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美 대북정책 변화의 숨은 디자이너,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

“당근? 원하면 던져준다, 대신 함께 먹는다”

  •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학 thkim@cau.ac.kr

    입력2007-04-09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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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3합의를 전후해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현란한 대북정책 변화를 놓고 궁금증이 증폭된다. 과연 미국은 생각을 바꾼 것일까. 바꿨다면 ‘새로운 생각’의 뿌리는 무엇이고 지향점은 어디인가. 2006년 5월 그 존재가 알려진 필립 젤리코 당시 국무부 자문관의 보고서는 이에 대한 답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단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정책 흐름 ‘창시자’로 지목되는 젤리코 전 자문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어떻게 정책으로 현실화했을까.
    美 대북정책 변화의 숨은 디자이너,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
    3월5일부터 이틀간 워싱턴에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를 수석대표로 하는 북미회담이 열렸다. 2월13일 6자회담 합의에 따른 5개 실무회담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북-미 관계가 북핵 문제의 핵심이며 6자회담의 수석대표들이 직접 참가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회담이 끝난 후 힐 차관보는 “매우 유익하고 포괄적이며 실제적”인 회담이었다고 평했다. 먼 길을 짧은 시간에 가야 하지만 일단은 제 궤도를 타고 있어 적어도 2·13합의 이후 60일 내의 초기 수확에 대해서는 낙관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의 흐름이다. 20년 가까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던 북핵 문제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한반도의 비핵화,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체결 등 쏟아져 나오는 논의들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의 국제정치 질서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그림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부시 대통령의 말대로 2·13합의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힐 차관보의 평가는 이번 북미회담이 그 둘째 걸음으로 일단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는 것이다. 이 발걸음은 과연 궁극적인 종착점에 도착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 변화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2006년 5월17일 ‘뉴욕타임스’

    2002년 10월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이래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고 온 것이 미국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간 미국은 북핵 시설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를 요구하며, “악행에는 보상이 없다” “대화는 하되 협상은 없다”고 외치는 강경노선을 펼쳐왔다. 그런 미국이 돌연 태도를 바꿔 협상의 물꼬를 텄고, 북한은 이에 호응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변화에 2004년 대선과 2006년 중간선거 등을 거치면서 전개된 미국 국내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가 주된 원인으로 깔려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再選) 이후 그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라이스가 국무장관이 되면서 국무부의 위상은 강화됐고, 중간선거 이후 강경파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존 볼튼 유엔대사가 사임함으로써 그 역할 비중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국무부의 역할이 커졌다는 말로는 모든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정책의 ‘방향’을 설명하려면 상황을 주도하는 국무부 인사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 정확히 말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란한 상황변화의 로드맵을 만들어낸 중추에는 필립 젤리코 전 국무장관 자문관이 있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2005년 9·19합의 이후 6자회담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던 2006년 5월17일, ‘뉴욕타임스’는 미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정책을 검토하고 있으며 아마도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젤리코 자문관이 초안을 잡은 보고서에 기초를 둔 이 정책에는 북한이 10여 년간 주장해온 평화협정이 포함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격론을 일으켰다는 이 보고서의 내용이 보도된 지 수일 후, 라이스 장관은 TV 대담프로에 나와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언급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다음인 지난해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도 ‘6·25전쟁의 종전과 평화협정’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美 대북정책 변화의 숨은 디자이너,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

    필립 젤리코 전 자문관(오른쪽)이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 1990년대 초반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황의 기저, 변화된 미국의 정책노선의 뿌리에 젤리코 전 자문관의 보고서가 있다는 분석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진행되는 그림의 구체적인 윤곽이 전해진 보고서의 내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향후 미국의 정책방향이나 한반도 정세의 향배를 예측하는 데 문제의 보고서와 젤리코 전 자문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매우 의미가 있다. 물론 한계는 있다. 우선 보고서 전체가 공개된 것이 아니고, 젤리코 자문관은 지난해 12월 국무부를 떠나 버지니아대 교수로 복귀했다. 또한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게임이므로 미국의 정책만으로 결과를 점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분석은 젤리코 전 자문관의 견해와 저술을 해부함으로써 그가 제시한 정책방향과 비공개 보고서의 내용을 유추하는 작업과 그 내용이 젤리코가 없는 국무부에서 정책에 얼마나 반영될지의 여부, 그에 대한 상대국, 특히 북한의 반응을 예상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완벽한 전망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세 가지 포인트로 향후의 상황전개를 가늠해보도록 하겠다.

