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에 책 출간과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 또한 2002년에 리포트를 발간하지 않은 것은 이 전 시장이 서울시장이 되는 것까지는 용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포트 초안에는 김유찬씨가 이명박 당시 의원에게 5급 비서관 승진 누락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 이명박 의원이 답변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김유찬)의 불편했던 심기에 대하여 이명박 의원에게 소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간 1년여 동안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의원님에 대한 존경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다만 제 나이 이미 30 중반을 넘어서 36세로 6급 비서로 근무하기에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큽니다. 다른 방과 비교해보아도 27~28세가 6급 비서로 근무하고 있어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대정부 관련 업무를 하기에도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고요. 국회에서 근무하느니 이곳 동아세아연구원(이명박 의원의 개인 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면 합니다.’

    이 의원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참! 그렇지! 내가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질 못했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좀 기다려!’

    그러나 나는 이 의원의 ‘기다려’라는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아니하였다.”

    알려왔습니다

    이종찬 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는 ‘신동아’ 2007년 4월호에 게재된 『김유찬, “DJ측 ‘이명박 폭로’ 대가로 3년치 영국 유학비 약속”』 보도에 대해 “1996년 9월9일 뉴서울호텔 객실에서 김유찬씨는 나와 단 둘이 만나 ‘폭로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서 이명박 후보의 선거운동 과정을 담은 플로피 디스켓 10매가량을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그후 김씨는 ‘이 사건을 중앙당으로 넘긴다면 먼저 당의 총재와 면담하여 나의 각오를 설명하고 싶다’고 하여 바로 김유찬을 김대중 총재의 일산 자택으로 안내했다. 일산 자택에서 김 총재는 김씨에게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국민은 항상 당신의 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는 요지로 격려했다. 김유찬은 자진해서 이명박 부정선거운동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것이며 어느 누구의 종용이나 유혹으로, 또는 금전이나 유학을 조건으로 폭로한 것이 아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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