    ‘어제의 동지들’ 재회하다

    1954년생인 라이스 장관은 주지하다시피 젊은 시절 민주당파였지만 카터 대통령의 외교에 실망해 공화당파로 돌아선 경력을 갖고 있다. 1981년 덴버 대학에서 소련 및 동구정치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해 스탠퍼드대 정치학과 조교수로 부임해 연구, 강의, 대학행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혔다. 1989년 1월 라이스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 의해 발탁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동갑내기인 필립 젤리코를 만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신사고 외교를 표방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세계를 바꾸던 바로 그 시점에, 그 변화의 핵심에서 변화를 요리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됐으며 결국은 소련이 해체되는 일련의 과정을 이들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함께 지켜보았다. 국무부의 카운터파트는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의 자문관이던 로버트 졸릭이었다. 졸릭은 그들보다 한 살 위다.

    1993년 라이스는 학교로 돌아갔지만 공화당 및 부시 가문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다. 2000년 대선 때는 부시 후보의 외교안보팀을 지휘했고 2001년에는 대통령안보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2005년 부시 2기의 국무장관으로 부임한 그는 통상대표로 있던 졸릭을 부장관으로, 젤리코를 차관급 자문관으로 발탁한다. ‘어제의 동지들’이 재회한 것이다.

    필립 젤리코는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이자 정치학 박사로 법정이 아닌 외교무대를 활동공간으로 택했다. 1989년 백악관에서 라이스와 만나기 전에는 수년간 국무부의 주요 보직을 거치는 등 관록을 쌓았다. 1991년 백악관을 나온 후에는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왕성한 저작활동을 했다. 쿠바 미사일 사태를 다룬 고전 ‘결정의 에센스’(그레이엄 앨리슨, 1971년작)를 새로 썼고, 무엇보다 많은 이의 찬사를 받은 ‘독일통일과 유럽의 변환’을 라이스와 공저로 출판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젤리코는 이념이나 이상이 아닌 현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다. 그러나 국제정치체계의 구조보다는 복잡한 정치현실과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신)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고전적 현실주의자다. 라이스와 공저한 책의 부제는 ‘국가경영술의 연구’다. 이 책에서 이들은, 동독 난민사태로 초래된 독일 통일과정의 문제를 큰 틀에서 접근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식견과 실낱같은 기회를 다잡아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 통일의 기회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이 누적된 필연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고르바초프 같은 개혁적인 지도자가 1985년 등장한 것은 우발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에 따라 중·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요동치고 동독이 그에 휘말린 것은 필연이었다. 그것을 국가연합식 통일로 미봉하지 않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였고, 그를 통해 유럽의 냉전을 구조적으로 종식시킨 것, 혹은 이를 시기적으로 크게 앞당긴 동인은 부시의 식견과 콜의 정치력이었다.

    소련·동유럽 지역연구를 전공한 라이스 장관과 역사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젤리코의 학문적 성향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 라이스 장관은 미국의 압도적인 힘을 신봉하지만 그것이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늘날 국제정치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와 같은 변환기를 맞고 있고, 지금 미국이 그 중심에 있지만 그 변환을 관리하고 결실을 수확하려면 현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환기를 관리한 딘 애치슨 장관의 초상화를 집무실에 걸어둔 채 ‘변환외교(transformational diplomacy)’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구체적인 상징의 한 조각이다.

    문제는 핵이 아니라 동북아

    美 대북정책 변화의 숨은 디자이너,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

    젤리코 전 자문관과 라이스 장관이 함께 집필한 ‘독일통일과 유럽의 변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젤리코 전 자문관이 라이스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등의 국무부 핵심인사들을 ‘지적으로 설득’했다는 것이 워싱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러한 이들의 상황인식과 논리를 한반도와 북핵 문제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답이 나온다. 북한의 핵 문제는 핵무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배경에 북한의 낙후와 고립과 독재가 있다. 따라서 북핵 문제는 북한 문제다. 세계화·탈냉전 시대에 북한이 낙후되고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는 것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단의 문제이자 6·25전쟁이라는 열전(熱戰)의 문제요, 한반도 냉전의 문제다. 급속히 성장하며 용틀임하는 중국, 정상국가를 향해 몸부림치는 일본이 있는 동북아의 문제다. 북핵 문제를 풀려면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 동북아 문제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역으로 북핵 문제를 풀면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 동북아 문제가 풀린다. 이는 북핵 문제를 대량살상무기 확산의 문제로 접근한 네오콘의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요구한다고 해서, “달라는 대로 다 주면 협상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료적이고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반면 “나쁜 짓에 보상은 없다”고 협상을 거부하는 것도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큰 틀에서 접근해 풀되 미국의 힘을 현실적으로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북한이 적대시 정책의 포기를 요구하고 그 증거로 평화협정을 요구하면 줘버리자. 차라리 그것을 이용해 큰 그림을 그리자.

    젤리코의 비공개 보고서를 토대로 한 국무부의 견해는 대략 이러한 요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13합의가 나온 일주일 후 젤리코 전 자문관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평양을 움직인 구상’이라는 칼럼을 보면, 이 같은 색채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앞서 설명한 대로 젤리코 자문관은 지난해 12월 자문관직을 사임했다. 중동정책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통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사임의 주요 이유로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책은 오히려 그의 주장대로 흘러가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북핵 문제뿐 아니라 중동 문제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는 그의 주장대로 이란과의 직접대화에 나선 것이다. 과연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큰 그림에서, 정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는 소위 네오콘이 부통령실, 국방부 장관실, 국무부의 일부에 포진해 점진적 접근을 주장하는 국무부를 압도했다. 국무부는 이렇다 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고, 공화당 내 입지가 약하고 대통령의 측근도 아니었던 콜린 파월 장관은 국무부의 방침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라이스 장관은 대통령의 신임도 클뿐더러 공화당내 입지도 탄탄하다. 폴 울포위츠, 존 볼튼 등 강경파가 점진적으로 밀려나고, 이라크에서의 난항과 중간선거의 패배로 럼스펠드 장관이 낙마함으로써 상대적 입지는 더욱 넓어졌다. 수족이 잘리고 전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가 유죄평결을 받은 딕 체니 부통령의 입김도 크게 약화됐다. 반면 라이스 장관은 젤리코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국무부의 대안을 다듬어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다.

    당근과 채찍의 양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된 계좌 일부의 해제를 포함한 경제제재의 해제, 나아가 북미수교, 궁극적으로는 한반도평화협정의 체결을 약속한 것이 북한을 움직였을까.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기왕의 제재가 그토록 아팠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젤리코의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 따르면 취임 이후 라이스 장관은 북핵 문제에 두 가지 접근법을 취했다. 첫째는 외교적 접근법이고, 둘째는 방어적 접근법이다. 이중 어느 것도 북한의 핵을 ‘매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외교적 접근법은 분열적인 동북아 강대국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북한의 활로를 제약하는 압박전략이다. 방어적 접근법은 북한이 위폐(僞幣), 마약, 무기 수출 등을 통해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BDA계좌 동결처럼 결국은 북한의 목줄을 죄는 압박전략이다. 다시 말해 젤리코의 분석은 두 가지 압박전략이 통해 2·13합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압박전략에 앞서 이야기한 라이스-젤리코의 ‘구상’이 얹어진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란 결국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 하여금 자국의 의지와 달리 행동하게끔 ‘설득’하는 과정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외교가 갖는 멋스러움의 본질이다. 북핵 외교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보유하고자 하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게끔 설득하는 과정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협박이나 매수와 다를 바 없는 방법들이 동원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끔 설득하려면, 첫째 핵을 고집할 경우 얻을 이득보다 그로 인한 피해가 크다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가지면 미국(과 남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결정적인 억제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반면 그것을 보유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공격에 직면하든, 아니면 그로 인해 체제를 위협당할 정도의 국제사회 제재를 받아야 한다. 곧 ‘채찍’의 논리다.

    이러한 협박이 통하려면, 억제력을 보유하기 전에 군사적 공격으로 나라가 무너지든지 핵을 써보지도 못한 채 경제적 제재로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이게 통하면 최선이다. 손쉬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군사공격을 감행할 필요도 없고 피차 부담스러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지 못하면 어차피 체제가 붕괴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이럴 때는 핵을 포기할 경우 입을 손해보다 그로 인한 이득이 크다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과 남한)의 군사적 위협을 두려워해야 할지 모르지만, 협상의 결과에 따라 불가침협정을 맺을 수 있고 경제지원도 얻을 수 있다. 곧 ‘당근’의 논리다.

    당근의 논리가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매수나 다름없기 때문에 통하면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불가침협정 체결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 경제적 지원에 따르는 실질적 비용이다. 더욱 더 큰 문제는 당근은 자칫 탐욕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결국 채찍을 기본으로 하되 상대가 좌절하지 않도록 당근을 섞고, 당근을 섞되 상대의 탐욕을 부추기지 않도록 양을 조절하는 것이 외교의 묘미다. 부시 1기의 대북정책은 채찍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좌절만 초래했다. 북한의 좌절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것이 네오콘의 자세였다.

    반면 북한의 좌절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이다. 이라크에 15만명의 병력이 묶여 있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 있어 한국과 중국, 나아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결국 당근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봤듯 당근을 제시한다는 것은 곧 (강압)외교의 실패로 인식하는 게 초강대국 미국의 정서다. 당근을 제공하더라도 그 당근을 결국은 함께 먹는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에 평화협정의 체결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동북아 국제정치 질서를 미국의 견지에서 변환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젤리코의 논리에 담겨 있는 핵심이다.

    평양의 탈출구, 명분과 의미

    그럼에도 젤리코는 칼럼을 통해 북한을 움직인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국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다. 북한을 움직인 것은 2003년 봄 이라크 공격시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식의 군사적 제재 위협이 아니었다. 바로 2005년 9월 이래의 금융제재와 2006년 10월 유엔안보리 결의안 1718호에 따른 경제제재 및 추가제재 가능성이었다.

    무력사용에 대한 국제적 거부감이 팽배해 있고 그것을 정당화해줄 유엔 안보리가 일부 국가의 거부권 행사로 무력화됐던 시기에, 외교적 압력을 위해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경제제재였다. 북한, 리비아, 이라크 등이 오랜 기간 경제제재하에 있었고 인종차별로 비난받은 남아공도 경제제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외교적 수단으로서의 경제제재는 두 가지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선 경제제재를 통해 대상국의 행위가 바뀐 적이 거의 없다. 경제제재는 외교적 수단으로서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제재는 비효율적일뿐더러 비도덕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제재의 대상이 될 만한 행위를 한 것은 정권 지도층이지만 그 피해는 무고한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비난이었다.

    2003년 리비아의 경우와 최근의 북한 사례를 보면, 경제제재가 도덕성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효율성 측면에서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외교의 묘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해도 오늘날의 경제제재는 정권 핵심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 그 행동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로버트 코헤인 교수와 조지프 나이 교수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결국 권력관계의 효과를 지닌다고 보고 그 정도를 민감성과 취약성으로 나누어 분석한 적이 있다. 즉 한 나라의 경제정책이 다른 나라에 정치적 압력을 주려면 다른 나라가 그 정책에 민감할 뿐 아니라 취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취약성은 곧 대체(代替)적 공급선의 존재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냉전시대의 경제제재가 효과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미국에 의한 제재를 소련이, 소련에 의한 제재를 미국이 중화했기 때문이다. 유엔 결의에 따른 다자적 제재는 쌍방적 거부권 행사로 불가능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그와 같은 대체효과가 없어졌다. 게다가 제재의 형식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빌림으로써 다자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대체효과는 더욱 감소했다. 북한 핵실험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15대 1로 통과됐다. 그 효과는 북한에 아플 수밖에 없었다.

    보다 중요한 것이 BDA건에서 보듯 세계화의 효과다. 북한의 불법활동에 따른 돈 세탁 혐의가 있다는 미국 재무부의 발표에 따라 세계적으로 26개 은행이 북한과의 거래를 동결했다. BDA에 동결된 북한 예금은 2400만달러 정도로 알려졌지만 그로 인해 북한이 입은 타격은 그 10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북한을 움직인 것은 BDA 계좌 동결로 입증된 미국 금융제재의 위력, 안보리 결의 1718호에 따라 그에 부여된 정당성과 추가적 제재의 가능성 같은 채찍이었다.

    핵 프로그램은 냉전종식에 따라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분단체제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북한이 선택한 생존의 한 방편이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위기를 해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쟁적 남북관계 속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할 기회도 포함하는 조치였다.

    막이 오르다

    미국의 금융제재, 그리고 북한의 자충수에 따른 유엔 안보리 결의와 그에 따른 국제적 제재 및 추가제재 가능성은 북한에 채찍질을 가해 그들이 끌어안고 있는 핵을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동인이 됐다. 젤리코 자문관의 보고서에 담긴 새로운 정책안은 바로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두 가지 기능을 했다. 첫째, 북한이 좌절하지 않고 체면을 유지한 채 출구를 모색할 수 있도록 명분을 부여했다. 둘째, 미국 내부에서,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을 포함한 6자회담 참가국들 사이에 북핵 문제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새로 정의하게 만들었다.

    현재로서 2·13 프로세스는 한 발짝 반을 내디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한국의 정치일정, 미국의 정치일정, 특히 북핵 프로그램의 진전상태를 감안하면 시간이 없다. 힐 차관보의 표현대로 짧은 시간에 먼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다. 외교란 실로 미묘한 과정이다. 때로는 압력을 가해야 하지만 너무 누르면 안 되고, 때로는 풀어주되 너무 느슨해지면 안 되는 장인의 기술이 요구되는 예술이다.

    美 대북정책 변화의 숨은 디자이너,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
    김태현

    1958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석·박사(정치학)

    미 플로리다대 객원 조교수, 일리노이대 연구위원,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現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저서 : ‘외교와 정치-세계화 시대의 국제협상논리와 전략’ ‘신동아시아 안보질서’ ‘탈냉전기 한국 대외정책의 분석과 평가’


    그 미묘한 예술이 미국에서, 북한에서, 일본에서, (아마도 중국과 러시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가장 미묘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국내 정치, 일본과 중국의 계산, 무엇보다 북한의 ‘결단’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짐작하기 어려운 갖가지 변수가 잠복해 있다. 그 과정에서 젤리코가 던진 ‘동북아의 미래로 접근하는 북핵 정책’이라는 화두가 어떻게 작동할지, 미 국무부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어떤 요리를 만들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바야흐로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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